깨달음의 두루마리
<퀘스트 완료>
모험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은은하게 빛을 내는 두루마리를 들어 올렸다.
정성스러운 매듭으로 봉인된 두루마리에는 양얼이 남긴 듯한 쪽지가 남아있었다.
이 두루마리를 받아 주시지요. 당신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준비가 되었을 때, 이 두루마리가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 끝에서 새로운 깨우침에 이르게 할 것이니. 그때를 기다리십시오.
……
깨달음의 때인가…?
진정한 각성 (1/4)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진정한 각성 (2/4)
모험가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양얼 님께 두루마리를 받았다는 이야기겠죠? 잘 오셨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양얼 님은… 그리고 솔도로스 님은 아젤리아 님의 유언을 들어주셨군요.
제가 그 내용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모험가님께서 이곳에 있다는 건 두 사람의 뜻이 모험가님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깨달음의 두루마리가 있다는 건, 제네시스에게 인정 받았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야.
그리고 인정받은 자는 '기억의 관'으로 향하는 길을 열 수 있지.
'기억의 관'은 원래 제네시스의 동력부. 하지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억을 저장하는 거대한 저장 장치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었어.
…그 표정을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했나보군.
맞아. '기억의 관'에는 제네시스가 처음 망자의 협곡에 내려 앉은 날부터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이 안에 잠들어 있어.
무려 이천년 동안 수련한 백 명의 기억이 담겨있다는 말이지.
망자의 협곡에서 로이 더 버닝펜과 대화하기
(해당 퀘스트는 젤바의 로이 더 버닝펜을 통해 `에피소드 전용 마을`로 이동하여 수행 가능합니다.)
<퀘스트 완료>
로이는 모험가를 바라보았다. 퀭한 눈이었지만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네가 이 안에서 무엇을 찾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반드시 원하는 걸 찾아서 나올 거라는 건 믿고 있어.
…그럼 어서 들어가봐.
진정한 각성 (3/4)
나는 제네시스의 기억. 존재했던 모든 이의 깨달음...
스스로의 그릇을 깨고자하면 그로써 이룰 것이니.
마땅한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라.
그대 역시, 시련을 통해 기억의 일부가 될 것이며.
스스로와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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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레이크!!
접기
부스트 : 이퀄리스-MR!!
그릇을 깨고 나온다.
<퀘스트 완료>
칼날은 연단되었다.
접기
이기어검술.
검사의 의지를 담아 손을 떠난 검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적을 공격하는 이 기술은 검을 다루는 이들에게는 꿈의 경지로 불린다.
그렇다면 넨은 어떠한가?
무릇 넨이란 시전자의 몸 안에 머물긴 하지만, 결국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기운.
대부분의 넨마스터들은 오랜 시간 이러한 넨을 연구하며 거대한 파괴력을 내거나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는 용도로 활용하였지만,
시전자의 의지가 대자연의 법칙에 앞설 수 있다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넨의 수련에 있어, 일정한 경지에 이르러 벽에 다다른 이들은 이러한 물음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그 답을 탐구했다.
만약 넨에 의지를 담아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단순히 넨의 크기를 키우거나, 한 점에 집중하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운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한 논의들은 넨마스터들과 이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꽤나 오랫동안 회자되었으나, 그 끝은 언제나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일이라는 허탈한 결론뿐.
나 또한 여러 넨마스터들과 만나며 그 이론에 점점 그 살이 붙어나갔으나,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이를 찾을 수 없어 연구에 열의를 잃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 그녀가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르침을 주려는 목적이었는지,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수련생들을 모두 모아 빈 공터로 불러내었다.
시작은 그저 아름다운 넨화처럼 보였다.
넨으로 일가를 이룬 대가(大家)가 피워낸 꽃봉오리는 찬란했고, 일견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가 눈을 감고 집중하자,
대기 중으로 흩어지던 넨화에서 새끼 뱀처럼 얇고 긴 넨수 하나가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넨수는 그녀의 상반신을 휘감듯이 타고 올라가며 점점 한 마리 푸른 용(龍)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몇몇 눈치 빠른 넨마스터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경악하고 있던 순간,
그녀는 보라는 듯 다른쪽 손을 내밀었고 오른손에서 피어난 넨화에서는 또 한 마리의 노란 넨수 용이 나와 그녀의 하반신을 휘감았다.
눈을 감고 양손을 늘어트리고 있는 그녀가 더 이상 넨을 운용하지 않고 있음은 자명했다.
그럼에도 마치 스스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그녀를 감싸며 움직이고 있는 두 넨수의 기운.
두 마리의 용에 휘감긴 그녀를 보며 한참을 숨죽이던 우리는 그제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의지를 담은 넨.
그것은 내게 다시 한번 넨에 대한 열의를 가져다주었으며, 동시에 염제(念帝)를 뛰어넘는 새로운 경지를 알리는 광경이었다.
접기
팡, 팡!
경쾌하게 가죽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샌드백이 줄 끊긴 연처럼 허공을 날았다.
화려한 기교도 효과적인 기술도 배제한 채,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기본기의 향연.
그녀는 난생 처음 격투기를 배우는 사람처럼 정직하게 손과 발을 내지르고 있었다.
“잠깐 쉬었다 하시지요.”
열번이 넘게 새로 테이핑을 동여맨 주먹은, 어느새 배어나온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련의 방 한쪽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풍진이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그녀는 괜찮다는 듯 풍진을 향해 한 손을 가볍게 들어보인 뒤 계속해서 샌드백을 두들겼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제 입으로 기억을 들추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제가 외교 사절로 갓 임명되어 수쥬 밖으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한동안 말없이 그녀의 훈련 모습을 바라보던 풍진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샌드백을 치던 스트라이커의 주먹이 조금 느려졌다.
“다들 알다시피 제가 전력으로 전개한 넨가드는 ‘그 분’의 로킥 한방에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무력한 패배감을 맛보며, 차가운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지요.”
그 때, 직선적인 경로만을 보이던 스트라이커의 주먹과 발이 서서히 기이한 각도를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근육의 작동 원리나 물리 법칙을 조금씩 빗겨나가는 것 같은, 파괴적인 기술들의 연계.
극한의 ‘머슬 시프트(Muscle Shift)’였다.
“어떤 이들은 여성의 몸에 맞춰진 격투술은 부드러움으로 강공을 제압한다고 하지만... 그건 스틸 마리아에 걷어차여 보지 못한 자들의 말이죠.
그 날 이후, 저는 충분히 단련된 육체가 내는 힘 또한 시전자를 진정한 강함에 가까워지게 만드는 하나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뼛속 깊이 새겼습니다.”
갑작스럽게 그녀의 앞으로 뛰어든 풍진이 전력으로 넨가드를 전개했다.
팡!
과거가 재현되듯 풍진이 펼친 넨가드가 산산조각이 났지만, 이전처럼 풍진이 바닥을 나뒹구는 일은 없었다.
넨가드를 뚫어낸 그녀의 주먹은 풍진의 옷깃 바로 앞에서 멈춰있었다.
급격한 넨의 소진으로 인해 휘청이던 풍진은 이내 도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역시, 당신이 얻은 깨달음에서는 그 때 그 분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아니, 어쩌면... 자신이 배운 격투술의 원류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경지를 보고 온 걸지도...”
감탄에 젖은 풍진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글러브를 주워 챙기며 수련의 방을 나서고 있었다.
접기
문주(門主)가 돌아왔다.
이 짧은 한마디는 용독문 문파원들의 입을 타고 삽시간에 뒷골목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호사가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그 어떤 소문보다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존경하는 문주와 감격적인 재회는 없었다.
대신 살벌한 대치가 펼쳐지고 있었다.
백사장의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선을 긋듯, 문주가 방출한 독기에 일자(一)로 녹아내린 술집 바닥.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문파원들이 새파랗게 질려 쓰러졌다.
“문주, 이게 무슨...!”
쓰러진 문파원들을 등지고 선 남자가 문주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몇 발자국 다가서던 남자는 따끔거리는 피부의 감각을 느끼고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렸다.
문주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독기와 그것이 만들어낸 뱀의 형상...
휘감듯 문주를 감싼 뱀이 만들어낸 독의 영역은 매일 같이 맹독을 다루는 문파원들 마저 강한 중독을 일으킬 정도의 독기를 품고 있었다.
이 모든 걸 알아차린 남자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독기에 잡아먹히신 겁니까?”
만약 그녀가 독기에 미쳐 독인(毒人)이 되었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핏물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분명했다.
“글쎄...”
하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문주는 또렷한 음성으로 답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보며 뒤로 물러난 문주는 넘어진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군.”
남자는 그제야 그녀를 살펴보았다.
독기가 퍼진 것이 분명한 반신(半身)과 신체 곳곳에 나타난 중독 징후.
목 아래까지 침범한 독기의 흔적. 그럼에도 오히려 멀쩡하게 움직이는 팔다리.
“정확히는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났다고 해야겠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주의 말에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접기
하루에도 수많은 싸움이 벌어지고 이야깃거리가 생겨나는 헨돈마이어의 뒷골목.
그 뒷골목의 지하에서도 가장 깊숙한 장소에 유래 없이 모인 사람들의 함성과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는 표정이네요. 크레이그.”
“당연하지, 렉시. 항상 꿈꿔오던 대회가 이렇게 성황리에 마무리되고 있는데.”
꿈결을 헤메는 것 같은 크레이그의 표정에 렉시와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가 길드를 따라간다며 종적을 감췄던 크레이그는 웨스트 코스트에 갑자기 생겨난 폭풍과 함께 돌아왔다.
그는 마계의 ‘파이트 클럽’이란 곳에서 어떤 대회를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며, 미친 사람처럼 하나의 대회를 개최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열린 것이 ‘UFE’(Ultimate Fighting Elimination)라 이름 붙인 대회.
주최자인 크레이그는 성별도, 체급도, 이기기위한 어떤 방법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내건 것은 오직 사각의 링 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사람만이 승자가 된다는 간단한 규칙.
소문은 빠르게 뒷골목 호사가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고,
때마침 웨스트 코스트에서 열린 연합군의 회담 덕분에 각지의 실력자 또한 공국의 수도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평소라면 무법자들로 가득했을 참가 명단은 수쥬 황실이 여는 무투 대회 못지 않게 쟁쟁한 이름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실력자들을 꺾고, 링 위에 우뚝 선 한 사람.
공국에서 천재 쌍둥이 그래플러로 유명한 루시와 렉시도 우승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서 이 대회에 참전했지만, 두 사람 모두 저 링 위의 그래플러에 의해 손도 써보지 못한 채 링밖으로 던져졌다.
렉시는 무언가에 홀린 듯,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링 위에서 챔피언 벨트를 들어올리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이 무지막지한 초대 챔피언(Champion)이 결정되었네요.”
다시 없을 대회의 끝자락을 보는 것이 아쉬웠는지, 루시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챔피언? 렉시, 제발... 그런 스트라이커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딱딱한 호칭 말고...
으음... 크레이그, 뭔가 생각해놓은 좋은 칭호 없어요?”
크레이그는 버릇처럼 잠시 턱을 긁적이더니, 곧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퀸 오브 더 링 (Queen of the ring)’. 줄여서 ‘퀸(Queen)’이 좋겠군.”
“링 위의 여왕이라...”
크레이그의 말을 듣는 여전히 렉시의 시선은 링 위에서 빛나고 있는, ‘퀸’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루시, ‘퀸’을 따라가자!”
갑작스러운 렉시의 말에 루시는 놀란 표정이었으나, 그녀의 가슴 역시 렉시처럼 뛰고 있었다.
“진심이야? 따라가서 뭐하게?”
“친구... 아니, 제자로 받아달라고 할거야!”
“야! 렉시, 기다려! 잠깐...!”
렉시와 루시는 어느새 링 위를 내려오고 있는 ‘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크레이그는 또 다른 전설의 시작을 예감하듯 미소지었다.
접기
그분이 천계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고서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만들어진 희생자들의 추모비 앞에 지친 표정으로 서서 한참 동안 바라보더군요.
온종일 미동도 없이 바라보다 어떨 때는 똑같은 표정으로 되돌아갔고, 어떨 때는 슬픈 표정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는 오랜 시간 그 곁을 서성였지만, 애석하게도 단 한 번도 우리를 바라봐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저 과거의 잔재를 바라보며 고뇌할 뿐이었죠.
그리고 어느 날. 이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되돌아간 이후,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군요.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 위해 꽤 바빴으니까요.
굴욕적인 날을 되새기며 고된 훈련이 끝날 무렵에는 항상 그분이 계속 이곳에 머무셨더라면...
그렇다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겠지 하며 볼멘소리를 하곤 하지만 그건 그저 의미 없는 투정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저 그분에 대한 조금의 아쉬움과 불만이 작게나마 표출되는 것일 뿐이었겠죠.
또 어느 날. 사라질 때처럼 뜬금없이 다시 나타난 그분은 홀가분한 표정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단발을 휘날리며, 마치 공기를 밟는 듯한 발걸음만으로도 과연 내가 그분과 같은 이름을 달고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번에 그분이 향한 곳은 추모비가 아니라 우리였습니다.
티 하나 없는 표정으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마침내 이루어낸 결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눈으로 보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분명 하나의 몸에서 그려지는 몸짓이지만, 결코 하나의 몸에서는 나올 수 없는 아름다운 춤사위였습니다.
그 단 한 번의 춤사위 속에서 우리는 왜 실패했는지, 왜 지켜내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보여준 뒤 홀가분하게 보이는 미소 속에서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미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접기
내가 있는 곳은 인적이 드문 겐트 공방 거리의 구석이지만, 오늘은 묘하게 손님이 찾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평화로운 날이 당분간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무심코 하고 말았던 것 같다.
“아,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이윽고 큰 결심을 한 듯 찾아온 그 녀석의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선명하다.
묵묵히 내민 설계도... 아니 사양서에 가까운 문서를 보고 이걸 만들 수 있냐는 의문보다 이걸 사용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먼저 든 것 또한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큰 벽을 만난 듯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모험가’인 그 녀석이 이렇게 먼저 찾아온 것을 보면.
- 프로젝트 Pandora 시작
장비는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어려운 부분은, 처음부터 제작이 아니라 그 장비의 사용에 있었으니까.
그 녀석은 처음 시동에서 만반을 대비해 만들어둔 훈련실을 모조리 파괴하고 말았다.
그 위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겠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고민에 빠진 표정을 보니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었다.
- 프로젝트 Pandora 7일 차
새로 구한 훈련실에서 무언가에 쫓기는 듯 훈련에만 매진하던 그 녀석의 몸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수많은 강적들과 싸우며 단련된 신체가 마치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런 상태에서 무리하게 강행군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이 틈에 또 망가뜨린 훈련실을 조금 더 보강해야겠군.
- 프로젝트 Pandora 10일 차
일주일은 쉬어야 한다는 말을 무시하고 기어코 훈련을 재개했다.
- 프로젝트 Pandora 17일 차
마침내 결전형 폼으로 전개하는 데 성공했다.
화력을 유지하고 빠른 기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병기의 무지막지한 무게를 감당하면서 생겨나는 압력은 결코 평범한 사람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그걸 성공하고 말았다.
- 프로젝트 Pandora 26일 차
다른 일로 한동안 훈련을 지켜보지 못했다. 간만에 찾아온 그 녀석이 특별한 요구를 했다.
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 가장 파괴하기 어려운 것을 만들어 달라고?
무슨 목적인지 뻔하네. 그걸 파괴하는 걸 훈련의 마지막으로 생각하겠다는 거겠지. 그래 기대한 만큼 강력한 것을 만들어주지. 네가 그 무기를 완전히 사용할 수 있어야만 파괴할 수 있는 것을 말이야.
- 프로젝트 Pandora 종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들어준 것은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진 병기가 기능과 타협하고서 가지는 강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오직 파괴하기 어려운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 준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있었고, 그 녀석 또한 비슷한 모양새로 한쪽에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와중에도 보여주는 만족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으려다가 그만두고 말했다.
“결국 성공했네. 하지만 이 무기의 이름을 판도라라고 한 이유를 잊지 마. 단순히 그 이름의 뜻 때문에 지은 것은 아니니까. 물론 그런 목적에 부합하기도 하겠지. 적들에게는 재앙이 찾아오는 상자일 테니까.”
그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곳에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할 것은... 결국엔 희망이야. 그걸 잊는 순간, 이 무기가 가진 이름에 너까지 휘말리게 될 테니까 꼭 명심해야 해.”
나는 다시 그 녀석이 파괴한 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녀석은... 절대로 빗나가서는 안될 무기를 가진 셈이나 다름없군.
이런 위력을 가진 무기가 의도와 다른 곳으로 향했다간... 어떤 결과를 불러들일지 상상도 되지 않으니까.
접기
“이건... 이건 말 그대로 혁신이야!”
“훗.”
린지 로섬은 지나 데오도르의 말에 웃고 말았다. 혁신이라니.
누구보다도 새로운 것의 개발을 당연하다 여기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단어치고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그만큼 놀랍다는 거라고요.”
작게 불평한 지나의 시선은 어느새 작은 실험실 안으로 향했고 린지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투명한 문 너머의 허공에 머물렀다.
실험실 안에는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그곳에는 아주 작은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과학자가 끼고 있는 특수한 안경을 껴야 보이는 아주 작은 것.
그녀들은 그 작은 것에게 ‘마이크로 봇’ 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을 지어주었다.
“절대 영도에 가까운 온도에서도 형태를 유지하고, 천계에서 가장 강력한 폭탄의 중심 온도에서도 금방 본래의 상태로 회복했었죠?”
지나의 말에 린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마이크로 봇은 가장 복잡하면서도 가장 단순한 구조를 가졌으니까요.”
“우리가 그토록 추구했던 아름답고 강력한 것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니. 이건 정말...!”
“하지만 아주 명확한 단점이 있지 않은가?”
뒤에서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에 둘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상대를 확인하곤 고글을 벗고 고개를 숙였다.
“페럴 웨인님. 오셨어요?”
그녀들의 앞에 선 천계의 복장을 한 남자는 그 인사를 받고는 실험실 안을 유심히 살폈다.
“저런 작은 로봇을 자유롭게 움직여서 원하는 형태를 만들거나 기존 무기를 보완한 다라... 분명 획기적인 발명품일세. 미리 짜인 형태라면 어떤 것이든 순식간에 만들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기존 장비들의 강화는 물론, 그 자체로도 새로운 무기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걸 가진 사람은 움직이는 무기 공장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말일세.”
페럴은 자신 있게 말하는 린지를 잠깐 바라보고는 이내 옥색으로 빛나는 반지가 끼워진 손을 실험실을 향해 내밀었다.
그가 손을 살짝 비틀자,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거대한 기관총이 만들어졌다.
손을 한 번 더 움직이자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 기관총은 실험실 안쪽에 있는 표적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집중력이 떨어지자마자 기관총의 모습이 흩어졌고, 형태가 무너진 총은 제멋대로 아우성치더니 사방으로 총탄을 튀기면서 사라졌다.
“이렇게 안정적인 상태에서도 형태를 유지하기 어렵군. 이게 만약 실제 전투라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겠나?
“맞아요. 앞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이죠.”
지나가 페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로 봇을 제어하는 반지를 통해, 머릿속으로 설계를 한 모양을 만든다. 무한에 가까운 자유도를 가졌지만 그만큼 사용의 제약이 컸다.
미리 설계도를 통째로 외우거나, 새로운 설계를 실시간으로 하는 부분은 별것 아니라 치더라도, 조금이라도 집중이 흩어지면 마이크로 봇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만다.
전투에서 사용하기에는 난이도가 너무 높았고, 아군의 생사도 오가는 전장에서 사용하기에는 더더욱 불완전했다.
“이걸 실제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대부분 어렵다 생각되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린지 양?”
페럴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린지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녀라면... 분명...”
수없이 전장을 헤쳐온 영웅. 그러면서도 자신들에게 뒤지지 않는 비상한 지혜를 가진 천재.
그녀가 세상을 탐험하는 모험가가 아니었다면, 천계는 과거 7인의 마이스터가 이루고자 했던 것에 더 빨리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비단 그들만이 하는 생각은 아닐 것이었다.
“이 다루기 어려운 녀석이... 그녀에게는 큰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군.”
“그럼 이걸...”
“시간 끌어서 좋을 것 없지. 지금 바로 리아 양에게 기별을 넣겠네. 허헛. 이것을 본 그녀의 표정이 벌써 궁금해지는군.”
접기
키츠카 가문의 저택으로 두 여인이 걸어 들어온다.
커다란 정원과 고풍스러운 저택을 지난 두 여인은 저택과 어울리지 않는 공방 앞에 멈추어 섰다.
이내 그중 한 명이 공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한 명도 그 뒤를 따라 안으로 향했다.
“마를렌입니다.”
마를렌이라 이름을 밝힌 여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왔느냐.”
마를렌의 뒤를 따라 공방으로 들어온 여인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많은 귀족이 황실에 등을 돌렸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온 인물이자, 키츠카 가문의 대표인 ‘제소벨 키츠카’가 있었다.
“그분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굽어짐이 없이 올바른 길을 걸어온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꼿꼿하게 서 있는 그녀였지만, 쉬어 갈라진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저물어가는 세월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간 무리한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모셨습니다.”
제소벨의 시선이 마를렌의 뒤에 서 있는 여인을 향해 시선이 옮겨졌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주름진 얼굴이 밝아지며, 평소에 없던 반가운 기색을 내비친다.
평소에 보인 적 없던 표정을 본 마를렌이 놀란 기색을 겨우 숨기는 동안, 제소벨이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야 영웅을 뵙는군요.”
여인은 제소벨의 손에 이끌려 공방 안쪽으로 정중히 인도되었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 저희 가문으로 은밀한 명이 도착했었지요.”
제소벨의 말이 끝나자 키츠카 가문의 사람들이 양쪽에서 들어야 할 만큼 커다란 상자를 들고 걸어 들어왔다.
그 크기만큼 범상치 않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자 상자가 열리며 익숙하지만 새로운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의로운 분이 가장 자유롭게 전장을 누빌 수 있도록 해달라는 특별한 명이었습니다.”
여인은 제소벨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자로 다가갔다.
자신의 장비와 유사했지만, 한 눈으로 보아도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완성도를 가진 물건.
이를 보증이라도 하듯이 천계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세븐 샤즈의 문양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하늘은 곧 천계를 말함과 같으니 영웅께서 하늘을 자유로이 누벼주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안심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늘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
하늘을 맨몸으로 자유롭게 누비기 위해서는 날씨와 바람은 물론이고 미세한 동작 하나로 인해 생기는 수많은 변수도 예상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이론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 쌓아 올려야 가능한 것이리라.
오랜 세월 동안 황실을 지켜오며 수많은 전장을 해쳐온 경험이 있는 ‘키츠카 가문’이었기에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고, 눈 앞의 영웅이 있기에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이것을 다루기 쉽지 않을 겁니다. 허나,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제소벨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어느 전장, 어느 상황에서도... 확실한 해결책이 되어줄 것입니다.”
접기
누구도 오지 않을 허름한 집 안의 작은 방의 낡은 침대 위에 한 소년이 누워있었다.
그 옆에서 소년을 간호하던 여인이 말했다.
“이봐. 은인. 이제 눈을 뜰 때가 되지 않았어?”
목소리를 들은 소년이 힘겹게 눈을 떴다. 어비스를 담은 심연의 검은 눈은 여전했지만, 한쪽 눈이 달랐다.
세상의 모든 힘을 담으려는 듯한 욕심을 보이는 사악한 눈...
어태껏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그 오드아이(Odd Eye)는 분명 그의 심장에 있는 어비스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한한 힘을 발산하는 어비스의 마력을, 무한한 힘을 담을 수 있는 심연의 눈에 담는 데 성공하다니.
“마계 한쪽이 날아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커다란 폭발이 있었어. 어비스 폭탄이 또 터진 줄 알았다니까?”
여인의 말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쪽 눈이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쓰며 손을 들어 가렸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성공했어. 네 위험해 보이는 오드아이(Wicked Odd Eye)를 보니 확신할 수 있겠네.”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거울을 들이밀었다. 거울을 무심코 받아든 소년은 거울 속에 비친 왼쪽 눈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자리 잡은 짙은 심연속에서 꿈틀대는 어비스의 마력은 마치 작은 우주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어비스를 이식한 자 중에서도... 그런 눈을 가진 자는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어.”
거울을 바라보던 소년이 여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마력도 그 눈에 빨려들어갈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지금... 네가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말이지.”
소년은 다시 고개를 돌려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워록이 된 소년은, 그 엄청난 사실에 비하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 안에 담긴 우주를 바라보았다.
접기
'뭐라고? 이리 와! 한 대 맞자.'
아! 왜 때려!
'어비스를 이식해달라니? 꼬맹아. 내가 분명 가르쳐줬었지?'
뭐, 뭘! 알려줄 게 있으면 때리지 말고 그냥 말로 하라고!
'대가 없는 힘은 없어. 쉽게 힘을 얻었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야.'
대가? 흥. 그게 무슨 대가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성공한 거 아니야?
'정당한 노력 없이, 부정한 방법으로 힘을 얻는 것은 결국 너를 파멸로 이끌게 될 거야.'
지금 이 상태로 사는 게 파멸보다 더...
'.......꼬맹아?'
...맞아. 그 대가는... 이미 혹독하게 치렀어. 나는... 소중한 것을 잃었지.
'알았으면 주먹이라도 한 번 더 내질러. 그게 네가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원하지 않는데도 얻게 되었다면? 그 힘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그걸 절대 원하지 않지만... 만약 네가 무슨 이유에서든 어비스를 얻었다면... 분명 무한한 힘이 함께하겠지.'
이 힘은 무한하지 않아. 나는... 이미 패배했으니까.
'하지만 어비스가 주는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 돼. 어비스가 쏟아내는 무한한 힘에 취하지 않고, 그 무한한 힘을...'
...그 무한한 힘을 다룰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해. 맞아. 분명 그렇게 말했었어.
'잊지 않고 있었구나? 어비스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힘이야. 만약 그 힘의 한계가 보인다면... 그건 스스로 만든 걸 거야.'
스스로 만든 한계...
'절대 잊지 마. 그 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았어. 그런데, 저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꼬맹아.'
.......
'나는 괜찮아.'
...미안해.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
고마워...
...모아.
접기
“크아아악!”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온몸의 혈기를 내뿜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생명을 잃었고, 이곳은 오롯이 나의 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나는 형용할 수 없이 기분 나쁘고 불쾌한 감정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떨쳐내지 못했다.
나는... 나는 어째서 죽음의 공포를 다시 느낀 것인가?
“사라져라! 저리 꺼지란 말이야!!”
끝없이 쏟아질 것만 같았던 몸의 혈기가 바닥나고, 마른 호수에 숨겨진 것이 드러난 것처럼 어비스가 느껴졌다.
어비스... 모든 것의 원인. 나에게 죽음의 공포와 삶의 희열을 동시에 가져다준 것... 이것 때문이었나?
순수한 진리여야 할 내가... 생명의 근원인 혈기 그 자체여야 할 나에게 남은 유일한 역린이...
“크흐, 크흐흐흐... 재미있구나...”
나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약점이라니.
이 상태로는 완벽해질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완벽해지지 않고서 살아갈 이유가 없다.
완벽해지려면... 이 역린조차도 나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몸에 남은 혈기를 끌어모았고, 혈기가 어비스를 감싸며 압축되듯 모여들었다.
어비스여,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나의 혈기와 하나가 되어, 더 완벽한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어비스가 마침내 터져나갔다.
“......!!”
비명조차 질러지지 않을 정도의 고통과 함께, 어비스가 내 혈기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끄으으...”
심장이, 아니 온몸이 불타오를 것만 같았다. 섞여서는 안 될 것들이 섞이며, 날카로운 칼날이 혈관을 흐르는 것만 같다.
비루한 신체로 이루어진 혈관이, 아니 내 온몸이 녹아내린다.
녹아내려 사라진 곳에 어비스와 섞인 혈기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이제야 진정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로구나.
나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문을 연 뒤, 앞으로 나아갈 단 한 발자국이 부족했던 것뿐이로구나!
요동쳤던 몸이 고요해졌고, 온몸의 혈관을 흐르는 강력한 힘이 거칠게 느껴졌다.
이것을 다른 무지한 놈들이 가진 어비스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모욕일 것이다.
손을 들어 올리자 핏빛의 결정체가 실체화되었다.
붉은 핏빛으로 빛나는 어비스... 블러드비스(Bloodbyss)!
나에게 무릎 꿇은, 그리고 앞으로 무릎 꿇을 모든 생명이여!
이제 내 앞에 너희들의 생명을 바칠 필요는 없다. 그 생명은 이미 나의 것이니!
그 미천한 삶을 유지하며 빚진 생명의 값은 이미 치른 것으로 해주겠다.
너희들이 깨닫지도 못하는 순간, 그 생명은 이미 나의 몸속에서 흐르고 있을 테니까.
접기
폭풍의 언덕에 갑자기 나타난 자는, 오래된 기억 속 저편에서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자였지.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지만, 어느새 제법 많은 소문을 들려주곤 했는데, 참으로 오래간만에 돌아온 것이었어.
그자는 고고한 표정으로 마을을 지나쳐 폭풍의 언덕, 그곳에서도 가장 바람이 많이 부는 곳으로 바로 향했단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
멈출 줄 모르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모든 운명에 대항하려는 듯했어.
난 그 모습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여서 매일매일 그를 찾아갔단다.
며칠이 지나자 나를 따라 그를 찾아가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고, 어느새 언덕 아래를 가득 채울 만큼 많아졌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갔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조금도 미동하지 않고 있었지.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온 거란다.
그날은 달랐어. 보통 사람들이라면 느끼지 못했겠지만, 바람의 힘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그렇게 느꼈을 것이야.
그날따라 더 요동치는 바람은 폭풍과도 같았단다.
폭풍은 그자를 잡아먹을 듯 휘몰아치고 있었고, 언제 그 자리에서 날아갈지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는 순간...
사라졌단다.
분명 그 수 많은 눈이 오직 그 사람 하나만을 보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었어.
그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휘몰아치던 언덕의 모든 바람도 함께 멈췄지.
절대 바람이 멈추는 일이 없는 곳이었지만, 폭풍의 눈에 들어온 것처럼 일순간 대기는 고요했고, 바람은 단 한 점도 불지 않게 되었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숨을 참으며 주변을 살피던 그때 바람이 다시 불어오기 시작했고, 참은 숨을 토해낸 모두는 같은 것을 느꼈단다.
“아아... 이 바람은...”
거짓말처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탄성이 함께 흘러나왔었지. 아직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단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다 느낄 수 있지.
그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사방으로 불어오는 바람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란다.
바람을 다스리거나, 바람을 부르는 것은 본 적이 있었지만, 바람 그 자체가 되는 것은 어떤 전설에서도 들어본 적조차 없었어.
말 그대로 바람이 된 그 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그 목소리는 거만했지만, 기분 나쁘지 않게 유쾌했단다.
이내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난 그 자의 머리 일부는 바람과 하나가 된 것을 자랑하려는 듯 하얗게 물들어 깃털처럼 변해있었지.
자만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았지만, 그건 주체할 수 없는 우월함이 넘쳐흐른 것일 뿐이라 생각될 정도로 당연하게 느껴졌어.
그 후로 그자를 부르는 명칭은 여러 가지였단다.
전설 속의 풍신이 나타났다고도 하고, 폭풍 속에서 나타났으니 폭풍의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
하지만 그런 명칭이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이 세상에 불어오는 어떤 바람의 이름을 붙여도 부족하지 않을 존재.
그 자체가 된 존재를 부르는 명칭은 ‘바람’ 그 하나로 족하지 않겠느냐?
접기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의 기분은... 다른 날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꿈을 꾼 건가? 하며 속으로 되뇌었을 뿐.
몽롱한 기분에 취해있었지만, 무심코 느껴진 오른손의 통증이,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이건...?”
펜이 부러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던 오른손을 치우자 낡은 양피지 위에 무언가가 어지럽게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명 내가 적은 것이 분명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고, 그래서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다.
“안돼.”
어느새 나타난 니알리가 양손으로 양피지를 가렸다.
평소처럼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가리려 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음을 쉽게 느낄 수 있을 만큼 긴장한 눈치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굳이 토를 달지 않았고, 니알리는 절대 보지 말라고 말했으면서도 정작 양피지를 빼앗아 가지는 않았다.
아니, 양피지를 만지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단 한 순간도 잠들지 못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유혹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나를 계속해서 어딘가로 데려가려 했다.
허용치 이상의 약물을 사용해도, 독한 술을 정신을 잃을 때 까지 마셔도 그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어차피 세상의 결말은 시작과 함께 정해져 있고, 그저 결말을 따라 흘러갈 뿐이란다.
이미 정해진 끝이 궁금하지 않니?
아니! 그딴 거 궁금하지 않아! 삶의 끝이 죽음이라고 해서, 죽음을 궁금해하면서 살지는 않잖아!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 몰라.
그래. 네가 그걸 거부하는 것도... 혹은 받아들이는 것도 결국은 정해진 일이니까.
그러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이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하면 편해질까? 목소리가 말하는 결말을 마주 본다면...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젠 지쳤어...”
다 끝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사라졌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피부가 아릴 만큼 차가웠지만, 끝까지 가라앉았을 때... 마침내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이 멍청이가!”
누군가의... 목소리? 분명 익숙한 목소리인 것 같은데,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직 차가움만 있을 것 같았던 공간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감아”
뭐?
“눈 감아!”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는 순간, 눈을 떴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했지만, 가장 소란스러웠던 감각이 사라졌고, 눈앞에 허름한 숙소의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여서는 안 될 편린들이 세상과 마구잡이로 뒤섞여 움직이고 있는 것들도 함께 볼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틀리고 있었고, 그것들이 보여주는 것들은 모든 순간의 시작이었지만 한순간의 끝과 같았다.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주입 당하는 듯,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순간 따듯한 기운이 눈을 가렸다.
그녀가 내 눈을 가려주자 눈앞의 괴리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든 현재가 섞인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내가 서 있는 현재만이 남았다.
그리고 가려진 손바닥 사이로 언뜻 보이는 모습은...
“아직... 보면 안 돼. 언젠가는 가야 겠지만...”
그녀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덧붙였다.
“조금만 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것보다 내 눈앞에 보이던 것들은 도대체...?
“앞으로 이걸 쓰고 다녀.”
니알리가 나에게 씌어준 것은... 단안경 이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 안경은 나에게 꼭 맞았고,
니알리는 그것을 씌우고 나서야 손을 치워줬다.
이제 세상을 덮었던 괴리는 보이지 않았고, 오직 숙소의 허름한 천장과 뒤통수의 따뜻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크, 크흠... 이건...”
“왜?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니알리의 손이 가볍게 내 이마를 밀었다.
그리고 이내 니알리가 불쑥 시야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이것도 나름 괜찮은데? 가끔 해줄까?”
그녀는 아무것도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글하고 웃었지만, 저 웃음을 지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무심코 알 수 있었다.
접기
“무엇을 위해 진리의 끝에 도달하고자 하시나요.”
레이진의 질문에 그녀는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인 듯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무엇을 위해’라...
원소와 마나의 근본에 대한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지식의 탐구욕일까?
초월적인 힘을 넘어선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힘에 대한 갈망?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굳어있는 그녀에게 엘레멘탈 마스터로서 최초로 ‘초월단계’를 경험한 자이자
이를 ‘오버마인드’ 명명한 존재인 레이진이 숙연한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저 또한 한때 초월적 힘에 대한 끝에 닿고자 했었지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진의 눈동자는 과거를 회상하듯 흐릿한 회색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저는 그저 무한한 초월 세계의 끄트머리를 엿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본 실마리는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또는 끔찍하게도 비현실적인 것이었죠.”
한때, 테라코타의 번영을 꿈꾸던, 순수한 지식의 탐구자이던 그녀의 시선은 과녁을 잃은 화살처럼 맥없이 바닥에 꽂혔다.
지금 그녀는 그저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헤매는 초월자의 잔상일 뿐...
레이진의 눈은 지독히도 공허한 우주를 비추는 듯했다.
“어쩌면...”
말끝을 흐리는 레이진의 시선이 어느새 그녀에게 닿았다
“진리의 끝에 닿고자 하는 생각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죠.
모든 것은 돌이켜 보면 끝이 아닌 시작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말이에요.”
레이진을 스친 스산한 바람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원소와 마나, 아니, 그 대단한 ‘사도’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또한 모두 우주라는 근원에서 시작되는 것...
그 미약하고도 원대한 진실에 저는 한 걸음 물러섰지만 당신은 도달할지도 모르겠군요.”
회색의 무표정하던 레이진의 표정에 언뜻 미소가 스친듯했다.
“시작의 근원에요.”
접기
어둠 속 한줄기 잔상을 그리는 빛이여,
공허 속 탐욕을 속삭이는 메아리여 들리는가.
그대는 마계를 밝히는 자이자 세상을 그림자로 뒤덮는 자.
탐욕에 허덕이는 밤하늘의 지배자이자 밤보다 더 깊고 심연 속 어둠을 속삭이는 자.
나 그대에게 원하노니 내 부름을 들어 검은 탐욕을 보이라.
나 또한 그대의 맹세를 들어 탐욕의 제물을 바치니,
탐욕을 삼키는 포식으로 오만한 자들에게 공포를 선보일지어다.
그것이 곧 나의 바람이자 그대의 존속 이유이니,
모든 식의 근원이자 고요한 마계의 밤하늘이여 내 외침을 들으라.
끝없는 공허에 굶주린 그대에게 더없이 짙은 어둠과 끝없이 밝은 빛을 선사할 자 여기 있으니.
나를 통해 그대는 세상을 탐하고, 나는 그대를 통해 염원을 이룰지어다.
심연 속에 숨죽이는 그대 답하라.
달의 뒤에 가려진 허상의 존재여 고개를 들어라.
나 또한 달의 이름을 등진 자.
‘이클립스’의 이름으로 위대한 마계의 하늘에게 약속할지니.
그대와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부정한 것들을 삼켜 세상의 침음을 전하리라.
- ‘포식의 델라리온’ 소환 의식 주문 중 일부 발췌
접기
태고에 빛과 어둠만이 존재하던, 아직 선과 악의 구분조차 모호하던 세계에 그녀가 있었으니.
그녀는 빛과 정의를 관장하는 존재이자, 찬란하고 고결한 전장의 여신.
우주의 원소 자체이자 원소로 돌아가는 존재.
존재하지만 사라지는 무형의 기운이자 어느 한 곳에 규정되지 않는 존재.
그 존재를 품으면 ‘테아나’ 그 자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라.
‘테아나’는 원소로 돌아가는 존재이자 기운이니,
원소의 힘을 탐하는 자는 테아나를 마주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강과 바다가 공존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바다에 강을 담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샘물로 시작된 강은 바다로 흐른다는 것을
다른 듯 같은 그것들은 모두 생명의 젖줄과 같다는 것을,
그리하여 결국에는 누군가를 구원하고, 무언가를 잉태한다는 것을...
이제 알겠는가.
결국에는 신 또한 태초의 우주에서 생겨난 기운이며
우주에 담긴 원소 또한 그것에서 시작된 것이니.
그 진실을 깨달은 자야말로 테아나의 본신이자 태고의 위대한 존재
‘프리미티브 프레센시아 (Primitive Presencia)’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접기
얏호! 친구들 안녕?
오늘도 신나게 롤러코스터를 만들어 볼까?
앗! 플루토!
아직 그 사탕을 먹으면 안된다구!
이런, 망토가 되어버렸잖아?
뭐 상관없어.
망토에 손이 네 개가 달렸으니 더 많이 집어올 수 있잖아?
그럼 이 달콤한 호박에도 붉은 사탕을 넣어볼까?
냐옹!
그치? 너도 좋은 생각이라 생각하지?
잘 익은 호박에 구멍을 파고 사탕을 넣으면?
휘호! 안녕, 잭 오 랜턴!
넌 가열로 담당이야!
냐아옹!
맞아, 내 생각도 그래!
역시 친구는 많을수록 좋거든!
너도, 너도, 이것도, 저것도!
넌 선로 담당!
넌 기관사! 넌 승객이야!
좋아! 그럼 이제 모두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됐지?
접기
아다지오(Adagio)
서두를 것 없다.
이제 막 서막이 올랐을 뿐이니...
인형의 숲에 초대받은 자들에게 보여 줄 인형극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안단티노(Andantino)
아주 조금씩 장미의 덩굴이 자라듯 화려하고도 장황한 그런 서사를 준비한다.
장미의 가시처럼 치명적이지만 덩굴이 자라나듯 너무 성급하지는 않게,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그들을 잠식해나가는 전율과도 같은 그런 서사를...
모데라토(Moderato)
무대가 움직일 필요는 없다.
관객이 무대를 찾아오는 법이니까.
내 관심을 받고자 하는 인형은 넘쳐나고 황홀경의 피날레를 고대하는 관객은 수두룩하다.
나는 지휘자일 뿐 결말을 고대하는 것은 초대받은 자들일 테니까.
알레그레토(Allegretto)
쁘앵뜨, 쁘앵뜨.
인형들이 춤을 추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명과 같은 환호와 침음이 나를 전율케 한다.
후훗... 머지않았다.
황홀한 종막극의 피날레가...
비바체(Vivace)
이야기는 빠르고 경쾌하게 결말로 치닫는다.
그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비관적으로,
누군가에게는 황홀하게 들릴 것이다.
종막극이 끝난 뒤 찾아오는 공허함에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다음 인형극의 주인공은 당신일 테니까...
접기
그날도 기도를 드리던 중이었습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저는 오색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두둥실 날고 있었고 그때 작은 빛이 다가오더니 대뜸 묻더군요.
“그대는 무슨 이유로 살아가는가?”
“오직 나의 신이신 레미디오스의 뜻을 알리고자 살아갑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했지만, 빛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다시 질문했지요.
“그런 그대의 마음에는 어떤 목표가 있는가?”
“세상에 죄지은 자들을 회개시키고, 그것을 통해 선량한 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너무나도 뻔하고 부족한 대답을 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빛은 나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다시 물었지요.
“그렇다면 그대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입으로 소리내기 부끄러운 핑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지만, 그 끝은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모든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빛은 이제야 만족하는 것 같았습니다.
“믿음이 부족했기에 이겨내지 못했고, 동료를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저의 근간이기에 그 믿음이 부족했다는 말은... 결국 저의 모든 것이 부족한 것입니다.”
드디어 빛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슴으로 다가와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진정으로 깨달은 자여. 이제 진정한 나의 뜻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라.”
빛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번져나갔다고 느끼는 순간, 서늘한 기도실에서 눈을 떴습니다.
어느새 제 품속에는 푸른 빛의 눈물방울처럼 생긴 것이 자리 잡고 있었지요.
그것을 본 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다시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신, 레미디오스시여(Pie, Remidomine).”
부족함을 채워주신 뜻을 받들어 앞으로도 세상의 가련한 이들을 보살피고, 적들을 심판하겠나이다.
앞으로도 신의 대행자로서 온 세상에 빛과 사랑이 가득할 수 있도록 하겠나이다.
접기
레미디아 바실리카에서도 일부 허락된 고위 프리스트들만 접근하는 장소가 있다.
평소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는 듯, 작은 조명조차 없었지만, 수수한 제단 위에는 황금색의 빛을 내는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것은 레미디오스의 성좌라네. 들어본 적이 있는가?”
“레미디오스의 성좌...”
메이가 로젠바흐의 말에 곁에 있던 프리스트는 그가 한 말을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 레미디오스의 신성력이 담긴 성유물이지. 성스러운 5인 중 한 명인 볼프간트 베오나르께서 최초로 사용했다고 하지.”
메이가가 말하는 동안 레미디오스의 성좌는 그저 빛무리였었지만, 어느샌가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챈 듯, 메이가가 물었다.
“이제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가?”
“...정(釘)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정(釘)이라. 두 주먹으로 악을 꿰뚫는 자네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모양이로군.”
메이가가 그렇게 말했을 때, 레미디오스의 성좌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넘칠 듯 주변으로 퍼지는 그 빛은 서서히 제단 앞에 있는 프리스트에게 다가왔고,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자애롭고 따뜻하지만, 그 어떤 악도 물리칠 수 있을 듯한 강력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본래 자격을 인정받은 소수의 고위 프리스트들이 신의 허락을 받아 사용하는 것일세. 허나...”
황금빛으로 빛나는 주신 레미디오스의 신성력이 프리스트의 한쪽 주먹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자네는 이미 그 자격을 갖추었지 않은가?”
“이건...”
그의 주먹에는 어느새 레미디오스의 성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거대한 정의 형태를 한 건틀릿은, 마치 한 몸인 듯 편안했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을 때, 건틀릿은 다시 황금빛으로 변했고. 원래 있던 장소로 되돌아갔다.
어찌 된 일인지 몰라 아쉬운 듯 빈 주먹과 레미디오스의 성좌를 번갈아 보는 프리스트에게 메이가가 다시 말했다.
“아쉬워하지 말게. 자네는 방금 그분의 허락을 받은 것이니 말일세.”
“어떻게...”
“그대가 그분의 뜻을 따라 정의를 집행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레미디오스 의 가호가 그대를 지켜줄걸세.”
메이가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느린 걸음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따뜻한 빛을 잠시 바라보던 프리스트는 이내 빠른 걸음으로 메이가의 옆에 따라붙었다.
접기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고 생각했다.
식신의 인정을 받는 것은 퇴마사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깨달음이었고,
그들에게 악을 처단할 힘을 빌리는 것이야말로 그 보상이라 생각했음이니.
그리고 황룡의 인정까지 받았을 때, 어찌 세상의 모든 악을 정화할 수 있으리라 자만하지 않았겠는가?
허나 너무나도 높은 벽을 만나고야 말았다.
그 벽을 넘기 위해 모든 식신의 힘을 빌렸지만, 흠집조차 나지 않는 단단하고 높은 벽이.
식신들이여. 더 힘을 빌려다오. 더 큰 힘을 빌려다오. 나와 더 크게 공명해다오.
그대들의 힘을... 더...
그토록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흩어졌고, 거친 파동과 함께 식신과의 공명이 흩어지고 말았다.
번뇌와 욕심이 가득한 자는 식신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나는 이대로 그들의 인정을 받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인가?
그렇다 해도 변명할 여지는 없겠지.
그렇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타오르는 듯한 정의감도 차가움 앞에서는 불길이 약해지고.”
“얼어붙을 듯한 냉정함도 뜨거움 앞에서는 결국 녹아내린다.”
처음으로 식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답을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가득 차버렸다며 자만했던 비좁은 마음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물을 깨달은 자도, 단 하나의 무지 앞에서 무릎 꿇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니.”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것을 보라.”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비우자, 그제야 비로소 가득 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세상의 이치 그 자체이자 신선(神仙)인 다섯 식신을 동등한 눈높이로 다시 바라보았을 때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깊은 곳에는 이미 벽을 뚫을 힘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저 새롭게 공명했을 뿐이지만 마치 천지를 개벽시킬만한 힘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우리의 진정한 힘으로 하나의 이치를 따라라.”
“이치를 벗어나 악으로 규정된 자들 또한 결국 그 이치 앞에서 마주 서게 될 것이니.”
악이라 규정하는 그들 또한 세상 만물의 일부.
허나 이 하나의 이치를 벗어난 것이라면... 응당 이 손으로 멸(滅)해 드리라.
접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외길로 어두운 다리 위로 발걸음을 옮기는 자가 있었다.
‘찰박-’
그자가 발걸음을 내딛자 땅에 얇게 저며진 것에서 소리가 났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밟고 있는 것은 이 죄인의 피인가, 아니면 다른 죄인들의 피인가?
...중요치 않다.
‘찰박-’
이어지는 발걸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사실 신경쓰지 않았다.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그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것이라 다짐했지 않았는가?
...상관 없다.
‘찰박-’
이 길의 끝에는 신의 답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자의 답이 있는 것인가?
나는 이 걸음을 멈추어야 하는가? 계속 나아가야 하는가?
...답은 없다.
‘찰박-’
어느새 길은 좁은 외나무다리와 같아졌다.
앞으로 더 좁아질 이 길은 결국, 빛으로 향하는 길인가, 어둠으로 향하는 길인가?
...두렵지 않다.
‘찰박-’
실처럼 가늘어진 다리 위에 아슬하게 올라선 자는 이제 마지막 한 걸음이 남았으리라 생각했다.
나락일지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지막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행동의 결과가 무엇이든...
...중요치 않을거라 생각했다.
‘......’
그자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으나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실처럼 가늘어진 다리를 이은 빛의 길이 그를 받쳐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발걸음 아래에는 빛이 언제나 함께했음을, 그의 신은 언제나 그자를 보살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은 모든 것이 중요했었다.
그자는 외길로 밝은 다리 위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더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접기
‘신께 고합니다.
신께서 주신 이름으로 신념을 전하고 헌신으로써 죄 많은 자들을 구원하였으나,
아직 제 안에 자리 잡은 어둠이 모두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부디 이 어둠을 몰아낼 가르침을 내려 주시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77일째 기도드리는 날이었다.
혹자는 신께 기도가 닿지 않은 것이라 말했고
혹자는 인간으로서의 능력 밖의 권능이라 신께서 듣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밤낮을 거듭한 여인의 간절한 부름과 물음을 신은 저버리지 않았다.
77일간의 기도 끝에 들린 답은 새벽을 깨우는 아침처럼 찬란했으며,
아침을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감미롭고도 포근했다.
그 목소리는 빛이었으며 음악이었고, 천사들의 속삭임이었다.
신의 답을 구하며 메마르고 여윈 여인에게 천사들이 내려앉았다
‘구하고자 하는 답이 어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인가.’
그 소리는 신의 목소리였으며, 천사의 연주였고, 내면을 꿰뚫는 빛의 창이었다.
‘아닙니다.’
여인은 마주 쥔 두 깍지에 힘을 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얻고자 하는 것이 세상을 군림할 힘인가.’
아스라이 들리는 바이올린과 플룻 소리에 여인은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마디마디 툭툭 불거져 나온 손에 힘을 주며 여인은 간절히 읊조렸다.
‘이 몸은 신의 권속이며 일부이니, 그저 스스로의 어둠에 굴복하지 않을 신념을 바라며
죄 많은 자들의 고통을 대신할 의지를 바랄 뿐입니다.’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마디를 부여잡은 그녀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과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또 다른 대천사의 탄생을 목도하듯, 일곱의 어린 천사가 그녀 곁에 내려앉아 눈을 감았다.
눈 부신 빛과 함께 십자가의 형상이 그녀의 목 언저리에서 밝게 빛났다.
‘네 부름에 일곱의 천사가 응답할 것이매, 너는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전할 것이라.’
또렷하고도 선명한 그 목소리에 여인의 메마른 뺨에 눈물이 흘렀다.
‘이는 나의 권능이니, 샤피엘로 하여금 이로써 모두를 이롭게 하고, 악한 것을 멸하게 하라.’
새로이 탄생한 대천사의 곁에서 다른 대천사들이 기쁨에 겨운 듯 날갯짓을 했다.
샤피엘, 레미디오스의 신념과 의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전하는 대천사가 지상에 내려앉은 날이었다.
접기
불붙은 검은 손이 발목을 붙잡을 때의 무게를 아는가?
찢어지는 단말마 속에 마지막으로 마주친 눈동자를 기억하는가?
억울함과 분노, 슬픔으로 뒤엉킨 그들의 기억은 죄책감과 연민의 덩굴이 되어 온몸을 옥죈다.
나약하다.
내가 걷는 길은 지옥의 가시밭일진데 어찌 사명을 다함에 죄책감과 연민을 품는다는 말인가.
이미 사명으로 얼룩진 손은 검게 물들다 못해 시꺼멓게 타버렸는데,
이 불붙은 손으로 누구의 손을 붙잡는다는 말인가.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도끼요.
내가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은 심판관으로서의 율법이니.
부디 제 나약함을 벌하소서.
지옥의 겁화를 내려 저를 옥죄는 가시를 불태우시고
지옥의 틈바구니에서 나약하게 웅크린 제 가슴에 쐐기를 박아 주소서.
그리하여, 모든 부정함이 타올라 재가 될 때
이 육신 또한 재가 되어 무간연옥의 하늘을 굽어보게 하소서.
지옥의 불길과 같은 겁화가 온몸을 휘감으며 옥죄던 부정한 덩굴은 속절없이 부스러지고
불길이 새겨진 육신의 정신은 더욱 맑고 견고해지니.
이는 아직 이 도끼로 행할 사명이 남았음이오.
‘사도’를 벌할 심판의 때가 기다리고 있음이다.
나의 속죄가 신께 닿았다면 사명을 다하는 날까지 이 육신은 불타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나 또한 불태워야 하는 이단일지니, 어찌 불붙는 것을 두려워하리오.
이 검게 그을린 손으로 쥔 도끼에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육신에 새겨진 불길의 기억이 나를 인도할 것이니.
죄지은 자 두려워하라.
내 기도로써 지옥의 겁화가 현세에 드리웠으니.
믿음이 있는 자 경외하라.
이 불길 끝에 반드시 안식이 있으리니.
- ‘속죄의 제단’에서의 고해성사
접기
바람에 꽃잎이 나리듯 나부끼는 소맷자락과 함께 스삭스삭 여인의 발이 미끄러지듯 돌바닥 위를 움직였다.
나비와 같이 가볍고도 우아한 움직임이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어느덧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위험합니다!’
그녀를 만류하던 선임 무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더이상 신룡의 힘을 받아들이면 신룡과 완전히 동화되고 말 거예요!’
다급하게 말리는 목소리에도 여인은 초연하게 답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도망치지 않고 받아들일 겁니다.’
마음을 굳힌 듯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에 선임 무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방관하듯 벽에 기대어 있던 사내가 귀찮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의 어깨에는 불꽃을 뿜는 작은 짐승이 올라타 있는 채였다.
‘설마 모르진 않겠지. 신룡과 동화되면 넌 더이상 인간이라 볼 수 없어.’
여인은 물러섬 없이 사내의 눈을 마주 보았다.
‘상관없어요.’
귀찮은 듯한 태도와 달리 그의 눈동자는 직설적이고 매서웠다.
‘잘못하다가는 네 존재는 사라지고 신룡만 남을 수도 있다.’
‘......’
아주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 스쳤지만, 여인은 결연한 눈빛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힘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다면... 그 힘으로 많은 이를 구할 수 있다면... 상관없습니다.’
사내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네가 신룡에 잡아 먹히든, 네가 신룡이 되든.’
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작과 함께 신당을 빠져나가는 그 모습에서 여인은 자신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섞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대행자로서의 마지막 사명이었으니까.
거칠어지는 호흡과 함께 나부끼듯 살랑이던 소맷자락은 빠르게 요동쳤고
잿빛 먹구름 사이로 그녀의 춤사위에 맞춰 뇌전과 천둥이 쏟아졌다.
비바람이 불며 물에 젖은 의복은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럼에도 그녀의 춤사위는 멈추지 않았다.
하얗게 번지는 뇌전에 그녀가 순간순간마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허공을 찢는 천둥소리에 시공간이 멎는 듯한 정적이 찾아온 듯도 했다.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녀는 손으로는 하늘을 받아들고 발로는 대지를 지탱하며 신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뇌전이 내려치며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싶은 순간
잿빛 구름 사이에서 심연을 담은 듯한 푸른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경외감에 가까웠다.
그 존재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살갗으로 느껴졌다.
평소와 같은 전언도, 언령의 힘도 없이 거대한 신룡이 먹구름을 헤치고 무서운 속도로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그 거대한 위용에 그대로 내리 찍혀 짓이겨질 것만 같은 순간,
거짓말처럼 신룡은 마치 여인과 하나가 되듯 그녀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영혼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엄청난 기운을 느끼며 여인은 물속에서 참았던 호흡을 내쉬듯 거친 숨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금빛으로 빛나는 가슴을 소중한 듯 양손으로 감싸며 눈을 감았다.
좀 전까지 쏟아붓던 비바람과 천둥이 무색하게 황금빛의 눈부신 하늘이 그녀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접기
아이야, 슬퍼 말아라.
네가 거둔 죄악은 너의 여린 살갗을 가르매 돋아날 것이오
비집고 나온 마지막 죄의 파편이 불순한 바닥을 짚는 바침이 될 것이니
너는 그저 날아올라 내게 고하거라.
그리하면 일곱의 원죄를 사하고 안식에 이를 것이니.
죄를 거둠에 있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느니라.
하나의 죄, 교만한 박쥐의 날개가 오른쪽 어깻죽지를 가르고 돋아나매
그 오만한 날갯짓은 천사가 이끄는 마차의 바퀴에 짓이겨질 것이오.
둘의 죄, 탐욕스러운 까마귀의 깃이 왼쪽 어깻죽지로 돋아나매
기름이 들끓는 가마솥에 담가질 것이라.
셋의 죄, 네 오른 등으로 비집고 나온 시기 어린 뱀의 주둥이는
차디찬 얼음물에 담가질 것이오.
넷의 죄, 사리 분별 못하는 분노는 굶주린 늑대와 같으매
네 날개로 하여금 나에게 닿을 때 산채로 찢길 것이라.
다섯의 죄, 음욕에 젖은 전갈의 꼬리는 불과 유황에 쪄질 것이고
여섯의 죄, 지나친 탐욕의 어금니를 지닌 자는 죽지 못한 채 평생을 파리와 쥐를 삼켜야 할 것이며
일곱의 죄, 나태한 나귀의 영혼은 뱀의 구덩이에서 영원히 구르게 될 것이니라.
모든 죄악의 근원을 품은 너는 세상의 아픔이자 내 상처이니.
두려워할 것 없다.
고통과 인내 끝에 산화한 네 날개는 그 어떤 천사의 날개보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이니.
비로소 그때 가장 순결하고 진실 된 존재로 거듭난 너를 모두가 우러러볼 것이니라.
오만한 자는 무릎 꿇고
탐욕과 시기 어린 자는 고개를 조아릴 것이며
음란하고 나태한 자들은 차마 눈을 바라볼 수 조차 없을 것이니.
네 존재 자체가 죄의 두려움이자 벌이오.
하늘을 뒤덮는 칠흑의 날개야말로 세상에게 고하는 안식이 되리라.
접기
빛 한점 들지 않는 지하의 별이자 흑요정의 영광인 존재.
공간을 넘는 순간의 지배자이자 밤하늘을 가르는 한줄기 신속의 성(星).
내가 곧 나의 스승이자 가본 적 없는 그곳이야말로 내 고향이니
인지의 감각을 버리고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 그곳에 도달하라.
내가 스승을 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닫고 있는 인지의 문 때문이니.
이미 나는 온전히 나 하나가 아닌 수많은 자의 영광이자 빛이며 자긍심일진데
고작 이 몸 하나 성 하고자 스스로의 빛을 가두고 있단 말인가.
개문(開門)하라.
나를 가로막고 있던 것은 나라는 문이었으니
문은 나를 지키는 방패임과 동시에 내 길목을 막는 방해물이다.
해방(解放)하라.
나를 지키고자 함은 생(生)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이니
본능의 껍질 안에 숨어 있는 무한의 힘을 개방하면 쾌속의 성(星)이 되리라.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은 나이고
나의 가장 큰 걸림돌 또한 나이니
나를 넘어선 지금이야말로 펜네스의 위대한 별이라 칭할 수 있으리라.
접기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온몸을 휘감음에도 그녀는 황홀함에 신음했다.
평범한 자였다면 그 공포의 입김이 닿는 것만으로도 졸도했을 상황.
하지만 황홀경을 접한 듯 얼굴을 부여잡은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의 눈빛은
두려움보다는 광기와 쾌락에 젖어 있었다.
그녀가 사령술사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것은 그녀가 사령술사 중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죄악의 지옥’에 가장 가까운 존재여서 이리라.
자신의 저울 위에 올라 있음에도 두려움은커녕 한 톨의 의구심조차 품지 않는 존재에
태초의 공포이자 불경한 자들의 신인 ‘모로스’는 호기심이 일었다.
과연 저 새로운 희생양의 무게는 얼마나 될지 말이다.
아무리 살인을 하고 죄악을 탐한다 한들 자신의 저울 위에서는 ‘태초의 공포’만큼의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자신은 그저 저울에 올려진 희생양의 무게만큼, 불경한 자들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을 뿐...
하지만 태고의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던 저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의 영혼의 무게가, 그녀가 지닌 죄악의 공포가 자신을 들어 올릴 만큼 무겁다는 것.
저울이라고 보이지 않는 제단 위에 올라서 있는 여인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어서 내게 증표를...!”
양팔을 벌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검은 연기가 휘몰아쳤다.
검은 연기는 살아있는 듯 뱀처럼 꾸물꾸물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마치 그녀 속에 있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그 감각에 여인은 기쁨과 흥분에 겨운 침음을 내뱉으며 미소지었다.
검은 연기가 모여들어 잿빛의 정(釘)의 형상으로 구현되었다.
그녀의 욕망에 동조하듯 정의 형태를 한 그것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그것은 모로스의 저울을 움직인 자에게만 주어지는 ‘아케론의 열쇠’
열쇠는 다시 연기처럼 흩어지며 여인에게 스며들었다.
여인은 고통인지, 희열인지 모를 거친 숨을 토하며 미소지었다.
고혹적이고도 기괴한 그 모습은 형언하기 힘든 또 다른 공포 그 자체였다.
접기
얘기는 건너서 들었습니다.
수쥬의 숨겨진 보물의 진정한 힘인 야타가라스의 이치를 깨달으셨다고요.
그 기운을 원천으로 삼신기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셨다니 수쥬국의 일원으로서 자랑스럽고도 벅차오릅니다.
당신이 ‘이즈나비’가 되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존재가 되었군요.
쇼난 왕가는 항상 당신을 포함한 쿠노이치 가문에게는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답니다.
이는 쇼난... 아니, 수쥬 전체가 당신의 영원한 지지자이자 지원자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존재는 수쥬의 자랑이자 쿠노이치 가문의 자존심이니까요.
다만, 걱정되는 것은...
야타가라스의 문양은 태양의 힘에 근원에 닿아, 태양신 자체가 되게 하는 길과 같은 것.
태양의 힘을 한정된 인간의 육체에 담는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인내가 필요한 일일지...
사신(使臣)의 말로는 당신이 야타가라스의 힘을 쓸 때마다 육체가 마치 용암을 품은 대지처럼 타오른다고 하더군요.
부디... 너무 무리하게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쿠노이치 가문에게도, 수쥬에도 다시는 없을 인재이자 재산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조만간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수쥬의 태양이 그대와 함께하길...
- ‘쇼난 아스카’로부터...
접기
“그런데 그 ‘검은 섬광’이란 자는 진짜 존재합니까?”
보통은 서신을 통해서만 주고받았을 의뢰였지만,
워낙 중한 의뢰라 구두로 의뢰를 하고 싶다는 의뢰인의 말을 수락한 것이 화근이었다.
귀찮고도 하찮은 의뢰인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기보다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안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기운에 주눅 든 것인지
진땀을 흘리던 의뢰인은 머쓱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필요한 정보는 다 들었다 판단한 그녀는 말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의뢰인 또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주변을 살피며 스리슬쩍 사라진 눈치였다.
후드를 눌러쓴 채 걷던 그녀는 발밑에 늘어진 자신의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검은 섬광’이 진짜 있느냐니... 정말이지 쓸데없는 질문이다.
그녀 또한 이 세계에 발을 담그며 한때, 그러한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검은 섬광’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섀도우 댄서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검은 섬광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검신이라 불리는 그를 만난 이후 자신의 그림자를 맞닥뜨린 그녀는 또 다른 하나를 알고 있었다.
때로는 검은 섬광은 누구도 될 수 있고 무언가도 될 수 있으며, 세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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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영혼들이 틔운 싹은 그 어떤 것보다도 크게 자라난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스러져 간 많은 이들의 영혼은 그란 플로리스로 모여들어 신성한 세계수 ‘에우디아’의 싹을 틔웠다.
하늘 높이 자라난, 에우디아의 위쪽에 펼쳐진 ‘생명의 정원’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식물들이 피어나 있었다.
“엘다르, 그게 정말 당신의 뜻입니까?”
전혀 다른 세상의 풍경처럼, 달빛마저 녹색으로 빛나는 이곳을 두 요정이 걷고 있었다.
엘다르라고 불린 요정은 에우디아의 그늘 밑에서 평화롭게 노닐고 있는 일각수와 정령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엘다르의 시선이 엑텔레의 뒤쪽에 위치한 정원의 중심으로 향했다.
정원의 중심에는 에우디아가 만들어낸 ‘대자연의 정수’가 담긴 샘이 있었는데,
이는 에우디아가 머금은 생명의 기운이 형상화된 곳으로 대자연의 힘을 얻고자 하는 전사들은 이곳에서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그녀는 에우디아의 허락을 받아 이미 다섯 번이나 그 샘물을 마신 요정족의 가장 위대한 전사였다.
“에우디아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힘을 내려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엑텔레?”
처음 샘물을 마셨을 때, 그녀는 에우디아의 가호를 받아 대자연의 충만한 힘을 몸에 갈무리할 수 있었다.
두 모금, 세 모금, 네 모금.
샘물을 마실수록 그녀는 주변의 정령, 신수들과 동화하여 그들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되었고.
다섯 번째로 샘물을 마셨을 때, 마침내 그녀는 온몸에 퍼진 대자연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야 당연히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들을 상대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글쎄요. 그러기엔 이곳은 이제 너무 평화롭죠.
에우디아가 제공하는 힘은 단순히 이 평화를 지키기엔 차고 넘칠 지경이구요.”
발걸음을 멈춘 엘다르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엑텔레는 그녀의 시선이 어쩐지 이곳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샘물을 마신 후로, 이따금 저와 연결된 또 다른 차원의 제 자신이 이곳의 힘을 빌려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곳과는 달리 전쟁과 혼란이 평화를 아득히 압도하는 곳일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에우디아는 저를 통해 그곳의 제 자신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다르.
아무리 그 의지가 곧고 선하다고 해도, 에우디아의 축복 없이는 어떠한 전사도 샘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
그 때, 한줄기 달빛이 에우디아의 잎사귀를 타고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었고
에우디아의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던,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일각수인 ‘필로시스’가 생명의 정원으로 날아올라 위대한 전사의 랜스에 깃들었다.
놀란 표정의 엑텔레가 더 이상 무언가 항변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게 에우디아의 대답인 것 같군요.”
엘다르는 옆으로 비켜선 엑테르를 지나쳐 샘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에우디아에서 떨어져 나온 단단한 겉껍질이 눈부신 빛을 내며 그녀의 방패와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세계수 에우디아가 자신의 힘을 허락한 전사에게 내리는 가장 확실한 증표.
달빛마저 녹색으로 빛나는 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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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빛이 없는 세계의 태양 이야기.
기나긴 인고 끝에 악마들을 전이시키던 차원문을 닫았을 때에도
그것이 내 심장에 옮겨붙은 검은 화염을 꺼트리지는 못하였다.
우리에게 유일한 신앙이란 이미 전투 그 자체가 되어버린지 오래.
전투가 계속될수록 우리의 신앙은 굳건해지고,
인간들에게 버림 받았던 악신의 권능 또한 다시 강해진다.
마치 우릴 시험하기 위해 차원문이 닫히길 기다렸다는 듯,
더 강하고 더 교활한 악마들을 풀어놓는 차원 너머 지옥의 거대한 존재.
이 싸움에는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
검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저 데몬들의 모습처럼
철처한 힘의 논리만이 뜨고 지는 태양처럼 자리를 지킬뿐.
빛나던 과거를 뒤로 하고 어둠 속에 갇혀있던 검은 태양은
온전한 빛도, 온전한 어둠도 아닌 혼돈의 존재들을 위해 스스로를 불사른다.
나는 빛이 없는 세계의 빛.
내게 복종하라. 그리하면 신의 권능이 펼쳐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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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금이 간 방패는 조그만 충격에도 깨지기 쉬워진다.
대결에서의 패배 이후, 그녀는 믿음이란 방패에도 의심이란 금이 가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떨쳐내기 위해 선택한 행동은 다시 무기를 들고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 끝에, 기도하듯 무너진 그녀를 찬란한 광휘가 비추어 내리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지만, 어쩐지 눈을 뗄 수 없는 광휘였다.
“마침내 차원을 넘어선 의지여.”
다른 세계의 자신에게 맞닿을 때와 분명 똑같은 감각.
그러나 빛 속에 깃든 거대한 존재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기운은?”
“당신의 의지는 언제나 절 놀라게 하는군요.
고귀한 헌신에 감사하며, 새로운 지혜를 전해드립니다.”
순간 차원 너머의 틈을 통해, 일곱 천사의 정수가 플레인 : 엔젤리카로부터 전해져왔다.
많은 부분이 유실되긴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기운.
그녀의 등에서 돋아난 일곱 장의 날개가 포근하게 그녀를 감쌌다.
“하지만 태초의 지혜시여...
짊어진 사명을 완수하기엔 제가 아직 부족합니다.”
잠시의 침묵이 이어진 뒤,
빛에서 흘러나온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친 그녀의 마음을 달래듯 어루만졌다.
“굳건한 믿음과 강인한 의지로 전장의 맨 앞에서 모두를 이끌어 온 건 바로 당신이에요.
마지막까지 주어진 사명을 포기하지 마세요.”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결연한 표정을 지은 그녀의 등에서 돋아나는 여덟 번째 날개.
초월자의 힘을 받아들여 오롯이 자신의 신념으로 발현한 믿음의 증명.
메타트론의 날개가 차원을 넘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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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물론 내 자신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미련해 보일 정도로 직선적인 전투 방식.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수많은 방법을 고민했다.
거대한 손이 온몸을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을 참아내며 끝없이 도를 휘둘렀다.
혹사당한 육체가 피를 토해낼 지경이 되어서야,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잠시 멈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바닥을 적신 붉은 피.
그동안의 전투가 머릿 속을 스쳐갈 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 때, 차원을 넘어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
진정으로 강해지고 싶다는 의지에 반응한 것일까?
다른 차원에 맞닿은 내 자신의 목소리들이 몸 안에 흐르고 있는 용족의 피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목소리들은 강력한 서약이 되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용혈(龍血)에 깃들었다.
서약은 용왕으로서의 권능보다 더 내밀하고 원초적인 용족의 감각들을 일깨웠고
아스트라의 숨결이 쥐고 있던 태도를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돌고돌아 기나긴 여정의 출발선을 다시 밟은 기분이었지만, 별로 나쁘지 않았다.
나는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울부짖는 아스트라의 등에 올라타 녀석의 뿔을 쓰다듬었다.
이 고민이 도착할 수 있는 종착역은 애초에 하나였다.
더 강한 힘으로 무자비한 공격을 적에게 선사하는 것.
적들은 나라는 발톱으로 인해,
용족이라는 이름의 공포를 흐르는 피 속에 다시 되새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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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높은 탑, 두 남자가 잠시 멈춰 섰다.
정적이 싫었는지, 혹은 그저 궁금해서였는지 젊은 남성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떠셨습니까?”
“가장 태산에 어울리는 자였네.”
무심한 듯 대답을 내뱉는 늙은 남성을 보며 젊은 남성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엄청난 투지를 가지고 있는 자라는 것은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태산이라...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다.
늙은 남성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꺾이지 않은 자가 있었던가.
“당신이라면 태산마저도 베어 넘길 수 있지 않으십니까.”
“하여 베었네.”
휘어지지 않는 자는 결국 부러지기 마련이고, 자칫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러한 성향을 굽히지 않았던 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말로를 맞이했다.
“이번 비무를 계기로 그는 유연함을 배웠겠지요.”
“묻겠네. 그의 흉물스러운 마창이 어떻게 느껴졌나?”
젊은 남성은 그가 끝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마창을 떠올렸다.
어찌 잊겠는가. 마치 혼자서라도 싸울 듯 쏘아대는, 주인마저 잡아먹을 듯한 그 흉흉한 기운을.
“다시 묻겠네. 그에게 유연함이 필요해 보이나?”
이미 확정된 패배 앞에서도 오기에 가까운 투기를 형형하게 뿜어냈던 자.
그리고 그가 쥐고 있었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했던 마창.
그가 이번 패배를 계기로 한층 더 단단해지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마창을 뛰어넘는 때가 온다면.
깨달은 듯 잠깐 눈을 휘둥그레 뜬 젊은 남성이 픽 웃어 보였다.
“비무가 아니라 재련(再鍊)을 하셨군요.”
늙은 남성이 말없이 몸을 휙 돌렸기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젊은 남성 역시 그의 뒤를 따랐지만, 머릿속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장면을 계속해서 상상해냈다.
전장을 가로지르며 천멸(踐滅)의 마창을 휘두르는 불사자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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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자 휘두르는 창이었다.
무엇이든 좋았다. 어떻게든 과거를 떨쳐내고 싶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은 창을 휘두르는 것뿐이었기에 수천, 수만 번 창을 휘둘렀다.
그리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들조차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뿌리박힌 작은 씨앗은 여실히 나의 창술로 발현되었다.
얄팍하고 가벼운 창이었다.
짊어진 무게조차 깨닫지 못한 창이었다.
죄책감이라는 말로 그럴싸하게 감정을 포장하여 속죄라는 상자 속에 넣어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죄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속죄라는 신기루를 좇아 수없이 창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의 창에서 죄책감의 무게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오랜 시간 도망친 끝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리도 쉽게 그들을 잊어선 안된다.
모두가 잊더라도 나는 결코 그들을 잊어선 안 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죽음을 오롯이 나의 창 위에 올려놓는 것.
그리고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이 창의 무게를 견뎌내겠다.
그토록 도망치고자 발버둥쳤던 그들의 무게를 창에 담는다.
날카롭게 창을 휘둘러본다.
수많은 신기루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것은 나의 모습인가. 그들의 모습인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들의 삶을, 죽음을, 이름을, 모든 것을 이어받은 자.
창은 여느 때보다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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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한 사냥꾼일수록 모든 상황을 자신의 통제하에 놓는다.
사냥감이 어떻게 공격해올지, 어느 방향으로 도망칠지,
언제 사냥감의 숨통을 끊을지, 흡수한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모든 것은 계획하에 실행하고 그래야만 완벽하게 사냥감을 제압할 수 있다.
이 힘은 지금 다루기엔 너무 위험하다.
완벽하게 다룰 수 없다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것이 폭주했던 동료들의 의지를 잇는 길이다.
결국 사냥꾼은 스스로 만든 한계에 갇히고 말았다.
밝은 달이 어쩐지 처량하고 외로워 보였다.
창끝이 떨려왔다.
한 번의 패배를 겪었다.
일말의 아쉬움도 남지 않는 압도적인 패배를.
그제야 사냥꾼은 공포에 먹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과신했던 사냥꾼의 감각이 오히려 몸을 둔하게 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통제코자 하는 오만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새로운 사냥을 시작하기 위해선 그토록 버리고자 했던 초심자의 무모함이 필요했다.
사냥꾼은 말없이 창을 움켜쥐었다.
피할 수 없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냥을 준비해야만 했다.
사냥꾼은 오랜 시간 여러 마수를 먹여 탐스럽게 살을 찌운 씨앗을 내놓았다.
마수의 왕이 그토록 삼키고자 했던 먹음직스럽고 거대한 기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미끼였지만, 실패한다면 사냥꾼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한 미끼.
배수의 진이었다.
씨앗에 다가온 마수의 왕은, 레비아탄의 기운은 거리낌 없이 씨앗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사냥꾼은 그저 가만히, 조용히 씨앗을 먹어 치우는 레비아탄의 힘을 바라봤다.
예민한 사냥꾼의 감각으로 실마리를 찾아 헤맸다.
노련한 눈썰미로 두 힘의 연결고리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사냥꾼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찾았다.”
적막한 어둠으로 가득 찬 밤, 찬란한 붉은 달이 사냥꾼을 비췄다.
충만한 마수의 힘이 갑주와 투구 사이로 넘쳐흘렀다.
합쳐진 힘으로 벼려진 등 뒤의 창들은 마치 별을 수놓은 듯했다.
눈부시도록 사나우며, 절제있는 날카로움을 간직한 빛.
마치 레비아탄의 재림이었다.
고요한 창끝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던 사냥꾼은 입을 열었다.
“사냥을 시작한다.”
붉은 달의 사냥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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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별조차 뜨지 않는 밤.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어둠을 보았다고 생각하나?
네가 본 어둠은 그저 빛의 부재일 뿐.
나의 어둠은 공간을 왜곡하는 힘이자
존재를 잠식하는 권한이고
빛을 물들이는 저주이면서
어둠마저 삼켜버리는 역병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無)에서조차 퍼져나가는 권능.
어둠이 엄습하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무지한 놈아.
심연을 쳐다보면서 심연이 널 보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니.
이미 목까지 잠식되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겠지.
무엇으로도 볼 수 없을 테니, 공포에 몸서리쳐라.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고통에 몸부림쳐라.
네놈이 살고자 발버둥 칠수록 수렁은 널 더욱 깊이 끌어당길 테니.
그러다 지쳐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마침내 너의 힘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울 것이다.
잠식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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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들이 어둡군. 혹시 내 설명이 부족했나? 빌, 브랜드.”
남자의 말이 끝나자, 세 사람이 모여있던 실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빌이었다.
“확실히 우리가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을만큼 어렵겠지만,
구현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조직 전술이 되겠군. 헌데...”
빌이 잠시 말을 멈추자, 브랜드가 기다렸다는 듯 빌의 말을 이어받았다.
“이 전술이 작동하려면 검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하네.
그것도 나나 빌 정도가 아닌 보스와 비슷한 수준으로.”
두 사람의 반응에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무언가 대꾸하려고 할 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총탄 소리를 확인한 브랜드가 굳은 표정으로 무전기를 집어들었다.
[보스! 수상한 자가 그곳으로-]
무전기 너머로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정적이 감돌던 문 밖에서 잠시 후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지만, 노크 소리의 주인공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태연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온 이는 낡은 장도 하나를 등에 걸친 중년 여성.
빌은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고
브랜드는 문 밖에 기절한 대원들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력이 예전 같지 않을줄 알았는데... 괜한 걱정이었구만.”
“무슨 소리야? 예전 같았으면 선배도 알아보지 못한 녀석들에게 겨우 저 정도 교육으로 끝나진 않았겠지.”
“그야 어쩔 수 없지 않나. 롤랑, 당신이 너무 오래 현장을 떠나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보스가 호출한 건가?”
“물론이지. 우리 ‘자기’가 아니라면 누가 다시 나를 부를 수 있겠어?”
롤랑의 시선이 남자를 향했지만, 그는 굳은 표정으로 침묵했다.
남자의 표정을 살피던 그녀가 한숨 쉬듯 말을 이었다.
“여전히 딱딱하긴. 농담이니까 표정 풀어. 하여간 그녀가 아니면...”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반갑군.
그렇지만 예전 추억은 나중에 얘기 하도록 하지. 당신을 부른 건-”
남자의 설명이 이어지자,
롤랑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은 놀람에서 경악으로 그리고 다시 흥미로움으로 변해갔다.
“...그렇군. 결국 나보고 이 ‘D.Tactics’인지 뭔지하는 전술의 두번째 날개가 되어달라는 거네.
은퇴한 히트맨에게 맡길 초과 근무치곤 업무가 조금 과중한데?”
롤랑은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빌과 브랜드는 그녀의 속마음이
이미 승낙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깨닫고 슬며시 미소지었다.
“아니, 그보다 이렇게까지 준비해서 부딪혀야 하는 상대는 도대체 누구지?”
롤랑의 질문에 남자는 대답 대신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혼들이 모여 만들어진 날개가 다시 날아오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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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사실인가?”
그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장소에 있던 것처럼 나타났다.
한밤 중, 뒷골목 깊은 곳에 모여 무언가를 모의하던 이들은
갑자기 등장한 남자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스승’의 흔적을 지우고 다니는 녀석들이 있다는 얘기 말이다.”
날씨라도 묻듯,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
남자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대답 대신 퍼부어진 총탄 세례의 범위를 가볍게 벗어나있었고
망설임 없이 휘둘러진 남자의 검이 어두운 색감의 궤적을 그렸다.
자신이 그려낸 어두운 검기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
그는 어느새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의 등 뒤를 점하며
확인이 끝난 임무 수배서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이내 찾아온 것은 밤하늘의 달이 어디론가 진 것 같은 완전무결한 어둠.
이따금 번쩍이는 총탄과 칼빛.
그 때마다 죽음을 암시하는 단말마가 울려퍼졌으나, 곧 잠잠해졌다.
마지막 단말마가 어둠 속으로 잦아들자
다시 떠오른 달빛 아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임무라...”
현장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깨끗하게 처리한 남자는
습관처럼 회중 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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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냐고?
거참, 너무 막연한 질문이라 어디서부터 대답해줘야할 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처음 시작은 달빛주점의 바 테이블 앞이었던 것 같군.
싸움에서 진 뒤에 마시는 술이었지.
술은 언제나 맛있지만, 유난히 맛이 덜 느껴질 때도 있다는 걸 알았다네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쓰게만 느껴지고, 취하려고 할 수록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지.
근데 계속 마시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 뭐 살다보면 질 수도 있지. 다음 번엔 이기면 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술맛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 의욕이 생기더군.
그길로 새벽부터 마가타에 올라타 화력을 강화할 방법을 찾기위해 천계 전역을 돌아다녔지.
불안정한 폭탄을 취급하는 서부 무법지대의 카르텔 잔당들부터
엘리트들이 모인 이튼 공업지대의 발전소들, 그리고 사도 루크의 기술력이 집약되어 있다는 죽은 자의 성까지...
그렇게 새로운 화기를 손에 넣기 위해 미친듯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부턴가 주변에선 나를 ‘하드보일드’라 부르더군. 뭐, 나쁘지 않은 별명이야.
그리고 수많은 시도 끝에, 하나의 탄두에 여러개의 CTF(Crisis Terminate Flame)를 장착한 이 물건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
딱히 새로울 것은 없지만, 기존의 화약들을 압축해 더 가볍고 몇 배는 더 강력하게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게 된거야.
응? 저 트랩은 뭐냐고?
하하, 이런 위험한 물건을 아무데서나 뻥뻥 터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또, 화력이 아무리 강해도 상대가 폭발 반경에서 도망친다면 열심히 설치한 화약들이 폭죽 놀이가 되어버린단 말이지.
저 화약들을 발동시키면서 트랩 속을 빠져나갈 방법이라...
글쎄, 이건 저 무법지대의 폭주족 녀석들에게서 얻은 영감인데, 생각처럼 잘 될지는 모르겠군.
뭐 이제 시운전을 해보면 알 수 있겠지. 잘못 되어봐야 죽거나 다치기밖에 더 하겠어?
그러니 자네는 너무 겁먹지말고 여기서 폭발 반경과 세기나 잘 측정하고 있으라고.
- 眞 트러블 슈터, 폭파 실험장의 과학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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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무언가를 찾던 남자가 발견한 것은 허공에 떠있는 두 개의 코어뿐이었다.
고개를 회회 저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어떤 사실을 깨닫고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군! 드디어 공간을 구축하는데 성공한건가?”
남자의 오랜 바람대로 코어 에너지로 만들어진 특수한 공간이 그의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품에 지니고 있던 코어 블레이드와 코어 피스톨을 꺼내들었다.
손때 묻은 무기들은 그의 가설을 실험해볼 수 있는 모습으로 개량이 끝난 상태였다.
“어떻게 공간 구축에 성공한 건지, 당장이라도 돌아가 실험 데이터를 되짚어 보고싶지만...
어찌됐든 지금이 축퇴로에 대한 내 이론을 증명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겠지.”
생각을 마친 남자는 곁에 있던 코어 블레이드를 힘차게 땅에 꽂고
코어 피스톨의 동력원을 꺼내어 코어 블레이드의 손잡이 끝에 장착했다.
곧 주변 대기가 요동치며, 고밀도의 에너지에 의해 전개된 코어 블레이드의 날 부분이 점점 검붉은 빛으로 변해갔다.
굳이 측정해보지 않아도 코어 에너지가 미친듯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눈으로 알 수 있는 현상이었다.
“으윽!”
손잡이를 잡자 남자의 두 손에서 연기가 피어났다.
보호 장갑을 착용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고통.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운용되는 에너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내 이론은 틀리지 않았어.”
다음 순간, 남자의 손에서 블랙홀 에너지를 한껏 방출하고 있던 코어 블레이드가
지평선을 따라 가로로 크게 휘둘러지며 코어 에너지로 만들어진 공간을 산산조각 내었다.
그의 주변을 맴돌던 두 개의 싱귤래리티 코어만이 무언가의 눈처럼 그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접기
"무딘 칼날이었군."
그의 한마디는 천금같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두 자루의 검을 품은 이후로 망설임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복수라는 정당한 분노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냈고 적들은 칼날 아래 침묵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피어오르는 붉은 꽃망울은 피로 얼룩진 복수의 길을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패배했다.
거침없이 폭주했던 분노는 담담하게 내려치는 일격과 함께 격류에 휩쓸리듯 사라졌다.
비수처럼 예리하게 벼려냈던 감각은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었고,
당대의 강자들을 무릎 꿇렸던 기술도, 원수를 찌르기 위해 길게 벼려낸 칼날도 어느 하나 그에게 닿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미련 없다는 듯이 돌아보지 않고 무심히 멀어져만 갔다.
결국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목숨보다 소중하게 품어왔던 두 자루의 검은 패배의 증거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고,
복수를 품었던 마음은 그보다 더 처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복수에 눈이 멀어 돌아보지 못하는군요."
갑작스레 파고드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조바심을 거두십시오."
흑발의 남자가 바닥에 나뒹굴던 두 자루의 검을 건네왔다.
"부러진들 어떻습니까?"
'부러져도 괜찮단다'
언젠가... 자신의 검을 건넸던 그 사람이 겹쳐 보였다.
그래서일까,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검을 움켜쥐었다.
"이미 멋진 검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멋지게 다시 태어나지 않았느냐?'
검을 움켜쥐고 있는 손이 떨려왔다.
"당신은 이미 길을 찾았습니다."
'너의 길을 찾았구나. 딸아.'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두 자루의 검을 버팀목 삼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카락이 볼썽사납게 흐트러져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흑발의 남자는 만족한 듯 웃고는 몸을 돌려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소녀는.
아니, 그녀는.
여느 때처럼 검게 칠해진 안경을 고쳐 쓰고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새로운 한 발을 가볍게 내디뎠다. 이번에는 틀리지 않겠다는 듯이.
처음으로 돌아간다. 한 자루의 칼날이 되기 위해서.
- 블레이드(Bl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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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최신 무기들에다 그동안 적들에게 얻은 전투 데이터까지?
에를록스를 이을 새로운 함정(艦艇)이라도 만들 셈이냐?"
"더 강력한 기술들이 필요해."
화면 너머의 멜빈은 여전히 한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 중얼거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머지 다섯 녀석의 힘을 모두 빌리겠다니...
네 개인적인 연구에 너무 과도하게 빠진 게 아니냐, 꼬맹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야."
착 가라앉은 멜빈의 목소리가 홀로그램을 통해 흘러나왔다.
멜빈을 오랫동안 봐온 메릴은 그의 눈동자가 지금 어느 때보다 이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젤 녀석 때문이냐?"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메릴의 시선을 피해, 잠시 창밖의 하늘을 바라다보던 멜빈은
한참 뒤에야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븐 샤즈(Seven Shards)의 일은 우리 안에서 마무리 지어야지."
메릴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멜빈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알던 누군가의 눈빛을 떠올렸다.
명확한 목표와 그것을 실현할 자신감이 느껴지는 눈빛.
신념에 찬 사람들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듯 말을 내뱉었다.
"나엔과 페럴은 내가 설득하지. 나머지 녀석들은 네가 직접 연락하도록 해.
젊은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역시 피곤하단 말이야."
"고마워, 할멈. 그걸로 충분해."
몇 가지 당부를 마치고 통신을 종료하려던 메릴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멜빈에게 던졌다.
"그런데... 그런 어마어마한 기술들을 한 사람이 전부 다룰 수 있을까?"
"녀석이라면 가능해. 그리고 이 힘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획을 그은 것처럼 멜빈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그려졌다.
"적들에게는 '절망'(Desperation) 그 자체로 느껴지겠지."
연단된 칼날인가…
진정한 각성 (4/4)
<퀘스트 완료>
…그래… 그 눈빛을 보니 원하는 걸 손에 쥐었나 보구나.
지금 너의 모습을 보니 이제 나도… 아젤리아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솔도로스 님이 모험가님만을 기다린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아젤리아 님도 웃으셨던 거겠죠? 지금, 이 순간을 이미 알고… 흑…
꼬맹이, 그만 울어. 슬퍼하지 않아도 돼.
우리의 역할은 끝났어.
정말로… 전부…
그러니 이제 돌아가자. 돌아가서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자.
그렇게 하자.
정말 솔직하지 못한 아저씨네. 나보고 울지 말라면서…
모험가님, 우리는 다시 젤바로 돌아갈 거예요.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갈 거예요. 모험가님도 자신의 길로 향하세요.
서로 다른 길이라도 흔들리지 않고 길을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그 끝에서 다시 마주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모험가님의 앞길에 아젤리아 님이 남긴 축복이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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