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 도감

검은 질병의 흔적
탄생의 기쁨으로 태어난 자여.
탄생의 증오로 태어난 나를 부정할 것이냐.
삶으로 죽음을 가리려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똑똑히 보아라.
나의 질병들은 너에게 늘 죽음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켜 줄 것이니.
잊지 마라. 언제나 너의 곁에 내가 있을 것이다.

해방된 전설
억울하게 희생된 혼들의 이야기는 이제 새롭게 각색된다.
한때 그들의 힘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누군가의 보구가 되어,
직접 사용자를 연단하고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그들의 힘 또한, 이제는 한 때의 과거에 머무를지니.
그렇게 지나간 모든 것들은 어느새 전설로 다시 해방된다.

무한한 탐식
기나긴 세월을 사는 것은 조금 특별한 일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이 끝나버리는 것을 지켜보는 일.
나는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 조금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었다.

무언의 건설자
헤블론의 왕, 빛과 어둠의 군주인 이 루크가 그렇게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예언이다.

나는 죽지 않겠다.
예언을 바꾸리라.
예언이 틀림을 증명하리라. 

무형의 씨앗
그럼에도 너는 살고자 한다.
정신이 담길 그릇을 찾아 오래 떠돈다. 오래, 더 오래 떠돌며
너는 생각한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되찾으리라.
홀로 받은 것을 되갚으리라.
무(無)가 되었으니 형(形)이 되리라.
모든 시간에 존재하리라.

불의 현신
애쉬코어는 다시 한번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역시나... 바칼 님께선 나의 힘을 눈여겨 보고 계셨다!

“후후후... 빨리 가자고. 바칼 님을 기다리시게 만들 순 없지!”

끝없는 마지막 결투
익숙한 기계의 기동음이 또다시 들려왔다.

아아... 저 녀석도 또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겠지.

이트레녹은 높이 도약했고, 이내 지축을 뒤흔들며 또 하나의 고철을 만들어 냈다.

제발, 부디 여기로 오너라. 낯선 곳에서 온 자들아.

내가 기다린 만큼 너희는 날 즐겁게 해주어야 할 테니.

눈부신 이면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이 좋습니다.
무식하게 힘만 내세우는 강함보다는, 한 단계 높은 차원의 힘이 더 아름답습니다.
당신들은 무엇이 그리 떳떳하죠?
하찮은 기계들로 나에게 덤벼봤자 소용없는 일.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는 거죠?

고요한 어둠
부나방 같은 것들.
그저 달려들 뿐인 것들.
영원한 불꽃?
그러나 여기 어디 빛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이곳은 암흑의 땅이고, 곧 죽음의 숲이야.
침묵만이 가득한, 나의 소중한...

꺼지지 않는 불꽃
“준비되었습니다.”
로자의 말에 이리네는 눈을 감았다.
방금 바라본,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두려는 듯.
지금까지 희생한 사람들과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순간에도 바칼의 곁에서 목숨을 걸고 있는 사라까지 떠올렸을 때, 다시 눈을 떴다.
이제 필요한 모든 조각이 준비되었고, 그렇기에 이 전쟁은 승리해야만 한다.

마지막 불의 숨결
'이제 그 날카로움으로...'
'힐더를 꿰뚫어라.'
그 순간, 왕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뜻을 이해한 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천 년을 타오르던 불꽃의 숨은,
단 하나의 불씨도 남기지 않은 채 영원히 멎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태초의 공포
눈을 뜬 니콜라스 앞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 아주 깊은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듯한,
마치 태초의 공포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공포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존재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의 주인
칼날이여.
시련으로 연단된 칼날이여.
어찌 그대의 자격이 부족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그대의 업보는 더욱 무거워질 것이니.
이제 스스로 검을 쥐고 왕의 자격을 증명하라.

근원적인 심연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누구든 홀려낼 세치 혀인가?
가려진 것을 찾아낼 눈인가?
절대 마르지 않는 힘인가?
내 힘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나를 인도해라.
텅 비어버린 네놈의 그릇을 나의 힘으로 가득 채워라.

위대한 마법
내가 이렇게 소리를 내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계획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본다는 핑계였지만,
사실은 거대한 힘 앞에 초라한 자신이 느낄 두려움을...감추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톱니바퀴의 틀은... 이제야 완성되었네."
"이제 우리가 기다리는, 그 운명의 톱니바퀴를 끼우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 톱니바퀴가 어떤 운명을 향해 맞춰 돌아갈지..."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인도하는 지혜
“그분이야말로 태초의 빛
모든 우주의 진실된 주인,
만물의 근원이자... 위대한 의지”
온 세상이 혼탁한 기운에 물들어 태초의 빛을 잃어갈 때에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부정한 기운이 먹물처럼 번져갈 때에도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바다 건너 외로운 섬
감시자의 마을에서 태어난 이들은 대부분 한평생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
물론 이따금 어업을 통해 얻은 것들을 거래하기 위해 마을을 나서거나
백해의 가장 번성한 도시인 청연을 구경하러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길지 않은 기간 내에 마을로 다시 돌아오며,
거주지를 옮기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마을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외로운 섬을 건조한 시선으로 관찰하며,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뿐이다.

안개의 감시자
딱 한 번.
브림은 어릴 적에 부모님과 함께 청연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유독 짙은 안개가 끼인 날이었지만 '안개의 도시'라는 이명처럼 청연의 전경은 아름다웠고,
백해의 중심이자 안개신을 모시는 곳인 '아스라한'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장엄했다.
비공정 센터의 날씨 알리미가 안개 고원의 이상 기후에 대한 안내 방송을 하고 있을 때,
브림은 도시에 끼인 안개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동시에 주변의 안개들이 살아있는 듯 움직여 그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내면에서 치솟는 뜨거움과 피부로 느껴지는 서늘함.
브림은 그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발버둥 쳤다.
영원 같던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브림은 안개 속에서 자신이 무언가 다른 존재로 거듭났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축복일지 저주일지는 아직 알지 못한 채로.

신의를 저버린 자
믿음, 신뢰, 신념.
인간들이 이런 단어를 말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가면을 망각하고 실소를 지었다.
그가 처음 마주했던 세상, 환란의 땅은 어두운 하늘 아래 생존 아니면 죽음만 허락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그가 살아남은 방법은 바로 감정의 틈을 가차 없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필요한 순간에 버리는 것. 바로 배신이었다.
배신의 힘은 아무리 강한 자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당연히 인간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각자의 입장을 위해 서로를 속이고 있으니...
이 반쪽짜리 모습으로 모든 걸 지켜보는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배신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아직 때가 아니기에, 그는 헤픈 웃음으로 자신의 민낯을 감췄다. 

환란의 요괴
라르고는 매일같이 상상했다.
어둑섬의 물길이 열리고 환란의 땅의 요기가 섬을 가득 메우게 될 날을.
섬을 시작으로 백해 전역이 요기로 물들기를.
그는 매일 같이 바랐다.
수많은 이들이 요기에 잠식되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 속에 잠기기를.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오랫동안 교묘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움직여 왔다.
마침내 오랜 바람이 이루어질 때가 왔다.

불신위괴
그의 계획은 가히 성공적이었다.
정체를 드러낸 이상, 더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채 삼키지 못한 강력한 힘은 온몸을 터뜨릴 듯 요동치고 있었다.
이젠 정말 끝을 낼 때란 생각에 라르고는 혼신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백해와 환란의 땅은 마침내 연결될 것임을 확신하며
라르고는 희열에 가득 찬 웃음을 토해냈다. 

각인된 상처의 꿈
기억하진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순간,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장면들...
그곳에서 난 무엇을 했을까... 그곳은 어디일까?
그건... 나였을까?

불타는 고난의 꿈
그리지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기억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싸워왔어.
끝없는 싸움에서 깨달은 건...
너무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그런 기억이,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한다는 사실이야.
가장 아프고 두렵지만, 사라져서는 안 될 꿈이야...

그늘진 새벽의 꿈
어떤 순간에도 놓지 말아야 할 기억...
나로 인해 모두가 고통받는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마이어, 만약 그때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겠죠.
...이제는 당신이 없더라도.
절대 그런 일은... 다시는, 나는... 

오염된 눈의 꿈
나로부터 시작된 것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건 정말 두려운 일이야.
지금의 조화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안개는, 모든 것을 감싸주면서도 모든 것을 눈 멀게 하니까...

따뜻한 봄 날의 꿈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은 절대로 거창한 것들은 아니었어.
포근한 바람과 푸른 땅, 걱정 없이 어우러지는 모든 것들, 그들이 내는 조화의 노랫소리.
이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에겐 가장 소중한 꿈이야.

안개의 신, 무
마이어.
당신이 말해 주었던 사람이 마침내 선계에 도달했어요.
당신이 남들보다 먼저 내딛은 걸음은... 드디어 다음 걸음으로 이어졌군요.

그 사람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잘 알고 있었어요.
스스로 내딛는 걸음에 주저함이 없는 모습에서 그것을 알 수 있었죠.
망설임 없이 앞으로 향하는 그 사람에게서 잠시 당신의 모습이 보였어요.

마이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었을까요?
아니겠죠.
그저... 믿었을 거예요.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누군가는 반드시 당신의 걸음을 이어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그러니, 저도 그 사람을 믿어요.
당신의 뒤를 따라, 당신의 걸음을 이어 앞으로 나아가는 그 사람을 믿겠어요.

그렇게...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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