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99 / 그림: Raten
깊게 들이켠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짰다. 이곳의 바다는 선계의 바다와 뭔가 다른 걸까?
웨스트코스트.
항구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박해 있는 수많은 배들 사이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치 소문으로만 듣던 청연의 항구를 보는 것 같았달까?
다만 청연과 다른 점은 이 배들이 모두 바다 위에 떠 있었다는 거다.
그래, 하늘이 아닌 물 위! 정말 놀랍지 않은가?
아주 오래전, 베르너 님이 비공정을 발명하기 전에는
선계에도 배들이 바다 위를 항해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듣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니까.
하루 종일 부두에서 별자리 항로가 아닌 물길을 따라 움직이는 배들을 구경하다 보니,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이라도 온 듯한 느낌이었다.
새삼 내가 떨어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실감이 났다.
‘바깥 세계’
전설로만 듣던 바깥 세계라니...
공해의 밑바닥을 빠져나와, 처음으로 땅에 발을 디뎠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안티엔바이를 찾아 내려온 여행이었지만, 여행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보고 들은 것의 기록이기에
나는 이곳에서의 나날을 빠짐없이 일지에 기록하기로 했다.
어느 곳을 가든 무엇을 발견하든, 여기선 내가 핀더 님처럼 최초의 개척자가 될 테니 말이다!
“이봐, 길 한복판에서 막고 있지 말고 저리 비켜!”
날 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검은 피부에 뾰족한 귀가 시야에 들어왔다.
베히모스에 오를 때 만난 카곤이란 이름의 흑요정이었다.
양손 가득 공구를 든 그는 짜증이 잔뜩 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모험가잖아? 아까부터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건데?”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서 애매한 표정으로 웃고 있으니,
카곤은 내가 그리던 그림을 보고 그 이유를 추측하는 듯했다.
그리곤 왠지 잘 됐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흐음~ 마가타를 관찰하고 있던 거야?
하긴, 저번에는 너무 바빠서 제대로 구경할 여유가 없어 보이긴 했지.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여유 있게 타보는 건 어때? 오늘만 특별히 할인가에...
뭐? 너무 비싸다고? 어허~ 비싼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흑요정 최고의 마가타 조종사인 이 카곤 님의 운전 실력은 차원이 다르다고!”
밤하늘의 별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오랜만에 발아래로 지나가는 구름을 보니 짜릿한 기분마저 들었다.
장담한 대로 카곤의 운전 실력은 정말 끝내줬다.
그가 모는 마가타는 남달급 비공정 정도의 크기였고, 미스트 엔진도 없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원리로 하늘을 나는 건지 물어보니 흑요정들의 마법 덕분이라고 했다.
자세한 건 영업 비밀이라 알려줄 수 없다나?
귀찮다는 그를 졸라 하루 종일 비행해본 뒤에야 비공정과의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며칠씩 이어지는 장거리 항해에는 적절치 않고, 많은 인원이나 물자를 한꺼번에 실을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한 번 운행을 마치면 길든 짧든 꼭 정비를 해줘야 한다는 것.
“너... 골드는 더 필요 없으니, 이제 그만 내려주라.
이 녀석도 보기보다 섬세한 물건이라서 이만큼 탔으면 좀 쉬어줘야 한다고.”
어느새 다가온 카곤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남들에게는 퉁명스러우면서, 자기 마가타만큼은 어지간히 걱정하는 말투였다.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흐느적거리며 어디론가 멀어져 갔다.
아마 애지중지 여기는 마가타를 정비할 부품들을 찾으러 가는 거겠지.
조금 아쉬웠지만 입맛을 다시며, 나는 다른 마가타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야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카곤이 내려준 곳은...
내가 출발했던 웨스트코스트 항구가 아니었다!
커다란 쇳덩이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다 눈앞에서 갑자기 몸체를 멈췄다.
와중에 일어난 바람이 머리를 헝클였고, 엄청난 소음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그럼에도 난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쇳덩이가 완전히 멈추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자,
기다리던 이들이 교대하듯 비워진 내부에 일제히 올라탔다.
몇 번이나 본 광경이었지만, 해상열차의 운행은 보는 이의 시선을 끄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이보쇼, 거기! 탈 거면 냉큼 타고, 안 탈거면 위험하니까 물러나쇼!”
관리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크게 손짓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 비장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응? 누군가 했더니 나리셨구먼?
요샌 아래 세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는 얼굴이 와도 잘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소.”
앞으로 다가온 베른은 내게 빈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다가,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입구에서 산 표를 건넸다.
“흠, 이튼 공업지대라... 칙칙한 곳으로 가시는구먼?
여행 온 거라면 더 좋은 곳들도 많을 텐데.
따라오쇼! 내 어느 열차인지 안내해줄 테니.”
베른은 계속 중얼거리며 요즘 서부선의 상황이 어쩌니, 어인들의 출몰이 저쩌니하는 말들을 꺼냈다.
처음에는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들이었지만,
그의 말솜씨 덕분에 곧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와의 수다에 빠져들었다.
“자, 이튼행 열차는 이쪽이오. 각지를 여행하는 중이라고 하셨던가?
그렇담 좋은 것도 많이 보고, 맛있는 것도 실컷 먹고...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라겠소, 나리!”
몸을 실은 해상열차가 밤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갑판에 드러누워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선 보일 리 없는 천해천의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유섬 위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익숙하고 낯선 별들이 뒤섞인 하늘.
그렇게 한참을 멍때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곳에선 들릴 리 없는 어이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다는 자신만의 별.
남들이 보기엔 옆에 있는 별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그 별이
나에게만 특별하게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이 올 거라고.
여행자라면 어디에 있든, 언제나 자신만의 별을 찾는 꿈을 꾸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말이, 누워있는 곳이 바뀌니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그래, 어쩌면 선계의 하늘에서 발견하지 못했을 뿐.
나만의 별도 이곳 어딘가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열차의 덜컹거림이 심해지더니 점점 속도를 줄이는 게 느껴졌다. 아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이곳에서의 여행도 즐거웠지만, 안티엔바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서서히 멈추는 열차의 진동을 느끼며, 나는 밤하늘 한쪽에 그림처럼 매달린 거꾸로 된 성을 바라보았다.
“여행? 먹고 살기도 바쁜 마당에 무신 놈의 여행이여.”
‘펌킨 볼’이라고 이름을 밝힌 수인이 쓰레기 더미 위에 누워 말했다.
바쁘다는 말과는 달리 세상 누구보다 느긋한 표정이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여~ 젊었을 때야 그런 게 멋있어 보일지 모르겠지만서도.
조금 냄새나는 동네긴 해도 할렘에선 여기만큼 편한 곳이 없어.”
펌킨 볼은 말할 때마다 고개를 들어 냄비를 힐끔거렸는데,
그때마다 냄새를 맡는지 양 볼에 난 수염이 씰룩거렸다.
그를 처음 봤을 땐 어찌나 놀랐던지...
저런 모습만 아니었다면 난 이곳에도 깨어난 숲처럼 신수들이 태어나는 장소가 있다고 믿었을 거다.
“근디~ 그건 무슨 요리여? 여기서는 영 처음 보는 방식 같은디.”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냄비에 들어간 재료들을 바라보았다.
조리법은 어이님이 알려주신 선계의 방식이었지만,
들어간 재료는 모두 바깥 세계로 떨어진 뒤 얻은 것들이었다.
원래라면 검은 들풀 평원에서 공수한 검은 밀이 들어가야 했지만,
아라드의 밀란 평원에서 나고 자란 밀을 넣고
물프레 군도의 말린 해초 역할을 할 히링 제도의 해초들과
뿔 사슴 평야의 꽃과 약초를 대신해 센트럴 파크에서 채집한 잎사귀들까지.
펌킨 볼은 끓고 있는 냄비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리에서 풍기는 냄새가 나쁘지 않았나 보다.
“으잉? 뭣이여? 이만큼이나 준다고?
아니, 꼭 얻어먹으려고 붙어있던 건 아니었는디...”
스튜를 그릇에 덜어 먼저 권하자, 펌킨 볼은 머쓱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굉장히 귀한 것을 마시듯 양손으로 그릇을 들어 올렸다.
입맛에 잘 맞을까? 나는 내심 긴장하며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을 꼭 감고 그릇을 비운 그는 한참이나 입맛을 더 다신 뒤에야 작은 눈을 뜨며 말했다.
“뭐랄까... 몸과 마음까지 회복되는 맛이구먼.”
물론 음식을 대접한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과 함께였다.
“이런 것도 다 여행에서 알게 된 겨?
으음... 이런 요리들을 만날 수 있다면, 가끔은 여행을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먼.”
나는 그 말에 배시시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냄비에서 나는 연기를 따라, 어느새 주변에서 새로운 인연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불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은 모습을 보니, 별마로에서 유랑에 가입하고 처음으로 요리를 해 먹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스튜를 더 끓여야 할 것 같았다.
재료를 더 꺼내기 위해 가방을 열며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비록 아직 안티엔바이를 찾진 못했어도, 좌절하고만 있기엔 내게 주어진 행운이 너무 많고
이 즐거운 여행은 내가 포기하기 전까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란 걸 말이다.
진정한 각성 (1/4)
<퀘스트 완료>
오셨군요. 모험가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정한 각성 (2/4)
신궁 루드밀라와 대화하기
(해당 퀘스트는 세인트 혼의 신궁 루드밀라를 통해 `에피소드 전용 마을`로 이동하여 수행 가능합니다.)
진정한 각성 (3/4)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라드에 처음 발을 디뎠던 곳이 나올 거야.)
(루드밀라 님의 말처럼 하룻밤 정도는 여행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도 좋겠지.)
역시, 정확히 꽂히지 않네.
활과 여행이라... 너무 먼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장작을 휙 던졌다. 흩어지는 불씨와 함께 타닥타닥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차가운 몸 사이사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모닥불 위에 올려 둔 냄비 물도 조용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인생 뭐 있어?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지.
일단 배부르게 먹자.
젠장... 얼마나 굶은 건지 모르겠어. 너무 배고프다.
맛있는 냄새.... 저 밥, 맛있어 보이는데! 뺏어먹자!
또 적인가?
난 또... 싸우려고 하는 거야?
내 여행의 목적은 싸우는 게 아니야.
내 목적은...
여행 그 자체의 즐거움.
(이 나침반, 새롭게 빛나고 있어.)
음식을 내놔! 안 그러면 때려주마!
<퀘스트 완료>
이 녀석, 우릴 죽일 수 있었는데 일부러 맞추지도 않았어... 어째서...
상대를 잘못 골랐다. 빨리 도망쳐!
잠깐만!
저기...
같이 먹을래?
믿을 수 없다! 인간이 음식을 베풀다니...
하지만 배고픈걸... 우리, 먹을 게 없어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잖아?
그리고 그냥 무시하고 가버렸다고 우릴 죽여버리면 어떡해!
흠, 그건 그래. 그럼, 속는 셈치고...
이거 정말 맛있다. 살면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야.
그렇지? 내가 공해에서 챙겨온 귀한 소금으로 간을 맞췄거든.
공해? 거긴 어디냐?
공해? 거긴 말이지...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면서 새로운 여행의 출발점이기도 한 곳이지.
특별한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거라 맛있는 건가?
(그래. 내가 그곳에 가기 전까지 공해는 그냥 세상의 끝과 같은 곳일 뿐이었어.)
(지금은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곳이지.)
(그래, 가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거야. 여행하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몰랐을지도 몰라.)
덕분에 잘 먹었다.
다음에 또 오면 그때는 내가 맛있는 걸 주도록 하지.
자, 그럼...
별은 늘 그 자리에 있었어. 나의 시선만이 달라졌을 뿐.
이제 슬슬 정리해 볼까?
새로운 세계가 사람들이, 그리고 아주아주 맛있는 음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장작을 휙 던졌다. 흩어지는 불씨와 함께 타닥타닥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차가운 몸 사이사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모닥불 위에 올려 둔 냄비 물도 조용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천천히 살아나는 감각들과 함께, 깊은 밤의 숲이 뿜어내던 스산한 기운도 조금씩 사그라지는 듯했다.
"인생 뭐 있어?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지."
시원하게 내뱉고 나니 모든 일이 아무렇지 않아졌다.
뭘 그렇게 혼자 심각했는지……
어차피 이기고 지는 문제로 그만 둘 마음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우울해질 필요가 없다.
그렇게 마음먹으려 해봐도.......
이 패배감을 떨쳐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럴 땐, 배불리 먹는 게 답이다.
가지고 있던 재료를 전부 냄비에 넣고 알맞게 익기를 기다렸다.
고기에서 나오는 기름이 야채들 사이에 배어 깊고 진한 맛을 내기 시작했다.
국물이 어느 정도 우러나왔을 때, 공해에서 챙겨온 귀한 소금으로 간을 맞췄다.
완성된 음식은 제법 근사했다. 다음에 마를렌을 만나면 레시피를 알려줘야겠다.
부른 배를 땅에 붙이니 하늘에 떠있는 별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별을 따라 참 많은 세계를 여행했다.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 도움을 주기도, 때로는 받기도 했다.
처음엔 어긋났던 시선도 결국 하나로 모여 힘을 합쳐 위험에 맞섰다.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든 일이, 참 즐거웠다.
그렇다. 여행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 여행을, 모험을 즐기고 있는가?
고민은 필요 없다. 답은 정해졌다.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새로운 여행을 떠날 차례였다.
새로운 세계가, 사람들이, 그리고 아주아주 맛있는 음식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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