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기억
비전의 납도술을 구사하는 마검사
데 로스 제국에서 극비리에 진행된 전이 실험은 많은 희생을 낳았다.
특히, 가족과 떨어져 실험체로 강제로 끌려온 어린 소년, 소녀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으며,
전이 실험의 실패는 이 희생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유입된 전이 에너지에 휩쓸리거나, 연구 시설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충격으로 많은 목숨이 사라진다.
겨우 살아남은 아이들은 마계에서 전이된 마수들에게 삼켜지거나, 운 좋게 도망쳤어도 병사들의 추격에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제국의 만행에 치를 떨고 있는 제국의 기사단장 크로웰의 도움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고,
자신의 삶을 찾아서, 혹은 제국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면서 아라드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어떤 아이들은 제국의 검술을 갈고 닦아 자신들만의 검술을 만들어내 제국에 맞서 싸우고자 한다.
어떤 아이들은 검마라 불리는 존재와 계약하여 마검을 손에 넣고, 복수의 길을 걷는다.
어떤 아이들은 전이의 힘을 억눌렀고, 방랑하면서 익힌 내공과 쌍검술로 새로운 유파를 만들어내 제국을 향해 검을 겨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죽음의 신의 사자가 되어, 제국의 이름을 그림자로 지우고자 한다.
이들 사이에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다른 아이들이 걸어가는 길을 바라만 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 어느 길을 선택한다고 한들 소녀가 원하는 복수를 이룰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아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눈앞에서 스러져간 은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부러진 검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조용히 사라진다.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만의 복수를 위해서.
도망
얼른 흩어져서 방금 그 실험체를 찾아라!
어린 녀석이니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시 그 끔찍한 곳으로 잡혀갈 순 없어.)
백작님! 여기 숨어있습니다!
으윽! 이 꼬맹이가...
멍청한 놈들... 뭣들 하는 거냐? 상대는 고작 어린애 하나일 뿐이잖느냐!
허억... 헉...
(거의 다 왔어. 곧 성문이...)
꼬마야, 크로웰 님은 어디있지?
......
그 검은... 그렇군. 승냥이 같은 백작의 손에 그 분의 최후를 맡기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미 늦은 건가?
날 너무 원망하진 말거라. 난 어디까지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제국의 기사로써 이곳에 온 것이니.
아! 검이...
크로웰 님은 나의 상관이자, 스승과 같은 분이었지.
...가거라. 복수 따위는 꿈꾸지 말고 평생 숨어지내라. 이게 내가 그분께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예의다.
다른 쪽을 찾아라! 이쪽으로 도망친 반역자들은 모두 처리했다!
정신이 들었느냐? 아직 몸이 온전치 않을 테니, 무리해서 일어나지는 말거라.
누구시죠?
...떠돌이의 이름을 알아 뭐하겠느냐.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거라.
그나저나 운이 꽤 좋은 편이구나. 때마침 내가 거길 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넌 저 모래 언덕 아래에 묻혀있었을 게다.
...왜 저를?
왜라니. 그야... 글쎄, 죽기 직전의 녀석을 보고도 사막 한가운데 두고 갈 정도로 모진 성격이 못되니까 그랬겠지.
나무 상자 안에 물이 있으니 천천히 여러 번에 나눠 마시거라. 아무래도 탈수 증상이 왔던 모양이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어디서 온 게냐? 신발이 그렇게 상할 정도면, 여간 먼 거리를 걸어온 게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앗!
이걸 찾는 게냐?
그 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놓치지않고 품에 꼭 안고 있더구나. 네겐 꽤나 소중한 물건인 것 같던데...
꽤나 좋은 검이었을 텐데 그렇게 부러졌다니 안타깝구나.
......
(흐음... 무언가 사연이 있는 모양인데...)
할아버지는 대장장이신가요?
뭐 그런셈이지. 별로 뛰어난 재주는 아니다만... 평생 망치를 손에서 놓지 않았으니, 어디가서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실력은 될 거다.
그렇다면... 혹시 이것도 고쳐주실 수 있나요?
그걸? 어디보자... 힘들겠지만 적당한 재료들만 구한다면 가능하겠구나.
후후, 좋다! 나를 믿고 맡긴다니 새 것처럼 고쳐주마. 하지만 원래처럼 다시 하나로 붙이지는 않을 게다.
어떤 식이든 상관 없어요. 한 사람의 목을 벨 수 있을만큼, 다시 날카로워질수만 있다면...
(아이의 눈빛이라기엔 살기가 너무 짙군. 누군가의 복수를 다짐한 건가?)
아직 날이 밝으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니 더 자두거라. 사막의 볕 아래에서는 몸을 쉬기 힘들테니 말이야.
이번 여행은 대박인걸!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진귀한 광물들을 이렇게나 많이 건지다니.
어쩌면... 너를 도와준 보답으로 찾아온 행운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나저나 정말 나와 같이 설산으로 가지 않을 테냐?
...죄송해요.
쯧...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네 검술 실력이라면 어딜 가든 쉽게 죽을 것 같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마.
내 이름은 '골고라이언'이다. 혹시라도 스톰패스에 들릴 일이 있다면, 내 이름을 대거라. 브왕가 녀석에게는 내가 잘 말해놓으마.
감사합니다.
아, 참! 이것도 가져가야지?
이건...?
네가 맡긴 그 부러진 검으로 새로 만든 것이다. 네가 다루기에는 길던 검신을 녹여, 짧은 도의 형태로 만들었지.
어떤 이들은 부러진 걸 다시 붙이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때론 한번 부러진 것은 녹여서 새로 벼리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거든.
어쩌면...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일지도 모르지.
할아버지...
껄껄... 쓸데 없는 얘기가 길었구나. 어때, 마음에 드느냐?
물론이에요. 그런데 할아버지... 뻔뻔하게 들리겠지만, 헤어지기 전에 할아버지한테 한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응? 혹시 날 따라올 마음이 생겼느냐?
그게 아니라... 긴 검이 하나 필요해요. 조금이라도 더... 아주 조금이라도 더 원수의 심장에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긴 검이요.
긴 검이라... 남은 검신에 이번 여행에서 구한 재료들을 섞는다면 가능하겠구나.
그래, 네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목표한 광석들을 구했으니...
며칠 더 이곳에서 머물렀다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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