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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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황금빛으로 물든 여인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든다. 곧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적 사이로 착지한다. 강력한 충격파가 생기면서 방심하고 있던 적들을 사방팔방으로 날려 보낸다.
이어서 빛나는 창이 날아가는 적들을 정확히 꿰뚫듯이 맞춘다. 순식간에 치명상을 입은 적들은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 갔다.
남자
괴… 괴물…!
남자는 운 좋게도 공격을 피한 모양이다. 하지만 멍청하게도 공포에 질려 소리를 내버린다.
황금빛으로 물든 여인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떤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응시만 한다.
(뭐, 뭐지? 사, 살았나?)
힘이라도 빠진 것일까? 아니면 죽일 가치도 없다는 것일까?
지금 상황에서는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어쨌든 공격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살았어! 살았다고!’
남자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한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날아온 나무 막대기가 머리를 강타했고,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만다.
뒤돌아서는 남자를 맞추려고 창을 들어 올렸던 황금빛 여인은 그 장면을 보고는 조용히 창을 내리고 한숨을 내쉰다.
어휴… 위험하다니까. 파이.
그녀의 말에 남자를 기절시킨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는 분홍 머리의 소녀가 응답했다.
니우 언니 항상 혼자 싸워… 나도… 돕고 싶어… 안돼?
여인을 감싸던 황금빛이 사그라들었다. 환한 빛이 사라지자 푸른색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여인은. 아니 여인이었던 소녀는 분홍 머리 소녀를 쓰다듬고 싱긋 웃으면서 답했다.
고마워, 하지만 꼭 싸우지 않아도 도와줄 수 있는 건 많으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 알았지?
응… 알았어…
분홍 머리 소녀는 웃어 보이면서도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제도 큰 싸움이 있었다. 오늘도 조금 전까지 치열한 싸움을 이어나갔다. 전에도 종종 다른 조직과 충돌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최근처럼 잦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니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싸움을 이어나갈수록 엄습해 오는 정체불명의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특히, 아주 오래전에 수호자들이 그저 약자들이 모인 집단에 불과했을 때부터 반목해온 카쉬파와 충돌이 눈에 띄게 늘었다.
수년 전, 배틀 메이지로 각성하고, 이 힘으로 수호자들을 무장시킨 이후부터 카쉬파가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차츰 충돌 횟수가 적어지던 중, 마계 회합이 벌어졌고, 이와 관련된 작은 사건이 조용히 마무리된 뒤로는 거의 충돌이 없었던 터였다.
하지만 최근, 이상하리만큼 충돌이 늘었다. 심지어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 작정하고 의도한 충돌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노골적인 적의를 내보이고 도발을 해오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있어, 뭔가가…)
니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빠졌다. 카쉬파와 물리적 충돌, 의도한 도발, 심상치 않은 동향… 무엇일까 도대체 카쉬파는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답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되는 충돌을 막지 못하고 힘만 소모할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바를 알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니우 언니…
걱정 속으로 앳된 목소리가 파고든다. 니우는 반사적으로 찌푸린 미간을 풀고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파이!
언니… 힘들어 보여… 돕고 싶어.
파이였다. 기억나지 않는 먼 옛날부터 항상 곁에서 손을 잡고 위로해주던 아이였다.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 어린 나이로 수호자들에 들어온 것도, 카쉬파의 습격 속에서 배틀 메이지로 각성한 것도, 그리고 지금까지 힘내면서 싸워온 것도 모두 이 아이를 위해서였다.
희망이 없는 마계에서 살아갈 이유를 주는 유일한 존재.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괜찮아. 힘들지 않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파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파이 앞에서는 웃자고 다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는 나를 따라 울고, 괴로워하고, 아파할 테니까. 자신의 몸이 먼지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어도 그 모습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끝날 거야. 곧 옛날처럼 다시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거야.
응, 알았어. 니우 언니… 절대로… 무리… 안돼? 알았지?
살며시 미소 짓는 파이의 얼굴을 본 니우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근심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힘내자.’ 그렇게 다짐했다.
수호자
니우!
수호자들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외치며 니우를 찾는다.
하늘에서 할렘 쪽으로…!
니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창을 집어 들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커다란 충돌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할렘… 아니, 마계 전체가 이 충돌에 말려 들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후우…’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한 니우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호자들을 바라본다.
하나하나 정겹고 익숙한 얼굴들. 많은 싸움 속에서 자신을 믿고 따라주었던 동료들이다. 이들을 지켜야 한다. 한 명의 피도 흘리지 않게 하고 싶다. 앞서서 수호자들을 이끌었던 모두가 그렇게 했다.
약자를 지키고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마저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 그들의 뒤를 이어 이들을 이끌게 된 자신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처럼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그래서 모두를 지킬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키지 못한다면…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헤집으며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불안이 불안을 삼키며 온몸을 짓눌렀다.
하지만 이런 걱정과 떨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료들 사이에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또 나만 두고 어딜 가려고?’라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파이를 보는 순간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니우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가 어리둥절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겨우 진정한 그녀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할렘으로 가겠어.
니우의 말에 파이는 무언가 말하려고 앞으로 나왔다. ‘혼자 갈 거야? 거기는 위험해!’, ‘카쉬파가 언니를 괴롭힐거야!’, ‘나도 데려가!’ 할 말이 수도 없이 많았다.
소매를 붙잡고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연한 표정을 보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보아온 사랑하는 언니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니우 언니… 조심히… 꼭 돌아와… 알았지?
응, 반드시 돌아올 거야. 약속할게.
니우는 지체할 틈도 없이 할렘으로 향했다. 파이는 니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손을 꼭 쥔다.
항상 모두를 지키려고 가장 앞섰던 언니. 언제나 웃으면서 돌아와 다정하게 손을 꼭 잡아주던 언니. 이번에도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금은 서운했지만, 기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언젠가 자신도 모두를, 그리고 니우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무표정했던 얼굴 위로 결연한 표정을 지은 파이는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나도 힘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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