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0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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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노인
쿨럭 쿨럭
메마른 기침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메운다. 노인은 조용히 하얀 천으로 자신의 입가를 닦아 냈다.
‘토혈’. 하얀 천 군데군데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노인의 곁을 지키던 여인은 이를 보고는 울먹인다.
여인
전하…
오늘이 처음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길면 이레에 한 번씩, 짧으면 사나흘에 한 번씩 토혈을 하던 터였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이틀에 한 번. 아니, 근래에는 하루에 한 번으로 짧아졌을 뿐이다. 겨우 그뿐이란 말이다.
노인
괜찮다.
여인
하오나…
노인은 메마른 목소리로 여인의 걱정을 물리쳤다. 하지만 여인은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쇠하고 갈라진 목소리,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지는 안색.
오랫동안 어의(御醫)로서 노인의 곁을 지켜온 그녀의 눈에는 그 여느 때보다 위태로워 보였다.
노인
정전으로 가겠다. 준비하라.
여인
전하, 요양하심이 옳을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노인은 만류하는 여인을 노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시선을 받았음에도 단호한 표정으로 노인을 만류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잠시 고집이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썩 유쾌하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을 나약하게 여기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어찌 이리 마음을 꺾이게 하는가?
수많은 세월을 이보다 더한 역경을 견디며 이 나라를 이끌어 왔다. 그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고작 토혈했을 뿐이다. 고작…
노인
정전으로 가겠다고 했다. 어서 준비하라!
노인의 일갈에 여인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기로 한다. 여기서 더 버틴다고 한들 노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뿐더러 되레 화를 돋워 용태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바쁜 걸음으로 노인의 방으로 들어오는 나인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마음속으로 한탄한다.
여인
아아,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를…
정전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신하들이 늘어서 있었고, 노인은 그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어좌(御座)로 걸어와 몸을 기댔다. 하지만 곧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정전을 뒤덮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라앉은 공기, 불안한 눈빛들. 바로 직전에 침전에서 어의에게 느꼈던 것과 같은 분위기.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이들마저 자신을 나약한 노인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기를 띠고 늘어선 신하들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노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니,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노인
(고얀…)
노인은 팔을 힘껏 휘둘러 분노를 표하고 자리에 털썩 기댔다. 이에 몇몇이 움찔하거나 더욱 불안한 눈빛을 내비쳤다. 하지만 분위기의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공기는 가라앉았고, 눈빛의 불안은 더욱 깊어져 갔다.
노인은 생각에 잠겼다. 이들이 이러는 것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도 최근 급격하게 몸이 쇠해지는 것을 느끼며 불안해하던 차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한 나라를 이끄는 왕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강인한 왕으로 모두를 지탱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쇠해지면 나라가 쇠해지는 것이며, 자신이 쓰러지면 나라가 쓰러지는 것이다.
그렇게 믿어왔으며, 그렇기에 누구보다 강인하게 우뚝 설 수 있었다. 저기서 불안함을 내비치는 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일들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원로
전하, 어의로부터 용태를 전해 들었습니다. 요양을 취하심이 옳을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역시나! 본인의 힘으로 만류하기 힘드니 쪼르르 달려가 모두에게 일러바친 것이리라.
‘고약한 것.’ 노인은 돌아가면 어의를 크게 혼낼 것이라 다짐한다. 그러기 전에 먼저 이들을 크게 꾸짖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터였다.
노인
들으라!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요란스럽게 요동치며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바닥에 깔려있을 터였던 붉은 비단…
원로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문관
거기 아무도 없느냐! 전하를 모시어라!
가까운 곳에 있었을 터였던 신하들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
아아…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내가 곧 이 나라이거늘…
내가 쓰러지면 이 나라가 쓰러질 것이며, 이 나라가 쓰러지면 내가 쓰러질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어야 한다.
원로
전하! 정신 차리시옵소서!
이를 끝으로 노인의 의식은 끊겼다.
방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리라. 요전번의 여인은 쓰라린 표정을 지으며 쓰러진 노인의 맥을 짚어나갔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곁에 있었어야 했었다며 자신을 질책했다.
참담한 것은 밖도 마찬가지였다. 노인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신하들이 밖에 엎드렸으며, 소식을 들은 궁궐 내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노인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어린 나인의 불안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이 궁궐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한 식경이 지났을까? 여인은 노인의 맥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이다. 이제 겨우 맥이 돌아왔을 뿐이다. 이대로면…
여인
(아니야. 아직이야.)
여인은 불안한 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도리질 친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게 하리라. 절대로.
노인
그만 되었다.
메마른 목소리가 여인의 생각을 깨고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노인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여인은 흠칫 놀라 맥을 재던 손을 놓고는 뒤로 물러나 노인의 앞에 엎드린다.
노인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여인
전하…
초연해진 노인의 목소리에 여인은 무언가를 직감하고 흐느꼈다. ‘아아… 이를 어찌한다 말인가?’ 여인은 다시금 마음속으로 한탄하며 눈물을 머금는다.
곧 원로대신들이 들기를 청했다. 노인이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노인은 이를 허락하고는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원로들은 방안으로 들어 오다가 이를 보고는 황망한 마음에 바닥에 몸을 엎드리고 흐느꼈다.
노인
모두 고개를 들어라.
노인의 말에 엎드렸던 모두가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불안하고 참담한 눈빛은 숨기지 못했다.
‘그래, 그렇겠지.’ 노인은 그들의 심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또한 같은 심정이었기에, 그리고 더는 거부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노인
긴 세월이었다.
그동안의 기억들이 노인의 머릿속을 지나쳐간다. 의를 숭상하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예로 백성을 아끼며 사랑했다.
수많은 학자와 장수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목숨을 바쳤다. 이는 무기가 되었고, 이로써 끝없는 외세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켰으며, 백성 모두가 풍족하게 살도록 만들었다. 누구 하나 굶지 않고, 누구 하나 억울하지 않은 그런 세상을 이루었다.
말 그대로 위대한 왕이 되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을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 버려야 했던 것들. 흘려야 했던 피와 눈물. 외면해야 했던 고통. 지난날의 회한이 가슴을 짓눌렀다.
노인
늘 고집만 부렸구나. 모두 잘도 이 늙은이의 장단에 맞춰줬어.
오랜 시간이었다.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 또한 많았지. 이제 됐다. 이 정도면 됐다.
노인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노인
여기까지다. 이다음은… 그 아이가 이어 나가야겠지.
이 말에 모두가 황망해 하며 땅바닥에 엎드리며 흐느꼈다.
신하들
전하!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노인은 초연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따라 한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자들.
그래, 누구보다 그들이 더욱 불안하겠지. 그 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노인
이 늙은 몸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는 사슬을 끊어내고 편히 쉬고 싶구나.
더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노인이 확고한 뜻을 내비쳤던 것도 있지만, 모두가 노인의 말대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의 왕을 떠나 보내야 한다.’ 그렇게 말이다.
노인
첫째 왕녀를 불러들일 것이다. 하지만 본디 자유분방하여 메여있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찾더라도 데려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지체할 수 없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하나가 명을 받아 속히 그 아이를 찾아 오도록 하라.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노인의 말대로 자유분방한 그녀를 찾을 도리도 없었으며, 찾아낸다고 한들 메여있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를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최전선에서 적과 맞섰던 용맹한 장수도, 왕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던 학자들도 선뜻 나서기를 꺼렸다.
긴 침묵이 장내를 뒤덮었다. 그렇게 한참. 기다리다 못한 노인이 침묵을 깨려고 할 때,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녀가 가겠나이다.
노인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반투명한 베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수려한 외모의 여인이 한 손에는 쥘부채를 쥐고 서 있었다.
노인
첫째 왕녀의 스승이 아니시오?
노인의 물음에 여인은 예의를 갖춘 다음 대답을 이어나갔다.
우라고 하옵니다.
수쥬에서 스승은 하늘과 같다. 난폭한 왕이라 할지라도 스승에 대해서는 평생 예를 다했으며, 스승의 간언이라면 무겁게 받아들였다.
하물며 왕녀가 내놓으라 하는 뛰어난 학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스스로 청한 스승이지 않은가? 그러하다면 이보다 더 적임은 없으리라.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랜만에 총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를 내어 명을 내린다.
노인
모두 들으라.
신하들
네, 전하.
노인
지금 당장 왕녀의 스승께 마차를 내어드리고, 첫째 왕녀를 찾아오는 일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
신하들
네, 전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의 앞으로 다가가 예를 갖추고 말을 이어나갔다.
노인
왕녀의 스승께서는 들어주시오. 이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소.
부디, 그 아이를 찾아 돌아와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오.
이에 우는 눈빛을 반짝이며 지체 없이 말을 이어갔다.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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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헨돈마이어. 벨 마이어 공국의 수도이자 자유의 도시. 그 명성답게 각국의 모험가, 상인, 학자들이 제약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과한 자유가 부여되면 그것에서 이탈하는 부류가 생기기 마련. 헨돈마이어 곳곳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시비가 일어나 공국 병사들의 골머리를 썩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헨돈마이어의 뒷골목과 인접한 광장에서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소동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본래 소동이 일어나면 주변 사람들이 자리를 피하고 곧바로 공국 병사들이 와서 중재하는 것이 보통인 데 반해서 계속해서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심지어는 소동을 막기 위해서 나타난 공국의 병사들마저 넋을 놓고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쾅! 쾅쾅!
쳇. 빌어먹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짧은 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이 바닥에 뒹굴었다. 하지만 곧바로 일어서서 한쪽에 쌓여있는 나무 상자를 들어 올린다.
상자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상인이 ‘아이고 그건 안돼!’라고 외쳐보지만, 그냥 외침일 뿐. 여성은 들어 올린 상자를 거침없이 자신이 날아온 쪽으로 집어 던진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모든 상자를 집어 던진 여성은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상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벽돌을 들고 그대로 상대에게 돌진한다.
쾅! 팡! 콰직! 파스스-
벽돌은 상대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하얗게 폭발하는 꽃잎에 막혀 산산이 조각나버린다.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여성은 벽돌을 들고 있었던 손을 어루만지며 뒤로 물러나며 상대를 노려본다.
어쭈, 부쉈어? 평범한 공주님은 아니신가 봐?
벽돌을 부순 상대는 차올렸던 다리를 내리면서 긴 흑발을 쓸어내리고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흥,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하여간 귀족 나부랭이들은 입만 살았다니까. 그럼 이것도 막아보시지.
굉음이 일어나면서 둘이 부딪치기 시작한다. 하얀 기(氣)의 파편들과 부서진 물건의 파편들이 서로 어우러져 다시 한번 장관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다그닥 다그닥
히이잉-
한창 싸움이 벌어지는 광장 뒤로 화려한 마차가 다가와 멈춘다. 이국적인 형태의 마차에서는 얼굴의 반을 베일로 가린 수려한 외모의 여인이 내린다.
평소였으면 모두의 주목을 받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바로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커다란 소동으로 인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인이 수행원과 함께 군중을 헤치고 지나갈 때,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만 눈치채고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다.
잠시 기다리도록 하지요.
앞에서 일어난 소동과 마주한 여인은 나지막하게 수행원에게 일렀다. 그리고 흥미롭다는 듯이 앞의 소동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막바지에 다다른 듯했다. 소동을 일으킨 두 사람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의 소강상태 그리고 대치. 먼저 움직인 것은 짧은 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부서진 파편들을 쓸어 모아 손에 쥐고는 상대의 품으로 부딪쳐갔다.
하지만 상대는 이를 예상했다는 듯이 가볍게 뒤로 물러나 피하고는 손에 하얀 기를 모아 앞으로 뻗는다. 그러자 거대한 빛의 구체가 나타나면서 지면을 태웠다.
기공장!
파스스스-
강렬한 마찰음이 바닥을 비볐고, 하얀 기의 파편이 하늘에 나풀거렸다. 강력한 공격에 모두가 긴 흑발의 여성이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구경하던 여인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한 방 먹으셨군요.)
여인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짧은 머리의 여성이 빛의 구체를 찢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빛이 사그라지는 순간을 읽고 틈을 만들어 뛰어든 것이다.
한쪽 어깨가 그을렸지만, 눈앞의 여자를 때려눕힐 수만 있다면 비교적 싼 대가였다.
이걸로 끝. 독은 없지만, 꽤 아플 거야.
어느샌가 한 손에 날카로운 바늘을 든 짧은 머리 여자는 빠르게 휘둘러 복부에 꽂아 넣으려고 했다. 허를 찔린 한 수.
물러날 줄 알았지만 도리어 반격당한 긴 흑발의 여성은 당황해하며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를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쾅! 핑- 파직
두 사람이 엇갈리며, 커다란 타격음이 광장을 덮었다.
(결착)
구경하던 여인의 생각대로 승부가 났다. 광장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엇갈린 채로 굳어있는 두 사람에게 쏠렸다. 긴 침묵. 그리고…
큭… 빌어먹을…
짧은 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동시에 긴 흑발의 여성도 힘이 가까스로 꺾이려는 무릎을 부여잡는다.
젠장! 한 판 더 붙어!
잠깐, 패리스. 눈이…!
분노하며 일어선 짧은 머리의 여성의 왼쪽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긴 흑발의 여성이 자신의 품으로 찔러오는 가시를 부러트린 것. 그리고 그 파편이 공교롭게도 짧은 머리 여성의 왼쪽 눈을 스쳤던 것이다.
다행히도 깊숙하게 찌른 것이 아니라 실명하지는 않은 듯했다.
미, 미안하긴 하지만 당신이 자초한 결과입니다. 먼저 싸움을 건 것도 그쪽이잖아요?
긴 흑발의 여성은 미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곧 아차 싶은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가린다.
이 말을 들은 짧은 머리의 여성은 더욱 화가 나는지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한다.
하여간 귀족 나부랭이들은 다 목뼈를 부러뜨려야 해! 목이 뻣뻣해서 고개 숙일 줄도 모르잖아!?
흥, 어쨌든 승부는 난 것 같군요. 당신도 나도 더 싸울 수 없어요. 여기서 비긴 걸로 하고 끝내죠.
젠자아아앙! 누구 마음대로! 야! 너 거기 안 서!!
긴 흑발의 여성이 ‘무승부’를 선언하며 몸을 돌린다. 짧은 머리의 여성은 승복할 수 없는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달려들려고 한다.
하지만 지쳐있는 데다가 눈의 상처까지 겹쳐 쉽지 않은 듯했다. 무엇보다 멍하니 구경하던 공국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수습하려고 나섰기 때문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긴 흑발의 여성은 그 모습을 슬쩍 뒤를 돌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긴장이 풀렸는지 벽에 손을 대고 크게 숨을 들이쉰다.
재미있는 구경이었습니다. 여전하시군요.
갑자기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긴 흑발의 여성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마차에서 내려 둘의 소동을 조용히 지켜보던 여인이 서 있었다.
스승이 아닙니까!?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긴 흑발의 여성의 반가운 외침에 여인은 작은 미소를 짓고는 조용히 예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쇼난 아스카 제1 왕녀 전하.
잠시 후.
안 그래도 조만간 스승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먼 곳까지 오시다니요!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조용한 곳을 물색해 주변을 물리치자 아스카는 친근한 말투로 우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수쥬의 안이었다면 제1 왕녀의 체면 때문에 쉽게 하지 못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쥬가 아닌 아라드. 게다가 주변의 수행원도 물리친 상황이라 평소의 버릇이 나온 것이다.
우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화답한다.
아마도 왕녀 전하께서 ‘기공장!’을 외치던 순간이었을 겁니다.
우의 가벼운 놀림에 아스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기술을 쓸 때 이름을 외친다는 것은 실제로는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본인도 그걸 자각하고는 부끄러워진 것이다.
아니, 그, 그것은 그러니까, 분위기를 타다 보니 저도 모르게…
스, 스승께서는 놀리지 마십시오!
우는 대답 대신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스카는 잠시 숨을 고르며 진정을 하다가 다시 그때가 떠올렸는지 볼을 부풀리며 애꿎은 탁자 다리를 툭툭 쳤다.
그리고는 이내 '푸우-'하는 소리와 함께 부푼 볼을 누그러트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인 일이십니까. 수쥬에 있을 스승께서 이 먼 헨돈마이어까지 오시다니요.
그것도 왕실의 마차와 수행원까지 대동해서 말입니다.
말 그대로였다. 제아무리 제1 왕녀의 스승일지라도 왕실의 마차는 쉽게 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바로 국왕이 허락한 경우였다.
이는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경우에만 국왕의 명에 의해서 왕실의 마차가 내어지며, 특별히 선별한 준마와 수행원을 대동시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이 사실을 제1 왕녀인 아스카가 모를 리 없었다. 오히려 우가 왕실의 마차와 수행원을 대동하고 왔을 때부터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국가의 중대사를 위해 왕실의 마차를 타고 자신을 만나러 온 스승. 생각할 수 있는 답은 하나. 하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줄곧 멀리 있다고 생각했었다.
설마…
네. 국왕 폐하께서 위독하십니다.
아스카는 주변의 세계가 하얗게 변하는 착각에 빠졌다.
국왕 폐하. 아아… 폐하. 나의 아버지. 우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쥔 아스카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들 부모가 위독하다는데 충격받지 않을까? 이는 왕족이라도 예외가 아니니…
우는 아스카가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있도록 잠시 기다리기로 한다.
그렇게 한참. 얼굴을 감쌌던 손을 푼 아스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왼쪽 눈에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돌아갈 것입니다. 스승께서는 준비해주십시오.
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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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드력 999년. 수쥬의 38대 국왕 쇼난 케이가가 붕어(崩御)한다. 시호는 현안왕(賢安王)으로 살아생전 어진 정치로 나라를 평안케 했다 하여 백성들이 칭송해 하며 붙인 호를 그대로 따랐다.
백성들은 몇 날 며칠을 슬퍼했다. 활기찼던 거리는 왕을 기리기 위해 내걸은 하얀 천으로 물들었고, 화려한 옷을 즐겨 입었던 백성들도 하얀 옷으로 갈아입었다.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평생 따르던 위대한 왕을 기리며 하얀 관복으로 갈아입고 궁궐에 엎드려 통곡을 이어갔다. 이에 탈진을 일으켜 의원이 달려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나라를 지킨 영웅, 백성을 사랑한 어진 어버이,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모든 것을 짊어졌고, 모두를 포용한 위대한 왕. 수쥬는 그렇게 그를 떠나 보냈다.
편전에는 아직은 선왕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평소 즐겨 읽던 책이나 즐겨 사용하던 붓, 벼루, 종이. 하나하나가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고, 아끼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얀 상복을 입은 소녀는 멍하니 그것들을 어루만졌다. 이제 곧 이것들은 치워지겠지.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자신의 물건들로 채워질 것이다.
선왕도 그랬고 선왕의 선왕도 그랬을 터였다. 자신의 뒤를 이을 먼 미래의 왕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르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무리 그리하더라도 비어버린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음이라.
소녀는 주저 앉아 흐느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제는 내가 이어나가야 한다. 내가 곧 이 나라의 중심이고, 백성의 어버이다. 아버지, 아니 선왕께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이야. 왕은 지배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를 짊어지고 앞서서 이끌어 갈 뿐이다.’
선왕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무거웠다. 17세의 어린 소녀의 작은 어깨로는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책임의 무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찌 이끌어 가야 한다 말인가. 마음이 심란하고 답답하여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어찌 그리 심란해하십니까.
소녀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하얀 베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여인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왕녀 전하… 아니, 이제는 국왕 폐하라고 해야겠지요.
스승께서 그리 격을 차리시면 불편합니다. 둘이 있을 때는 이전 같이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처연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본 소녀는 그녀에게 앉을 것을 권하며 자리에 앉는다. 이에 여인은 화답하듯이 옅은 미소를 짓고는 마주 앉는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소녀는 안심하며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근심은 숨기지 못한 듯 했다. 마주앉은 여인은 소녀의 안색을 살피더니 넌지시 말을 던졌다.
그리 수심이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으면 못생겨지십니다.
스승님!
소녀의 반응에 여인은 빙긋 웃어 보인다. 의도를 알아차린 소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결 풀어진 표정을 지어 보인다.
본디 왕에 오른 자는 얼굴 하나까지 신경 써야 하는 법입니다.
민심의 안정은 왕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 백성들 또한 불안해 할 것이며, 슬픈 표정을 지으면 백성들 또한 슬퍼할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허나…
스승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르기로 마음 먹은 이상 더는 어리광을 피울 수도 없었다.
‘불안합니다. 불안합니다. 이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합니다.’ 소녀는 마음으로 말을 삼켰다.
하지만 여인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애초에 소녀가 불안해 한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이는 수쥬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그리고 선왕의 유지를 받드는 자리에서도 느꼈기 때문이다.
무겁습니까?
소녀는 머뭇거리더니 털어놓듯 대답했다.
네, 무겁습니다. 두렵습니다. 왕으로써 잘해나갈 수 있을지. 이 나라를 짊어질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허나…
폐하. 아니, 아스카 님.
여인은 소녀가 하려는 말을 부드럽게 자르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느닷없이 자신의 본명을 들은 소녀는 흠칫 놀라면서 여인을 바라보았다.
왕이란 무엇입니까?
소녀는 뜬금없는 스승의 물음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스승이 허투로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인지라 의문을 감추고 순순히 답한다.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무엇입니까?
백성입니다. 영토가 없어도 백성만 있다면 나라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백성입니다.
여인은 소녀의 답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여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 잠시의 침묵에 소녀는 살짝 긴장하며 여인의 입을 바라보았다.
백성은 무엇입니까?
백성은…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말문이 막혀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머릿속을 꽉 채우던 근심과 걱정이 모두 함축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신이 이끌어가야 할… 두 어깨에 짊어져야 할 자들.
그렇기에 섣불리 판단할 수 없고,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천근보다 더 무거운 존재였다.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왕족으로서, 제1 왕녀로서 수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갑자기 마주한 현실 앞에서 모든 배움이 바스라져 날아갔다.
한 명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모두에게 인정 받는 왕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한다.
소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백성은…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녀는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여인은 소녀와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어나갔다.
백성은 왕이 두려워해야 할 존재입니다.
그들은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을 역사 위에 올리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평할 것입니다.
그게 무거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인정 받을 수도 없습니다.
이는 선왕께서도 그러셨고, 선왕의 선왕께서도 그러셨지요.
여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완벽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렇지 않다 한들 문제 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문제 될 것이라면 그들을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왕으로서 백성과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니, 이야 말로 비겁한 도망자가 되는 길입니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아스카 님. 아니, 수쥬의 젊은 왕이시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펼친 뒤, 백성에게 묻고 그들에게 답을 구하십시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을 이해시키고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직접 부딪쳤을 때 알게 되는 것이 있으며, 그 모든 것을 깨우쳤을 때 짊어지고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제야 진정한 왕이 되어 역사 위에 올려지게 될 것입니다.
여인의 말에 소녀는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그리고는 속에 있는 무언가를 끌어 내듯이 여인의 앞에 꺼내놓기 시작한다.
이 나라는... 오랫동안 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외세의 침략에 맞선 선택이었지만 많은 것을 희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일찍이 나아가 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익혔습니다. 그 중에는 수쥬보다 못한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뛰어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면 틀림없이 한 발, 아니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웠습니다. 오랜 세월을 선왕께서 두른 사슬에 묶인 이 나라와 백성들이 저를 거부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꾸짖고 앞으로 나아감을 거부하면서 변함없이 틀어박힐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소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큰 결심을 한 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그들을 두려워하되 가까이 다가갈 것이며, 목소리를 듣고 답을 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묶여있던 사슬을 하나하나 풀어나갈 것입니다.
저는 이 나라의 왕입니다. 백성들의 어버이이며, 기둥입니다. 저를 싫어하고 거부할지라도 모두를 짊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올린 역사 위에서 당당히 걸어 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소녀. 아니, 수쥬국의 39대 왕 쇼난 아스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열망이 서려있는 눈으로 자신을 일깨워준 스승을 바라보고는 예를 갖춘다.
여인은 왕의 스승으로서 그녀의 예를 받고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한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아라드력 1000년. 쇄국 정책으로 닫혀 있던 수쥬의 문이 열린다. 새롭게 왕으로 등극한 쇼난 아스카는 대대적으로 문호 개방 정책을 펼친다.
이를 위해서 철인의 문을 활짝 열고 무투대회 개최를 선언하고, 곧 왕의 스승인 우를 칙사의 자격으로 벨 마이어 공국으로 보낸다. 그리고 이 소식은 아라드 대륙의 모든 국가로 순식간에 퍼진다.
혹자는 갑작스러운 개방 정책에 당황하며 이를 거부하고, 혹자는 이를 반기며 기회로 삼는다.
노인들은 아직은 부족하고 보완할 것이 많다며 우려를 표하고, 젊은이들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바람에 열광했다. 이로 인해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수쥬의 국왕 쇼난 아스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거리로 나아갔고, 때로는 왕궁으로 불러들여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파격적인 행동에 백성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어갔다.
어느 화창한 날. 두 사람은 다시 편전에서 마주했다.
그곳에는 지난 날 대담을 주고 받던 소녀와 여인은 없었다. 대신 왕과 왕의 스승이 있었다.
답은 찾으셨습니까?
왕의 스승이 물었다.
아니요. 아직입니다.
왕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불안하거나 짓눌린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은 듯 상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웃어 보인다.
하지만 찾아낼 것입니다. 이제 막 한 걸음 떼었을 뿐입니다. 멀리 보고 오래도록 걸어 나갈 것입니다.
물론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계속 걷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찾아낼 것입니다.
왕은 왕의 스승과 눈을 마주했다.
분명, 긴 세월이 될 것입니다.
저들은 제 이야기를 들어줬습니다. 그리고 실패할지도 모르는 길을 걸어가라고 밀어줬습니다.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저들이 올려준 길 위에서 모두를 이끌며 걸어 갈 것입니다.
왕의 스승은 왕에게서 위대한 왕으로 칭해지며 백성의 사랑을 받던 선대 왕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안왕이시여.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창으로 기분 좋은 햇빛이 넘실거리고 있다. 가끔 바람이 흘러 들어와 두 사람의 볼을 비비고는 흩날려 사라졌다.
왕은. 그리고 왕의 스승은 이 작은 찰나의 순간에서 평화를 느끼며 서로를 마주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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