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튼의 사령관, 페트라 노이만
[그날의 기록, 하나]
이튼의 사령관, 페트라 노이만
이튼의 중장 니베르를 만나 이야기 듣기
<퀘스트 완료>
이튼 사령관 페트라 노이만은
신권 약화를 꾀하는 네빌로 유르겐을 피해
군으로 이동한 사제 중 한 사람이다.
군과 연이 없던 페트라가 단기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대사제라는 신분과 몇 번의 행운,
그리고 괜찮은 장군이었던 이모 덕분이었다.
뼛속까지 군인인 잭터는 이 파격적인 인사를 내켜하지 않았으나,
내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페트라는 황녀의 임명장을 받고 이튼 사령관이 되었다.
노블스카이 호의 위치는 파악했나?
보고에 따르면 이 부근에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안톤 타도 후, 이튼 사령관의 주된 임무는 파괴된 기반 시설의 복구 작업이었다.
페트라는 군대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아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비전문가 지휘관으로서 할 수 있는 바를 했다.
그래서 니베르는 페트라를 썩 나쁘지는 않게 생각했었다.
수도 겐트에서 멀리 떨어진 이튼 생활의 장점을 하나씩 찾아갈 쯤,
겐트에서 난리가 일어나 황녀가 쫓겨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나 페트라는 황녀를 위해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황도로 전력을 보내는 송전탑의 경비를 강화하고
황도의 동향을 살피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송전탑이 공격받을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경비는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페트라는 뜨거운 차를 조금 마셨다.
황도에서도 구하기 힘든 고급 차였다.
네빌로 유르겐만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멋없는 군복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경비는 계속해.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하늘도 낫을 놓아버린 농부에게는 이삭을 내려주지 않으시네.
...도난당한 노블스카이가 공격해 올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걱정되시면 노블스카이를 포획하러 가면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해적을 잡을 여력이 어딨나. 그리고 무법지대로 향할 게 뻔한데 그쪽에서 알아서 잡겠지.
...그 배에 황녀님이 타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귀족에 의해 발행되는 신문을 보면
겐트는 몇몇 폭도들이 일으킨 소란을 빼곤 평온하다.
황녀가 유르겐 부녀에게 국정을 맡기고 유람을 간 것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을 뿐이다.
겐트에 난리가 나서 황녀가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소문이며,
이마저도 통제되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소문은 또 어디서 듣고 온 건가? 행여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그저 황도의 반란군이 처단되기만을 기다리며 파워스테이션을 지킬 뿐이지.
(일이 터지자마자 온갖 잔머리는 다 굴려놓고서... 뻔히 알고서 노블스카이의 동향을 감시하는 주제에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 셈인가?)
페트라를 바라보는 니베르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
할말은 다 했나? 그럼 이만 나가보게.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무슨 말이지?
식량이 줄고 있습니다.
현재 이튼은 식량 자급률이 좋지 않다.
비축분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황도의 보급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황도에서 보내오는 식량의 양이 점점 줄기 시작한 것이다.
황도의 식량을 이튼으로 보내는 결정권자는 겐트에 있는 귀족이다.
전력이 끊기면 상당히 난감하겠지만 굶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겐트는 페트라의 의도를 눈치챈 것이다.
곧 보낸다고 했으니 걱정 말게. 그리고 농업 개발 부서를 만들라고 했어. 기술자들이 해결책을 내겠지.
그리고 자네가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니 하는 말인데, 이튼은 이제 더 이상은 전기나 물품을 생산하는 황도의 공방에 머무르지 않을 것일세.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계의 두 대들보는 황도와 이튼이야. 지금까지는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으나, 내가 이곳에 온 이상 그렇게는 안 되지. 대등한 상대로서 격을 갖춰갈 생각이라는 말일세.
이번엔 니베르도 입을 다물었다.
정치 문화의 중심인 황도에 비해 이튼은 공장 지대라는 인상이 강하다.
중요한 곳이지만, 천계를 이끌어 나가는 건 어디까지나 황도라는 뜻이다.
(차별하지는 않지만 대등하지도 않은 관계... 황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 감정을 활용할 셈인가. 그새 명분까지 챙기다니.)
니베르는 아쉬웠다.
황녀에게 시간이 있었다면 이런 불공평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무서운 적을 상대로 싸워, 살아남은 이들끼리 화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니까.
하지만 황녀는 쫓겨났고, 이튼은 황녀를 구하지 않은 채 황도와 대립하고 있다. 소모뿐인 대립. 나아질 것 하나 없는 암담한 상황이다.
니베르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웬 한숨인가?
전쟁은 끝났는데 세상이 아직도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쟁은 문제가 아니라 결과지. 선로가 바뀌지 않는 한, 기차는 같은 역에 도착할 뿐이네.
마음에 들지 않는 길이라면 내려서 다른 기차를 탈 수도 있겠지요.
그럴 수 있겠지.
니베르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페트라를 향한 의심을 확고히 굳히기에는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설마 총독 운운하던 건 날 떠본 거였나? 이 아줌마... 제사나 지내던 주제에 대체 무슨 생각이지?)
경례를 붙이고 사령관실에서 나온 니베르는
페트라의 언행을 기반으로 가설을 다시 세워보았다.
그리고 급하게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방문자
[그날의 기록, 둘]
노블 스카이의 방문자
이제 어떻게 되려나...
언제까지고 이렇게 떠다닐 수도 없고. 무법지대에 황녀님의 거처를 마련하거나, 아니면 아랫세계에 모시고 내려가게 되는 거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린가?
대걸레를 옆에 세워두고 처량하게 중얼거리던 루카스는
이름 모를 황녀의 정원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자 깜짝 놀랐다.
벌써 약한 소리하는 건가? 군인이 맞기는 하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걱정이 되어서요. 나엔 박사님을 통해 지원을 약속하던 연락도 점점 끊기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쯤 반란군은 민심을 수습하면서 정당성을 만들고 있을 거라고요. 앞으로 열흘 이내에 황제가 하나 툭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뭐야? 어디서 그런 망발을 하는 거지? 반란을 꿈꾸는 건가?
엑? 아닙니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뿐인데...
해도 될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다! 듣자하니 귀관은 귀족의 자제라던데. 혹시 내부 스파이 짓에 가담한 건 아닌가?
네? 그게 무슨... 황녀님을 구출하느라 죽을 뻔한 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럼 의심이 갈 만한 말을 왜 하나?
...무슨 일인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마침 갑판으로 올라온 운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대령님... 그게...
구세주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다가가는 루카스를 밀며
황녀의 정원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령님. 대책은 세우셨습니까? 지금 지휘관은 당신입니다. 부상을 입으셨다곤 해도 긴 시간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황녀님을 빨리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합니다.
황녀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시던데.
그 '때'를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무법지대는 대장군님과 대령님의 고향 아닙니까? 거기서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습니까?
나엔 박사님이 통신을 엿들었는데, 이튼이 아무런 성명도 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이미 한통속인 겁니다. 무법지대로 가야 합니다. 자기들이 지은 죄를 안다면 전심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마음만큼 급하게 쏟아내는 말의 홍수를 운은 조용히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보다 못한 루카스가 두 팔을 마구 휘둘렀다.
잠깐만요. 대령님이 피곤하신 것 같으니 나중에 말씀하시죠. 그렇게 서두르지 않으셔도 대령님이 알아서 잘 하실 거예요.
실수였다.
황녀의 정원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서두르냐며 루카스를 공격하였다.
한참 혼나던 루카스가 결국은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겠습니다...
대령님이 계시니 그만하겠다만 조심하게.
네에...
루카스는 황녀의 정원이 반대편으로 걸어가고서야 땀을 닦아내었다.
...후우. 너무 초조해하는 것 같네요. 불안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저렇게 신경을 곤두세워서야 무슨 대화가 되겠습니까.
그나저나 오늘은 좀 주무셨습니까? 수면제가 좀 더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정 잠을 못 주무시겠으면 말씀하세요. 소설처럼 뒷목을 쳐서...
대령님?
운은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루카스는 의아하여 운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몇 번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하는 수 없이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대령님, 뭘 보시는 겁니까? 대답도 안 하시고.
어? 여긴 어디야?
주변을 둘러보던 운이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루카스는 상관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떼었다.
네?
...대령님?
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루카스를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렇게 쳐다보지?
누구길래 날 쳐다보지?
내가 이상한가?
들킨 건가?
...들켜? 뭐를?
그보다 레베카랑 제이는?
아는 얼굴을 찾기 위해 주변을 다시 둘러보던 운은
아까부터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더라.
......아.
소위. 우리가 있는 이곳... 좌표가 어떻게 되나?
네? 좌표요? 어... 잘 모르겠네요. 나엔 박사님께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루카스가 떠난 후 운은 비틀거리며 갑판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시장 한복판에 온 것처럼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선체에 부딪치는 하얀 포말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상반신을 난간 바깥으로 내밀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가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으.
운은 난간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으득, 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간신히 자세를 바로한 그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대령님! 대령님, 큰일입니다! 미확인 비행물이 이쪽으로 접근 중입니다!
운은 달려오는 루카스를 보았다.
부하의 모습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운은 서둘러 모자를 눌러썼다.
하늘에서 나타난 방문자를 보러 가기
안녕하신가. 놀랐겠지만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네. 내 말을 좀 들어주겠나?
누구냐? 어디 소속이지?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레지스탕스다. 제국을 싫어하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그쪽에 해가 될 이야기는 아니니 들어보지 않겠나?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배에서 내린 자는
꽤 덩치가 좋은 남자와 금발의 여자였다.
민간인이 절대로 아닌 모습에 테미와 루카스는 긴장했다.
자네들이 천계의 황녀님을 보호하고 있는 건 알고 있네. 우리는 절대 그분을 해할 생각이 없어. 오히려 도움을 주러 왔지.
말했듯이 우리는 제국을 싫어해. 천계가 제국에 넘어가면 우리도 곤란해지지. 제국이 천계의 기술력을 손에 넣으면 우리도 상대하기 어려워지니까.
......
운은 제멋대로 떠드는 캡틴 루터의 말을 들으려 애썼으나
기분 나쁜 잡음이 집중을 방해했다.
그의 무반응을 여유로 받아들인 캡틴 루터는 기분 좋게 웃었다.
라이오닐 대령 맞지? 우리는 외부인이지만 꽤 많은 걸 알고 있다네.
천계의 황녀님이 지원을 부를 곳은 두 곳. 무법지대와 이튼이지. 가장 도움이 될 곳은 이튼이지만 거기 사령관이 꿈지럭대고 있다면서?
우리가 자네들 편에 서면 그 사령관의 마음을 돌리기 더 쉽지 않겠어? 그곳이 싫다면 무법지대로 가도 돼. 뭐, 선택은 자네들이 하라구.
선택...
세인트 혼은 하늘을 나는 배다. 이 거대한 철덩어리밖에 없는 자네들을 바다에서 하늘로 옮겨줄 수 있단 말이야.
그 보답으로 황녀님이 자리를 되찾으면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해. 비밀 후원자가 되어 달라는 거지. 제국과의 동맹을 끊어주면 더 좋겠지만, 우리 사정만 우기지는 않겠어.
어떻게 하죠, 대령님?
테미와 루카스가 동시에 운을 보았다. 운은 숨쉬기가 어려웠다.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모르겠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콜록콜록...
이봐, 괜찮은가? 상태가 말이 아닌 것 같은데. 흐음. 어떻게 된 거지.
황녀님, 황녀님! 위험합니다!
돌연 소란스러워졌다.
루카스와 테미는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경례를 붙였다.
천계의 황녀 에르제는 기침을 하는 운의 옆에 서,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이 왔다 들었네. 대령. 소개를 해줄 수 있겠는가?
오. 천계의 황녀님이신가?
저는 캡틴 루터라고 합니다, 황녀님. 아라드의 제국에 대항하는 혁명군의 부사령관이자 세인트 혼의 선장이지요. 이쪽은 동료이자 선원인 레베카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사과와 이번 사태에 대한 심심한 위로를 함께 표하며, 손을 잡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퀘스트 완료>
…그렇군. 반가운 제안이오.
바람과 파도
제국을 징계하려는 그대들의 의지에 깊이 공감하오. 더구나 같은 사람을 아는 것 같으니, 손을 잡을 이유는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소.
만약 짐이 황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대들의 활동을 지원할 것이며, 추후 제국에 대항하는 문제도 함께 생각할 것이오. 지금은 말밖에 줄 수 없으나 믿어주길 바라오.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피차 도박인 건 마찬가지인데 말밖에 건넬 게 없겠죠.
그럼 황녀님께서는 앞으로 어쩌실 계획이십니까? 이대로 황도로 돌아갈 순 없으니 병력을 끌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소. 그러나 다른 지역 역시 반란군의 수괴에게 포섭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소.
호위 인력이 부족하다면 돕지요. 만에 하나의 경우, 탈출 루트 또한 제공하겠습니다. 그러면 황녀님이 움직이시기 더 쉽겠지요?
하지만 저희 인원이 많지는 않습니다. 호위에도 한계가 있고, 또, 저희가 군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저희가 계속 도와드리는 것이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해하오. 그대들에게도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동맹의 뜻으로 제가 여기 머물도록 하지요. 세인트 혼은 이 배를 따라오게 하겠습니다.
에, 아, 안 됩니다!
...?
루카스 본인을 제외하면 가장 놀란 사람은 테미였다.
무, 무슨 말 하는 거야? 왜 끼어들어?
엑, 저, 저는, 그, 뭐냐... 저기, 당신의 그 뿔... 장식품입니까?
내 뿔? 이건 내 몸의 일부인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지, 진짜였군요... 역시...
황녀님. 절대로 안 됩니다. 옛날, 그 사악한 바칼도 머리에 뿔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칼에게는 동족이 있다고 합니다. 용족이라나 뭐라나... 책에서 본 건데...
젊은 친구.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내가 자네들 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닙니다. 황녀님께서 바칼을 닮은 남자와 동행하시면 문제가 된다고 말하려는 겁니다.
루터는 찌뿌둥한 표정으로 루카스를 쳐다보았고,
황녀 역시 놀란 눈으로 루터와 루카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와준다는데 이것저것 따지는 것만 많네. 그럴 입장이 아닐 텐데.
레베카는 노블스카이호로 내려올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천계인이 확실해 보였으나,
황녀 앞에서 긴장하거나 예의를 차리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진정하라고. 저쪽은 황녀님 입장을 생각 안 할 수 없잖아. 레베카 자네가 내 입장 생각해주는 것처럼 말이야. 안 그래?
캡틴 입장 생각해서가 아니라 시작부터 따지는 게 보기 싫어서 그러죠.
하지만 나라에 관련된 일에 명분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 이해하네, 군인 친구. 요컨대 내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 된다는 거지?
그럼 레베카 양. 자네가 얼굴 마담으로 나서주는 게 좋겠는데? 같은 천계인이니까 이래저래 편할 것 아닌가?
정말이지... 제가 싫다고 몇 번이나...
어휴, 알겠어요. 여기 남아서 서포트하다가 일이 생기면 캡틴에게 연락하면 되는 거죠? 지원은 바로바로 해주세요.
그래. 자네만 믿네.
루터의 유연한 태도에 에르제는 긴장을 덜었다.
이렇게 찾아온 협력자를 내칠 생각은 없었지만,
낯선 이를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해해 주어 고맙소.
별 말씀을. 그럼 황녀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논의가 필요하시면 이 친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승리의 그날을 위해.
황녀 에르제에게 가서 대화를 듣기
<퀘스트 완료>
그대는 천계인인 듯하군. 어쩌다 아랫세계의 제국과 싸우는 자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
제 신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황녀님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실지겠지요.
저희가 협력한다고는 해도 전쟁에 있어 큰 도움은 안 됩니다. 제3의 세력이 황녀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소한 변화만 드릴 뿐이죠.
짐이 기다리던 것이 바로 그 변화였네. 상황의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지. 그게 아무리 작다고 해도, 우리만으로는 일으킬 수 없는 변화야말로 반격의 기점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하려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거친 길을 함께 걸으려면 많은 이들이 필요하네. 대장군이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라이오닐 대령. 왜 그러는가? 안색이 좋지 못한데. 몸이 불편하면 들어가 쉬게.
아까부터 미동조차 하지 않는 운을 이상히 여긴 에르제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운은 황급히 모자 그늘 아래로 얼굴을 숨기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레베카에게 용족에 대해 묻기 시작한 루카스를 제지한 테미가
조심스럽지만 살짝 딱딱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레베카 씨. 미안하지만 당신의 무장을 확인해야겠어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후우. 답답한 곳이군요. 알겠어요. 여기 있는 동안은 따라드리죠.
레베카가 테미와 함께 사라진 후, 황녀 에르제는 주변 사람을 물렸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에르제의 긴 옷자락이 나풀거렸다.
대령.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기다리던 때일세.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 우리가 할 일은 한 줄기 바람을 폭풍으로 만들어 겐트로 향하는 것일세.
에르제의 목소리는 모처럼 활기찼다.
레지스탕스라는 정체 모를 조직이 믿음직스럽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온 그들의 등장이 아무것도 아니지는 않았다.
우리는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닐세. 거센 폭풍은 산조차 깎는 법. 기세가 꺾일 때까지 우리는 기다렸네. 힘들고 막막했으나 모두가 잘 참아 주었네. 이제, 나설 때가 된 것 같네.
다만 분한 것은 이튼이 아직도 방관하고 있다는 점이로군. 노이만은 대대로 충직한 대사제를 지내왔으나, 페트라가 먹칠을 하는 것 같군. 안타까운 일이야.
대령. 어떻게 생각하는가? 역시 웨스피스 사령부로 가는 게 옳지 않겠는가? 그쪽이라면 대장군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제법 있을 터. 이튼처럼 방관만 하지는 않을 것이야. 게다가 자네도...
운은 앞으로의 계획을 그리는 에르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무척 피곤했다.
갑자기 나타난 레지스탕스라는 조직에 대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흐려져 가는 기억 속 누군가의 동명이인과 만난 것도 놀랍지 않았다.
지금껏 동명이인은 수없이 봐왔으니 당연하다.
레베카라는 이름은 흔하다. 사망자 명단에서 수백번은 보았을 것이다.
그때마다 심장이 깎여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왜냐고? 그야 당연히,
어차피 다 죽었는데 뭐.
응? 무슨 말인가?
황녀의 물음에 운은 생각을 입밖으로 꺼냈다는 사실을 느리게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핏기가 빠진 얼굴이 시체처럼 변해갔다.
들켰다.
마지막까지 정상처럼 보여야 했는데. 들켰다.
숨겨야 했는데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을 때 어떻게 하더라.
대령?!
황급히 뻗은 에르제의 손은 군복을 잡지 못했다.
운의 눈은 갑판 너머 푸른 바다에 고정됐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심장 고동과 섞여 온몸을 흔드는 듯했다.
시푸른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운! 운 라이오닐!!
황녀의 부름도, 멀리서 외치는 부하들의 만류도 막지 못한
운의 발걸음을 멈춘 것은 낯선 여성의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돌린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선명한 금발이었다. 운은 눈을 깜빡였다. 깨진 유리조각을 통해 보이는 것 같던 시계가 한순간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 누나다…
배에서 떨어지기 직전인 운의 손을 잡은 것은 에르제였다.
그리고 달려온 사람들이 운을 당겨, 갑판 위에 넘어뜨렸다.
긴 하루의 시작
대령은 자는가?
네. 다행히 찬장 구석에 마지막 진정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요 근래 거의 잠을 못 잤다고 하던데 쉬게 내버려두게.
레베카라 부르면 되는가? 고맙네. 그때 그대가 대령을 부르지 않았다면 뛰어난 인재를 영영 잃을 뻔했어.
돌아다니면서 그런 사람을 몇 명 봤거든요. 도움이 돼서 다행입니다. 황녀님께서 손수 잡으러 갈 정도면 꽤 아끼는 인재인가 보군요.
대장군이 짐에게 보낸 인재일세. 함께 그분을 구하고 천계를 되찾을 것일세. 허나 부상이 채 낫지 않았으니 쉬게 해야겠군.
그건 그렇고, 그대들은 언제 움직일 수 있는가?
언제든지요.
캡틴 말로는 황녀님이 당장 선택해야 하는 곳이 두 가지라던데요. 무법지대. 그리고 이튼. 저희가 살펴본 바로는 이튼은 조용했어요. 하지만 낌새가 좋지는 않더군요.
그리고 무법지대. 거기도 조용하던데요. 소식이 늦는 걸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늦는 건 아닐걸세. 통제하고 있겠지. 신문사 역시 귀족 소유이니, 눈치를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네.
하지만 아무리 통제되어 있어도 이튼의 사령관이 겐트의 반란을 모를 수가 없네. 그녀는 이름 높은 사제일세. 겐트가 통제되어 있다고 한들,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사정을 알아볼 수 있을걸세.
웨스피스 사령부 역시 모르지는 않을걸세. 다만 나엔 박사가 알아본 바로는 이튼은 황도로 보내는 전기 송출량을 조절하고 있다고 하더군. 이번 난리에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게 분명하겠지.
그러니 웨스피스군을 모아 황도로 가야겠네.
좌중은 침묵했다.
운이 불참한 가운데 나엔 및 겐트군, 황녀의 정원은
에르제의 결정을 존중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웨스피스 사령부...에 통신을 보낼까요?
무법지대로 가시는 거면 저희는 뭘할까요?
우선은 짐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네. 짐이 직접 가면 웨스피스 사령부가 무시하지는 못할 테지. 싫어도 움직일 수밖에.
분위기는 무거웠지만 에르제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캡틴 루터와 레베카에 놀라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모험가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상황 때문이 아니라 믿어도 되기에 믿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 적어도, 지금은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아.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다. 나는 정말 큰 복을 받았어.)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군. 말은 않지만 이 여자의 과거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에르제는 추후의 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천계는 갈 길이 멀구나. 언제쯤 백성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까...)
황녀님?
이런.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군. 무슨 말을 하고 있었나?
이분들이 세인트 혼을 확인하고 싶다 하시는군요. 어차피 탈 거라면 도청 위험이 있는 통신보다는 직접 무법지대의 군대로 가서 말을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갑자기 등장하면 저쪽도 대비를 못 하고 있었을 테니 허를 찌를 수 있을 겁니다. 엉뚱한 준비를 할 시간도 없겠죠.
다만 처음부터 사령부로 가는 게 아니라 황녀님 구출 때 협조했던 사람들에게 먼저 가는 게 좋을 거란 의견도 있었어요.
세부 방침에 대해서는 라이오닐 대령이 깨어나면 정하도록 하겠네.
그 남자요?
...황녀님 의견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 상당히 불안해 보이던데요. 패닉을 일으킨 사람이 돌발행동을 하는 건 봐왔지만 지휘관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황녀님 앞에서.
......
엥? 듣고 있자니 아까부터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대령님은 그냥 바다 너머를 보려다가 넘어질 뻔한 거잖아요.
...어, 대위님?
여러 번 말했지만 제발 좀 입 다물어...
그를 현 지휘관으로 명한 건 짐이네. 그가 깨어나면 결정할 것이네.
후우... 네. 그러시죠.
겐트의 네빌로 유르겐을 만나 이야기 듣기
<퀘스트 완료>
[그날의 기록, 셋]
전옥서에서 나눈 대화
유르겐과 잭터
네빌로 유르겐은 종자에게 들려 온 떡을
간수들에게 내어주며 자리를 비켜달라 하였다.
선물을 받아든 간수들은 쭈뼛쭈뼛 눈치를 보았으나
그의 부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종자까지 다 물린 후에야 유르겐은 무거운 문을 열었다.
겐트의 외진 곳에 있는 원형 건물의 지하.
창문도 없고 편히 누울 자리도 없는 좁은 방에는
흰 죄수복을 입은 잭터 이글아이가 있었다.
눈을 감고 정좌를 하고 있던 잭터는
유르겐이 문을 닫고 들어와 마주앉아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이런 곳에 일부러 행차하다니. 무슨 일이오?
행여 불편함은 없는지 여쭈러 왔습니다만.
관두시오. 뭘 말하고 싶은 거요?
잭터는 유르겐과 길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유르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잘 벼린 칼 같은 노장군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본론을 꺼내었다.
에르제 황녀를 부르십시오. 과오를 인정하고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면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바다 한가운데를 떠돌다 죽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유르겐의 말은 단호했고 여지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 잭터는 이상함을 느꼈다.
무엇에 쫓기고 있소?
쫓기는 것은 그쪽이겠지요. 최소한의 인정으로써 살길을 베풀어 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대장군이었던 당신의 마지막 의무라고도 생각합니다.
나더러 황녀님을 저잣거리에 불러 쫓겨나게 하라는 건가. 하하! 내 쓸모가 그것밖에 없다면 오늘이라도 목을 치시오.
세상에 집 지키는 개를 버리는 주인은 있어도 주인을 버리는 개는 없소. 이리 떼가 모인 곳에 왜 부른단 말이오?
그럼 어쩔 생각입니까? 저대로 부평초처럼 떠돌다 죽게 만들 셈입니까?
확실하게 말하지요. 나는 황녀를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젊은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지금 형편을 따질 때가 아니라는 걸 아십시오.
우습군.
우습소. 그대가 그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겠군. 황녀님이 나에게 좌지우지되어 흔들리는 나약한 겁쟁이라 생각했소? 조금 으름장을 놓으면 무서워서 덜덜 떨 거라고?
카르텔에 잡혀가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던 분께 너무한 평가로군. 그분의 배짱은 나보다 대단할 텐데.
잭터는 유쾌하게 웃었다. 유르겐은 별로 즐겁지 않았다.
네빌로. 나야말로 제안하지. 지금 당장 딸과 주동자들을 포박하고 황녀님 앞에 부복하시오. 그러면 가문만은 부지할 수 있을 테니.
생각을 돌릴 시간을 드리지요. 망망대해에 황녀를 버린 것은 당신입니다.
유르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잭터는 대귀족의 등을 향해 말했다.
싸우고자 했으면 적이거늘, 아직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데 칠 수나 있겠소?
허수아비일 뿐입니다. 다만 이 나라엔 법이 있으니 절차를 밟기 전까지 이렇게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법이라. 그렇게 법을 잘 지키는 자가 왜 제국을 끌어들여 천계에 소란을 일으키게 만든 거요?
유르겐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대답을 피한다면 잭터에게 지는 기분이 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은 도구지요. 쓰고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수는 많으나, 어리석고, 옛 문물에 지나치게 의존합니다. 그들의 피로써 우리가 바로 선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어딨겠습니까.
그래서 같은 천계 백성인 무법지대를 버리고 그들을 취한 거요?
버린 적 없습니다. 치워두었을 뿐이지요. 무법지대도 언젠가는 천계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즐거이 술을 나눌 것입니다.
법이 바로 섰을 때.
법이 바로 섰을 때?
하늘의 복과 벌이 법규를 무시하고 법치를 위협합니다. 법을 가리켜야 할 귀족이 사제복을 입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하늘의 길이 있을지언정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곳은 땅인데 가당한 일입니까?
바꿀 것입니다. 이치에 맞는 법이 변덕스러운 하늘을 대신할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겠지요. 오늘이 구시대와 신시대의 기점이라면, 옛 것에 바치는 제물이 하나쯤 필요하겠지요.
무슨 말이 하고 싶소?
마을이 깨끗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쓰레기를 버릴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계가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은 아침에 맛없는 아침밥을 삼키며 무법지대를 원망하고, 점심에 죄인을 손가락질하며 무법지대에 버리라 합니다. 저녁에는 아이를 가르치며 무법지대를 무서워하라 하지요.
무법지대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바꾸는 것은 법이 바로 선 후입니다. 사람의 합리에 맞는 법이 마음과 몸을 다스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법지대의 흙탕물에서 조금씩 진흙을 빼낼 수 있겠지요.
그리고 진흙을 빼는 데 굳이 맨손으로 할 필요 없겠지요. 장갑이나 삽이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제국이 도구라 말씀드렸지요? 여기에 쓸 생각입니다.
무슨 얘기를 그리 길게 하나 했더니. 고작 그 말이오?
무법지대 출신인 잭터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빛은 이글아이 그 자체였다.
적을 꿰뚫는다는 그 시선을 유르겐은 선선히 넘겼다.
맞습니다. 기본을 말한 것뿐입니다. 잘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사지로 집어넣은 당신이라면.
궤변이오.
후세가 평가할 것입니다. 역사라는 강물 앞에서 당신과 내가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유르겐은 밖으로 나갔다.
간수 옆에 서 있던 종자가 다가오자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처형을 서둘러라.
겐트의 하이람을 만나 이야기 듣기
<퀘스트 완료>
[그날의 기록, 넷]
얽히고 설킨 계획
하이람은 마리안 유르겐의 부름을 받고 발걸음을 옮겼다.
통보받은 회의실에 들어가니 짜증스러워 하는 마리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날이 좋군요. 하실 말씀이 뭡니까?
언제 자네 일을 하러 갈 건가? 이곳의 정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하이람은 마리안이 어서 에르제를 잡아오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마리안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하이람은 빠른 말투로 재차 종용하는 마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담하게 황녀를 쫓아낸 마리안이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초조해 보였다.
전란을 겪으며 다친 사람들의 마음에는 빈틈이 생겨났다.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현실의 배고픔과 아픔,
그리고 미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란이 성공한 것은 그 틈을 파고든 덕분이었다.
차별과 갈등 속 불만을 교묘하게 황녀와 잭터에게로 옮겼다.
황녀 측근이라 할 수 있는 황녀의 정원을 내분시킨 것도
그러한 공작이 유효했기 때문이었다.
빼앗긴 것이 많은 이들을 선동하는 것은 쉬웠다.
'예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한마디가 뭇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유약한 황녀 때문에 카르텔이 활개를 쳤다는 황녀책임론은 많은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일도 많았다.
방해가 많을 거라는 것쯤 예상한 바였지만
누구보다도 마리안을 방해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인 네빌로 유르겐이었다.
유르겐은 마리안이 모아온 귀족들의 사병을 움직여
겐트 정비를 하는 것도 모자라,
제국측과 접촉하여 동맹을 성사시킨 것이 자신임을 확실히 보였다.
전력 공급을 들먹이며 콧바람 한번 내보려는 이튼을
식량 보급을 움켜쥐고 맞받아친 것도 그였다.
마리안에게 소식이 오기도 전에 움직였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마리안은 아버지를 향한 분노 때문에 하루하루 미칠 지경이었다.
이를 뒤엎으려면 성과가 필요했다.
황녀가 죽어야 우리가 산단 말일세. 하루 빨리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하늘을 만들어야 하네. 처형날이 바로 새 하늘이 열리는 날이 될 것이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게 있을 텐데요.
이글아이 말인가. 황녀를 잡아오면 함께 처형하세.
그래선 늦습니다. 굳이 함께 처형할 이유가 뭐죠? 황녀가 저리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도 다 이글아이를 구출하면 길이 열린다고 보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하이람의 지적을 들은 마리안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빴다. 군인은 그저 지시를 따르면 되는 것이다.
군인 나부랭이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가? 살려두는 것은 아직 쓸 데가 있기 때문이야. 반드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황녀나 잡아오게.
마리안은 아직 할말이 남아있는 하이람을 남겨두고 방에서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멍청한 군인에게 벼루라도 던지고 싶었다.
감히 군인 주제에 귀족의, 그것도 대귀족의 말에 반박을 해?
마리안은 알고 있었다. 하이람은 그다지 쓸모 있는 장기말이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쓰고 있었기에 빼앗은 것이다.
이렇게 건방질 줄 알았다면 그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아버지. 아버지!
네빌로 유르겐을 생각할 때마다 마리안은 화를 누르기 힘들었다.
수족인 하이람이 없어졌는데, 그의 계획을 부수었는데,
최근 행보를 보면 마리안은 안중에도 없다.
오죽하면 황녀옹호파가 마리안의 눈을 피해
그에게 접촉하여 눈물로 호소를 할까.
게다가 숨기지도 않는 걸 보니,
정말로 딸인 자신과 싸울 생각인 듯하다.
(흥. 이 나라를 위해 지금 어떤 행동을 취해야할지 정말 모른다면 아버님이라 하더라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황궁의 작은 회의실 앞에서 마리안은 잠시 심호흡을 하였다.
그녀의 눈에는 다시 의지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두고 보십시오. 당신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리안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초로의 여성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웨인 공.
겐트의 젤딘 슈나이더를 만나 이야기 듣기
<퀘스트 완료>
겐트의 해안 수비대
급하게 현장에 도착한 해안수비대를 맞이한 것은
노점에서 군것질거리를 사먹고 있는 젤딘과 겐트 수비대원들이었다.
행인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안수비대를 쳐다볼 뿐,
민란이나 도적떼와 같은 험한 단어가 튀어나올 구석은 없었다.
대체 뭐야? 무슨 일입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온 건가?
안녕하세요… 무장집단이 시장 한가운데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무장집단? 지금 내가 보기엔 우리밖에 없는 것 같은데.
덩치 큰 겐트 수비대원들은 떡을 질겅질겅 씹으며 해안수비대원들을 꼬나보았다. 코엔은 당황하여 손사레를 쳤고 허크는 머리를 사납게 긁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요... 저희가 왜 겐트 수비대를 체포하러 오겠습니까? 거 왜 요즘 이상한 삐라를 뿌려대는 도적떼가 또 나타났나 했죠.
흠. 그런 놈들이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간식이나 사먹고 있을까?
그렇네요. 오보였나 봅니다. 쉬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허탕을 치고 돌아온 허크와 코엔을 본 하이람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아닐 거라 했잖아.
그럼 어떡합니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겐트 수비대는 비협조적인데 아니, 어떨 땐 부추기고 있는 것 같다니까요?
황녀가 겐트를 비운 후,
'자경단'이라는 집단이 겐트 곳곳에 출몰하여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자극적인 문구의 전단지를 붙이는가 하면,
해안수비대가 머무르고 있는 숙소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들은 황녀 에르제와 잭터 이글아이를 되찾고,
반역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세력은 그리 크지 않지만 어찌나 재빠른지,
카르텔과 싸운 해안수비대도 아직 그들을 잡지 못했다.
겐트 수비대가 방해를 해서 그렇다니까요? '비협조' 정도가 아니라고요. 연결 관계가 있는 거 아닌지 알아봐야 돼요.
내버려둬. 어차피 별 짓 못 해.
겐트 사람들이 동요할 텐데요...?
뮤우의 걱정에도 하이람은 태연했다.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냐. 혼란하면 겐트 경비가 문제인 거니 젤딘 탓을 할 수 있어 오히려 좋지.
몇 번 말했지만 아직 우리가 드러내놓고 나설 때가 아냐. 우리는 어디까지나 도구인 것처럼 보이면 돼.
그거 몇 번을 들어도 기분 나쁜데요.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안 다치려면 이러는 게 맞아.
하이람은 투덜거리는 허크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물론 이렇게 숨는다고 해서 반역죄가 안 따라오는 건 아냐. 그러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귀족들을 향해 있을 때, 우리는 무법지대 놈들을 수장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해.
무법지대 사람이라고 해서... 다 나쁜 건 아니었는데 꼭 그래야 할까요?
한두 명 봐준 결과가 카르텔이야. 말했을 텐데?
...내 스승님도 너처럼 생각하다가 돌아가셨다고. 여기 있는 모두가, '착한 줄 알았던' 놈들에게 뒷통수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구.
네...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어.
그리고 명심해. 우리의 적은 무법지대뿐만이 아냐. 우리 같은 녀석들을 일회용으로 생각하는 귀족들 역시 적이다. 자기네들 좋을대로 써먹던 더 컴퍼니를 어떻게 했는지 다 알지?
귀족들의 위협이 된다며 제거 당했죠... 카르텔 전쟁도 끝났고 사도도 죽었으니 다음 타겟은 우리겠지요.
유르겐도 대장님을 신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군인무용론'이나 밀어붙였고요. 쳇. 말이 돼요? 군대를 즉석 군인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웃겨요.
다른 대원들도 흥분하여 한 마디씩 거들었다.
잭터가 군비 축소로 인해 시달렸던 것처럼, 하이람도 많은 곤란을 겪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잭터는 정책으로써 대응했고,
하이람은 부하들과 함께 귀족들에 대한 분노를 착실히 쌓아갔다는 것이다.
존경하는 대장과 동료들이 한마음으로 뭉치는 것을 보며
코엔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겐트의 황녀 이자벨라를 만나 이야기 듣기
<퀘스트 완료>
[그날의 기록, 여섯]
제국의 황녀, 이자벨라
이자벨라의 계획
어휴, 화나!
겐트 황궁에 있는 손님용 방.
제국의 황녀는 자신에게 배정된 방에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지금의 감정을 매우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사이러스는 이런 이자벨라의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익숙해진 참이었다.
그러신 것 같군요. 또 그 멍청한 놈이 문제입니까?
그래. 그 아저씨, 진짜 사람 기분 나쁘게 할 줄 안다니깐.
황녀는 계속 투덜거렸고 사이러스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겐트에 온 이래로 이자벨라의 기분이 계속 좋지 않다.
황녀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계속 저기압이신 것 같군요. 마계 탐사를 방해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그래 보여? 역시 사이러스에겐 숨기질 못하겠네. 바깥에서는 잘 숨기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게…, 사실은,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그래서 잘못 생각했던 나에게 좀 화가 난 것 같아.
난 처음에 에르제가 그런 식으로 쫓겨난 게 마음이 아팠어. 하지만 유르겐 공의 말처럼 그 애가 서툴러서 뭔가 잘못했을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이상하잖아. 황제가 잘못을 저질렀다 쳐. 그걸 왜 귀족들이 평가하지? 어떻게 감히?
아무리 제국과 천계가 다르다곤 해도... 귀족들이 에르제를 해치지 않을 거란 걸 듣고 순진하게 기뻐했던 내가 부끄러워.
말씀대로 천계는 제국처럼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황제도 없고요. 그러니 그렇게 생각 못 하셨던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으응. 그렇게 말하면 그렇긴 하지만...
후우. 솔직히 천계는 제국보다 뒤떨어지는 면이 많아. 하지만 천계는 혼자 덩그러니 있는 나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해. 말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면 제멋대로 크잖아?
천계의 황녀를 동정하시는 거면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슈만 공에게 들켜봤자 골치만 아프게 되겠지요.
가슴이 답답한 이유를 명쾌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자벨라의 말을 들으며
사이러스는 행여나 싶어 못을 박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자벨라의 짜증을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가 황녀인데 왜 그 뚱뚱이 아저씨 때문에 골치 아파야 하는 거냐구? 정말, 아바마마도 무슨 생각이신지.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자벨라는 창 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황녀의 고운 얼굴에 그늘이 진 모습을 보던 사이러스는
망설이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시험이 아니겠습니까?
시험?
폐하께서는 황녀님을 이미 사절로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황녀님을 본국으로 부르지도 않은 채 슈만 공을 보내셨지요. 이렇게 일 처리를 하실 분이 아닙니다.
만약 먼저 보낸 황녀님을 정말로 후임자의 제어하에 두실 생각이었다면...
공작이잖아.
하지만 슈만이죠.
흐응.
무기력하던 이자벨라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네. 아바마마가 날 방해하실 리 없지. 슈만 공을 좀 놀래켜볼까? 사이러스도 물론 도와줄 거지?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시길. 심장이 좋을 것처럼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이러스는 정말 염려되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의기양양하게 방 안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사이러스도 참. 혼날 정도로는 하지 않을 거야. 아바마마께 내 역량을 보여드리기만 할 거라구.
어떻게 해야 인상적이려나. 아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천계를 안정된 국가로 만들어 보는 게 좋겠어. 명색이 제국의 동맹국인데 황녀가 시도 때도 없이 쫓겨나서야 어떻게 동맹 관계를 유지하겠어?
발슈테트 공이 없으니 젤바에 대기하고 있는 아이언울프는 쓰지 못하겠지. 그거까지 건드렸다간 정말 혼날 거고... 지금 당장은 내 호위병밖에 없네. 하지만 발슈테트 공을 따라온 제국군이라면...
...응. 그래. 대충 끌어올 수 있겠네. 좋아. 겐트를 손에 넣자구!
선물을 고르는 아이처럼 신난 이자벨라를 보며 사이러스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마수 이식 때도 하지 않았던 걱정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노블스카이의 황녀 에르제를 만나 이야기 듣기
<퀘스트 완료>
[그날의 기록, 일곱]
천계의 황녀, 에르제
그래.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들었네. 무슨 일인가?
네. 제가 감히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황녀님께서 웨스피스의 사령부에 먼저 가실 계획이라면 변경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루카스 옆에 있던 테미는 하마터면 군내 폭력의 새로운 장을 열 뻔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루카스는 긴장한 탓에 폭발하기 직전인 테미를 보지 못했다.
에르제는 뒷말을 재촉했고,
그래서 그는 하루 종일 고민하던 생각을 더듬더듬 풀어나갔다.
어, 황녀님께서 웨스피스로 가시는 게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쪽은 정규군이 심하게 모자라서 소년병 제한을 풀기도 했고, 또, 카르텔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소집단이 우후죽순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그쪽 사령부의 사정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할까요. 물론 황녀님께서도 이미 다 고려하시고서 결정하셨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네. 허나 최선이 없는 상황에서 차악을 고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저도 그 부분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튼에는 물자도 있고 인재도 있습니다. 선택지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알고 있네. 그러나...
황녀님께서는 무법지대의 황녀님이십니까? 천계의 황녀님이시잖습니까. 그런데 왜 이튼에는 기회조차 주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충분한 능력이 되는데도 짐을 도우러 오지 않았네.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것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황녀님께서는 굳게 닫힌 겐트로 돌아가시려 하면서 어찌 이튼을 두려워 하십니까?
이튼으로 가는 것이 잘못된 시도라면 어찌할 것인가. 웨스피스의 병력 없이 무작정 그곳으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보는가?
그렇다고 저들의 진의를 확인하지도 않으시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이대로 웨스피스 사령부로 곧장 가시면, 황녀님의 입지만 불안해질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황녀님의 무법지대 정책을 문제 삼고 있는데, 지금 여기서 바로 그쪽으로 가버리면 그들의 명분을 강화시켜줄 뿐 아니겠습니까.
레지스탕스를 믿어도 될지는 확신이 없지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더 생긴 지금, 제1의 선택을 무법지대로 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튼의 사령관님은...
에르제와 루카스의 이야기는 점점 정치적인 문제로 넘어갔다.
테미가 불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두 명의 이야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녀님의 걱정은 저도 똑같이, 아니, 제가 더 하고 있을 겁니다. 만약 일이 틀어지면, 어,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먼저 죽는 건 저일 테니까요. 하지만 황녀님께선 저희를 너무 아끼시면 안 됩니다.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루카스의 마지막 한 마디에 에르제가 입을 다물었다.
황녀는 화가 난듯도, 슬퍼하는 듯도 보였다.
돌아가 주게.
황녀님.
혼자 있고 싶군.
루카스는 아직 할말이 많이 남아 있었다.
테미가 몰래 꼬집으며 억지로 끌고 나가지 않았더라면
몇 마디는 더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에르제는 두 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새카맣게 보이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했다.
루카스의 말은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여러 번 생각한 바였다.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무법지대에 납치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으나,
자신의 입으로 그곳에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황궁에 앉아 그곳의 백성들을 염려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튼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더 큰 두려움 때문이었다.
외로운 자리. 실로 그렇다.
도와주려는 이는 있지만 그들이 이 자리를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혼자라는 두려움은 차가운 황궁에 내던져졌을 때부터 줄곧 안고 있었던 것이었다.
카르텔의 폭도들 사이에서
홀로 달을 올려다 보며 삼켜야 했던 외로움보다도 더한 것은,
도와줄 것이라 믿었던 이들의 배신이었다.
일부라고는 해도 그녀에게 반기를 든 이들 중에는
황녀의 정원과 황도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 배신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발끝을 한참이나 내려보던 에르제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수면에 닿은 태양이 쏘아낸 황금빛에 물든 에르제는
바로 이 순간을 영원인 것처럼 바라보았다.
천계의 황녀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무법지대의 황녀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하는가? 그 지경까지 떨어졌단 말인가? 지켜야 할 백성과 역사가 저렇게나 많거늘. 아직도 흔들리는가?
에르제는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초점 없이 수평선만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그 너머에 있을 이튼뿐 아니라, 천계 전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천계의 황녀다.
차라리 우는 것처럼 보이던 에르제의 표정이 천천히 바뀌었다.
놀라움, 기쁨, 두려움, 사랑, 분노.
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며 겪는 모든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어린 계집아. 네 무엇이 그토록 두려우냐. 홍역 한 번에 남은 삶이 그토록 멀고 무서운 것이냐?
에르제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소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듣고 싶은 목소리라고도 생각했다.
내가 천계다. 이 땅과 백성, 역사가 바로 나다. 이 모든 일은 나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 나의 몸이 나를 죽인다 하여도 그것은 내가 하는 일.
나를 내가 무서워할 것이냐? 그 차가운 방에서 떨었던 어린애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냐? 아니다. 나는 그때 죽었다. 어머니가 주신 육신은 죽고 천계의 혼으로 새로이 태어났다.
가야겠구나. 나는 이대로 병을 안은 채 스러질 수는 없다. 고름을 쨀 손을 무서워 할 이유도 없다. 팔이 저리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다.
에르제는 한 걸음씩 내딛었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걸음에 집중하고 있자니,
어느새 갑판 위에 올라 있었다.
바람을 쐬며 이야기하던 사람들의 눈이 모였다.
황녀는 그들 앞으로 곧게 걸었다.
나엔 박사. 여기서 가장 가까운 항구는 어딘가?
에..., 이, 이튼에 있는데요...
그런가. 그럼 그리로 가지.
무법지대에 가, 가신다고 하셨던 거... 아, 아닌가요?
에르제는 긴 소맷자락 속에 숨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일이 급한데 가까운 곳으로 먼저 가보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에르제는 생각했다. 이 간단한 지시는 이제껏 할 수 없었던 말이다.
납치된 이후 계속 떨쳐내지 못하고 있던
카르텔의 망령에서 겨우 해방된 기분이었다.
에, 그건 그런데...
나엔은 왜 황녀가 말을 바꾸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에르제는 의문을 가진 채 침묵하는 면면을 바라보았다.
놀라고는 있으나, 부정적인 감정이 섞인 것 같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확신할 수 있었다.
운은, 어, 아직 자고 있는데요...?
쉬게 두게. 대령도 좀 쉬어야지. 나는 혼자 걸을 수 있네.
네?
아무것도 아닐세. 이튼으로 뱃머리를 돌려주게나.
당황해하던 나엔은 침착한 황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정을 찾았다.
곧장 조타실로 달려가는 나엔의 모습을
멀리서 보던 레베카가 황녀 옆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생각이 바뀌신 건가요?
눈을 떴을 뿐이네.
...세인트 혼에 대기하라고 전할까요?
거리를 유지하고 지켜보라고 하게.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과시할 생각도 없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갸웃거리고만 있는 레베카에게
에르제가 활짝 웃어보였다.
레베카는 처음 보는 황녀의 밝은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대는 천계에 불만이 많은 것 같던데.
네? 음... 불만이랄까, 사실 기억도 별로 없어서요. 사고를 당했는지 예전 일은 아무것도 못 떠올리겠더군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레베카는 숨기고 있으려던 비밀을 툭 내뱉은 자신을 탓했다.
캡틴에게나 겨우 말한 건데 왜 말했을까.
그런가. 그럼 더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겠군. 그러면 언젠가는 그대도 천계를 사랑할 수 있게 되겠지.
레베카는 하고 싶은 많은 질문을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낮에 보았을 때만 해도 엄숙하고 진지하여 웃음이라곤 모르던 황녀가
왜 갑자기 달라진 걸까? 상황은 아무것도 안 바뀌었는데.
속도를 내기 시작한 노블스카이 호에 몸을 실은 채,
레베카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에르제를 조용히 관찰하였다.
이튼의 중장 니베르에게 가서 대화를 듣기
<퀘스트 완료>
[그날의 기록, 마지막]
이튼에 모인 사람들
만약 일이 틀어지면 네 귓구멍을 꽃병으로 쓸 거야.
살다살다 이런 위협은 처음이구만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제대로 깨웠슴다! 늦은 건 중장님 탓이라고요!
그래그래. 알았어. 하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 내가 사령관님 몰래 노블스카이를 관찰하라고 말한 게 오늘... 어제 오전인데, 아무리 내 촉이 좋아도... 하아암, 밤에 일이 터진다는 게 말이...
벌레마저 잠든 깊은 밤.
허둥지둥 찾아와 자신을 깨운 부하의 뒤를 따라가며
끊임없이 투덜거리던 니베르가 입을 다물었다.
콘은 마치 자기가 부르기라도 했다는 듯
멀리 항구로 들어오는 배를 가리켰다.
노블스카이호. 안톤과 싸우기 위해 이튼에 왔고,
황녀가 쫓겨난 후 사라졌던 배가 저기 오고 있었다.
왜 항구에 이튼군이 모여있지? 사령관 아줌마도 여기 온 건가?
콘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니베르가 빠르게 걸었다.
전기 절약을 이유로 최소한의 불빛만 허락되었던 항구는 한낮처럼 밝았다.
전날 오전, 니베르는 페트라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이튼의 총독,
혹은 그 비슷한 것이 될 생각이라는 것은 확신했다.
다만 그의 고민처럼, 페트라에게는 홀로서기를 할 뜻은 없었다.
총독은 어디까지나 누군가에게 임명받는 자리니까.
말한 대로 해놨지? 우리 아줌마가 갑자기 왜 이튼으로 왔는지 훈련병부터 콜라 냉장고 망가뜨린 취사병까지 다 알게 하라고 했잖아.
어느 정도는요. 잘나신 유르겐 공이 사제들을 싫어해서 도망쳐 온 거라곤 말했죠. 근데 진짜예요? 아무리 그래도 대사제인데, 유르겐한텐 못 당하는 겁니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우리는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
페트라에게 독립국을 만들 생각은 없다.
그녀는 절대로 아랫세계로 도망간 야심가가 될 생각이 없다.
다만 자율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는 이튼의 대표가 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황녀의 편이 될 수밖에 없게 한다.
페트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한편,
황도에서 '버려진' 동질감을 유발하여
이튼이 페트라와 함께 귀족의 황도를 적대하게 한다.
그런 후 연락이 되지 않는 노블스카이와 접촉하여 이튼에 오게 한 후,
겐트의 반란을 폭로한다.
황도 중심 정치에 불만을 가진 이튼인은 많다.
그러나 황녀 역시 피해자라는 것을 알리고
이튼과 약속을 해주기만 하면 이튼을 황녀편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근데 황녀님이 좀 빨리 오신 것 같네요.
황녀님이 오신 건 괜찮아. 아줌마가 우리가 퍼뜨린 소문을 들었는지가 문제야. 이튼이 황녀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어도, 반란에 동조할 정도는 아닐 거야. 하지만 결정하는 건 그 아줌마니까.
근데 중장님 생각이 잘못된 거면요? 사령관님이 황녀님을 잡아다가 겐트 반란군에 바치려고 할 수도 있잖슴까?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럼 뭐... 싸워야지. 별 수 있냐.
하하! 그거 좋구만요!
태연하게 대답했어도 니베르 역시 불안했다.
겨우 항구에 도착해 노블스카이가 정박하려는 부두로 급하게 달리는 와중에
잭터가 농담삼아 하던 말이 생각났다.
'막히면 일단 던지고 봐라.'
상황이 안 좋으면 수류탄이나 하나 던져 볼까.
그만 두세요.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온 비연에 콘과 니베르는 점잖지 못한 소리를 질렀다.
아오, XX, 깜짝이야. 넌 왜 거기서 튀어나와?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백업하려고요. 페럴 님도 도와주실 테니 침착하게 나가세요.
비연의 말을 듣고 보니 이튼 병사 몇몇이
달려오는 니베르와 콘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니베르는 헛기침을 한 후 천천히 걸어갔다.
다행히 이튼의 사령관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황녀 역시 노블스카이에서 내려,
페트라의 앞에 서 있었다.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만.
이 땅에서 짐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제가 이튼에 온 이후로 한 번도 오시지 않던 분이. 공장을 알아서 고치라면서 황도에 앉아 계실 뿐 아니었습니까?
귀를 기울이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에르제를 쳐다보았다.
잭터가 황도군을 이끌고 안톤을 막으러 왔기에
무법지대 친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황도보다 적을 뿐이지,
에르제의 행보를 의심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에르제는 조용한 병사들의 정신적인 불안과 불만을 가만히 느꼈다.
후회와 미안함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페트라는 여유로웠다.
황녀의 대답을 거의 완벽히 예상하고 있었다.
사과하는 에르제를 탓하며 원하는 것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황녀를 확보한 후, 상황에 따라 황녀를 겐트로 송환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제발로 찾아온 황녀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페트라의 준비는 거의 끝나 있었다.
그러나 에르제의 대답은 페트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랬지. 그래서 그대를 보내지 않았는가.
...네?
'신이 거하는 곳' 겐트에는 짐이 있었네. 그리고 이곳에는 대사제 출신이었던 그대를 보내지 않았나.
아니 그건, 그런 상황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네빌로 유르겐이...
당황하여 부인하려던 페트라가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이튼 병사들은 그날 돌던 소문이 진짜였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린 건 짐이었지. 천계 그 어디에 짐과 함께 신을 받들던 대사제가 사령부에 부임한 적이 있는가?
페트라는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였지만,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황녀를 제외한 대사제가 단번에 군 사령관이 된 경우는
페트라 자신이 유일하다.
에르제는 페트라를 냉정하게 쳐다보며, 주변에 잘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짐이 배울 것이 많아 이튼에 오지는 못하였으나, 짐의 대사제를 사령관으로 보내었다. 사령관으로서 잘 할 수 있을지는 고민스러웠으나 들리는 이야기가 썩 나쁘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짐의 권위는 하늘에서 오는 것. 하늘이란 천계를 의미하니, 짐의 뜻과 천계의 의지가 이튼을 외면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 대답하라. 페트라 노이만.
페트라는 자신의 대사제직이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에르제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황녀를 압박하기 위해 끌고 온 병사들 앞에서 말할 수 없었다.
왜 굴욕을 견디며 이튼으로 옮겨가 긴 싸움을 하였는가?
바로 자신이 기회를 잡는 그날,
모든 것은 하늘의 총애라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에르제는 페트라의 분노 앞에 사과하지 않았다.
페트라 역시 천계의 일원이고, 천계는 에르제 자신이기 때문에
조그만 아픔 정도는 필요에 따라 참을 수 있었다.
바람이 차갑군. 사령부로 안내하게.
이튼의 병사들이여. 새벽잠을 깨워 미안하다. 별일 아니니 들어가 쉬어라.
에르제는 페트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었다.
니베르가 얼른 황녀를 따라 걸었고,
노블스카이에서 내린 호위대가 콘과 함께 뒤따라갔다.
머뭇거리던 이튼군도 페트라를 놔둔 채 황녀를 따라갔다.
멋지군. 대관식 같아.
무슨 말씀이세요? 황녀님의 대관식은 예전에 끝났어요.
세인트 혼에 내린 어둠 속에서 루터가 가볍게 웃었다.
그때야 남이 입혀주는 옷을 입고 남들 시키는 대로 했겠지. 내가 보기엔 이제야 자기 혼자 걸어가시는 것 같은데.
왕은 스스로 서는 거야. 바칼 씨도 그랬지.
기가 막혀... 그 폭군이랑 비교하지 말아주시겠어요? 아무튼 캡틴은 안쪽에 들어가 계세요. 괜히 들켰다간 다 틀어질 테니까.
레베카가 루터의 등을 밀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파도 소리가 잠든 새벽이었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나란히 선 노블스카이의 갑판까지 잘 들렸다.
......
모두가 나가고 텅 빈 쇳덩어리 배 위에서
운은 세인트 혼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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