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시턴의 마계 생물기
Prologue. 괴학자
전사에게 상흔은 경험 혹은 용기의 징표지만, 마력을 잃는 일은 존중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그들이 평생 마주해야 하는 시선은 존중보다는 경멸과 조롱에 가깝다. -학회 소속 마법사의 업무 일지 중에서
“애시! 그 안에 있는 거 다 안다. 얼른 문 열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나는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 오는 길이었다. 소음의 진원지는 뜻밖에도 내 연구실 앞이었다. 스키페 교수가 연구실 앞에서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그가 체중을 실어 두들기자 오래된 나무문은 경첩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흔들렸다.
“셋 셀 동안 대답 없으면 부수고 들어가겠다!”
스키페 교수는 큰 소리로 셋까지 숫자를 세더니 깊게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양팔에 거센 돌풍이 휘감겼다.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열려 있어요. 안엔 아무도 없지만.”
스키페 교수는 간신히 마력을 발출하는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경첩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다행히 문은 아무런 이상없이 열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문이 박살난 영문도 모를 뻔했네요.”
그는 민망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연구실은 내가 떠났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생물들의 표본은 여전히 연구실 곳곳에 빨래처럼 이리저리 널려 있었고, 책상과 침대에는 내가 읽다 만 책과 논문이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연구실은 썩어가는 냄새로 가득했다.
“냄새가 좀 독하죠? 아우쿠소가 벌레를 안 먹고 얼마나 버티는지 실험 중이라서요.”
나는 되도 않는 농담을 하며 창가의 화분을 가리켰다. 생물학 교수가 된 날 그에게 선물 받은 꽃이었다. 어떠한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다고 알려진 마계화가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말라비틀어져가고 있었다. 스키페 교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생물학자라는 녀석이 정작 연구실의 꽃 하나 돌보지 못하는구나.”
그는 연구실의 창문을 한껏 열어젖혔다.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연구실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품에서 기절한 생쥐 한 마리를 꺼내더니 화분 앞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미동도 없던 아우쿠소가 움직인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우쿠소는 가시 돋은 뿌리를 움직여 번개처럼 생쥐를 낚아챘다. 으적거리는 소리가 적막한 연구실 안을 울렸다.
“지도에, 마법석에, 스코프까지… 멀리 이사라도 가는 거냐?”
스키페 교수가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발로 헤집으며 물었다. 꽤나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물건들에서 한바탕 먼지가 일었다.
“다 알고 오셨으면서 뭘 굳이 물어보세요.”
나는 먹을 것을 감추다 들킨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 네 녀석의 자살 여행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달려온 참이다.”
“자살 여행이 아니라…”
스키페 교수는 내 말을 듣지 않고 품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학회에서 붙인 벽보였다. 어딘가 붙어 있던 걸 급하게 뜯어온 모양인지 윗부분이 조금 찢어져 있었다. 벽보의 여백에는 누군가 악의적으로 적은 게 분명한 상스러운 낙서들이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낙서는 여백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고 모두 다른 글씨체였다.
“애시. 마계 8면을 돌아다니는 건 노련한 헌터들에게도 위험한 일이다. 게다가 생물들을 찾아 직접 조사하겠다니 그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냐?”
나는 그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벽보 한쪽에 적힌 낙서를 짚으며 읽어 내렸다.
“‘마력을 잃은 마법사가 과연 학회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핵심을 찌르는 문구네요.”
“그런 멍청이들의 말은 무시해도 된다. 네 연구의 발끝도 못 따라오는 녀석들이니까.”
“하지만 그 멍청이들도 마법은 사용할 수 있죠.”
“허튼 소리! 다리 하나가 분질러져야 말을 듣겠느냐?”
스키페 교수가 목청을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센 돌풍이 그의 주변에서 몰아치며 근처에 있던 물건을 이리저리 날려보냈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 손을 들었지만, 손에 들려있던 벽보만 돌풍에 휘말려 날아갔다. 지저분하던 연구실은 순식간에 폭풍이라도 휩쓸고 간 것처럼 변했다.
“애시, 솔직하게 말해 다오.” 스키페 교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교수직을 포기한 것도, 이번 연구에 자원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냐? 유치한 낙서나 남기는 멍청이들을 피해 학회를 떠나고 싶어서?”
“교수님. 저는 그저 생물들을 연구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연구실로 배달되는 표본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짜 생물들이요.”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침묵의 끝에서 스키페 교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브롱크스의 폐허에서 젖먹이였던 널 학회에 데리고 왔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먼 곳을 더듬고 있었다. “사람들은 너를 천재라고 치켜세웠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가만히 있는 걸 한시도 견디지 못하는 어린아이였다. 몰두할 것이 생기면 밤낮없이 파고들면서 열정을 불태웠지. 마치 그게 네 존재 의미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어쩌면 이제 그 불길이 마법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간 걸지도 모르겠구나.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 떠나겠느냐?”
“예전에 그러셨잖아요. 제 이름이 ‘고집’이란 뜻이라고.”
“고집이 아니라 ‘굳은 의지’라고 했지.” 스키페 교수는 체념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고집을 부린 건 아무래도 내 쪽인 것 같구나. 아무리 꽉 움켜쥐어도 손 안의 모래는 빠져나가기 마련인데 말이야. 그래서 언제 떠날 생각이냐?”
“빠를수록 좋겠죠. 아드닐만 준비가 끝나면 오늘이라도 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마침 아트로픽이 브루클린 근처를 지나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드닐도 같이? 학회에서 그걸 허가해줬느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괄량이 아가씨가 동행한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어쩌면 학회가 너에게 생각보다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생존 신고는 월례 보고서로 대신할게요.”
스키페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했다. 나는 그를 입구까지 배웅했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돌아오너라.”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을 알아챘는지 스키페 교수는 더 이상 불필요한 말을 보태지 않았다. 연구실을 나서기 전,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 참! 그리고 지원자가 있긴 있더구나. 오는 길에 학회에 들러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지원자요?”
나는 표정을 찡그렸다. 애초에 지원자 모집은 학회에서 멋대로 내건 조건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초보 마법사가 학회의 꼬드김에 넘어가 지원했더라도, 이 위험한 연구에 누군가를 더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너도 잘 아는 학생일 게다.”
“학생이요?”
스키페 교수의 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말라비틀어진 마계화 아우쿠소.
스키페 교수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실의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드닐에게 노크하는 습관 같은 건 없었다.
“애시, 준비는 다 됐어?”
그녀가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책상에 기대어 놓은 배낭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짐이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창고에서 쓸 만해 보이는 건 다 꺼내 왔어. 한동안 못 돌아올 텐데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겨야지.”
“혼자선 들지도 못하면서 욕심은.”
아드닐이 투덜거리면서도 배낭을 가볍게 들어 한쪽 어깨에 멨다. 배낭은 그녀의 등을 다 덮고도 남는 크기였다.
“작별인사는 다 끝난 거야? 아까 스키페 교수가 찾는 것 같던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나가자고. 이 지긋지긋한 울타리에서.”
“학회 사람들이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을 말이네. 그동안 자기들이 신경 써서 너를 보호해줬다고 생각할 텐데.”
“그 사람들은 항상 그래. 겉으로는 위해 주는 척하지만, 사실 속으론 희귀한 연구 표본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긴장이 풀리며 웃음이 났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하루에 세 명이나 연구실을 찾아 온 것이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서 있던 아드닐이 반응하기도 전에 연구실 문이 빼꼼히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익숙한 얼굴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수업의 얼마 되지 않는 수강생 중 한 명인 멜렌이었다.
“출발 준비는 다 끝나셨나요, 교수님?”
열린 문 틈 사이로 작은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날아 들었다. 등 뒤로 아우쿠소의 으적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연구실 안에 울려 퍼졌다.
순환하는 아트로픽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해주는 몇 가지 것들이 있다. 노인의 주름, 훌쩍 큰 아이의 키, 해와 달의 위치, 순환하는 아트로픽. -마계의 오랜 격언
아트로픽을 처음으로 본 건 아주 어릴 적의 일이었다. 다섯 살, 아니 여섯 살 즈음으로 기억한다. 물론 확실하진 않다. 고아인 나는 태어난 날짜를 정확히 알지 못하니까. 어찌됐든 당시 나는 스키페 교수의 손을 잡고 학회 근처의 작은 언덕에 올랐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몇십 년 만에 아트로픽이 학회 근처를 지나던 해였다.
“저것 좀 봐라.”
스키페 교수가 아트로픽을 가리켰다. 굳이 그 말이 아니었더라도, 내 눈은 이미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키페 교수의 얼굴에는 마계의 신비 중 하나를 어린아이에게 보여준다는 자부심이 드러나 있었다. 신기하지 않니?”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트로픽이 움직이는 모습은 하나의 세상이 움직이는 광경 같았다. 그 거대한 생물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근처의 산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고, 아트로픽의 경로에 있는 생물들은 전력을 다해 그곳을 벗어났다. 생명체라기보다 지형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아트로픽의 크기는 어린아이가 인지할 수 있는 한계를 한참이나 벗어난 영역이었다.
“저게 학회를 밟고 지나가면 어떡하죠?” 나는 어린아이다운 상상력 때문에 잔뜩 겁에 질린 채 물었다. 잠깐 사이에 침이 마른 모양인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였다. 스키페 교수는 한바탕 웃음을 쏟아냈다.
“글쎄? 물론 그런 일이 없길 기도해야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피해야겠지.”
“뭐?” 아드닐과 멜렌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불쑥 떠오른 기억을 털어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조사할 대상으로 아트로픽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소재 파악이 가장 쉬웠기 때문이다. 아트로픽은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 말은 아트로픽이 마계 8면 어디에 있든 입소문을 통해 행방을 들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이 거대한 생물이 학회 근처를 지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짐을 꾸려 출발했다. 다행히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협곡을 지나가는 아트로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협곡 위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아트로픽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지?” 아드닐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일종의 축제예요. 아트로픽을 보내며 한 해가 무사히 지나간 것을 축하하고, 다음 해도 별 탈 없이 지나가길 기원하는 거죠.”
멜렌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설명해 주듯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마다 경로가 달라지긴 하지만, 아트로픽은 일년에 걸쳐 마계 8면을 한 바퀴 순회하거든요”
“그 정돈 나도 들어서 알아. 나라고 학회에만 처박혀 있던 건 아니니까. 물론 이런 축제는 처음이지만...”
버럭 소리치던 아드닐이 말끝을 흐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멜렌의 말처럼 사람들은 들뜬 표정으로 아트로픽을 환송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아트로픽이 지나가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노인도 있었다.
“정말 징그럽게 크네”
아드닐의 말처럼 가까이서 본 아트로픽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굉음에 가까운 발걸음 소리가 협곡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나는 어릴 적에 보았던 아트로픽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릴 적에 본 대부분의 것들이 나이를 먹으며 점점 작아 보이는 것과 다르게, 아트로픽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때보다 훨씬 근접한 거리에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제 어떻게 할거야?”
아드닐이 나를 바라보았다.
“뒤쫓아야지.” 순식간에 멀어지는 아트로픽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말했다.
“아트로픽을 쫓아간다고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키사족 하나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풍성한 붉은 꼬리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올해 들은 이야기 중 제일 웃긴 이야기네요. 하루 종일 걷는 저 거대한 걸 힘들게 따라가는 것보다, 차라리 언젠가 다시 여길 지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셔.”
아드닐이 딱딱한 말투로 톡 쏘아붙였지만, 키사족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계속해서 킬킬거렸다.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빈손을 들어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였다.
“일부러 엿들은 건 아녜요. 그냥 지나치기엔 당신들의 얘기가 너무 재밌어서 말이죠.”
아드닐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요. 난 그저 서로에게 좋은 제안을 하려고 온 것뿐이니까.”
키사족은 어디론가 향하더니 곧 고삐를 쥐고 다시 돌아왔다. 손에 쥔 고삐를 잡아 당기자, 거기에 매인 발구르 세 마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끌려왔다. 키사족은 반항하는 발구르 한 마리를 잡고 입마개를 씌웠다. 거칠지만 능숙한 모습이었다. 이내 발구르가 잠잠해지자 그녀는 발구르의 등에 안장을 얹으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키사족 여자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그러니까, 당신들 설마 아트로픽을 걸어서 쫓아갈 생각은 아니었죠?”
입마개를 씌운 탑승용 발구르. 복종의 마법을 사용하는 가루다와는 달리, 수인족은 발구르를 길들이기 위해 입마개를 사용한다.
쿵ㅡ!
아트로픽이 발걸음을 내딛자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발구르를 멈추고 안장에 바짝 엎드려 대비하던 우리는 땅의 흔들림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며칠간 이어진 추격으로 아트로픽이 걸을 때마다 발생하는 충격파에는 어느정도 적응한 상태였다. 하지만 땅이 흔들릴 때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아트로픽이 걸음을 내딛은 자리에서 생겨난 흙먼지가 눈앞을 가리자 아드닐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해도해도 너무 하잖아.]
아드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입 모양을 보고 그녀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아트로픽의 발소리로부터 고막을 지키기 위해 두꺼운 솜을 뭉쳐 귀를 막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는 상대의 입모양을 보고 그 내용을 추측해야 했다. 확실한 의사전달이 필요할 때는 서로가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나 뻐끔거림을 반복했다. 때문에 아트로픽 근처에서 우리의 대화는 몸짓이나 간단한 문장으로만 이루어졌다.
알려진 것처럼 아트로픽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날씨가 궂거나 혹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덜 걷는 법도 없었다. 아트로픽의 움직임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려 보였지만, 그 크기에 걸맞게 한 걸음만 걸어도 어마어마한 거리를 이동했다. 오로지 걷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트로픽은 먹지도, 쉬지도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친 발구르들을 세우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라도 하면 힘들게 좁힌 거리가 다시 벌어졌다.
이틀 밤을 꼬박 새워 뒤쫓은 끝에 우리는 비로소 아트로픽의 지근거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치도 못한 문제와 맞닥뜨렸다. 발구르들이 더 이상 아트로픽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히 접근을 하지않는 게 아니라,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고삐를 풀고 도망가려고 할 정도였다. 별 수 없이 우리는 발구르들을 잠든 아트로픽 근처에 묶어 두고 아트로픽이 있는 곳까지 걸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다.
“젠장, 분명히 발구르들이 이러는 걸 알고도 팔았을 거야.” 아드닐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키사족 녀석들은 완전히 믿을 수가 없다니까.”
아트로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그 거대함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어느 정도 시야에 들어왔던 몸체는 가까이 갈수록 도저히 그 크기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더 이상 눈 앞의 모습이 아트로픽의 어느 부분인지도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어둠이 내린 평야에서 아트로픽은 산처럼 우뚝 선 채 잠들어 있었다.
“멜렌, 비행 마법은?” 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멜른은 이미 지팡이를 움켜쥐고 마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불가능해요.” 멜렌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트로픽이 주변의 마력을 흩어 놓고 있어요.”
우리의 초기 계획은 아트로픽의 등에 올라타는 것이었지만, 막상 접근해보니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인족인 아드닐의 신체 능력으로도 아트로픽의 등에 오르는 일은 무리였다. 몇 번이나 땅으로 곤두박질친 후에야, 그녀는 다리를 기어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왔다. 당장은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위를 맴돌며 아트로픽을 관찰하기로 했다.
“교수님! 이것 좀 보세요!”
아트로픽의 배 밑까지 들어간 멜렌이 내 쪽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는 그녀를 따라 배 밑으로 들어갔다. 아트로픽의 배 밑은 생각보다 훨씬 밝았다.
나는 고개를 젖혀 멜렌이 가리키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에서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밤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트로픽의 배였다. 배는 하나의 세로줄과 세 개의 가로줄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줄들로 인해 손금처럼 갈라져 있었다. 빛은 그 갈라진 틈 사이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황홀한 광경에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뒤따라 들어온 아드닐이 물었다.
“저기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흘러 나오고 있어요.”
멜렌이 경악한 표정으로 아트로픽의 배를 가리켰다. 굳이 그녀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치 물통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트로픽의 배에서 흘러나온 마력은 아트로픽의 주위를 감싸며 천천히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순간, 아트로픽의 배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해졌다. 시야가 요동치며 밤하늘의 빛이 물감처럼 뒤섞였다. 눈을 감은 와중에도 아트로픽이 주변의 마력을 강하게 끌어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두 발이 공중에 뜨며 몸이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아드닐이 나와 멜렌을 낚아채듯 양쪽 옆구리에 끼우고 나는 듯이 달리고 있었다. 가로로 뒤집어진 시야 속에서 기지개를 켜듯 서서히 움직이는 아트로픽의 모습이 보였다.
“애시, 저길 좀 봐.” 아드닐이 발구르 위에서 졸고 있던 내 어깨를 흔들었다. 아트로픽을 쫓기 시작한 지 사흘 째 되던 날이었다.
나는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트로픽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백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숫자였고 어린아이부터 젊은이, 노인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저 사람들도 축제를 벌이려는 걸까?”
“저렇게 피난이라도 가는 모습으로?”
하나같이 배낭을 메고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있다는 점만 빼면 모두 평범한 마계의 주민들이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불안한 눈빛으로 아트로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사람들을 살피던 멜렌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트로픽이 지나갈 때 벌이는 축제에는 한 해가 지나간 것 말고도 마을이 무사한 걸 축하하는 의미도 있대요.”
“무슨 소리야?”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아트로픽이 마계를 순회할 때 종종 마을이 파괴되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날이 밝아오자 아트로픽의 정면에 있는 마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스태튼 지역으로 넘어가는 어퍼만 앞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나는 아트로픽의 경로 앞에 놓인 마을을 바라보았다. 주민들이 모두 빠져나온 마을은 멀리서 보기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휑하니 비어 있었다. 저렇게 거대한 생물이 움직이는데 그로 인해 파괴되는 마을이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사람들은 아트로픽의 경로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거침없이 걸음을 내딛던 아트로픽이 마침내 마을 가장 앞쪽에 있던 건물과 부딪혔다. 일순간 주민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건물에 막혀 잠시 멈췄던 아트로픽은 곧 힘주어 다시 발을 내딛었다. 아트로픽의 걸음을 잠시 막았던 건물은 죽은 시체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첫번째 붕괴를 시작으로 아트로픽이 걸음을 내딛는 곳마다 건물들이 연이어 비명을 질렀다. 큰 건물들은 쓰러지면서 근처의 다른 건물들을 깔아 뭉갰고, 작고 허름한 건물들은 아트로픽이 땅에 발을 내딛는 충격만으로도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아트로픽이 마을을 관통하는 짧은 사이에 건물들은 이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한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이에 화답하듯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도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떤 아이는 저주를 퍼부었고, 어떤 아이는 아트로픽이 지나는 방향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을 품에 끌어 안으며 진정시켰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아트로픽이 자신의 터전을 파괴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인 아트로픽은 어퍼만의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아트로픽의 거대한 몸체가 순풍에 떠내려가는 배처럼 유유히 멀어져 갔다.
애시턴의 월례 보고서¹
목격 지역
브루클린의 어퍼만 지역
목격 가능 지역
마계 8면 전 지역
크기
안톤에 버금간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메트로 센터를 차지하고 있던 안톤의 절반 정도 크기이다.
색깔
전체적으로 짙은 적갈색을 띠고 있다. 배 밑의 피부는 갈라져 있으며, 갈라진 틈 사이로 마력이 새어 나온다.
형태
네 발로 걸어 다니며 등에는 비석을 지고 다니는 거대한 크기의 생명체이다. 아트로픽이 지고 다니는 비석에는 생명수에 대한 비밀이 새겨져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지만,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
특징
잠들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 곳에 머무르는 일이 없다.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마계를 순회하는데 거대한 크기 때문에 한 번에 긴 거리를 움직인다. 아트로픽이 마계 8면을 한 바퀴 도는데 정확히 일 년이 걸린다고 한다. 때문에 마계의 주민들은 아트로픽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한 해가 지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거대한 존재가 필요한 에너지를 어디서 얻는 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대기 중에 있는 마력을 흡수한다는 설이다. 아트로픽이 생명 활동에 필요한 어떠한 물질도 섭취하지 않는다는 점과 아트로픽 주변의 마력장이 숙련된 마법사들도 마법 전개가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정하다는 사실 등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트로픽이 잠든 동안 가까이 접근하여 관찰한 결과, 아트로픽의 배부분에는 갈라진 틈 사이로 은은한 빛과 함께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며 아트로픽이 활동할 때 그 정도가 더 심해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멜렌은 아트로픽이 막대한 마력이 새어 나가는 것을 충당하기 위해 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하며,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마계 8면을 돌아다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멜렌의 가설이 맞다면, 아트로픽은 자신의 마력이 고갈되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걷고 있는 셈이다.
특기할 것은 아트로픽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아트로픽은 자신의 앞에 무엇이 있든 피해가는 법이 없는데, 이 때문에 아트로픽의 이동 경로에 있는 마을들이 파괴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해마다 몇 개의 마을이 아트로픽에 의해 터전이 파괴되며,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잠시 몸을 피했다가 무너진 마을을 다시 재건한다.
아트로픽이 마계의 마을들을 파괴하는 것은 어떠한 적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이 거대한 생물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우리가 걸을 때마다 발밑의 풀이나 벌레를 신경 쓰며 걷지 않는 것처럼 아트로픽 또한 발밑의 존재들을 굳이 신경 쓰지 않는 것뿐이다.
사람들에게 친숙한 생물인만큼 관련된 이야기 또한 많은 편인데, 아트로픽이 멈추는 날이 마계의 마지막 날이 될 거라는 종말론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또한 여러 지역에서 아트로픽을 보며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을 축하하는 풍습이 발견되는데, 이는 아트로픽이 근처를 지날 때 마을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축하하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주의사항
그동안 아트로픽의 발걸음을 막거나 경로를 바꾸려는 시도가 일부 있었지만 유의미한 성공 사례는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다. 웬만한 공격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지만, 위협이 될 만한 공격을 받을 시에는 거대한 몸체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움직임으로 반격한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로는 마을 하나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소호’의 사례가 전해진다.
¹애시턴이 학회에 매달 정기적으로 제출한 보고서. 자신이 목격한 마계 생물들의 모습과 특징, 마계 8면의 주민들에게 수집한 해당 생물에 관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불타는 타이어 골렘
해가 진 미쉐린 근처에서 갑자기 주위가 밝아진다면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라. -브룩클린 주민들의 말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건 때때로 날 선 감각보다 우연한 호기심일 수도 있다. 브루클린의 황무지 지역을 지날 때가 그랬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풍경 속에서 수상한 흔적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멜렌이었다. 건조한 시선으로 땅을 응시하던 그녀는 갑자기 발구르를 멈추더니 발구르 등 위에서 뛰어 내렸다.
“무슨 일이야, 멜렌?” 뒤이어 내린 아드닐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드닐! 이것 좀 봐요.”
멜렌이 발견한 것은 황무지의 흙이 네 줄로 깊게 파인 흔적이었다. 황무지의 흙이 패여 만들어진 깊은 고랑에는 발구르의 비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상태를 보아하니 생긴 지 얼마 안된 흔적 같았다.
“뭐야, 발구르 자국이잖아.” 아드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 말고도 이 황무지를 지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아뇨, 발구르들은 이렇게 깊은 흔적을 남기지 않아요.” 멜렌이 눈을 밝히며 말했다.
나는 발구르에서 내려 뒤를 돌아보았다. 멜렌의 말대로 우리가 지나온 길에는 희미한 자국만이 약간 남아 있었다.
“발구르에 아트로픽이라도 싣고 지나간 걸까요?” 멜렌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설마. 하지만 수레를 끌고 갔을 수는 있겠지.” 무릎을 꿇고 흔적을 주의 깊게 살피던 아드닐이 말했다. “지나간 지 얼마 안 됐어.”
그녀의 손이 깊게 패인 고랑 안에 남은 거대한 바퀴 자국을 주의 깊게 매만지고 있었다.
멜렌이 발견한 수상한 흔적
“바퀴 자국이 있다는 건, 어쨌든 사람이라는 소리잖아요.”
멜렌은 끈덕지게 아드닐에게 매달렸다. 꼭 떼쓰는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어쩌면 마음씨 착한 도적단이거나 선량한 카쉬파일지도 모르지.” 아드닐은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전방을 살피고 있었다. “어쩌면 여태껏 발견되지 않은 괴물이 수레를 타고 다니는 걸지도 모르고.”
“아드닐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아드닐은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동감이야.”
나는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퀴 자국을 쫓아가자고 주장한 것은 멜렌이었다. 아드닐은 위험할 수도 있다며 반대했지만, 그녀의 불붙은 호기심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바퀴 자국의 진행 경로는 미쉐린 구 시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가 향하던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명분을 얻은 멜렌은 어차피 마주칠지도 모르는 상대라면 우리가 먼저 발견하는 쪽이 낫다는 이유를 들어 아드닐을 설득했다.
그리고 멜렌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상대를 먼저 발견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미쉐린 시가지 근처에 가까워질수록 늘어난 모래 언덕 때문이었다. 바퀴 자국을 따라 눈 앞의 모래 언덕을 반쯤 넘었을 때 발구르를 탄 로카족 여섯이 미끄러지듯 언덕을 내려왔다. 용병 차림의 로카족들은 내려오던 속도 그대로 우리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키힝! 멈춰!” 날카로운 인상의 로카족 하나가 손에 든 창을 겨누며 우리를 다그쳤다. “왜 우리 뒤를 쫓아오지? 목적은? 용건은? 어서 말해!”
‘어떻게 할까, 애시?’ 아드닐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앞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멜렌도 양손 가득 마나를 끌어 모으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로카족들은 그다지 적의가 없어 보였다. 나는 눈짓으로 그녀들을 제지했다. 로카족들은 우리가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자기들끼리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차림을 보니 여행자인 것 같은데?”
“무기 치워, 닐. 얼어붙어서 대답도 제대로 못하잖아.”
“그, 그래도 애드워드 님이 위험 요소는 모두 철저히 경계하라고 했잖아.”
“이봐, 닐! 이젠 이런 꼬마들도 위험해 보여? 못 본 사이에 다 겁쟁이가 됐군. 그래서야 어디 가서 애드워드 님을 모신다고 할 수 있겠어?”
닐이라고 불린 로카족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겨누던 창을 거두었다.
“목적지가 우연히 같았을 뿐이야. 우리도 미쉐린 시가지에 가던 길이거든.”
나는 어깨 위로 빈손을 들어 보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로카족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거기엔 뭐하러? 페허가 된지 오래라 여행자들이 탐낼 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텐데.”
“미쉐린에 특이한 골렘이 있다고 하더군.”
“골렘?”
로카족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자기들끼리 낄낄댔다. 한 로카족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됐지만 그 골렘은 조만간 사라질 거야. 애드워드 님이 그 괴물을 처리하실 거거든.”
잠시 뒤, 우리는 로카족들의 손에 이끌려 언덕을 넘었다. 언덕 너머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천막을 쳤다. 구성원들은 노인부터 아이까지 다양했고, 수인족들도 일부 섞여 있었다. 닐은 우리를 아영지의 중심부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멜렌이 발견한 바퀴 자국을 남긴 거대한 수레가 놓여 있었다.
“키힝! 애드워드 님, 뒤따라오던 녀석들을 잡아왔습니다.”
수레에 타고 있는 것은 수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거구의 사내였다. 수레는 네 마리의 발구르가 끌어야 할 정도로 컸지만, 그 하나를 싣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태로워 보였다. 사내는 자리에 몸을 깊숙하게 파묻고 마법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학회의 마법사들이라고?” 애드워드라고 불린 사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를 훑어보았다. 그는 마법서를 덮으며 몸을 일으켰다. “안전한 곳에 숨어 책만 파는 샌님들이 여긴 무슨 일이지?”
“미쉐린에 있는 골렘을 연구하러 가는 길입니다.”
“연구라…” 애드워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대감이 물씬 풍기는 말투였다. “학회는 매번 그런 식이지. 자신들이 마법 연구에 심취해 있기만 할 뿐, 그걸 사용해 사람들을 도울 생각은 안중에도 없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생물들을 연구하는 겁니다.”
“그게 학회의 입장인가?” 애드워드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머뭇거리며 잠시 말을 골랐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궤변이군. 그깟 연구가 당장 죽어 나가는 사람들보다 중요한가?” 애드워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수레에서 내려와 우리 앞에 똑바로 섰다. 그의 거대한 체구 때문에 일순간 빛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미쉐린의 골렘은 그냥 생물이 아니야. 브룩클린 지역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한 괴물이지.”
그는 엄중한 목소리로 단정하듯 말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청중들에게 연설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학회는 그동안 마계 생물들에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해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연구 명목으로 이런 풋내기 몇을 보내는 게 고작이군.”
사람들 사이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주먹 쥔 손을 높게 들어올리며 애드워드가 목청껏 소리쳤다. “괴물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자손들에겐 안전한 세상을 물려줄 것이다.”
애드워드의 말에 사람들은 함성으로 화답했다. 함성 소리가 고요한 황무지를 가득 채웠다.
“좋아, 따라오게 해주지.”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애드워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두 눈 크게 뜨고, 자네들이 본 걸 학회에 똑바로 보고해줬으면 좋겠군.”
“걱정하지 마. 그러려고 여기 온 거니까.” 아드닐이 가시 돋힌 말투로 대꾸했다.
“닐, 손님들에게 천막을 하나 내어주게. 그리고 자네가 이분들을 호위해줬으면 좋겠군.” 애드워드는 우리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책상 앞에만 앉아있던 사람들이 막상 공포를 마주하면 거기에 짓눌려 도망칠 지도 모르니 말이야.”
“꼭 훈련 받은 조직 같네요.”
멜렌이 천막의 나사못과 씨름하고 있는 소녀를 보며 감탄했다. 소녀는 작은 돌멩이 하나로 자신의 키만한 나사못을 요령 있게 빼내고 있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할 일이 있었다. 각자 할 일은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나눠져 있었고, 사람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움직였다. 오랫동안 행동을 함께 한 듯 손발이 척척 맞았다.
“키힝! 다들 평범한 주민들이었어. 애드워드 님이 이렇게 바꿔놓은 거지.”
진영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온 닐이 모래 언덕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아침 식사로 먹던 팔택쏘¹를 몇 개 가져와 우리에게 내밀었다.
“정말 굉장하신 분이야.“
“마법을 모르는 사람들 눈엔 모든 마법사가 굉장해 보이죠.”
“그런 게 아냐.”
닐은 멜렌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분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흉악한 괴물들과 맞섰다고. 그동안 잘난 너희 학회는 뭘 했지?”
멜렌이 입을 다물었다. 닐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남은 팔택쏘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우물거렸다.
미쉐린에 도착한 것은 어둑해진 저녁 무렵이었다. 사방에 내린 어둠이 황무지를 더 음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행렬의 선두에서 주먹 쥔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정지 신호였다. 언뜻 보니 발구르를 타고 시가지 안으로 먼저 정찰을 나섰던 로카족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키힝! 골렘이 없습니다.” 잔뜩 긴장했던 탓인지 로카족 하나가 거친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온통 폐타이어 뿐인뎁쇼?” 다른 로카족 하나도 거들었다.
애드워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사람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오늘은 이곳에서 아영한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애드워드는 못을 박듯 자신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기 전에 준비를 서두르도록.”
“미쉐린의 골렘은 타이어를 구하기 위해 며칠씩 이곳을 비우곤 한다더군.” 닐이 폐타이어 하나를 깔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애드워드 님은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실 모양이야.”
정찰대의 말대로 시가지는 엄청난 수의 폐타이어로 가득했다. 마치 마계의 모든 폐타이어를 이곳에 모아 놓은 것 같았다. 폐타이어들은 군데군데 그을리고 녹아 있었으나, 대부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방에 널린 타이어들을 전리품처럼 멋대로 사용했다.
“벌써 사흘째야. 그 골렘은 언제 돌아오는데?” 아드닐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키힝!”
“그럼 우린 무단 침입자인 셈이네요.” 마찬가지로 자그만 폐타이어 하나를 깔고 앉아 있던 멜렌이 말했다. 우리의 시선이 멜렌을 향하자,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그 골렘 입장에서 보면 말이에요.”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녘이 가까웠다. 경계를 서는 로카족 몇을 빼면 모두 잠든 시각이었다. 애드워드는 골렘이 나타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그런 말이 며칠 동안 누적된 사람들의 피로까지 풀어줄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와 함께 황무지의 지평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이걸로 나흘째네.” 자리에서 일어난 아드닐이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지평선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껏 찌푸렸던 그녀의 얼굴이 곧 경악으로 가득 찼다.
“이봐, 닐! 가서 사람들을 전부 깨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하게 서있는 닐에게 그녀가 소리쳤다. “모조리 타 죽기 전에, 얼른!”
상황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천막들을 집어삼킨 불길은 폐타이어에도 금새 옮겨 붙었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소란의 중심에는 불길과 폐타이어로 둘러싸인 거대한 골렘이 날뛰고 있었다. 골렘의 몸에서 불길이 새어 나올 때마다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몸에 불이 붙거나, 유독한 연기를 들이마시고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키힝! 애드워드 님이다.”
“애드워드 님!”
애드워드는 미처 옷을 갖춰 입지도 못한 잠옷 차림이었다. 거구의 사내가 얇은 옷 한장만 걸치고 있는 광경은 꽤나 희극적이었지만, 사람들은 구세주라도 나타난 것처럼 기뻐했다. 비장한 표정으로 골렘에게 다가가던 그의 시선이 문득 나와 마주쳤다.
“아직도 저런 괴물들과 우리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가 물었다.
“골렘의 영역에 먼저 침입한 건 당신들이에요.”
“내 아내와 딸은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죽었네. 저런 것들이 마을을 지나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더군.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하나하나 맨손으로 치웠어. 신기하게도 일주일 동안 한숨도 잠이 오지 않더군. 결국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난 그날 마법보다 강한 힘을 얻었어. 복수심이었지.”
애드워드가 정신을 집중하자 차가운 빛이 양손을 뒤덮었다. 퀸즈의 영구 동토에서 불어 오는 것 같은 한기가 그의 손에서 퍼져 나왔다. 거칠 것없이 날뛰던 골렘도 위험을 느꼈는지 애드워드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당신을 믿고 따라온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지.”
나는 소란 속에서 아드닐과 멜렌의 모습을 찾았다. 그녀들은 불길 사이를 분주히 뛰어다니며 살아 남은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아뇨, 당신의 복수심이 저들을 죽음으로 떠민 거죠.”
“학회는 자네와 다른 생각이면 좋겠는데.”
애드워드는 피곤한 듯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는 논쟁은 그만하지. 집중에 방해되는군.”
말을 마친 애드워드는 귀찮다는 듯 나에게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돌풍에 휘말려 튕기듯 뒤로 내팽개쳐졌다. 놀라 뛰어온 아드닐이 간신히 나를 받아 내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벼락 같이 골렘에게 달려드는 애드워드의 모습이 보였다.
애드워드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였다. 강대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그의 두 팔을 에워싸며 몰려들었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한기가 타이어 골렘을 감쌌다. 골렘의 몸에서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상반된 두 힘이 흰 빛을 뿜으며 폭발했다. 귓가를 울리는 굉음 속에서 나는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놓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브루클린의 밤하늘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간밤의 일은 꿈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몸에 생긴 화상 자국의 고통은 생생했다. 고개를 돌리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졸고 있는 멜렌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무리하지 마. 상처가 심하니까.” 어느새 다가온 아드닐이 내 몸을 일으켜주며 말했다.
“골렘은?”
한쪽 눈만 힘겹게 뜬 채 내가 물었다. 열기를 마신 탓인지 목이 잔뜩 쉬어있었다. 숨을 들이쉬자 차가운 공기가 바늘처럼 폐를 찔렀다. 다른쪽 눈도 뜨고 싶었지만, 얼굴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떠났어요.” 멜렌의 목소리였다.
“애드워드가 이긴 거야?”
“깨어났군.” 폐가 다친 것 같은 듣기 거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힝! 애드워드 님!”
멜렌은 피곤한 표정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녀의 뒤로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닐이 보였다. 윤기가 흐르던 갈색 털은 성한 곳 없이 그을려 있었지만 무사한 모습이었다. 그의 품 안에는 애드워드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온몸에 화상 자국이 가득하고 하반신이 반쯤 녹아버린 끔찍한 몰골이었다..
“자네 말이 맞는 지도 몰라.” 애드워드의 눈은 전에 없던 생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눈앞의 죽음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괴물들의 손에 더 이상 소중한 이를 잃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 이건 진심이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려고 했지만, 무언가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닐은 애드워드의 상처에 필사적으로 붕대를 감으려고 했지만, 애드워드는 고개를 떨구며 그의 손을 슬쩍 밀어냈다.
“따라와줘서 고맙네, 닐.”
황무지에 내린 어둠이 로카족의 울음소리를 집어 삼켰다.
애시턴의 월례 보고서
목격 지역
브루클린 지역의 미쉐린 구 시가지
크기
키 3.5m(평상시) 기분이 좋거나 전투 시에는 팽창하기도 한다.
색깔
상체는 새까맣게 연소한 타이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붉은 화염으로 뒤덮여 있다.
형태
온몸이 화염으로 둘러싸인 이 골렘은 가까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몸통을 포함한 상체는 타이어로 하체는 불길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기어 다니는 것에 가깝게 움직이며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검은 자국을 남긴다.
폐타이어를 구하기 위해 브루클린 일대를 돌아다니는데 상태가 좋은 타이어를 발견하면 자신의 몸에 끼워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타이어들은 마계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물건으로 이것들은 이 골렘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특징
브루클린 지역을 지나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폐타이어를 찾아 돌아다니는 이 화염 거인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행동 반경을 종잡을 수가 없는데, 이는 폐타이어를 구하기 위해 브루클린 지역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골렘의 특성 때문이다. 일과의 마지막은 언제나 미쉐린으로 돌아와 폐타이어들을 쌓아 만든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폐타이어를 구워 먹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천진난만한 행동과 종잡을 수 없는 성격 때문에 일부 마법사들은 이 골렘을 정령의 일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골렘이 거주하는 미쉐린은 한 때 마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상업이 발달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미쉐린에는 이전 테라의 유물들을 사고 파는 상인들이 상당수 거주했는데, 그 중 한 상인이 우연히 손에 넣은 테라 유물의 봉인을 뜯었고 그 유물에서 ‘꺼지지 않는 불길’이 새어 나와 마을을 남김없이 태우고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외형에 걸맞게 빙결 마법이나 수속성 마법을 기피하지만, 폐타이어를 얻기 위해서라면 얼음물 속이라도 거침없이 뛰어든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모은 타이어들을 보물처럼 여기며, 누군가 타이어에 손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주의사항
이 골렘을 감싸고 있는 불길은 좀처럼 불이 붙지 않는 물건들도 남김없이 태워버릴 정도로 뜨겁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골렘 근처에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며, 골렘과 접촉할 시에는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치명적인 화상을 입는다.
마계 주민들에게 목격되는 일이 잦지만, 사실 살아 있는 생명체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모험가들의 짐에 관심이 생기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기 때문에,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모험가들이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폐타이어와 비슷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마계 끝까지 쫓아온다고 한다.
브루클린 지역을 지날 때는 오해를 살 만한 물건을 소지하지 않는 편이 좋으며, 만약 이 골렘에게 쫓긴다면 가지고 있는 짐을 모두 버리고 도망치는 편이 좋다.
추신 : 미쉐린 시가지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이 골렘에 의해 피해를 입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습니다. 브루클린 주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학회 차원의 대처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¹생물의 사체에서 양분을 얻어 자라는 버섯.
자신과 싸우는 새, 도도
어둠에 잠긴 바다는 너무나 쉽게 현실감을 앗아갔다. 미약한 빛 속에서 노인의 얼굴이 꿈결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뱃고물에 걸어 놓은 등불은 선체 위를 밝히기에도 힘이 모자랐다. 파도가 뱃전을 두드릴 때마다 몸이 흔들리며 가벼운 현기증이 났다. 배를 처음 타본다는 멜렌은 갑판에 엎드려 선체와 아예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조금만 참으시오. 거의 다 왔소.”
노인이 피곤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우리와 다르게 그는 풍랑이 일부러 피해 가기라도 한 것처럼 멀쩡해 보였다. 그가 도롱이를 털자 옷 끝에 살짝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그의 손길을 피해 도망치듯 떨어져 나갔다.
우리가 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완전히 저문 한밤 중이었다. 브루클린에서 보았을 때는 손 뻗으면 닿을 것 같던 거리였지만, 섬의 물길은 외부인이 접근하는 것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해가 저물 때까지 해류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빙빙 돌고 나서야, 우리는 어두워진 모아 섬 근처 해안에 겨우 닿을 수 있었다.
“꼭 이렇게 험한 길로 와야했어?”
한참을 비틀거리다 겨우 몸을 일으킨 아드닐이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이 정도면 편하게 도착한 편이오. 이번 뱃길은 바람이 말을 잘 들어줬으니까. 풍랑이 심할 땐 평생 뱃질한 놈들도 소용돌이에 잡아 먹히는 일이 허다하거든.”
노인의 말에 아드닐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돌아갈 길을 상상하기라도 했는지 뱃전을 짚고 일어나던 멜렌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꼬마 아가씨. 무슨 이유인지 섬에서 나가는 물길은 항상 평온하거든. 꼭 잘 가라고 등을 떠밀어 주는 것처럼 말이지.” 멜렌의 모습을 보며 킬킬거리던 노인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이 곳엔 무슨 일이오? 사랑의 도피 같은 건 아닐 테고.”
“섬의 생물들을 연구하러 왔습니다.” 나는 짧게 대꾸했다.
“하긴, 마계 8면에 신기한 곳이 한두 군데겠냐만 이 섬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곳이지.” 노인은 우리가 이 섬 자체를 연구하러 왔다고 여기는 듯이 말했다.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오?”
“보름 정도 있을 계획입니다.”
노인은 바닷바람에 푸석해진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잠시 세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단 좀 더 있으셔야겠소. 다음 물길이 열리는 건 한달 뒤일 테니.”
“그나저나 정말 이 섬에 사람들이 산단 말이야? 무인도라고 표시돼 있는데.”
학회에서 가져온 지도를 뒤적거리던 아드닐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나루터에 배를 묶던 노인의 손이 우뚝 멈췄다. 무언가 회상에 잠긴 표정이었다. 노인은 대답 대신 주름진 손으로 섬의 한가운데에 높게 솟은 산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산 보이오? 꼭대기에 거대한 분지가 있는데, 아주 오래 전 어디선가 날아온 큰 새가 내려앉으며 생겼다고 하오.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전해지지.”
“그게 언제 이야기인데?” 아드닐의 물음에 노인의 시선이 멜렌을 향했다.
“글쎄,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내 키가 꼬마 아가씨 어깨쯤 닿았을 무렵이려나?”
지도의 뒷면을 펼쳐 발행일자를 확인한 아드닐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지도보다도 오래된 얘기네.”
“적어도 내가 마지막으로 섬을 찾았을 때는 사람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소.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소만.” 노인은 껄껄거리며 웃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미리 봐 놓은 아늑한 동굴이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내가 말한 마을로 한 번 가보시오. 도움을 청하면 박대하지는 않을 사람들이니.”
그 때 가까운 곳에서 땅이 울리는 진동과 함께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재빠르게 몸을 낮추며 옆에 서있던 아드닐의 목을 우악스럽게 짓눌렀다.
“무슨 짓이야!” 아드닐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쉿!“ 노인이 낮고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게 뭐죠?” 멀미를 겨우 멈춘 멜렌이 나루터 쪽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엎드려서 숨 참으시오, 얼른!”
노인은 재빠르게 몸을 날려 미약하게 타오르고 있던 등불을 껐다.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을 감쌌다. 그의 표정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그의 말을 따라 갑판에 엎드렸다. 노인이 배의 뒤편에서 가져온 무언가로 바닥에 엎드려 있던 우리의 머리 위를 덮었다. 어두운 색의 모포였다.
울음소리는 어느새 코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여러 마리가 다투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지는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모포 위로 드리워졌다. 모포 속에서 노인이 자신의 코와 입을 필사적으로 틀어막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영원히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을 것 같던 그림자는 천천히 나루터를 지나쳐 멀어져 갔다. 차가운 갑판에 오랫동안 엎드려 있던 탓인지 팔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뻣뻣했다.
“휴… 까딱했다간 송장 치울 사람도 없을 뻔했군." 노인은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도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이 섬에 대해 조사한다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왔소?”
“그러니까 조사하러 왔죠.”
멜렌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노인은 말문이 막힌 듯 고개를 젓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들, 나한테 뱃삯 말고도 큰 빚을 진 거요.”
버려진 고철들을 이용해 만든 나룻배
뱃사공 노인은 보름 후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배에 올라탔다. 꼬리에 빛을 매단 나룻배는 해류를 타고 수평선의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노인의 말대로 모아 섬은 마계 8면의 어느 곳보다 특이한 곳이었다. 시야가 닿는 곳에 있는 모든 것이 거대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부터 고철들 사이를 뚫고 자라난 식물들까지. 모두 육지에 비하면 비정상적일 정도의 크기였다.
우리는 노인의 조언대로 섬의 중심에 위치한 산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걷는 걸음은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아드닐이 자진해서 앞장 서서 길을 열었지만, 나와 멜렌이 그녀의 걸음 속도에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는 번번이 뒤쳐졌고 아드닐은 그런 우리를 살피기 위해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무슨 일이에요?”
앞서 걷던 아드닐의 등에 이마를 부딪힌 멜렌이 물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죽을 위기ㅡ뱃사공의 말에 의하면ㅡ를 넘긴 탓에 우리는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져 있었다. 아드닐은 대답 대신 입술에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한 소녀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뱃사공이 했던 것처럼 몸에는 낡은 외투를 걸친 채였다. 처음에는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지만, 자세히 살핀 후에야 소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챌 수 있었다.
“꼬마야.” 말릴 틈도 없이 다가간 멜렌이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걸었다.
소녀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열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아이였다. 핏기 없는 피부는 푸석했고 눈 밑에는 그늘이 내려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아직 생기가 돌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달아나려던 소녀는 몇 걸음 도망가지 못하고 이내 자리에 넘어졌다. 소녀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외투가 그 바람에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도망가지 않아도 돼. 음… 뭐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까 이상한 소리를 내던 것도 지나갔어.”
멜렌이 넘어진 소녀를 안심시키며 손을 내밀었다. 넘어질 때 발목을 다치기라도 했는지 소녀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잠시 소녀의 상태를 살피던 멜렌의 손에서 따듯한 빛이 일어나 소녀에게 스며들었다. 소녀의 동그란 눈이 커졌다. 마법을 처음 본 것처럼 놀라는 반응이었다. 잠시 후, 소녀는 멜렌의 손을 잡고 가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계심이 많이 풀린 눈치였다.
“꼬마라고 말한 건 취소해야겠는데?”
아드닐이 멜렌과 소녀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의 키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멜렌이 발돋움을 해야 겨우 소녀의 어깨에 닿을 정도였다. 우리는 소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소녀는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을 보면 귀가 먼 것 같진 않았다. 소녀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쩌죠? 말을 못하나 봐요.”
멜렌이 울상이 된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옷을 보아하니 마을이 멀지 않은 것 같은데. 곧 마을 사람들이 찾으러 오지 않을까?”
아드닐의 말대로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은 낡긴 했지만 깨끗한 평상복이었다. 아무리 날씨가 따듯하더라도 여행자가 입고 다니기에 적합한 종류의 옷은 아니었다.
“아드닐!” 멜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산 속에 그냥 두고 가자구요? 사람들이 언제 찾으러 올지도 모르는데?”
“아, 아니. 꼭 그러자는 게 아니라…” 아드닐은 멜렌의 책망하는 눈빛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마을 사람들이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무작정 데리고 갈 순 없잖아. 만약 길이라도 엇갈리면 어쩌려고.“
“일단 우리가 데려가자.” 나는 땅에 떨어졌던 소녀의 외투를 주워들었다.
아드닐이 무언가 말하려던 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들었던 그 소리였다. 순간 모두의 동작이 멈추며 같은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소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위태롭게 서 있던 소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도도."
소녀가 쓰러진 것과 아드닐이 번개같이 몸을 날린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헛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멜렌을 부르는 아드닐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멜렌이 다급하게 만들어 낸 빛의 구체가 머리 위로 떠올라 주변을 밝게 비추었다. 어둠 속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루아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족장이라고 소개한 거구의 사내가 말했다. 굽은 허리에도 불구하고 2미터를 훌쩍 넘기는 건장한 체격은 키 큰 주민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목과 이마에 자리 잡은 주름이 아니었다면 그가 노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소녀를 업고 마을로 오는 내내 한마디도 없던 마을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족장으로 선출되는 기준은 키가 아니라 유창한 말솜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닐의 예상대로 마을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다만 우리의 예상보다 매우 높은 곳에. 마을 사람들의 뒤를 쫓아 거의 반나절 정도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나서야 우리는 산꼭대기에 숨겨진 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보물처럼 숨어 있었다. 백여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고, 날개가 달린 것이 아닌 이상에야 발견하기 힘들 것 같은 위치였다.
“언제부터 우릴 감시한 거지?”
아드닐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리 밤중이었다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접근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족장은 빙그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육지에서 들어오는 물길은 하나뿐이라 항상 눈여겨보고 있지요. 외지인이 섬에 온 게 몇 년만의 일인지 모르겠군요.”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 우리가 섬에 도착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루아는 괜찮나요?” 멜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전에 겨우 잠들었습니다.” 족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불쌍한 아이지요. 어미가 도도에게 물려 죽은 이후로는 말하는 법도 잊고, 멀리서 울음소리만 들려도 불안해하지요. 어젯밤엔 비몽사몽간에 자신도 모르게 마을 밖까지 나갔던 모양입니다.”
나는 숲의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던 루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족장의 호의 어린 시선이 멜렌을 향했다.
“루아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꼬마 요정님’을 찾더군요.
“꼬마 요정이요?” 멜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하,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해.”
아드닐이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멜렌의 키를 재는 시늉을 하며 킥킥댔다. 멜렌이 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째려보았지만, 아드닐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그녀에게서 멀어진 뒤였다.
“도도가 뭐죠?” 내가 물었다.
“여러분들이 섬에 도착해 마주친 거대한 괴물 말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 했어.” 아드닐이 아쉽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뱃사공이 시킨 대로 모포만 뒤집어 쓰고 있었거든. 숨소리까지 참으면서 말이야.”
“노련한 뱃사공이군요. 도망치기 힘들 땐 그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족장은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였다. “도도는 섬 반대편에서 나는 소리도 놓치지 않지만, 눈이 나빠 코앞의 사물도 잘 구분하지 못하지요. 육지 사람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군요.”
“저희는 이 섬의 생물들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나는 단숨에 본론을 꺼냈다. “가능하다면 한달 정도 마을에 머물고 싶은데요.”
“얼마든지요. 안 그래도 주민들을 시켜 빈집을 청소 해놨으니 거길 쓰시면 됩니다. 모아 섬 사람들은 한 번 받은 도움을 잊지 않지요.”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하던 족장은 무언가 생각난 듯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먹을 건 알아서 구하셔야 합니다. 저희도 식량 사정이 넉넉하진 못해서요.“
다음 날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섬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섬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걸을 때 나는 발소리를 제외하고는 파도나 귓가를 스치는 바람 정도가 들려오는 소리의 전부였다. 이따금 멀리서 들려오는 도도의 괴이한 울음소리가 섬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모든 것이 거대하지만 활기가 없는 섬. 그것이 내가 모아 섬으로부터 받은 느낌이었다.
“교수님! 이것 좀 보세요.”
고철 더미 사이를 뒤적거리던 멜렌이 내게 주먹만한 헬망¹을 내밀었다.
“이렇게 큰 것들은 처음 봐요. 꼭 거인들의 섬에 떨어진 난쟁이라도 된 기분이네요.”
멜렌의 말대로 이 조용한 섬에서는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거대하고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위험 요소가 없어서 그래.”
“무슨 소리야?” 멜렌이 건넨 헬망과 버섯을 갈무리해 챙기던 아드닐이 내게 물었다.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스스로 크기를 제한하던 생물들이 그럴 필요가 없어지면 커지는 거야. 몸집이 커지면 여러모로 생존에 유리한 점이 많으니까. 포식자가 없고 외부와 고립된 지역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렇지만 도도가 있잖아요?”
멜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래.”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래서 이 섬에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르지.”
섬의 거대한 생물들보다 내 흥미를 끌었던 건 섬의 주민들이었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거의 똑같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햇볕을 쬐거나 잠을 자면서 보냈고, 좀처럼 마을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언가 생산적인 활동이나 유흥 거리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면 마계에서 보기 드물게 평화로운 마을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게으른 자들의 천국 같았다.
주민들은 며칠에 한 번씩 산 아래로 먹을 것을 구하러 내려갔다. 안전한 마을을 벗어나 섬을 돌아다니는 잠깐의 위험. 오직 그 시간만이 그들이 활기를 띠는 유일한 때였다. 물론 위험 요소는 섬의 유일한 포식자인 도도였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그 위험 요소에 맞추고 있었다. 예를 들면 주민들은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항상 발 뒤꿈치를 들고 다녔는데, 어릴 적부터 몸에 밴 모양인지 그런 걸음으로 가파른 산길을 걷는데도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또 소리 내어 말하는 것보다 수신호를 즐겨 사용했는데, 생활에 필요한 거의 대부분의 대화를 수신호로만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도도에 대해 조사하려고 했으나, 주민들은 도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작정 섬을 돌아다녀도 봤지만, 첫날처럼 거대한 그림자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모아 섬에서의 날들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어느새 뱃사공 노인과 약속한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애시!”
사건이 벌어진 것은 섬에서 보내기로 한 마지막날 밤이었다. 한밤 중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문 밖에 서있던 이는 항상 침착하던 족장이었다. 그는 항상 침착하던 평상시와 다르게 핏기 없는 얼굴로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혹시 안에 루아 있습니까?”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은 아드닐과 멜렌도 2층에서 내려왔다. 족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우리의 표정을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족장의 등 뒤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루아가 사라졌습니다.”
밤 사이에 시작된 수색 작업은 동이 터올 때까지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뤄 산을 훑으며 내려왔지만 루아를 찾지는 못했다. 주민 한 사람이 산 아래에서 루아의 핀을 주워왔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산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족장님.”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서 키 큰 사내 하나가 족장에게 다가왔다. 얼굴 한쪽에 큰 흉터가 있는 사내였다.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마을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말대로 산 아래로 내려온 다음부터 마을 사람들은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쉴 새 없이 사방을 경계하며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족장은 천천히 사람들을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내 탓일세.” 족장은 머리를 감싸 쥐며 자책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루아에게 좀 더 신경 썼어야 하는 건데…”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보셨잖습니까.” 사내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어미의 망령이 그 아이를 둥지로 데려간 거지요.”
“그런 소리 말게.”
족장은 서슬이 퍼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찔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펄, 자네는 사람들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주게.”
“족장님은요?”
“루아를 찾아 돌아가겠네.”
사내를 뒤로 하고 족장은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짚이는 곳이 한군데 있습니다.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도도는 식인을 하지 않지만, 도도에게 물려 죽는 사람은 예전부터 줄곧 있어 왔지요. 제 딸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따님이 있으셨나요?” 멜렌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십년도 더 된 일입니다. 도도와 마주쳤을 때 하필이면 안고 있던 아기가 울음을 터트렸지요. 도도의 부리에 온 몸이 뜯겨 나가면서도 딸은 끝까지 그 젖먹이를 끌어 안았습니다. 덕분에 품 안의 아기는 무사했죠.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 때의 무력감은 아직도 어제 일 같이 생생합니다.”
앞장서서 산길을 오르던 족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여기서부턴 절대 입을 열지 말아주십시오.”
“왜?”
“이 앞이 도도의 둥지입니다.” 아드닐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며 족장이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마을에 피해가 생길까봐 숨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라도 그랬을 거에요.” 멜렌이 빙긋 웃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족장은 이후로 굳게 입을 다물었다. 우리도 묵묵히 그의 뒤를 쫓았다. 점심 무렵에야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산 아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안 절벽이었다. 절벽 위로 수북하게 쌓아 올려진 고철 더미가 보였다. 고철들은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고, 꼭대기는 경사가 완만해 평평했다.
고철 더미 위에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생물이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단 한번 보았을 뿐이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도도였다.
족장은 아무 말 없이 고철 더미를 오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쇠붙이에 이곳저곳이 긁힌 그의 몸에서 피가 흘렀다. 그가 발을 헛디뎌 시끄러운 소리가 날 때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보다 못한 아드닐이 나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고철 더미 위에 먼저 올라가 그를 잡아당겼다. 꼭대기에 오른 아드닐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더니 족장과 함께 둥지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족장과 함께 나타난 그녀는 루아를 품에 안고 있었다.
고철 더미로 쌓아 올린 도도의 둥지
조심스럽게 고철 더미를 내려오던 두 사람의 뒤로 머리 하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머리는 두사람을 발견하곤 곧 특유의 울음 소리를 내며 둥지에서 몸을 일으켰다.
“흩어져서 나루터로 가!”
아드닐은 족장에게 루아를 넘기며 소리 질렀다. 도도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아드닐은 재주 넘듯 도도의 부리를 피하며 마을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우리는 세 방향으로 흩어져 구르듯이 산비탈을 내려왔다. 성난 울음소리가 뒤를 따랐다. 세 개의 머리는 자기들끼리 다투느라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아드닐이 도도의 시선을 끌며 숲 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 뱃사공 노인은 배를 정박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멜렌이 헐떡거리며 뛰어오자 노인이 놀란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배에 오르기 무섭게 등 뒤에서 성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멜렌의 만류에도 겁에 질린 뱃사공 노인은 기어코 배를 묶은 줄을 풀어냈다. 배는 바람을 타고 천천히 나루터를 벗어났다.
멀리서 도도에게 쫓기는 아드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녀는 나루터를 도움닫기 삼아 힘껏 도약했다. 조그만 나룻배가 태풍을 만난 나뭇잎처럼 뒤집힐 듯 크게 흔들렸다. 한차례 파도를 뒤집어 쓰고 나자, 갑판 위에 넘어진 아드닐이 보였다. 뱃사공 노인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터무니 없는 짓을 한거요? 도대체!”
우리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서로를 마주 보고 키득댔다. 해안가에 멈춰선 도도가 배웅이라도 하듯 울부짖고 있었다.
애시턴의 월례 보고서
목격 지역
모아 섬은 브루클린과 메트로센터 지역 사이의 해상에 위치한 섬이다. 육지와는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지만 해로의 거센 풍랑으로 인해 왕래가 힘들다. 섬의 생물들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 비정상적으로 몸집이 컸으며, 주민들 또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키가 매우 컸다. 이러한 섬 전체의 거대화 현상은 오랜 시간동안 육지와 단절되어 있던 섬의 환경으로 인해 수 세대에 걸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크기
몸길이 약 10m, 다리 길이 3m.
색깔
몸의 깃털은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띤다. 세 개의 머리에 달린 볏의 색이 각각 다른 것이 특징이다.
형태
세 개의 머리와 두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 새. 다리의 길이만 해도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긴다. 크기에 걸맞게 거대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오래 전에 어딘가에서 모아 섬으로 날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정작 모아 섬의 주민들 사이에서도 도도가 비행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특징
도도의 가장 큰 특징은 세 개의 머리이다. 머리들은 모두 성격이 매우 난폭한데, 평소에는 가운데 머리가 나머지 머리들을 이끌지만 흥분하면 양쪽 머리가 통솔을 거부하며 날뛰는 모습을 보인다. 이따금 신체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며 서로에게 상처 입히는 모습이 목격될 만큼 사이가 좋지 않다. 하지만 위협적인 적을 만났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합심하여 한 몸처럼 싸운다. 모아 섬 주민들은 도도의 몸에 서로 다른 세 개의 영혼이 깃들었다고 생각한다.
‘도도(do-do)’라는 이름도 세 개의 머리가 다툴 때 내는 소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세 개의 머리는 각자 다른 음역대를 내는데 이것이 어우러져 도도 특유의 괴이한 울음소리가 난다. 사냥 중에 다투다 먹이를 놓치는 일도 빈번하며 잡은 먹이를 두고도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내장기관 또한 세 개로 나눠져 있기 때문인지 또는 단순한 경쟁심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주로 해변가를 돌아다니며 발구르를 사냥하지만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다.
도도는 예민한 청각에 비해 시각과 후각이 매우 좋지 않다. 때문에 몸을 가린 채로 숨을 죽이고 있으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도 좀처럼 알아채지 못한다. 모아 섬의 주민들은 아이들에게 도도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바위처럼 보이기 위해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숨을 참으라’고 가르친다. 주민들 사이에서 “도도”라는 말은 ‘조용히 있으라’는 의미로 통한다.
주의사항
모아 섬의 주민들은 우리에게 도도에 관한 몇 가지 주의 사항들을 가르쳐 주었다. 대부분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이유를 들으면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학생들에게 그동안 가르쳤던 지식들과는 전혀 상반되는 것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알려준 주의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도에게서 도망칠 땐 최대한 천천히 움직일 것.
☞ 급하게 움직이면 오히려 소리를 내서 도도의 주의를 끌 위험이 있다.
둘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으려 하지 말고 사방이 탁 트인 높은 지대로 올라갈 것.
☞ 발구르를 좋아하는 도도는 바위 틈이나 동굴처럼 습하고 외진 곳을 집중적으로 탐색하는 습성이 있다. 때문에 차라리 최대한 높은 지대로 도망치는 편이 좋다.
셋째, 말 대신 수신호로 소통하되 동작은 최대한 크게 할 것.
☞ 동작을 아무리 크게 해도 도도의 주의를 끌지 않는다. 수신호는 동료가 명확히 알아볼 수 있도록 크게 하는 편이 낫다.
넷째,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다른 사람들이 여러 방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 도도의 시선을 끌 것. 그리고 합류 지점을 정한 뒤, 최대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날 것.
☞ 세 개의 머리는 모두 독립된 자아를 가진 존재들로 몸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특성이 있다. 이 점을 이용해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주어 도도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
다섯째, 절대로 도도를 자극하지 말 것. 만일 도도에게 쫓긴다면 마을 반대 방향으로 도망칠 것.
¹고철 더미 사이에서 자라는 열매. 매우 맵다.
천둥마와 폭풍마
…그리하여 쌍둥이 형제는 밤하늘에 못박혔다. 먹을 것 때문에 동생을 살해한 형은 분노한 동생에게 영원히 쫓기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마계 천태만상 上권 중에서
돌풍지대는 그 이름처럼 크고 작은 바람이 멈추지 않는 곳이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불어오는 돌풍과 마주쳐야 했고, 그때마다 온 몸에 모래를 뒤집어 써야했다. 옷 안에서 느껴지는 모래의 꺼끌꺼끌한 감촉은 신경도 쓰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날의 세 번째인가 네 번째 모래 폭풍을 만났을 때였다. 서서히 커지는 모래 폭풍의 진행 경로를 살피던 멜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을 본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바람을 등지고 발구르들을 방패 삼아 몸을 기댔다. 아드닐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발구르들의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나는 입고 있던 외투의 옷깃으로 최대한 얼굴을 가리며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모래 폭풍은 우리가 있던 곳과 한참 떨어진 지점을 지나갔지만 그 여파는 고스란히 전해졌다. 온 세상이 희뿌연 먼지로 가득했고, 얼굴을 때리는 모래 알갱이들 때문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모래 폭풍이 완전히 지나가고 나서야 나는 기진맥진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애시?”
아드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발 밑을 내려보았다. 주름투성이 손이 내 발목을 굳게 붙잡고 있었다.
우리가 모래 속에서 꺼낸 것은 밑창이 다 닳은 신발과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친 노인이었다. 그는 깊은 잠이라도 한숨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개운한 표정이었다. 몇 차례 입 안의 모래를 뱉어 낸 후에야 그는 상황을 깨달은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얼레? 너흰 누구야?”
그리고 뻔뻔하게도 우리가 가장 하고 싶던 질문을 오히려 우리에게 던졌다. 머릿속에서 모래 폭풍이라도 부는 것처럼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여기가 내 집이라니까.”
노인은 멜렌이 내민 수통을 성스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건네받았다. 그리고 경건한 태도로 한 방울 한 방울을 음미하듯 수통을 기울였다.
“돌풍지대에서 산다고요? 말도 안 돼요!” 매일같이 마셔 댄 모래 때문에 멜렌의 목소리는 반쯤 쉬어 있었다. 아마 내 목소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안될 게 뭐가 있나?” 노인의 앙상한 손이 모래 위를 기어가던 작은 전갈 한 마리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그리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입 안으로 집어 넣었다.
“영감님! 그거ㅡ”
“그냥도 먹을 만해. 물론 불이 있으면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겠지만.”
“아뇨… 독이 있다고요.”
그는 행복한 표정으로 전갈 꼬리를 우적거렸다.
“이런 곳에 오래 살다 보니 이제 웬만한 독충들은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됐지.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말야.”
“모래 속엔 왜 파묻혀 있던 겁니까?” 내가 물었다.
“자고 있었는데 모래 폭풍에 휘말렸어.” 노인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멀어지고 있는 모래 폭풍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운이 좋다고 해도 저런 폭풍에 휘말려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자네들이 앞에 있더군.”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한 사람 같아.”
아드닐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충분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지만, 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자네들이야말로 여긴 무슨 일이지? 좀처럼 여행자가 찾지 않는 곳인데.”
“센트럴 파크로 가는 중입니다. 여길 지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긴 하지.” 노인은 돌풍지대의 한가운데 불고 있는 가장 큰 모래 폭풍을 가리켰다. “저걸 넘어가면 금방이야.”
“다른 길은 없나요?” 멜렌이 물었다.
“없어.” 노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번뜩였다. “아! 그러고보니 곧 폭풍이 천둥을 따라 잡을 시기군.”
우리는 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길 지나갈 방법이 있다는 소리야?” 아드닐이 대답을 독촉했다. 노인은 수통을 마저 비우더니, 모래 폭풍을 응시하며 느릿느릿하게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혹시 마실 건 더 없나?”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움직여. 특히 거기 수인 아가씨.”
우리는 고심 끝에 노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당장 거대한 모래 폭풍을 뚫고 지나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노인의 호언장담 때문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주변의 지형지물이 바뀌는 와중에도 그는 방향을 잃지 않고 돌풍지대의 중심부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최대한 몸에서 열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 위를 대로처럼 활보하던 노인은 간간히 우리를 돌아보며 이런저런 충고를 했다. “몸을 녹초로 만드는 건 태양빛만으로도 충분하거든.”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었다. 태양 아래 달아올랐던 모래는 빠르게 식었고, 살을 에는 추위가 더위가 물러간 자리를 대체했다. 돌풍지대의 중심부에서 보내는 밤은 혹독했다. 우리는 모닥불을 피우고 침낭 속에서 잠을 청했다. 노인은 침낭도 마다한 채, 널찍한 바위를 하나 골라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새벽 중이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피곤이 쌓여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 위에서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직 덜 깬 잠기운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다.
“잠이 오지 않는가 봐?” 노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잠기운이 전혀 없는 또렷한 목소리였다.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뒤이어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영감님이 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멜렌이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잔가지를 꺼내 모닥불 안으로 던져 넣었다.
“무슨 말?”
“‘폭풍이 천둥을 따라 잡는다.’는 얘기요. 그거 폭풍마와 천둥마 전설이죠? 돌풍지대에서 천둥과 폭풍을 몰고 다닌다는 쌍둥이 괴물들 말이에요.”
“전설이 아니야.” 노인은 가볍게 몸을 일으켜 바위에 걸터앉았다. “둘은 정말로 저 모래 폭풍 속에 있어. 몇 년에 한 번 보기 힘들지만.”
“믿기 힘든 얘기들만 하시네요.” 멜렌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학회를 떠나 돌풍지대를 떠도는 마법사가 있다고.”
“자네들이 학회의 마법사들인 줄은 몰랐군.” 노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자신과 전혀 상관 없는 얘기라는 듯한 태도였다. “스키페는 여전히 건강한가?”
멜렌은 노인의 말에 놀란 듯 잠시 헛바람을 들이켰다.
“영감님이 그 마법사인가요?”
“난 그저 평범한 늙은이일 뿐일세.” 노인은 멜렌의 질문이 재밌었는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나이를 먹다 보면 보고 들은 게 자연히 많아지기 마련이지. 그게 마법 같아 보였나?”
“거짓말.”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으며 멜렌이 중얼거렸다. “나이를 먹었다고 누구나 돌풍지대에서 맨몸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노인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왜 이런 곳에 사는 거예요?”
멜렌의 질문에 노인은 고개를 들더니 어둠이 내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멀리서 희미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자갈을 싣고 바위를 깎는 돌풍지대의 바람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땅이니 물이나 식량은 물론 턱없이 부족하지. 모래 폭풍도 수시로 몰아치고. 특히, 무엇보다 힘든 건 따가운 태양이야. 수십 년을 살아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더군.” 노인이 한숨 쉬듯 대답했다. 어딘가 슬픈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가 다른 곳보다는 나아. 적어도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일은 없으니까.”
멜렌은 노인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저 모래 폭풍을 뚫고, 센트럴 파크에 도착할 방법이 있나요?”
“그야 자네들 하기 나름이지.”
그는 말을 마치더니 등을 돌려 뒤돌아 누웠다.
“걱정은 그만하고 자둬. 내일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움직여야 하니까.”
노인의 투박한 말투에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는 흐려져가는 정신 속에서 눈을 감았다. 무겁게 쌓인 피로가 눈꺼풀을 짓눌렀다.
일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고 알려진 돌풍지대의 모래 폭풍. 천둥마와 폭풍마가 사라지자 폭풍도 잠시 사그라들었다.
가까이서 본 돌풍지대의 중심은 모래 폭풍들의 거대한 사교장이었다. 수많은 모래 폭풍들이 춤을 추듯 서로 부딪히고, 합쳐지고, 소멸하고 있었다. 온 몸을 감싸는 거센 돌풍 때문에 가만히 서있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앞장 서서 걷던 노인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뭐하는 거예요?” 아드닐이 소리쳤다.
“어차피 발구르론 여길 못 지나가.”
노인이 발구르들의 고삐를 풀어주며 말했다. 겁에 질려 있던 발구르들은 고삐를 풀기 무섭게 모래 속으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는 발구르들을 매고 있던 줄을 하나로 잇더니 그걸로 자신의 허리를 꽁꽁 동여맸다. 그리고 남는 줄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서로의 몸을 밧줄로 연결했다.
노인은 흉흉한 기세로 소용돌이치는 모래 폭풍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여기서부턴 저걸 타고 건너편으로 갈 거야.”
노인은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며 모래 폭풍 틈바구니를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중심부에 다가갈수록 몸을 뒤흔드는 모래 폭풍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잠시라도 몸에 힘을 풀었다가는 돌풍에 휘말려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나중에는 거의 바닥에 엎드려 기어간다는 표현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까지 모래 폭풍 근처에 접근해서야 노인은 전진을 멈췄다.
“이제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
“뭐를? 그 전에 우리가 날아갈 판인데!” 아드닐이 악에 받친 목소리가 바람 소리와 함께 메아리쳤다.
“폭풍이 지나가기 전의 날씨가 가장 궂지. 곧 나타날 거야.”
노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모래 속으로 몸을 반쯤 파묻었다. 문득 주위가 고요해졌다. 순식간에 무풍지대에 떨어진 것처럼 주변의 기류가 급변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슬며시 들고 몸을 일으켰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교수님!”
멜렌이 가르킨 곳에는 신비한 두 존재가 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천둥마와 폭풍마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앞서 달리는 천둥마가 발을 딛는 곳마다 번개가 튀었다. 그 발걸음을 따라 잠깐의 간격을 두고, 천둥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폭풍마는 온 몸에 돌풍을 두른 채 성난 표정으로 천둥마의 뒤를 쫓고 있었다. 옛 이야기로 전해져 오는 모습 그대로였다.
“이봐!”
무언가 허리춤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우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노인이 허리에 동여맨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 틈에 얼른 지나가야 해!”
우리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노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앙상한 다리로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모래 위를 달리고 있었다. 맨 뒤에 있던 아드닐이 어느새 내 옆에 섰다. 그녀는 나와 멜렌을 들어올려 양쪽 옆구리에 끼고 노인을 따라 나는 듯이 달렸다. 별안간 등 뒤에서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났다.
나는 아드닐의 옆구리에 매달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천둥마를 따라 잡은 폭풍마가 형의 목덜미를 물어 뜯고 있었다. 천둥마가 괴로운 지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피 대신 쏟아지는 커다란 천둥소리 때문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천둥마의 푸르스름한 몸이 물어 뜯긴 부분부터 허공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대충 통과한 것 같군.”
쉴 틈 없이 달리던 노인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전에 내가 얘기한 적 있지?”
천둥마와 폭풍마가 사라지자 다시 돌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노인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모래 폭풍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게.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그 모래 바람이 자네들을 원하는 곳으로 실어다 줄 거야.”
“영감님은요?”
노인이 무어라 대답했지만, 그의 대답은 바람 소리에 휩쓸려 들리지 않았다. 문득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 사이에 우리는 돌풍에 휘말려 있었다. 위아래가 제멋대로 뒤집히는 시야 속에서 허리춤의 밧줄을 풀며 손을 흔드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딘가의 모래 언덕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묶은 줄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줄을 따라 가니 다행히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아드닐과 멜렌이 보였다. 노인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천둥마와 폭풍마도, 온몸을 세차게 감싸던 모래 폭풍도 모두 꿈 속의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신기하게도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오히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무심코 땅을 짚은 손바닥에 낯선 감촉이 닿았다. 풀포기였다. 고개를 돌리자 파릇하게 펼쳐진 숲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세차게 불던 바람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애시턴의 월례 보고서
목격 지역
메트로센터 지역 돌풍지대의 중심부
크기
어깨높이 약 3m, 몸길이 약 4m.
형으로 알려진 천둥마의 몸집이 좀 더 크다.
색깔
푸른색
형태
천둥마와 폭풍마 모두 목덜미부터 시작되는 긴 갈기가 있고, 이마에는 두 개의 뿔이 나 있다. 비행에 쓰이는 날개 같은 기관은 보이지 않았으며 두 마리 모두 허공을 밟고 달리는 것처럼 하늘을 날아다녔다.
특징
천둥마와 폭풍마의 전설은 옛 이야기를 좋아하는 노인들의 주된 소재이다. 동생을 불쌍히 여긴 신에 의해 두 형제는 밤하늘에 못 박히고, 먹을 것 때문에 동생을 살해한 형은 분노한 동생에게 평생동안 쫓기는 형벌을 받게 된다는 지극히 교훈적인 내용의 이야기이다.
두 생물의 생김새는 거의 똑같았지만, 전설의 내용대로 쫓고 쫓기는 모습을 통해 두 생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천둥마는 온몸에 번개를 맞으며 하늘을 날아다녔는데 번개를 맞을수록 몸집이 커졌다. 마지막에는 거의 산만큼 거대해지기도 했다. 반면 폭풍마는 강한 비바람을 동반하며 날아다녔는데 신기하게도 폭풍마의 주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했다.
형제가 추격전을 벌이는 동안에는 하늘길을 비켜주듯 돌풍지대의 모래 폭풍마저 잠잠해졌다. 아드닐은 우리가 폭풍의 눈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주의사항
돌풍지대의 중심부에서 목격한 이 형제의 추격전은 폭풍마가 천둥마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다가, 분노한 동생이 형의 목덜미를 물어 뜯는 것으로 끝이 났다.
천둥마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는데 하늘을 울리는 큰 굉음이 났으며 가까이에서 이 소리를 듣자 잠시동안 귀가 들리지 않았다.
행복한 의자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순식간에 세찬 소나기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무들의 그림자에 가려 어둡던 숲은 더욱 어두워졌다. 우리는 오래된 거목 아래로 몸을 피했다. 빽빽하게 자란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비를 막아주었다. 비에 젖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내려간 기온 때문인지 멜렌이 몸을 떨었다.
“왠지 으스스한 곳이네요.”
“그럴만하지. 마녀가 사는 숲이니까.”
“마녀요?” 멜렌은 아드닐이 툭 던진 한마디에 사색이 됐다.
“몰랐어? 이 근방에선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그만해, 아드닐.”
내가 말렸지만 아드닐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놀릴 거리를 찾았다는 표정이었다.
“이 숲에 메트로 센터에서 가장 흉악한 마녀가 산대. 소문엔 사람도 잡아 먹는다는데. 운 나쁘게 마주치면 한끼 식사가 될지도ㅡ 꺄악!”
멜렌을 놀리던 아드닐이 별안간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전투태세를 취하며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드닐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발밑이었다. 곧 아드닐의 맥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라임이잖아?”
슬라임은 보기 힘들긴 해도 낯선 생물은 아니었다. 다만 신기한 점은 슬라임이 우리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고 먼저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드닐이 위협하자 겁 먹은 듯 잠시 멀어졌다가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와 우리의 뒤를 달라붙곤 했다.
“꼭 강아지 같네요.” 자신의 발치에서 몸을 비비는 슬라임을 보며 멜렌이 말했다. 자신을 따르는 슬라임이 귀여운지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위험하니까 함부로 만지지 말라니까, 멜렌.”
“하지만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걸요.” 멜렌은 아드닐이 말리기도 전에, 장갑 낀 손으로 슬라임의 일부를 조금 떼어냈다. 그녀의 말대로 점액질에는 산성의 흔적이 없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아드닐이 말을 삼켰다..
“변종 슬라임인가 보네. 데리고 다니기라도 하게?”
“글쎄요. 하지만 그럼 주인이 슬퍼하겠죠.” 멜렌이 빙긋거리며 대답했다.
“주인?”
“사람 손을 피하지 않는 걸 보면 누군가 애완생물로 기르던 게 아닐까요?”
멜렌은 이제 아예 그것을 의자 삼아 앉았다. 그녀의 자그마한 몸이 점액질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꽤나 편안해 보였다.
“편해 보이네?”
“헤헤, 꼭 할머니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에요. 아드닐도 앉아 볼래요?”
“됐어. 걘 내가 근처에만 가도 도망가잖아.”
“그야, 아드닐이 보자마자 소릴 지르고 못되게 굴었으니까 그렇죠.”
아드닐이 피식 웃으며 모닥불을 피우자, 한동안 미동도 없던 슬라임이 크게 출렁였다. 뜻밖에 엉덩방아를 찧은 멜렌이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슬라임은 순식간에 썰물 빠지듯 모닥불의 열기가 미치는 거리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불을 무서워하나 보네. 하긴 변종이더라도 슬라임은 슬라임이니까.”
“아드닐!”
“미안. 고의는 아녔어.”
멜렌은 담요를 챙겨 모닥불 바깥으로 향했다.
“거기서 자게? 그러다 감기 걸려.”
“별로 춥지도 않은 걸요.”
슬라임을 베개 삼아 등을 기댄 멜렌이 담요를 펼쳐 다리를 덮으며 말했다. 어둠 속이라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굉장히 나른한 목소리였다. 나는 모닥불 앞에 앉아 검불을 던져 넣었다. 오늘 밤은 내가 첫 번째 불침번이었다.
정신을 차린 것은 동트기 전 새벽 무렵이었다. 모닥불은 어느새 꺼져 있었고 한기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 불침번 순서대로라면 멜렌이 나를 깨웠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모닥불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멜렌이 누워있던 자리에는 담요 한 장만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애시, 나만 이상하게 느낀 거 아니지?”
X자로 표식이 새겨져 있는 나무를 짚으며 아드닐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숲은 시시각각 변하는 미로였다. 비슷하게 생긴 수풀과 나무들이 방향 감각을 잃기 좋게 배치되어 있었다. 아드닐이 일정 걸음마다 지형지물에 표식을 남겼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어느새 표식을 남긴 곳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꼭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아무래도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이전부터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입밖으로 내고 싶지 않던 말이기도 했다.
“이건 우리가 남긴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드닐이 나무 기둥을 살피며 말했다. 그곳에는 무딘 날로 새긴 듯한 표식이 남겨져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멜렌이 남긴 걸까?”
“아니. 오래된 자국이야.” 나는 집중해서 주변의 나무들을 살펴보았다. 표식을 남긴 것은 우리만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나무에는 대여섯 개의 각기 다른 표식이 남겨져 있기도 했다. 나는 발끝으로 애꿎은 흙을 파헤치며 중얼거렸다. “우리 같이 헤멘 사람들이 많았나본데.”
“젠장, 나 때문이야.” 아드닐은 스스로의 머리를 두드리며 자책했다. “정체도 모르는 것과 같이 두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멜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 보는 사람을 친숙하게 따르던 슬라임, 한밤중에 슬라임과 함께 사라진 멜렌. 미로가 되어 버린 숲과 슬라임의 주인.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긴 이 숲에서 슬라임이 누군가의 손을 탔다면 그 주인이 될 수 있는 건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나와, 녹색 마녀. 나와!”
아드닐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숲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한참을 소리 지르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목에 무리가 올 때쯤에야 나는 무언가 내 종아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슬라임이었다.
슬라임은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처럼 앞장섰다. 걸음이 늦어지면 종종 움직임을 멈추고 우리를 기다렸다. 눈은 없었지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슬라임은 한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잠시 망설이다 그 뒤를 따랐다.
사방이 막혀 있는 듯한 동굴을 지나자 펼쳐진 것은 넓은 공터였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나온 동굴은 어느새 어지럽게 얽힌 덩굴로 바뀌어 있었다. 공터의 한 가운데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멜렌의 모습이 보였다.
“멜렌!”
아드닐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다. 슬라임은 걱정하는 듯한 모습으로 멜렌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허공을 향하고 있었고, 희미한 목소리로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
“뭐라고?”
“에이 참, 귀찮게 좀 하지마요.”
아드닐이 멜렌을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럴 의지가 없어 보였다. 늘어져 있던 그녀는 아드닐의 손길을 뿌리쳤다.
“연구고 뭐고 다 귀찮아.”
멜렌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슬라임을 안으려 했으나, 오히려 슬라임이 그녀를 피했다. 멜렌은 제풀에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문득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손님이 더 있었구나, 토토?”
슬라임의 뒤쪽에서 갑자기 모습을 나타낸 것은 녹색 로브을 입은 여자였다. 큰 키에 젊어 보이는 외모였지만,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여자는 콜록거리며 다가와 장갑 낀 손으로 토토라고 부른 슬라임을 쓰다듬었다. 오래된 풍경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멜렌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드닐이 소리쳤다.
“토토의 점액에 너무 오래 노출됐어요.”
“무슨 소리지?”
아드닐이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아이의 점액은 닿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효능이 있죠. 크게 몸에 해롭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고 멜렌을 내려보았다. “그게 지나치면 목표를 잃고 사람은 무기력해져요. 평소에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여자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멜렌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로브 안에서 호리병을 꺼내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쓰러진 멜렌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약물이 멜렌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일단 응급처치는 해놨으니 곧 정신을 차릴 거예요.”
여자는 빙긋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호의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허름한 녹색 로브와 지팡이. 그녀를 따르는 슬라임. 그리고 숲 안쪽의 비밀공간.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녹색 마녀인가요?”
“이름이 중요한가요? 편할 대로 불러요.” 녹색 마녀는 자신의 발치에서 몸을 비비고 있는 슬라임을 쓰다듬었다. 슬라임의 표면이 크게 한 차례 진동했다.
“토토, 이리 온.”
녹색 마녀는 무릎을 굽혀 들고 있던 호리병을 내밀었다. 슬라임은 몸을 뒤틀며 거부 의사를 보였지만, 얼마 못 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굴복했다. 슬라임의 몸체가 작은 호리병 속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갔다.
“악의가 없는 걸 알았으니 나가는 길을 알려줄게요.”
그녀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우리의 등 뒤를 가리켰다. 우리가 나왔던 덩굴의 일부가 휘어지며 아치 모양으로 변했다.
“당신들의 여정에 축복이 깃들길.”
녹색 마녀는 숲의 덩굴들 사이로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그녀가 숲의 나무들 사이로 사라지자 주변의 풍경이 일렁였다. 공터는 어느새 깊은 숲 속으로 바뀌어 있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해 불씨가 남은 모닥불에서 희미한 연기가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 우리가 피운 모닥불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아드닐이 뭔가를 먼저 발견했다. 주변의 나무들 이곳저곳에 똑같은 X자 표식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멜렌을 찾아 돌아다니며 우리가 새긴 표식이었다. 표식이 새겨진 나무들은 고작 팔 두개 정도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오늘은 두분 다 일찍 일어났네요?”
잠에서 깨어난 멜렌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한숨 푹 잔 것 같은 개운한 표정이었다. 나와 아드닐은 아무 말 없이 허탈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슬라임이 들어간 녹색 마녀의 호리병
애시턴의 월례 보고서
목격 지역
메트로 센터의 녹색 마녀의 숲
크기
평상시에는 1m 높이의 크기이다. 크기나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데, 작아질 때는 호리병에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다.
색깔
짙은 녹청색
형태
정체불명의 점액질로 이루어진 슬라임. 평상시에는 앉기 좋은 의자의 형태를 하고 있다.
특징
일반적인 슬라임의 특징인 강한 산성이 없는 변종 슬라임이다. 전투 능력은 없으며 조금만 위협을 느껴도 겁을 먹고 도망친다. 불을 특히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숲까지 흘러들어 온 것을 녹색 마녀가 거둔 듯하다. 이 때문인지 사람을 매우 잘 따른다. 사람을 발견하면 달려들어 접촉을 시도한다.
주의사항
이 슬라임의 가장 주의해야할 점은 이 생물의 점액이 사람에게 행복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기분이 약간 고무되는 정도지만, 장시간 노출되면 인지능력에 영향이 갈 정도로 강렬한 감정적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녹색 마녀의 말에 따르면 점액에 오랫동안 노출된 생명체는 고양된 행복감에 의해 삶의 의욕을 잃고, 극도로 무기력해진다고 한다. 이 때문에 메트로 센터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녹색 마녀의 숲에 한 번 앉으면 죽을 때까지 일어날 수 없는 ‘행복한 의자’가 있다는 괴담이 떠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슬라임의 점액에 노출되었던 멜렌은 마녀의 도움을 받아 곧 정신을 차렸지만, 숲을 벗어나고도 며칠 동안 금단 증세 비슷한 부작용에 시달렸다. 자신이 사라진 밤 사이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거대한 아기 인형
쫓기는 쪽은 좀처럼 발밑을 살피지 못한다.-헌터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격언
센트럴 파크를 벗어나 타락한 숲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주위는 여전히 적막했고, 썩은 물웅덩이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올라왔다. 이상한 징조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아드닐이었다. 세모난 귀가 숲의 어둠 속에서 민감하게 쫑긋거렸다.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연신 어둠에 잠긴 숲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뭔가 있어.”
아드닐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곧 가까운 곳에서 무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높게 자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희미한 달빛만이 어렴풋이 숲을 비추고 있었다. 숲을 덮은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모습을 드러낸 건 숲의 고목들을 넘어설 정도로 거대한 아기였다. 아기는 푸-‘, ‘파-‘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천천히 숲을 기어가고 있었다. 허벅지는 왠만한 성인 남성의 몸통만 했고, 한 걸음 기어갈 때마다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숨을 죽이고 수풀 사이에 몸을 더 깊숙이 묻었다.
“교수님?”
멜렌이 속삭이며 아기의 손을 가리켰다. 아기의 손에는 한 사람이 들려 있었다. 피골이 상접하고 몸이 축 늘어진 여자였다. 그녀는 초점 잃은 눈을 한 채 무언가 같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멜렌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확신 없는 목소리였다. 구해? 우리가 무슨 수로? 내가 잠시 갈등하는 동안, 여자는 수풀 속에 숨어있던 우리를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눈을 빛내며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잔뜩 쉰 목소리였다.
“저걸 잡아! 나 말고 저걸ㅡ!!”
아기의 손아귀에서 발버둥치던 여자가 우리를 가리켰다. 아기의 고개가 여자의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돌았다. 거대한 눈동자가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온몸의 신경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기는 갖고 놀던 인형을 버리는 것처럼 여자를 던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를 향해 뻗는 인형의 손을 피해 도망치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여자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를 구해준 것은 갑자기 나타난 한 사내였다.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우리를 나무 기둥 속으로 잡아당겼다. 우리는 나무 기둥의 어둠 속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인형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근처를 방황하던 인형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당신 누구야?”
“그건 안전한 곳에서 설명하지. 일단 이쪽으로.”
사내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숲 속에 위치한 폐건물이었다. 건물 입구는 죽은 식물들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다. 다 쓰러져 가는 낡은 건물이었지만,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는 사람의 흔적으로 알뜰하게 채워져 있었다. 꼭 생존에 필요한 도구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을 보는 것 같았다.
“제법 그럴듯한 아지트네.” 아드닐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연신 둘러보았다.
“당신, 헌터죠?”
“꼬마 아가씬 마법사로군. 나머지 둘은 잘 모르겠지만.” 그의 시선이 멜렌의 지팡이를 향했다. 당연한 걸 뭐 하러 입 아프게 묻냐는 듯한 말투였다. “잭이라고 불러.”
“이런 건 어디서 난 거야? 강도짓?” 아드닐이 탁자 위에서 빛을 발하던 마법석을 이리저리 만져보며 물었다.
“강도짓 같은 건 안 해.” 잭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석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빛과 온기가 방 안을 천천히 채우고 있었다. “숲에는 주인 잃은 물건들이 많지. 그런 것들을 가져와 유용하게 쓰고 있을 뿐이야. 흙 속에 파묻혀 있기엔 아까운 물건들이니까.”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봐.” 털가죽으로 덮인 침상에 걸터앉으며 잭이 말했다. “타락한 숲엔 왜 들어갔던 거야?”
“할렘으로 가던 길이야.” 아드닐이 대답했다.
“할렘? 너희들 설마 카쉬파야?” 잭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 보았다.
“퀸즈에 간다고 모두 빙결사인 건 아니잖아요.” 멜렌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지. 미안, 내가 성급했네.” 잭이 한방 먹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 숲을 지나는 길이겠군?”
“그래. 하지만 당장은 할렘으로 가지 않을 거야.” 아드닐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보다 아까 그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은데.” 내가 말했다.
“인형은 왜?” 잭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우린 학회의 학자들이에요. 마계 8면을 돌아다니며 생물들을 연구하고 있죠.” 멜렌이 끼어들었다.
“좋아. 대신 하나는 확실하게 하고 가자.” 잠시 고민하던 잭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은 내 사냥감이야. 건드리면 가만 안 둬.”
탁자 위에서 빛나던 마법석의 빛이 깜빡였다. 잭의 이야기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대평원¹부터 여기까지 그 인형을 쫓아왔다고?” 아드닐이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거긴 자메이카 지역이잖아?”
“몰랐어? 헌터란 원래 그런 족속들이야.” 마계의 절반 가까이를 횡단한 당사자는 정작 담담하게 대꾸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눈길도 주지 않지만, 한 번 목표로 삼은 건 끝까지 놓치지 않지.”
“왜 그렇게까지 그 인형을 뒤쫓는 거야?” 아드닐이 물었다.
“헌터가 사냥감을 뒤쫓는 이유가 뭐겠어.”
“돈?” 아드닐이 중얼거렸다. 잭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걸 잡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지. 물론 사냥에서 얻은 걸 돈 받고 팔긴 하지만, 그건 일종의 전리품 같은 거야. 사냥에 따라오는 부가적인 거지. 너희들, 학회에서 왔다고 했지?”
그는 우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학회와 거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줘. 마법사들이라면 저 인형의 표본에 관심이 많을 것 같은데.”
“물론 많지.” 아드닐이 냉소적인 태도로 말했다. “당신이 그걸 잡을 수만 있다면 말야.”
“곧 잡을 거야.” 잭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계획이 있으니까.”
“계획?”
잭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를 트게 해주면 우리가 얻는 건 뭐지?” 아드닐이 물었다.
그는 서랍에서 지도 한 장을 책상 위에 꺼내 펼쳤다. 숲의 지형과 길이 그려진 꽤나 정밀한 지도였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거대한 덫을 설치하는데 열중인 잭에게 아드닐이 물었다.
“암시장에서.” 잭이 대답했다. “도망친 노예들을 잡을 때 사용하는 덫이라고 하더군.”
나는 바닥에 있던 돌을 던져 덫의 작동 장치를 슬쩍 건드려 보았다. 덫은 무서운 기세로 지면에서 튀어 오르며 강철로 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녹슨 쇠붙이들이 맞물리며 끔찍한 소리가 났다. 이 정도면 포획이 아니라 살상이 목적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잭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봐, 장난치지 마.”
“미안.”
“덫이 이렇게 눈에 띄어서야 일부러 걸리기도 힘들겠다.” 아드닐이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당연하지. 이건 몰이용이니까.” 잭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일부러 눈에 잘 띄게 해서 사냥감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거야. 예전에 인형이 이 덫에 걸려든 적이 있었어. 덫이 인형의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어 바람이 꽤나 많이 새어 나왔지.”
“바람?”
“그래. 웃기는 소리 같지만 인형 안은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어.” 잭은 입 안 가득 공기를 마시더니 ‘푸-‘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이것 말야.”
“바보 취급하지 마. 알아 들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멜렌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구멍이 난 손바닥을 붙잡고 이리저리 날뛰는 바람에 난리도 아니었지. 얼마나 난폭하게 날뛰던지 몰래 지켜보던 나도 목숨이 위험할 뻔했어. 바람이 빠져서 그런지 가죽은 쭈글쭈글해지고 크기도 눈에 띄게 작아지더군. 그 때가 녀석을 사냥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결국 놓치고 말았지.”
덫을 설치하던 잭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멈췄다. 그 때의 일을 회상하고 있는지 회한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얼마 뒤에 바늘로 꿰맨 것 같은 손을 하고 다시 나타나더군. 녀석의 손바닥을 보면 그 때의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어.” 잭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요는 그 녀석의 몸에 바람구멍을 내주면 된다는 거지. 물론 이번에는 손에 구멍을 뚫는 정도로만 끝내지는 않을 거지만.”
“좋아.” 아드닐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당신 계획을 얘기해봐.”
밤이 되자 잭은 숲에서 주운 땔감들로 불을 피웠다. 죽은 식물들이 모닥불 속에서 불티를 날리며 타들어갔다.
“우리보고 미끼가 되라고?”
“미끼가 아니라 인형을 유인하는 역할이야.”
“그게 미끼잖아!” 아드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걱정하지 마.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할 테니까.” 잭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대평원의 지평선²에 걸고 약속하지.”
“그럼 차라리 내가ㅡ”
“넌 수인족이잖아.” 잭은 아드닐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수인족을 잡으려 하지않아.”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녀석을 쫓아 마계의 절반을 지나왔어. 나보다 녀석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나는 인형에게 잡혀 있던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목소리를 높이던 잭은 잠시 심호흡을 하며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 좋아. 여길 지나면 이제 카쉬파의 영역이야. 녀석이 이 숲을 넘어가면 지금처럼 마음 놓고 쫓기는 힘들겠지.”
잭은 힘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할게요.”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의 말다툼에 끼어든 것은 멜렌이었다. 그녀는 작지만 결의에 찬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제가 미끼 역할을 맡을게요. 그럼 됐죠?”
“멜렌! 저런 말에ㅡ”
“탁월한 선택이야.” 멜렌의 마음이 바뀌는 게 걱정됐는지 잭이 잽싸게 말했다. “혹시 부를 줄 아는 노래 있어? 아기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노래요?” 멜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처음 들어보는 멜렌의 노래는 꽤나 감미로웠다. 그녀는 눈을 감고 ‘스태튼 섬의 아기’를 부르고 있었다. 아기가 일을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지만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서정적인 가락이 구슬프기로 유명한 곡이었다. 노래는 그녀의 목소리와 썩 잘 어울렸다.
우리는 근처의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사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인형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푸-‘, ‘파-‘하는 숨소리와 무릎으로 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녀석이야.”
힘들게 설치한 덫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인형은 정확히 잭이 예상한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것도 쥐지 않은 빈손이었다. 멜렌을 발견한 인형은 지난번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기까지는 잭의 계획대로였다. 그러나 인형은 예상외로 멜렌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손을 뻗어도 그녀에게 닿지 않을 거리였다. 그리고 잭이 뛰어내릴 지점에 약간 못 미치는 지점이기도 했다.
인형은 움직임을 멈추고 멜렌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멜렌은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잭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나무 위에서 팽팽하게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노련한 헌터의 눈이 착륙 지점을 찾아 인형의 등을 더듬고 있었다.
“멜렌!”
인형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손을 뻗은 것과 아드닐이 나무 구멍에서 전광석화처럼 쏘아져 나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인형에 손에 멜렌이 붙잡히기 직전, 아드닐은 간발의 차이로 그녀를 낚아채고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자신의 몸통만한 쇠기둥을 든 잭이 나무 위에서 소리를 지르며 인형 위로 뛰어내렸다.
인형을 몰기 위해 잭이 설치한 거대한 덫.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와 함께 인형의 등에서 뜨거운 기운이 훅 뿜어져 나왔다. 숲은 순식간에 찜통처럼 더운 김으로 가득 찼다. 나는 나무 기둥에서 뛰쳐나와 자욱한 김 속에서 아드닐과 멜렌을 찾아 헤멨다. 약간의 화상을 입긴 했지만 두 사람은 무사했다.
우리는 바람 빠진 인형을 내려다 보았다. 불과 방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인형은 미동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인형 주변은 뿜어져 나온 열기로 인해 뜨거워진 흙과 식물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한참동안 열기가 식기를 기다렸다가, 인형 속을 뒤져 잭의 물건들을 찾아냈다. 대부분 녹아내려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잭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뜨거운 증기가 나올 거란 걸 몰랐던 걸까?”
“아마 그랬겠지.”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쩌면 알고도 쫓긴 건 본인이었던 걸지도 모르고.”
“학회에는 뭐라고 보고하죠?” 멜렌이 물었다.
“본 그대로 보고해야지.”
나는 손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아드닐이 어느샌가 챙겨 온 쇠기둥을 잭의 옷가지를 묻은 곳 위에 세웠다. 인형 속에서 유일하게 형태가 남아 있는 물건이었다. 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별로 좋은 녀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약속은 지킨 셈이니까.”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잭이 준 숲의 지도가 부스럭거렸다.
애시턴의 월례 보고서
목격 지역
센트럴 파크 외곽의 타락한 숲
크기
앉은 키 기준 6m, 몸길이 약 10m.
색깔
연한 살구색. 갓 태어난 아기처럼 피부가 하얗다.
형태
거대한 아기의 모습을 한 움직이는 인형
특징
이 거대한 인형이 처음 발견된 곳은 자메이카의 평원 지대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대의 어떤 축제³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인형이라고 한다. 입으로는 끊임 없이 ‘푸-‘, ‘파-‘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마계 8면을 기어 다닌다.
몸 여기저기에 기워 꿰맨 자국이 있으며, 등 뒤에 있는 거대한 바람 구멍이 약점이다. 멜렌은 인형이 마력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다고 했지만, 헌터에게 사냥 당해 결국 그 근원을 알아 내지는 못했다.
주의사항
성인 남성을 한 손에 들고 다닐 정도로 크다. 항상 엎드린 채로 기어 다니며 엄마를 찾고 있다. 엄마처럼 보이는 사람을 잡으면 죽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데리고 다닌다. 움직이지 않고 숨을 참고 있으면 눈치 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고 한다.
추신 : 동봉된 지도에 인형 가죽이 남아 있는 장소를 표시해서 보냅니다. 귀중한 연구 자료이니 사람을 보내 꼭 회수 부탁드립니다.⁴
¹평평한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 자메이카 지역의 평원. 전이된 다양한 생물들이 발견되는 곳이다. 거대한 거인이나 괴수들도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²헌터들은 자메이카의 평원을 ‘대평원’이라고 부르며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 출생과 죽음이 모두 대평원에서 온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의미로 대평원의 지평선에 걸고 약속하기도 한다.
³마계의 곳곳에는 여전히 악마에게 제물을 바쳤던 인신공양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주로 어린 아기들이 선호되었으며, 여의치 않을 경우 마력을 넣은 인형 등의 대체물이 쓰였다고 한다.
⁴보고를 받고 학회가 파견한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서 인형 가죽이 사라진 뒤였다.
벽 속에 사는 짐승, 가룸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숨길 땐 그의 그림자에 숨겨라. -할렘 지역의 속담-
로열 카지노는 ‘할렘의 꽃’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도시의 불빛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화려한 카지노와 주점들, 너저분한 뒷골목과 도시 외곽의 무너져가는 싸구려 숙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리고 그 구조는 거미줄처럼 정교했다. 모든 시설들이 도시의 한가운데 위치한 로열 카지노를 중심으로 설계된 것 같았다.
도시의 중심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가득했다. 거리에 북적대는 인파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걸어야 했다. 할렘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할수록 로열 카지노의 화려함은 더욱 돋보였다. 다른 도시들이 카쉬파의 어두운 그림자라면 로열 카지노는 보는 이의 눈을 멀게 만드는 빛이었다.
“저것 좀 봐!” 아드닐이 멀리서 빛나고 있는 카지노의 불빛을 가리켰다.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도시의 방문객들에게 인사하듯 고개를 위아래로 까딱거리고 있었다.
“이 도시에만 메트로센터의 에너지가 공급되기라도 하는 걸까?”
“저건 마법으로 만든 빛이에요.” 멜렌이 말했다. 그녀 역시 화려한 도시의 모습에 매료됐는지, 평소보다 약간 들뜬 목소리였다.
“어떤 마법석들은 마력을 담아 물건을 빛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럼 학회의 잘난 마법사들은 왜 저런 걸 만들지 않는 거지?” 아드닐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의 이곳저곳에서 화려한 간판들이 자신의 존재를 뽐내듯 빛나고 있었다.
“그야 그런 마법석은 비싸니까요.”
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길가에 걸린 간판들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카지노의 거대한 간판만큼은 아니지만 꽤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간판들 한 쪽에는 멜렌의 말처럼 주먹만한 마법석이 박혀 있었다. 주점까지 이런 마법 조명을 사용할 정도라면, 도시 전체에 돌고 있는 재화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카쉬파 수입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나온다는 소문이 과장이 아닌 것 같았다.
“키잉! 돈 놓고 돈 먹기! 칩이 들어 있는 컵을 맞추면 3배!”
골목 어귀에서 용병으로 보이는 로카족 하나가 세 개의 그릇을 엎어 놓고 이리 저리 섞으며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바위꾼이었다. 사람들은 로카족의 말에 홀린 것처럼 경쟁적으로 칩을 던졌다. 세 무더기의 칩이 순식간에 컵 앞에 쌓였다가 사라졌다.
“이런! 이번에도 꽝이네요.”
신기하게도 로카족이 감춘 칩은 번번이 칩이 가장 적게 쌓여 있는 컵에서 나왔다. 처음에는 멀리서 곁눈질로 구경하던 아드닐과 멜렌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점점 가까이 다가가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뱀! 붉은 담 삼거리에 뱀 세 마리!”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에서 거칠게 인파를 헤집고 다가오는 카쉬파 단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의 발에 차인 컵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도망치려는 사람들과 바닥에 흩어진 칩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뒤섞이며 골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소동의 중심에 있던 로카족은 양 주머니 가득 칩을 챙긴 채, 어느새 사람들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좋은 날일 수는 없는 법! 살다 보면 꽝인 날도 있을 수도 있죠.” 우리와 눈이 마주친 로카족은 칩 두 개를 아드닐에게 튕겨 보냈다. “도박은 꼭 카지노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언제든 다시 찾아주세요, 예쁜 아가씨들. 키잉!” 로카족은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골목의 어둠 속으로 총총거리며 사라졌다.
뒷골목에서 성행 중인 야바위. 카지노 밖에서 이뤄지는 모든 도박 행위는 카쉬파의 단속 대상이다.
이튿날 우리는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로열 카지노는 낮과 밤이 바뀐 도시였다. 지난밤에 휘황찬란하게 빛났던 불빛들은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고, 도시는 아무도 찾지 않는 묘지처럼 변해 있었다. 문을 닫은 가게보다 문을 연 곳을 찾는 편이 쉬울 지경이었다. 길거리에 누워 넝마를 이불 삼아 잠든 사람들은 투박한 모양의 주사위를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쥐고 있었다.
“정말 여기에 가룸이 있을까요?”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멜렌은 경계하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솔직히 이렇게 사람이 많은 도시에 숨어 있다는 게 상상이 안돼요.”
나는 대답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이 도시에 있다면 카쉬파도 알고 있을까?” 아드닐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룸 말이야.”
나와 멜렌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아드닐의 말처럼 카쉬파와 부딪힌다면? 그들의 본거지나 다름 없는 이곳에서 우리가 무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글쎄.”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딪히지 않게 최대한 조심해야지.”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하나둘씩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거리는 순식간에 인파로 뒤덮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숨어 있던 건지 그저 신기할 지경이었다. 길가에 누워 있던 노숙인들도 하나둘 일어나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금방 활기를 되찾았다.
“이래서야 가룸이 이름표를 달고 돌아다닌다고 해도 못 찾겠는데.” 아드닐이 벽에 기대어 주저 앉으며 말했다.
“동감이에요.” 멜렌도 그녀를 따라 주저 앉았다.
“애초에 여기에 있다는 정보 하나로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온종일 골목 구석구석까지 찾아봤잖아.”
“아직 안 가본 곳이 한 군데 남아 있긴 해.”
나는 도시의 중심을 가리켰다. 멜렌과 아드닐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녀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인파가 줄을 서 있었다. 카쉬파 문양의 간판에 불이 들어오자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시끄럽던 도시가 한순간 조용해질 정도였다.
로열 카지노는 하나의 신전 같았다. 오로지 도박이라는 신을 숭배하기 위해 화려하게 지어진 신전.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밀물처럼 카지노 안으로 몰려들어 갔다. 마치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생물이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멜렌, 좀 진정해. 꼬리에 불붙은 키사족처럼 불안해하지 말고.”
“제, 제가 언제요!” 멜렌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얼마 안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카쉬파의 본거지에 들어왔는 사실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머리 위에서 빛나는 휘황찬란한 조명들이 더해져, 카지노에서는 좀처럼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아드닐의 우려와는 달리 우리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카지노 안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고함 소리,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뒤섞여 바로 옆 사람과 이야기하기도 힘들 지경이었으니까. 카지노는 하나의 거대한 신전이었다. 도박이라는 신을 숭배하기 위해, 마계의 돈이 스스로 몰려드는 신전.
우리는 구경하는 척하며 각자 흩어져 카지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가끔 인적이 드문 곳을 순찰하는 카쉬파 단원들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우리를 비웃으며 지나갔을 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아마 우리가 난생처음 카지노에 와 길을 잃은 뜨내기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뭔가 발견한 거라도 있어?”
“딱히.” 아드닐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인 건 카쉬파는 모르는 것 같아. 우리처럼 찾으러 돌아다니는 녀석들도 없고.”
“이 자식들! 뭐? 돈 놓고 돈 먹기? 이거 순 사기꾼들 아냐!”
한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잔뜩 때가 탄 옷을 입은 어린 소년이 테이블 위로 몸을 날려 토끼 귀를 한 딜러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은 지친 표정에 몹시 여윈 몸을 한 소년이었지만, 핏발이 선 눈으로 바락바락 악을 쓰는 모습에 덩치 큰 사내들도 기가 질린 표정으로 물러설 정도였다.
“카드에 수작 부리는 걸 내가 똑똑히 봤다고! 그것도 두 번이나ㅡ”
소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딜러는 순식간에 소년의 팔을 꺾어 테이블로 내던졌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카지노 내부를 울렸다. 어느새 나타난 카쉬파 단원들이 소년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딜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옷차림을 바로 한 뒤, 차가운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며 단원 중 하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사람들은 발버둥치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박장대소하다가, 소년이 단원들의 손에 끌려 나가자 흥미를 잃은 듯 다시 도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요?” 멜렌은 끌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카쉬파가 사람들을 부려 채굴하는 테라나이트 광산이 있다고 들었어.” 아드닐이 멜렌의 어깨를 감싸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할렘에 있다는 노예 시장으로 팔려가는 걸지도 모르지.”
잠시 생각에 잠기던 멜렌은 갑자기 소년의 뒤를 쫓아 나가기 시작했다.
“멜렌!” 순식간에 멜렌을 따라 잡은 아드닐이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어쩌려고! 카쉬파를 상대로 싸우기라도 할 생각이야?”
멜렌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드닐에게 잡힌 팔을 억지로 빼냈다. 그녀의 얇은 손목에 잠깐 사이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생겨 있었다. 아드닐은 당황한 표정으로 잡은 손목을 놔주었다.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어요.” 붉어진 팔목을 잠시 어루만지던 멜렌이 말했다. “우리가 미처 그림자를 살피지 못했던 것뿐이죠.”
다행히 우리는 카지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길에서 세 명의 카쉬파 단원들에게 끌려가는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조금 거리를 두고 그들을 따라갔다. 무언가로 머리를 맞았는지 소년의 이마에서는 굵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두 발이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딜러에게 제압 당했던 한쪽 팔은 여전히 기형적인 각도로 꺾여 있는 채였다. 드문드문 세워져 있는 간판들의 불빛이 골목길을 비추고 있었다. 간판의 불빛을 받은 소년과 카쉬파 단원들의 그림자가 발 밑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멜렌, 네가 잘못 본 거 아니야?” 아드닐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멜렌은 아무 대꾸도 없이 소년의 뒷모습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악ㅡ!”
갑자기 한 카쉬파 단원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기절한 것처럼 보였던 소년이 단원의 팔을 짐승처럼 물어뜯고 있었다. 다른 단원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소년은 턱에 준 힘을 좀처럼 풀지 않았다. 팔을 물린 단원이 단봉으로 머리를 몇 번이나 내리치고 나서야, 소년은 단원의 살점을 한 움큼 베어 문 채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이봐!” 쓰러진 소년을 살피던 단원이 팔을 물린 단원에게 성내듯 소리쳤다. “죽이면 어떡해! 이론제 님이 광산으로 끌고 가라고 하셨잖아!”
“저렇게 눈이 돌아가서 물어뜯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이것 좀 보라구!”
소년에게 물린 단원이 팔을 들어 보였다. 어찌나 세게 물어뜯었는지 살점이 전부 떼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화를 내던 단원이 핼쑥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다른 단원이 끼어들며 두 사람을 다독였다.
“얼른 가서 치료부터 받자고. 광산에 끌고 갈 녀석들은 이곳에 널렸으니까.”
세 사람은 소년을 골목길 구석에 그대로 둔 채 카지노 방향으로 사라졌다. 불안하게 깜빡이던 간판의 불빛이 사라지자 골목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아드닐은 세 사람이 사라지고 한참 뒤에야 쓰러진 소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고개를 저었다. 밤 공기는 그리 차갑지 않았지만 멜렌은 오한이 나는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 모두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순간, 소년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다른 카쉬파 단원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를.
애시턴의 월례 보고서
목격 지역
할렘 지역의 로열 카지노
(여전히 로열 카지노 지역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
몸길이 5.2m, 어깨높이 2.4m 정도.
색깔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온 몸을 감싸고 있다.
형태
거대한 늑대 그림자의 형상을 한 생물. 주로 벽이나 바닥에 그림자로 나타나며 정해진 형태 없이 마음대로 몸을 바꿀 수 있다. 무생물의 그림자에 숨어 있을 때는 그 사물의 그림자를 흉내 낼 수 있지만, 생물의 그림자에 숨어 있을 때는 반드시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전해진다.
기록에서는 주로 살아 있는 늑대 그림자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널리 알려진 각클 벽화 이야기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브롱크스 지역의 유명한 각클 그림쟁이가 벽에 거대한 두 마리 늑대의 형상을 그렸는데 눈동자를 완성하지 않았다. 다른 각클들이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냐고 묻자, 그림쟁이는 그러면 늑대들이 벽에서 빠져나와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다른 각클들은 그의 말을 비웃으며 눈동자를 그리도록 다그쳤다. 그림쟁이가 마지못해 그 중 한 마리의 눈동자를 그려 넣자, 늑대 하나가 벽에서 튀어나와 그림쟁이와 각클들을 모두 해치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다른 늑대는 그대로 여전히 벽에 남아 있었다.
브롱크스 지역에는 벽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늑대의 벽화가 실제로 남아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목격한 가룸의 모습과 어느 정도 일치했다.
특징
한 달가량 로열 카지노에 머물며 가룸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가룸은 카지노 근처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림자가 없는 곳에는 등장하지 못했다. 주변의 모든 그림자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졌고, 후에 그림자가 있는 다른 장소에서 다시 나타났다. 유난히 빛과 사람들이 많은 로열 카지노에 머무는 것은 숨어 있을 그림자가 많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역설적이게도 할렘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이곳이야말로 가룸이 숨어 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무생물보다는 생물의 그림자를, 성인보다는 어린아이의 그림자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숙주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림자에 머무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짧은 시간동안 여러 대상의 그림자를 옮겨 다니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의 그림자를 돌아다니며 로열 카지노에 머무는 것이, 마계의 황량한 다른 지역들에 머무는 것보다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카지노의 도박꾼들 중 눈치 빠른 몇몇은 이런 가룸의 모습을 목격하였으나, 단순히 행운이 찾아올 징조로 치부하고 있었다. ‘늑대의 그림자가 보이면 조만간 큰 돈을 만진다.’는 식으로 말이다.
한번은 이 생물이 아드닐의 그림자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기겁한 그녀가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카지노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카지노 출입이 제한되었고, 한동안 로열 카지노 근처를 맴돌았지만 카지노 밖에서는 좀처럼 이 생물의 모습을 목격할 수 없었다.
주의사항
가룸은 사람들의 그림자 사이를 자유자재로 이동했는데, 가룸이 들어간 그림자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괴물의 형상으로 변했다. 가룸은 숙주의 그림자에 머물며 사람들의 생명력을 흡수했으며 숙주는 쉽게 지치고 피로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가룸이 그림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숙주가 공격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었다. 카지노에서 누군가 소란이 일으키는 경우에는 대부분 그 그림자에 깃든 가룸의 형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마수 - 히에로
발견 지역 : 메트로센터 지역의 바닷가 도시 근처
형태 : 상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사족 보행을 하는 마수. 가슴과 배를 제외한 신체의 대부분이 비늘로 덮여 있다. 주로 지상에서 활동하지만 비늘과 꼬리는 물속에서 움직이기에도 적합하게 발달되어 있다. 발견 당시부터 에컨 양식의 장신구들을 착용하고 있었다.
특징 : 어느 지역의 바닷가 도시에 가든 주민들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바다의 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보편적인 감성으로, 바다의 신은 그런 공포심이 빚어낸 가상의 존재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보호 받는다는 느낌을 얻기 위해, 바다의 신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지내기도 한다. 마계 외곽의 바닷가 도시에서는 이러한 의식의 흔적이 아직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하지만 히에로라는 마수는 이러한 공포가 현실로 뛰쳐나온 경우이다.
히에로는 메트로센터 지역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언어를 구사하지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일 뿐, 상대와의 의사소통을 위한 대화는 하지 않는다. 또 매우 호전적인 성격으로 전투를 즐겨한다. 대부분의 마수들이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과 다르게, 발견된 마수 중 유일하게 다른 마수에게도 싸움을 거는 마수이다. 사냥이나 생존이 아닌, 전투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향과 발견 당시부터 에컨 양식의 장신구들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에컨 행성에서 전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 오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기한 것은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히에로가 4원소 중 물의 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능력이 히에로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인지, 전이로 인한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물의 원소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히에로의 능력이 더욱 강해진다는 점이다.
ㅡ 듈리스가 남긴 관찰 기록 중에서
마수 - 앤의 동상
발견 지역 : 메트로센터 지역의 돌풍지대 초입
형태 : 발견 당시 동상은 얼굴만 남아 있는 상태였고, 목 아래 부분은 무언가 강한 힘에 의해 뜯긴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이마에 박힌 보석이었는데 거대한 크기도 크기지만, 특유의 영롱한 빛깔로 도굴꾼들을 불러 모았다. 수많은 도굴꾼들이 보석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동상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고 한다.
특징 : 사실, 마수는 단순히 '강한 생명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주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라면 얼마든지 마수로 분류될 수 있다. 일부 마수의 경우 생명체라기 보다는 의지를 가진 자연 현상이거나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에 가까운 경우도 있었다. 움직이는 동상 또한 그런 경우였다. 사람 키의 세 배 정도 크기인 이 동상은 메트로센터 지역의 돌풍지대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관찰 당시, 동상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카쉬파의 마법진으로 인해 봉인이 풀릴 상황에 처하자 스스로 움직여 마법사들을 처치했다. 린다의 가설에 따르면 봉인이 해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전장치인 동상의 힘이 발동된 것으로 보인다. 동상 안에 어떤 마수가 봉인되어 있는 지, 또 카쉬파가 그 사실을 알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동상은 무게가 없는 물체처럼 날아올라 움직였으며, 카쉬파의 마법사들을 공격한 힘은 마법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힘으로 보였다. 동상은 돌풍지대에 잠시 머무르다가 얼마 뒤 홀연히 사라졌다.
ㅡ 듈리스가 남긴 관찰 기록 중에서
마수 연구자, 카트린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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