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코 레이드] 환영이 남긴 것

석양(夕陽) - 上
글: 月 / 그림: 58
발끝에 닿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비척이는 걸음걸이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으며 고개 숙인 두 눈에는 공허함 만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도착했는지도 모르게 달빛 주점에 들어선 아간조는 벽에 기댄 채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 무엇도 그의 시야에 담기지 않았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공허한 눈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되짚는 듯했다.
시간 속에서 지워져 버린 그녀의 존재는 자꾸만 흘러가는 시간의 덮개 아래로 희미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 기억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간조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잊지 않아… 다시는… 록시 널…’
지그시 감는 눈꺼풀의 암막 위로 하얀 기억이 덧대어졌다. 흐릿해지는 시간 위로 되뇌이듯 그녀의 기억을 새겼다. 안간힘을 쓰며 기억을 붙잡던 아간조의 입가에 어느 순간 피식, 씁쓸한 조소가 걸렸다.
‘그래, 잊을 수 없지… 그날의 너는…’


“그 돈주머니… 여기 두고 가라.”
그 당당함에 잠시 넋이 나갔던 것 같다.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마주한 구릿빛 피부를 지닌 여인의 말은 그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음…”
고민인지 난감함인지 모를 신음을 내뱉은 그는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짝 거머쥔 검 손잡이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탓이리라…
“훗… 이거 원…”
어리숙한 강도와 놀아나 줄 생각은 없었기에 갈 길을 재촉하려는 찰나, 비웃는 것이라 여겼는지 기세가 매서워진 여인의 검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들었다.
챙-
부딪힌 검 날이 제법 날카로웠지만 정돈되지 않은 날것과 같았다. 차분한 움직임으로 단숨에 칼날을 밀어 누른 그가 경고하듯 중얼거렸다.
“고작 이런 실력으로 강도질인가…”
그 말이 도화선이 되었는지 이를 부득 갈며 달려든 그녀의 검 끝이 더욱 산만하게 쏟아졌다. 길들지 않은 짐승처럼 날뛰는 그녀의 검을, 그는 마치 숙련된 조련사처럼 여유롭게 받아치고 있었다.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더는 시간 낭비라 여긴 아간조가 거대한 대검에 힘을 싣자 여인의 양손 검은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져 바닥에 꽂혔다.
이번 대결로 본인의 실력을 깨닫고 허튼짓을 접는다면 다행이리라. 그것이 아니라도, 이 정도 힘의 차이라면 다시는 자신에게 덤비지 않을 것이리라.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돌아서 걸어가던 아간조의 등 뒤로 엄청난 살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섬뜩한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대검을 올려세운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으로 날아든 붉은 짐승의 모습에 헛바람을 집어삼켜야 했다.
“흡…!”
말 그대로 짐승이었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에는 살의만이 남아있었으며, 드러난 팔은 붉은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그와 칼을 맞댄 그녀의 입가에서 거친 숨과 함께 짐승의 그것과 같은 낮은 울림이 새어 나왔다.
엄청난 살기를 검 날로 받아내던 아간조의 시선이 들끓듯 꿈틀거리는 붉은 팔로 향했다.
“귀수…?”
그녀의 한쪽 팔을 옥죄고 있던 거대한 장신구가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장신구라 여겼는데 구속구였던 건가? 흑요정에게도 ‘카잔 증후군’의 영향이 미치다니…
흥미로움과 함께 묘한 동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찰나였을 뿐, 목숨이 오고 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아간조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성난 광풍처럼 몰아치는 그녀의 공격을 그는 거칠게 튕겨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노력했다. 상대를 죽이고자 했으면 훨씬 수월했을 전투였지만,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 맞대는 칼날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거친 호흡과 땀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섞이는 칼날과 떨어지는 땀방울 속에 붉은 그녀와 그녀의 검만 보일 뿐, 주변의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순수한 본능으로 부딪혀 오는 그녀가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순수하게 검만을 부딪히고 있는 지금의 순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
검을 오랫동안 휘둘렀더니 정신이 잠시 이상해진 모양이군.
어느새 이성 없이 휘두르는 단순한 그녀의 공격을 간파한 그의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고 여긴 그는 그녀의 검을 튕겨내고는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내리눌러 제압했다.
이성이 남아있지 않은 그녀가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무기를 쥐고 있지 않음에도 이성 없이 발악하는 그녀의 움직임에, 잘못하면 그나 그녀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좀 더 힘주어 그녀의 양팔을 압박한 아간조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이겨내라.”
성인 남성의 힘보다 거센 그녀의 움직임에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이겨내.”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점점 그녀의 발악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압박하고 있던 순간, 움직임이 잦아든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녀의 눈동자에 이체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살기가 잦아들고 그녀의 눈동자가 본래의 색을 되찾자, 아간조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이성을 되찾은 듯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자신이 벌인 일이 수치스러운 듯, 또는 괴로운 듯 바닥을 바라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느새 붉게 물든 태양이 그녀의 어깨를 비추며 길게 그림자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폭풍같이 몰아치던 좀 전의 기세와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가녀리고 작아 보이는 어깨였다.
아간조는 굳이 뭐라 말을 건네지 않고 조심스레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그녀 옆에 내려놓았다.
군말 없이 몸을 돌려 돌아선 그의 뒷모습을 그녀는 한참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의 그림자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게 그와 그녀의 시작이었다.


뒷골목 구석에 허름하게 자리 잡은 달빛 주점의 문이 벌컥 열리며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여기 있었군.”
폐인처럼 주점 구석 바닥에 너부러져 앉아 있는 아간조를 바라본 라이너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가왔다.
“뭔가 찾아낼 것처럼 의욕 넘치게 나섰던 사람이 상태가 왜 이런가? 그 찾고자 했던 걸 못 찾은건가?”
아간조의 앞에 의자를 끌고 와서는 털썩 주저앉은 라이너스가 한심스럽게 묻자, 공허하게 바닥을 바라보던 아간조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찾고자 했던 거라…”
자조적인 미소를 보인 아간조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실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찾았지... 찾았다네.”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라이너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지고 왔던 무언가를 그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이것을 돌려줄 때가 된 것 같군.”
‘허름한 스야 숄더’를 내려놓은 라이너스가 짐을 덜었다는 듯 속 시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맡겨두었던 것이네. 당시에 도대체 왜 이런 허름한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며. 자네가 놓친 무언가를 찾을 때까지 맡아달라고 내게 부탁했었지.”
바닥에만 못 박혀 있던 아간조의 시선이 천천히 자석에 이끌리듯 ‘허름한 스야 숄더’로 향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찾고자 했던 걸 찾았다고 하니 이 물건도 돌려주는 게 맞을 것 같군. 근데 자네 괜찮은 건가?”
아간조는 말없이 스야 숄더에 천천히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마치 그것에 묻은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것처럼…


“내 이름은 록시. 괜찮다면… 이름을 알려 줄 수 있겠나, 방랑자?”
어느새 자연스럽게 동행 아닌 동행이 되어버린 둘 사이에서 제일 먼저 입을 뗀 것은 록시였다.
석양이 지는 붉은 태양 너머로 바람이 불어왔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 또한 석양만큼 붉어 보였다.
그간 그녀의 행동을 눈여겨보건대, 아마 저 말을 하기까지 꽤나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으리라.
붉게 지는 석양과 그녀의 피부색이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아간조.”
고심 끝에 건넨 말에 흔쾌히 대답이 들려오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그녀가 선뜻 다음 질문을 이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엘븐가드, 그란플로리스의 경계지역이지.”
미동도 없이 앞을 바라보며 말하는 아간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좀 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엘븐가드에는 무슨 일이지?”
꼭 이유가 있어야 하냐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맑은 그녀의 눈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헛기침한 아간조는 퉁명하게 말을 이었다.
“부탁받은 것이 있어서.”
“흐음… 모험 중인 건가?”
동경과 설렘이 섞인 그녀의 질문에 아간조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모험가 치고는 장비가 너무 허름한 것 아닌가?”
“아직은 쓸만하다.”
덤덤하게 대꾸하는 그의 모습에 록시는 피식 미소를 흘리며 몇 걸음 앞서 걸었다.
“꽤 오랫동안 함께한 것들인 모양인데, 나름의 의미부여를 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군.”
그녀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해, 아간조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록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뭐…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곳은 아니지만, 내 고향인 흑요정 왕국에서는 오래된 물건이나 동물에 기억해 두고 싶은 순간이나 의미를 부여해두는 습관이 있지. 고립된 곳에서 오랜 시간 지내다 보니 생긴 관습 같은 거랄까?”
그녀가 들려준 흑요정의 관습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녀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한 적이 있었나 싶은 마음에 아간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의 눈빛에 머쓱해진 록시가 서둘러 얼버무렸다.
“그냥 그런 게 있다는 말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당황한 록시가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며 앞서 걸어가자 아간조의 두 눈이 당황스럽게 그녀를 쫓았다. 록시의 반응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조금 흥미로웠다. 사물에 기억해 두고 싶은 순간이나 의미를 부여 한다라…
어쩌면 귀수를 지닌 흑요정과 동행하게 된 이 순간이 그에게는 그런 의미일지도…


석양(夕陽) - 下

글: 月 / 그림: 58
거대한 둔기를 우렁차게 탁자에 내려친 브왕가가 불만스러운 듯이 아간조를 내려보았다.
덕분에 달빛 주점의 주인장인 슈시아의 눈총이 따갑게 쏟아지자 이내 헛기침을 한 브왕가가 아간조 앞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봐, 아간조. 도대체 왜 그러는 건가? 시로코와의 전투 이후 왜 이렇게 주점에만 처박혀 있느냐는 말이야.”
답답한 듯 주문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브왕가의 행동에 묵묵부답 대답이 없던 아간조가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왕가.”
“그래, 말해보게. 시로코와의 전투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겐가?”
술에 취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멀쩡하고 곧은 시선이 브왕가를 향했다. 아간조의 뚜렷한 시선에 브왕가가 긴장하는 사이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시로코와 싸우던 때…”
“그래, 자네와 우리가 힘을 합쳐 하늘성을 점거한 그 요물을 해치웠지 않나!”
“아니, 그 전에… 비명굴에서 말이네.”
느닷없는 비명굴 얘기에 브왕가가 의중을 알아채지 못하고 의아하게 바라보자 아간조가 간절하게 되물었다.
“정말 기억나지 않나? 비명굴에서 시로코를 죽음에 몰아넣은 자를?”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시로코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한 건 자네이지 않았나.”
브왕가의 대답에 아간조는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래…그렇지… 그렇겠지…”
브왕가의 대답을 뒤로 재차 술잔을 기울이는 아간조의 모습에 브왕가는 답답한 듯 머리를 벅벅 긁을 뿐이었다..
“도대체 자네가 왜 이러고 있는지 내 짧은 생각으로는 도무지 모르겠군.”
그때, 음침한 달빛 주점의 문을 조심스럽게 여는 자가 있었다. 사도 시로코의 토벌 소식을 듣고 쇼난의 사절단으로 건너온 칙사 ‘우’였다.
인사차 단정하게 묶인 꽃다발을 들고 왔던 우는 가라앉은 분위기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끼면 안 될 자리에 온 것일까요?”
다시 한번 머리를 벅벅 긁던 브왕가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오, 마침 나가려던 참이었으니 마저 일 보시오.”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길을 비키는 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던 브왕가는 주점 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친우에 대한 염려를 잊지 않았다.
“정신이 좀 돌아오거든 나를 다시 찾게나. 기다리고 있겠네.”
그런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는 아간조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들고 온 꽃을 옆 테이블에 올려둔 우가 다가와 앉았다.
“찾던 분은 찾으셨습니까?”
한잔 들이킨 그가 묵묵히 대답했다.
“그렇소.”
“헌데 왜 그러십니까.”
“찾자마자 잃었기 때문이오.”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기억은 찾으신 모양이로군요.”
순간, 술잔을 내려놓는 아간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에서 그의 참담한 기분이 여실히 느껴졌다.
“기억이 돌아왔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그녀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내가 존재하는 이 시간 자체에서 지워져 버렸는데…”
울분을 삼키는 그의 모습에 우는 씁쓸하게 시선을 돌려 자신이 내려놓은 꽃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는 부럽군요. 그분은 당신의 기억 속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크게 남아 계신 듯하니까요…”
혼잣말을 하는 듯한 그녀의 중얼거림에 아간조는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우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도 저와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록시가 바라던 마음…?
“그게 무슨 소리…”
일순간 제 감정에 휩쓸려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아간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돼! 록시! 절대 구속구를 풀어서는 안 돼!!”
한기가 서릴 듯한 차갑고 습한 동굴 벽을 타고 아간조의 외침이 처절하게 울렸다.
시로코의 정신 지배 능력으로 하나, 둘 차가운 비명굴 바닥에 쓰려진 동료들… 그리고 마지막 정신력으로 안간힘을 다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버티고 있던 아간조는 록시가 구속구에 손을 향하는 것을 보고는 절규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구속구를 푼다는 것은. 불나방이 되어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는 것.
“록시!!”
아간조의 시야에는 그녀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 모습조차 흐릿해지는 시선 탓에 물에 번진 듯 뿌옇게 보이고 있었다. 등 돌리고 있는 그녀가 뭐라 중얼거리는 듯했다.
“미안… 하지만… ..보다 조금은… …..한걸”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구속구가 그녀의 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돌아서라고 외치고 싶었다. 네가 아니어도 된다고, 아니, 너만은 아니어야 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겨우 버티고 있던 다른 쪽 무릎이 맥없이 꺾이고 말았다. 동시에 바닥에 엎드리듯 무너진 그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그리고…
폭풍이 일었다고 생각했다. 붉은 기운과 검은 기운이 뒤섞여 폭발하듯 휘몰아쳤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싶은 순간, 세상이 하얗게 번지고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그 찰나 같은 순간…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그가 정신 지배 능력에 무너져 모든 것이 멈춘 순간 그의 시간도 멈춰 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모든 시간과 모두의 기억 그리고, 그의 기억 속에서 잊혀 버렸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기억의 끈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그것은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던 록시의 목소리였다.
‘이상하지… 이 세상 모든 게 싫었던 내가…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아름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누구...?
‘고마워… 아침이 다시 온다는 것이 행복이란 것을 알게 해줘서… 그리고…’
누구의 목소리? 어째서…
‘나를… 잊지 말아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감정이라고는 사라진 듯했던 아간조의 얼굴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바랐던 건… 살고 싶다는 욕심도,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바램도 아닌, 그저… 단지 그의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더욱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깨달은 사실과 그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울분과 설움이 목 끝에 턱, 걸려 아우성쳤다. 소리 내어 우는 것조차 떠나간 그녀의 마음을 옥죄게 하는 것일까 봐, 꽉 쥔 두 손이 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을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바라보던 우는 차분한 표정으로 옆에 놓인 꽃을 들어 건넸다.
“지금은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아간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직 그는 록시의 기억을 되새기기만도 벅찬 상태였다. 그간 그녀가 비친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록시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 찬 지금 이전처럼 어영부영 그녀를 대하는 건 그녀에게도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 찰나 우가 차분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말씀 안 하셔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녀를 기억하기 이전부터 행동으로 완곡하게 거절하셨는걸요.”
그녀의 말에 더욱 마음이 무거워진 아간조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자 우가 서슴없이 말을 이었다.
“이 꽃이 무언지 아십니까?”
느닷없는 꽃 타령에 아간조가 뭐라 답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우가 예의 그 차분하고 아름다운 미소로 답했다.
“물망초라는 꽃입니다.”
더없이 어여쁘고 눈부신 여인의 미소 끝에 쓸쓸함이 걸렸다.
그런 우를 마주 보며 미소 지은 아간조가 받아든 꽃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꽃이오…”
당장이라도 무언가 쏟아질 듯한 눈으로 꽃을 바라보는 아간조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바라보는 우 또한 마주 미소 지었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입니다.’
그녀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엘븐가드쪽에서 불어온 북서풍의 바람이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날이었다.



[시로코 레이드] 환영이 남긴 것


모험가님, 오셨군요. 사실은 부탁이 있어요.
시로코의 기운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에서 특별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무엇인지 현재 분명하지 않지만 시로코의 기운이 남아있는 흔적을 정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하늘성에서 기운이 남은 흔적을 정화해 주세요.
이미 저희는 많은 희생을 치뤘기 때문에 모르는 병사들이 흔적에 접근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더 이상 바라보는 더 많은 이들을 잃을 수 없어요.
부탁드릴게요. 모험가님



시로코 레이드에서 시로코 5회 처치
(가이드 던전에서는 클리어 불가)





아간조 : 이런... 다시 해보게나. 그 순서가 아닌 것 같네
아간조 : 그래, 그거였군. 그렇게 하나씩 해나가면 되는건가보군
아간조 : 문이 다시 닫혀버렸네. 아무래도 문이 열려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나보군

아간조 : [환영의 경계]의 힘이 사라졌어. 몽환의 새벽이 약해지는것 같군
아간조 : [악몽의 밤]의 힘이 사라졌어. 몽환의 새벽이 약해지는것 같군
아간조 : [귀환의 낮]의 힘이 사라졌어. 몽환의 새벽이 약해지는것 같군
아간조 : [악몽의 밤]의 힘이 다시 느껴지네
아간조 : [귀환의 낮]의 힘이 다시 느껴지네

아간조 : [고난의 거울]의 힘이 사라졌어. 잘했네
아간조 : [고난의 거울]의 힘이 다시 느껴지네
아간조 : [고난의 거울]이 폭주할 것 같네
아간조 : [고난의 거울]의 힘이 폭주하여 구역이 재설정되었네...

아간조 : [기억의 파편]의 힘이 사라졌어. 고생했네
아간조 : [파편의 기억]의 힘이 사라졌어. 고생했네

아간조 : [성의 환영]의 힘이 사라졌어. [무형의 관문]의 피해가 커지는군
아간조 : [환영의 성]의 힘이 사라졌어. [무형의 관문]의 피해가 커지는군

아간조 : [무형의 관문] - 비타의 힘이 느껴지네
아간조 : [무형의 관문] - 비타의 힘이 사라졌네!

아간조 : [무형의 관문] - 넥스의 힘이 느껴지네
아간조 : [무형의 관문] - 넥스의 힘이 사라졌네!

아간조 : [부유의 성]의 힘이 느껴지네
아간조 : [부유의 성]의 힘이 사라졌네!



아간조 : [무의식의 관]이 하나씩 파괴되는군
아간조 : 의식의 관이 하나씩 파괴되는군

아간조 : [무의식의 관 : 억압]의 힘이 다시 느껴지네
아간조 : [무의식의 관 : 부정]의 힘이 다시 느껴지네
아간조 : [무의식의 관 : 망각]의 힘이 다시 느껴지네

아간조 : 록시를 일깨워 시로코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아간조 : 지금이 시로코를 처치할 기회일세!
아간조 : 시로코의 진정한 의식이 점점 흐릿해 지네!
아간조 : [무의식의 관 : 부정]이 폭주할 것 같네!
아간조 : [무의식의 관 : 부정]이 폭주하여 구역이 재설정되었네...
아간조 : 시로코의 내면이 닫혔네... 다음 기회를 노리지



<퀘스트 완료>
시로코의 기운은 남아있지만 특별히 위험한 흔적이 남아있진 않은 것 같아요.
모험가님께서 베푸신 호의가 큰 도움이 되었어요.
이것은 레미디아 바실리카에서 모험가님을 위해 준비한 물건이에요.
정화된 흔적 중 한 곳에서 발견된 물건입니다. 교단에서는 이 물건을 모험가님께서 가지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어요.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의 축복이 모험가님의 어깨에 머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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