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겐트
1. 신문 기사
"대령님 유명 인사네요."
겐트 사령부 소속 루카스 소위는 서류에 푹 파묻히다시피 한 운의 눈앞에 빳빳한 신문을 들이밀었다. 아직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신문에는 운의 어릴 적 사진과 언제 찍혔는지 모를 최근 사진들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화질이나 상황을 따져봐도 본인의 의사를 구하지 않았음이 명백했다. 신문사는 아예 작정했는지 그의 이야기를 특집 코너로 편성하여 며칠에 걸쳐 담아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운은 무심히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런가."
"요즘 기자들이 자주 대령님을 찾는다 싶더니 또 특집이 나오네요. 팬들이 더 늘어나는 거 아닙니까?"
"모르겠군."
"천계를 울린 '꼬맹이 라이오닐'이 늠름한 군인이 되어 나라를 구했다. 전 사령부 최연소 대령으로 유명한 그는 천계군 최연소 소년병 출신으로도 유명하며, 최근의 공을 인정받아 준장으로 진급할 기회를 얻었으나..."
"그만 읽게."
운이 조용히 부탁하자 루카스가 자기 일인마냥 아쉬워하며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렸다.
"왜 거절하셨습니까? 준장이라고요. 사령부 최초의 20대 준장! 월급도 많아질 거고 부하도 많아질 테니 우리 일도 줄 텐데..."
슬쩍 본심을 드러내는 루카스에 피식거리며 듣던 테미 대위가 끼어들었다. 루카스와 마찬가지로 운보다 연상인 그녀는 계속되는 감축 방침 때문에 세 명으로 줄어든 이 사무실에서 홀로 여자였다.
"우리가 할 야근을 대령님이 다 하시는데 무슨 소리야? 자네나 숫자 틀려서 일 늘리지 마. 매번 찾아내는 게 쉬운 줄 알아? 그만 놀고 아까 하라고 했던 거나 빨리 줘."
"이상하군."
펜을 멈춘 운이 중얼거리자 테미가 손을 크게 휘저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소위가 숫자나 단위를 틀리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고요."
"나에 대한 기사를 내는 게 이상하다는 뜻이네. 안톤은 지난 일이고, 이런 대형 신문사는 귀족의 자본으로 움직이지. 이제 와서 군을 띄워줄 이유가 없는데."
"이건 군이 아니라 대령님 개인을 띄우는 겁니다."
자기 자리로 돌아간 루카스가 운의 의문에 답했다. 독촉받은 서류를 찾으며 서랍을 있는 대로 열어보던 루카스는 운이 말없이 기다리는 걸 깨달았다.
"말씀대로 신문사 대부분은 귀족의 입김 때문에 군에게 야박하죠. 군 병원 신축을 무산시킬 때도 신문사가 앞장섰고요. 말로는 있는 국립 병원이나 잘 쓰라는 거였지만, 귀족의 개인 병원에 환자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거였잖아요."
"그래 놓고 지금은 돈 없는 군인들이 치료받을 데가 없다며 비난을 쏟아내고 있죠. 황녀님이랑 사령관님 탓하면서." 테미가 투덜거렸다.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대령님의 기구한 사연에만 집중하면서 동정이나 하고 있죠. 이건 영웅 취급도 뭣도 아니에요. 인기 끌기지."
"귀족이 대령님의 인기를 올려서 뭐하게?"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령님이 아니라 신문의 인기 말입니다. 옛날부터 유명했잖습니까. 꼬맹이 라이오닐의 이야기. 저 불쌍한 애를 도와줘야 한다고 엄청 난리였죠. 그 이후로 무기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요. 대민지원은 없었다고 들었지만 귀족 소유의 공장은 큰 돈을 벌었죠... 아무튼, 그때부터 사람들은 대령님을 향한 구원자 심리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계속 관심을 갖는 거죠. '쟤는 우리 덕분에 저렇게 잘 된 거다.'라며. 주워온 강아지가 재롱떠는 걸 보며 흐뭇해하는 거랑 비슷한 겁니다."
테미는 고민했다. 루카스의 비유가 틀린 것 같지는 않지만, 상관을 강아지에 빗대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운 본인이 열심히 듣고 있는 걸 보니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가. 하지만 전쟁이 끝났으니 내 이야기는 이제 흥미 없을 텐데."
"대령님은 일종의 트로피니까요. 트로피는 잘 닦아서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법 아니겠습니까. 요즘 귀족가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둘째나 셋째를 대령님과 결혼시키라고 해요. 무법지대 출신이라는 악조건도, 상대가 꼬맹이 라이오닐이라면 예쁜 장식에 묻은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루카스는 간단히 말했지만 운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무법지대에게 뼈아픈 패배를 맛본 사람들은 다시 그들을 무시하고 차별함으로써 상처를 회복하려고 하고 있었고, 이는 황녀가 골치를 썩이는 문제였다. 그러니 운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사회 현상이 아니었다. 우월감, 과시욕.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심리 요인은 '바다 멀리 어떤 산이 있다더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 설명에 자화자찬하고 있는 루카스와 생각에 잠긴 운을 본 테미가 마침내 끼어들었다.
"뭔 소리야. 그냥 요즘 제국군이 짜증 나니까 대항마로 대령님 기사를 낸 걸 수도 있잖아. 아님 혹시 알아? 사장이 사실 대령님의 열렬한 팬이어서, 화려한 공개 구혼으로 대미를 장식할지. 자네가 말한 '바칼이 숨겨놓은 해저성'보다 더 현실적인 거 같은데."
운은 루카스의 모험적인 공상보다 테미의 발랄한 상상이 더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루카스가 테미를 향해 외쳤다.
"바칼은 분명히 숨겨놨을 거라니까요!"
"안톤만 봐도 사도가 도둑이 무서워서 바다 아래에 성을 지었을 거라는 이야기는 안 믿겨져. 그런 소리나 하니까 자네 형님이 제발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씀하신 거 아냐. 이제 그만하고 아까 달라고 했던 초안이나 내놔. 분명히 또 엉망으로 써놨을 거야. 황녀의 정원에 있는 친구가 저번에 얼마나 웃었는지 알아? 내가 부끄러워서 정말..."
루카스는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고 테미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신문 기사에서 시작된 잡담은 그렇게 홍일점의 승리로 끝났다. 질문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운은 다시 업무로 돌아가려 했다.
"실례합니다. 라이오닐 대령님, 대장군님이 회의 자료를 들고 와달라고 하십니다."
사령부 소속의 누군가가 잭터의 호출을 전달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오후 2시였다. 운이 주섬주섬 서류를 챙기는 모습을 보며 루카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빨리 부르시네요. 검토 못 한 거 있으면 도와드릴까요?"
"아니. 재검토까지 끝냈네. 나는 이대로 외부로 나갈 것 같으니 자네들은 정시에 퇴근하게."
"한 시간 일찍 나가면 안 될까요? 소위가 지난 사격 시험에서 또 떨어져서 옆에서 좀 봐야겠어요."
루카스의 얼굴이 벌개졌다. 운은 별 표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테미는 루카스에게 의미 깊은 시선을 보내었다. 기가 죽은 낙제자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책상 옆에 치워둔 신문에는 운에 대한 기사 아래에 잭터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설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2. 사령관실
천계의 군 체계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몇 개의 섬으로 분리된 환경에 맞게 각각의 사령부가 존재하며, 황도군을 관리하는 겐트 사령부가 이들을 총괄 지휘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선대 사제 벨드런 대에 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나 아직도 군 체계가 완벽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다. 지역 사령부로 대표되는 일련의 체계 외에도 황녀의 정원, 겐트 수비대, 해안수비대 등의 특수 부대는 별도의 규칙을 따른다. 이들은 편의상 준장이나 소령 같은 계급명을 빌리지만 사령부의 그것과 딱 들어맞지 않는다. 세부적인 조직이 존재하여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면서 이 지경이 된 것은, 긴 평화와 고립된 환경 속에서 굳이 힘들여 바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체계로 인한 혼란이 간혹 일어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굳어진 조직을 단번에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특수 부대들은 이미 독립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였기에 겐트 사령부조차 이들을 재편성할 권한이 없다. 각 특수 부대를 모두 지휘할 수 있는 것은 최고 사제, 현재의 황녀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겐트 사령부의 최고 지휘관인 잭터 이글아이의 위엄이 떨어지지 않는다.
각 사령부의 최고 지휘관은 대장군에 임명되나, 고관 예우라는 관행이 겹쳐 한 사령부에 대장군이 복수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 황녀가 대장군이라 임명한 이는 잭터 단 한 명뿐이다. 각 특수 부대 역시 그를 존중하여 조언을 따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잭터 이글아이가 황도군을 넘어 천계군 전체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불리고 있는 까닭이다.
천계 최초의 단독 대장군. 무법지대 출신이지만 실력 하나로 겐트에 불려와 안톤과 싸우는 등의 혁혁한 공을 세운 입지전적 인물. 황녀가 믿고 의지하는 나라의 어른. 받은 훈장을 모두 달면 번쩍거리는 미늘 갑옷이 될 거라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높은 신빙성을 가진 소문의 주인공 잭터 이글아이. 멋진 백발을 귀 뒤로 깔끔하게 넘긴 그는 사령관실에 앉아 손톱을 깎다가 살을 찢어 피를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이런 때도 있는 법이야."
"그렇습니까."
아무리 권위에 매달리지 않는 성격이어도 부하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는 법이다. 잭터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부관이 건네는 서류를 받았다. 귀족들에게 나눠줄 것도 있기에 대부분 손글씨였다. 아라드인이 입을 쩍 벌릴 정도로 과학 기술이 발전한 천계건만 전통을 중시하는 귀족들은 손으로 쓴 서류를 선호했다. 물론 그들이라 해서 모든 서류를 손으로 쓰지는 않지만, 잭터를 상대로는 유난히 기품을 강조하곤 했다.
기계가 쓴 듯 정갈하고 틀림없는 글씨에 흡족해하며 잭터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잘했군."
"다 읽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잘했겠지."
운이 갸웃거렸다.
"돋보기가 필요하십니까."
"젠장.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어차피 초안을 확인했으니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 아닌가."
"제 임의로 자료를 몇 개 더 첨부했습니다. 82쪽부터 84쪽을 확인해 주십시오."
부지런한 부하가 이래서 귀찮으니 어쩌니 배부른 소리를 하며 잭터가 내용을 확인했다. 처음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였으나, 마지막 페이지를 보는 동안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거, 제대로 확인한 건가?"
운은 설명하는 대신 별도로 들고 있던 서류를 잭터에게 넘겼다. 이번에는 종이를 넘기는 잭터의 손길도 신중했다. 내부 고발장, 사진, 유출된 기밀 자료로 구성된 문서들은 운이 제출한 내용이 사실이라 증명하고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던 잭터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멍청한 놈들.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겠군."
"......"
"병원 짓겠다던 거 막은 것도 다 이러려고 한 거였나. 돈타령하더니 세금 낼 생각은 안 하고 우리 몰래 의료소나 지어서 환자를 공짜로 치료? 구호물자는 다 제국이 제공? 멍청한 짓만 골라서 하는군. 웨스피스에서 가져온 곡물은 불태우면서 제국이 갖고 온 밥은 더 맛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저번에 분명, 제국군 때문에 바이러스가 들어와서 가축 5만마리를 살처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귀족들은 제국이 우리에게 바친 공물이라며 수준이 조금 모자라도 아량을 베풀자고 합니다. "
"미친 소리. 그쪽은 우리의 빈틈만 노리고 있을걸. 아라드에서도 악명이 높더구만. 이것 봐. 그냥 주는 게 아니잖아. 운송료도 어마어마할 텐데 우리 좋으라고 물자를 공짜로 다 퍼줄 리가 있냐고!"
"경계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습니다. 그들의 무기가 구식이기 때문에 여차하면 금방 제압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숨을 쉬다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기어코 욕 몇 마디를 내뱉은 잭터는 더 보기도 싫다는 듯 서류를 책상 위에 던졌다.
"자네, 발슈테트라는 자를 기억하나?"
"제국의 기사단장 반 발슈테트 말씀이십니까."
"그자들은 검이나 창만 쓰는 게 아니야. 마법인지 기인지 희한한 기술도 쓴다고. 그쪽은 기사단장까지 우리 기술을 연구하는 데 여념이 없는데, 우리는 그쪽의 기술을 눈속임이라며 알아볼 생각도 않고 있어."
"싸우면 이길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기겠지. 지금은. 하지만 그쪽은 사람도 물자도 풍족해. 우리는 인구의 반이 죽었고, 전쟁 경험은커녕 외교 경험도 없어. 상대가 있어야 연습을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우린 고립되어 있었어. 그 엄청난 시간 동안."
"전쟁은 겪지 않았습니까."
나지막한 질문에 잭터가 눈을 들어 부관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나 딱딱하게 굳히고 있지만 아직 어린 느낌이 남아있는 얼굴에는 그의 감정을 읽을 단서가 없었다. 하지만 잭터는 처음 봤을 때의, 또래보다 작고 상처투성이던 그를 기억했다.
"그건 전쟁이 아니야."
"그렇습니까."
"전쟁은... 니가 내 말을 들을 때까지 혼쭐을 내주겠다는 거지. 웨스피스 전체에서 들고일어난 거면 몰라도, 카르텔은 힘을 내세워 약한 자를 죽일 뿐이었어. 그건 학살에 지나지 않네."
"하지만 후반부에는 상당히 많은 일반인이 가담하였습니다."
"잘 되어 가는 거 같으니까 낀 거지. 하지만 베릭트놈 말마따나 그자의 탈퇴 전후로 카르텔은 단순한 범죄집단이 됐어. 게다가 웨스피스 내부에서조차 카르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지 않았는가? 자네도 그랬고..."
잭터는 책상 위에 올려 둔 낡은 회중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만으로 이긴 게 아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해. ‘안톤이 오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깔고 우리의 방어가 안전하다고 말해선 안 돼. 천계는 문제가 많은 나라일세, 대령. 지금까지 잠잠했던 것은 우리끼리 있었기 때문이지. 난 안톤 때 제국을 보며 느꼈네. 그들을, 아랫세계를 경계해야 한다고. 내가 내내 고민하던 것을 그들은 예전에 해결했어. 많은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발전했지. 그 긴 세월을 결코 얕잡아 봐서는 안 되네. 우리는 높은 곳에 있기에 천계인 거지, 신이기 때문에 천계인 게 아닐세."
"알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군인을 늘려도 모자랄 판이야. 이미 수적으로 제국군보다 밀리지 않는가. 그들의 입국을 제한할 제도도 걸음마 단계고. 그 뭐 같은 군인무용론(軍人無用論) 때문에 군인이 점점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는데, 유르겐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아. 그게 바라는 바겠지만 병사들은..."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고 쫓겨나는 병사들만 생각하면 귀족원에 폭탄이라도 던지고 싶다. 가까스로 그들의 식비라도 지원토록 했지만, 상처받은 몸과 마음 앞에 몇 줌의 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잭터는 타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물을 벌컥 들이켰다.
"대령.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가 이딴 식으로 버려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분노만 남아, 분노만. 그 분노는 처음부터 나라를 미워한 자들보다 더 클 수밖에 없네."
컵을 내려놓으며 잭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상당히 흘러 있었다. 귀족과의 회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넘쳐흐르는 것은 짜증과 무력감이었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다. 적에 맞서는 군인이다. 내정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게다가, 도움이 될 줄 알았던 유르겐은 아직도 섭정의 인을 내어놓지 않았다. 그가 점차 노골적으로 황녀를 압박해 오는 모양이 몹시 실망스러웠다.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나라가 어지러울 때 가만히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뭔가. 제국의 작위까지 받다니... 정치가의 감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을지 몰라도 잭터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잭터가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난 안톤만 막고 은퇴할 생각이었다고! 한가로이 낚시나 하면서 쉬려고 했다고. 그런데 내일도 출근이고 모레도 출근이야! 나가라고 떠들지 않아도 나야말로 쉬고 싶네! 젠장, 싸울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놈들이..."
책상에서 떨어진 종이를 줍던 운이 다시 갸웃거렸다.
"퇴역 신청서를 작성하시겠습니까?"
천계의 대장군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3. 오후, 궁궐
구시렁대고 으르렁대며 서류를 읽고 준비를 마쳤을 때는 이미 시간이 가까워진 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잭터는 그대로 나가려다가 문득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었다. 저 유명한 헬렌 캐프리 장군의 자서전이었다.
"이걸 좀 인용하면 수그러들지 모르겠군... 한 2분 정도는 조용해지겠지."
그리고 책을 옆에 끼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사령부를 나와 입궐하여 회의실로 가는 동안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귀족들의 신랄한 공격을 어떻게 넘기고 황녀님의 뜻을 돕게 할 것인가... 그것만을 생각하며 긴 복도로 접어들었다. 먼지 하나 없는 복도에 울려 퍼지는 군화 소리가 2인분. 잭터는 그제야 뒤에서 따라오는 이의 존재를 깨달았다.
"자네 왜 따라오나? 여긴 자네가 오면 안 되는데."
궐 내는 황녀의 정원이 경비하기 때문에 소속이 다른 호위병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 운은 눈을 깜빡였다. 상관의 목소리는 부루퉁했지만, 딱히 자신에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레, 하지만 남들에게는 평소와 똑같이 들리는 톤으로 물어보았다.
"자료는 필요 없으십니까?"
'내 정신 좀 보게.' 머릿속에서 귀족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느라 부관이 뭘 들고 오는지도 보지 못했다. 고개를 저으며 그럼 회의실에 두고 나가라는 말을 하려던 잭터는 웬 종이 더미가 자신의 팔 위에 얹어지는 걸 보았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생각이 멈춘 그는 운이 교본보다 정확하게 경례를 붙이고 돌아선 후에야 깨달았다.
잭터가 탄식했다. '아, 저놈의 빈틈 없는 사고 과정 같으니.' 화도 못 내고, 그렇다고 상쾌한 기분도 아니게 된 노장군은 멀어지는 등을 보다가 말없이 회의실로 향했다.
한편, 아무것도 모른 채 궐 밖으로 나가던 운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찡그렸다.
[...운. 운. 살려줘.]
[...운. 내 팔 어딨어? 아파. 아파...]
폭발에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외부에서 들려온 부름에 부응하듯 갑작스레 떠오르는 비명에 운은 자리에 우뚝 섰다. 심장 소리에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 주변 풍경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린다. 분명 제자리에 서 있는데, 뒷덜미를 잡혀 빠르게 끌려가는 기분. 심한 멀미와 토기가 동시에 솟구쳐 오른다. 운은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서 튀는 붉은 피에 체온이 올라가고, 뼛속까지 흔드는 폭음에 소름이 돋는다. '괜찮아. 괜찮아. 여긴 겐트야. 오늘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 괜찮아. 폭탄은 터지지 않았어.' 운은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속으로 되뇌었다.
자리에서 멈추고 이름이 불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극히 짧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눈을 한 번 깜빡일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지옥이 스쳐지나갔다. 운은 작게 심호흡을 하며 현실의 풍경에 집중했다. 눈앞이 흔들리지만 다가오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잘 열리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바라며.
"안녕하십니까."
"응, 안녕. 여기서 보네. 잘 있었, 있었지?"
"여긴 웬일인가? 잭터 그 삥따구 따라 온 거야?"
세븐 샤즈의 나엔 시거와 메릴 파이오니어였다. 운은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이들의 목소리를 구별하려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메릴이 그런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나? 얼굴이 새하얀데. 어디 아픈 거 아냐?"
"괜찮습니다."
'당신들은 카르텔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배고픔에 쓰러져 있던 우리에게 폭탄을 던지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운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세븐 샤, 샤즈끼리 모여서 얘기하자고... 안톤 후처리 문제도 있고 파, 파워스테이션 복구 문제도... 그래서 왔어. 운이랑 만날 줄은 몰랐, 몰랐는데... 어디 가는 길이야?"
순수하게 기뻐하는 나엔 앞에서 제발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엔은 친근함을 담아 부르는 것이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이름을 불리는 것에 불쾌해하지 않는다. 자신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더 어긋날 수는 없다. 운은 금방이라도 뒤돌아 달려가고 싶은 것을 참기 위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사령관님과 함께 왔다가 외부 대기하는 중입니다."
"회의하나? 또 귀족들이 난리를 치는 건가? 쯧, 우리 예산도 깎여서 도와주고 싶어도 뭘 할 수가 없어."
'알고 있습니다. 사령관님도 기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 정보 전달만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말하면 대화가 좀 더 빨리 끝날 테지만 예의 없다고 낙인 찍힐 것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이미 필요 이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운은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이 둘은 운보다 키가 작다. 살짝 숙이는 정도로는 그가 이를 강하게 사리 물고 있는 모습이 가려지지 않는다. 모자 그늘이 얼굴을 충분히 숨겨주길 바라며 운은 나엔의 잡담이 끝나길 기다렸다.
"아무튼 그래서... 운도 이따가 같이 갈래? 안 바빠?"
메릴은 신난 나엔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사람 사귀기를 어려워하는 나엔에겐 마음을 터놓을 상대가 몇 명 없다. 본인은 노력하고 있지만 느리고 어눌한 말투와 독특한 정신세계를 감내해 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점에서 운은 괜찮은 대화 상대다. 헛소리를 해도 제대로 들어주고 반드시 대답하니까.
"죄송합니다. 오늘은 일정이 있어 시간을 내기 어렵습니다."
"어... 그, 그럼 내일은...?"
"내일도 곤란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정확한 대답이 친절로 느껴지는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나엔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운을 쏘아보더니 작별 인사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메릴은 낄낄거리며 운의 어깨를 두들겨준 후 느긋하게 제자를 따라갔다.
두 과학자와 헤어진 운은 담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나엔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건 알지만 왜 화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대화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는 점이다. 힘주어 쥐고 있던 손을 보니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머리도 어지럽다. 이 상태로는 통행인이 많은 문 근처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끝이 깨진 기와를 보았다. 숨쉬기가 조금 편해졌다.
나중에 나엔에게 사과를 해야 할까. 운은 오른팔을 주무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유를 모르니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같은 여성이고 사교성이 좋은 테미 대위라면 이유를 말해줄 것 같지만 부하에게 이런 문제를 상담하는 것은 폐인 것 같다. 부하가 개인적인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것을 귀찮아해 본 적 없지만, 상관이 이런 걸 물어온다면... 과연 정상적으로 보일까. 괜찮은 걸까.
"......"
운은 평생을 전투 속에서 살았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늘 하던 일이다. 명령대로 움직이면 됐기에 인간관계에 다소 서툴러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생처음 겪는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오자 사정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보이는 적과 싸웠다면, 이제는 사람의 마음을 읽으며 어울려야 한다. 보이지 않는 적에 둘러싸인 기분이다.
"......레베카. 제이..."
무서울 땐 도와주러 온다더니.
안톤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4. 두 번의 저녁 식사
회의를 마치고 잔뜩 성이 난 잭터를 사령부로 모신 후 전사한 부하의 유품을 챙겨 나왔다. 부하의 집은 시장 끄트머리에 있었다. 한때 젓갈을 팔았다던 낡은 집은 딸에 이어 아들까지 잃은 부모의 슬픔에 짓눌려 더욱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살릴 수도 있었는데.' 무너지려는 허리를 꼿꼿이 세워 문을 두들겼다. 시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지만, 운의 노력 덕분에 유품이라도 뒤늦게 찾은 참이었다. 그동안 빼빼 말라버린 부모는 아들의 수첩을 보자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사양하는 운을 기어이 붙잡아 자식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대령님은 왜 그렇게 말랐소? 좀 더 살이 붙어야 여자들이 좋아하지."
"우린 안 믿어. 대장군님이 일부러 안톤과의 싸움을 질질 끌었다는 이야기, 우린 안 믿어. 애들이 그분 칭찬을 얼마나 했는데. 나도 멀리서 뵌 적 있지. 아주 좋은 분이라는 느낌이 왔어."
부모는 계속 운의 손을 쓰다듬으며 이거 먹으라는 둥, 저거 싸주겠다는 둥, 끝없이 챙기려 들었다. 친구 집보다 부하의 집에 찾아간 경험이 더 많지만 운은 아직도 이런 일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어떻게든 사양하려 들었고, 꾸지람을 듣고서야 푸짐한 음식을 몇 개의 가방에 나눠 담은 채로 집에서 나왔다.
"......"
이대로 사령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벌써 사령부 사람들이 퇴근을 서두를 무렵이니까. 괜히 그들을 붙잡아 귀가 시간을 늦추고 싶지 않았다. 운은 점점 무거워지는 가방을 든 채 해가 지는 거리를 걸었다. 집에 가져가도 보관할 곳이 없다. 그렇다고 혼자 먹기엔 너무 양이 많다. 버릴 수도 없고 난감한 노릇이었다. 만약 그 모험가가 있다면 같이 먹어주었으려나 하는 생각을 할 때쯤,
"이런. 운 군이 아닌가. 뭐 하고 있나?"
절대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도움의 손길을 뻗어왔다.
잔을 가득 채운 술은 춤추는 촛불을 머금고 있다. 달이 뜨지 않는 밤에는 이렇게 하는 거라는 집주인의 배려 덕분에 처음 겪는 풍취였다. 하지만 운의 머리를 꽉 채운 것은 이 엄청난 귀족 가문의 저녁 시간이 과연 30분 안에 끝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래서야 조용한 뜰 가운데 있는 정자의 처마가 멋들어지게 휘었건 어쨌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런 진수성찬에 술이 어울릴지 모르겠군. 천계 영웅의 부모가 만들어 준 음식이라니. 자네 덕분에 호식하는군."
"좋은 술 감사합니다."
예의상 첫 잔을 비운 후 수저를 들었지만 당연하게도 전혀 배고프지 않았다. 애초에 계속된 철야로 음식에 맛을 잃은 상태다. 따끈하게 데워져 나온 부하의 집 요리가 버려지지 않는 것에 만족하며 운은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에를록스 님은 자네를 많이 신뢰하고 계신 것 같더군. 바쁘실 텐데 자네 덕분에 든든하시겠어."
"아직 모자랍니다."
"오늘 점심 신문을 봤다네.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더군. 다시 봐도 참 대단해.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많이 애썼군."
운은 갑자기 돌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자신도 이유를 몰랐다. 내심 갸웃거리며 유르겐의 말에 답했다.
"저 정도는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사실 지금도 자네의 공에 비하면 대령이라는 지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전에 말이 나왔던 준장도 좀 모자란다고 생각했는데, 왜 거절했는가?"
"지금도 제 분수에 넘치기 때문입니다."
"분수라니. 그 나이에 지나치게 겸손한 거 아닌가? 내가 자네 나이 땐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지. 남자라고 비웃는 여자들 사이에서 아버지 이상으로 뛰어난 성과를 내겠다며 자신감에 차 있었네. 실제로 그리했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보편적으로 여성이 많은 권력을 가지는 천계에서 네빌로 유르겐의 두각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체력을 중시하는 군대에서나 남성이 여성과 비슷한 대우를 받지, 다른 분야, 특히 정치권은 남성에게 있어 유리 천장이나 마찬가지다.
유르겐 가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던 운은 유르겐이 황녀와 잭터가 참석한 오늘 회의에 불참했다는 사실 역시 떠올렸다. '그 중요한 회의에 이 사람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다른 대귀족들의 밀어내기 때문인가. 귀족 내부에서도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뜻인가.' 운의 생각을 눈치챈 유르겐이 하하, 사람 좋게 웃었다.
"엉뚱한 걱정하지 말게. 내 딸이 혼인도 하고 나이도 되지 않았는가? 슬슬 가문을 이을 준비를 해야 하니 오늘은 빠진 걸세."
40대 중반을 지나고 있는 유르겐은 귀족답게 일찍 결혼하여 자식을 넷이나 두고 있다. 그중 두 명은 운보다 연상이며, 유르겐이 말하는 딸은 첫째이자 고명딸인 마리안 유르겐이다. '얼마 전에 무법지대로 간다더니 벌써 돌아온 건가.' 운은 잭터를 수행하며 마리안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난민들을 도우러 무법지대에 간다던 것도 그저 아버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일 터이다.
"게다가 젤바에서 내내 긴장한 탓인지 몸이 피로하여 긴 회의를 견딜 자신도 없고. 좀 쉬었다가 다시 갈 준비를 해야지."
"다시 젤바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 마계로 통하는 길을 닫지 못하니 경비 문제가 생기지 않나? 해안수비대와 협력하여 여러 방도를 강구할 생각일세."
"그렇습니까."
공손하지만 짧게 대답하는 운을 바라보던 유르겐이 씨익 웃었다.
"자넨 아직도 어리군. 어른과 이야기하는 게 불편한가?"
"불쾌하시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즐거운 대화에 소질이 없습니다."
"아니, 군인답고 괜찮아. 그냥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져서 말이지. 막내가 내게 차를 대접할 때하고 비슷하군."
"부모가 되면 알아채는 게 많아집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그나저나 자네는 소식 하나 들려오지 않는군. 내 조카딸이 나이가 적당한데 만나지 않겠는가?"
운은 낮에 루카스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예쁜 장식에 묻은 먼지.
"죄송합니다. 저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상하단 말이지. 여군은 때가 되면 혼인을 하는데 남군은 제때에 하지 않아. 경쟁이 심해서 그런가? 이상하지 않나? 체력이나 힘은 남자가 우세한데, 여자가 더 쉽고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실이."
"전투에서 성별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체력적 조건을 갖추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네. 만약 남자에게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뛰어난 군인이 되지 않겠는가?"
"일반적으로는 남자가 더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헛소리일세. 여자와 남자의 능력은 크게 다르지 않아. 세심하게 감정을 읽는 능력이야 여자가 뛰어날지 모르지만, 군대는 그런 곳이 아니지 않은가. 정치도 마찬가지지. 한 수 더 멀리 보는 시야와 경험이 중요한 거지, 눈앞의 사람이 느낄 감정이 중요한 것은 아닐세."
유르겐은 말을 끊고 술잔을 비우더니 다시 잔을 채웠다. 운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운 군. 정치가 무엇인지 아는가? 보다 많은 자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것일세. 훌륭한 정치는 공익과 크게 다르지 않지. 차이가 있다면 정치가는 이득을 얻기 위해 희생이 불가피할 경우, 최대한의 피해조차 감수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걸세. 군대로 치면 진압을 위해 더욱 많은 적을 사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 자네도 군에서 뼈가 굵었으니 내 말에 동의하겠지?"
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이 남자는 더 이상의 피해를 늘리지 말라는 이유로 안톤 추격을 반대했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말은 정반대다. '깊게 따져볼 문제인가?' 잠깐 고민하다가 이 수수께끼는 잭터에게 넘겨야겠다고 생각한 운은 최대한 무난한 말을 골랐다.
"사령관님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만."
안톤을 추격할 땐 후환을 두지 않기 위해 무리했지만, 기본적으로 잭터는 무혈 승리를 최고로 친다. 카르텔 포로들이 믿고 협력했던 것도 무법지대 출신답지 않은 그의 성향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분은 이상주의자일세. 나쁜 건 아니지."
유르겐은 딱 잘라 말하며 운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운은 눈동자만 돌려 시계를 찾았으나 정자에 시계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초와 음식, 그리고 술이며, 들리는 것이라고는 멀리서 시작된 잔잔한 가야금 소리였다. '여긴 내가 있어도 될 곳이 아닌데.' 운은 당장이라도 사령부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눌러참았다.
"꿈 같은 이상도 중요하지. 하지만 이미 아랫세계와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시국을 냉정히 봐야 할 때일세. 꿈을 얘기하던 시대는 끝났네. 옆 사람의 마음을 읽고 배려하던 게 최상의 처세였던 시절 역시 지났네. 과감하고 때론 무모하게 나아가야 살아남지. 이게 바로 격동의 시대란 것일세."
유르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는 의기가 차있었고, 웅대한 뜻이 느껴졌다. 하지만 운은 알지 못했다. 대귀족이, 황녀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를 놓는 유르겐 가의 가주가, 정적이라고 봐도 좋을 잭터 이글아이의 부관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운은 겐트에 있는 누구보다도 자기 평가가 낮은 사람이다.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의 입장이었다면 금방 알아챌 유르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눈만 깜빡였다.
유르겐은 술을 한 잔 더 비웠다. 그리고 적당히 뜸을 들인 후 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라이오닐 대령. 새로운 시대를 위해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은 없는가?"
5. 한밤, 그리고 이른 아침
사령부로 돌아온 운은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이미 시곗바늘은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얼굴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거울을 보니 달아오른 얼굴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대답이 궁한 것을 숨기기 위해 마신 몇 잔의 술이 이렇게나 독한 줄 몰랐다.
그에겐 잭터를 배신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가 입대한 것은 어떤 목적 때문이었고, 그 목적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잭터 이글아이가 반드시 무사할 것.' 그래서 그는 가까이서 잭터를 지킬 수 있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지키기 위해 보좌한다는 방침이 바뀌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이대로 잭터를 계속 돕는 게 과연 지키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귀족들은? 제국은? 모두를 하나의 뜻으로 뭉치게 했던 전쟁과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
"......"
운은 책상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별생각 없이 오른손으로 뚜껑을 열려던 운은, 그러나 입술을 깨물며 왼손으로 열었다. 상자 안에는 여러 번 쓴 구급 키트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낸 것은 진통제였다. 물도 없이 약을 삼킨 후, 작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플라시보 효과라던가. 약의 효과가 벌써 돌 리 없는데도 아픔이 점차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의사의 처방 없이 구할 수 없는 이 진통제는 군의관이 몇 통 빼준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점점 효과가 짧아지고 있다. 이것보다 강한 걸 찾으려면 이제 마약밖에 없다는 경고를 들었는데.
"...어떻게든 될 거야."
제이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원래 제일 뛰어난 건 흑발이지만 적발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던 제이. 밝은 금발의 레베카는 제이와 운이 키득거리는 걸 보며 화를 냈었다.
'나, 그때는 웃었지. 뭐가 즐거웠던 걸까.'
잘 안 움직이는 오른손을 억지로 움직여 양쪽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하지만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뺨의 상처가 도드라져 몹시 보기 싫었다. 그날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증거. 친구를 잃고 가족을 잃은 주제에 혼자 살아남은 죄를 끊임없이 각인시키는 흉터. 운은 거울을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코트를 벗고 셔츠의 오른팔 소매를 어깨까지 접어 올렸다. 팔꿈치 위로 흰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한 손만으로 붕대를 풀고 피에 물든 거즈를 떼어 약을 발랐다. 아팠지만, 익숙했다.
총상은 숱하게 겪었지만 화살에 의한 상처는 처음이다. 어제, 병실이 모자라 분노하는 군인들을 달래러 잭터가 병원을 찾았을 때 호위하다가 다친 것이다. 위문이 계속되던 중,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이 수상하여 확인하러 갔다. 인적이 드물고 엄폐물이 많은 곳. 그러나 잭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곳. 아니나 다를까 복면을 두른 괴한들이 숨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천계에서 보기 드문 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행히 큰 충돌 없이 괴한들은 물러났으나 운은 미처 화살 한 대를 피할 수 없었다. 꽤 깊은 상처였지만 가뜩이나 불안한 상황에 불안을 더할 수 없었기에, 그는 부상을 숨기고 잭터를 계속 수행했다. 물론 주변 수색과 경비 강화를 꼼꼼히 명령한 후에. 하지만 범인은 끝내 찾을 수 없었고 다친 지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의무실에 간 운은 온갖 잔소리로 귀가 얼얼해져서 돌아왔다.
그게 어제저녁의 일. 오늘 낮에 다시 찾아갔어야 했는데 바쁘다며 가지 않았으니 내일 또 혼날 것이다. 군의관의 일을 늘려버려 참으로 면목이 없다.
부하들이 두고 간 결재 서류를 확인하고 다른 부서에서 요청받은 자료를 정리하고 나니 벌써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깔끔히 마무리한 후 다시 진통제를 한 알 삼켰다.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왠지 한기가 돌았다. 피곤하다. 이대로라면 두 시간 정도는 꿈을 꾸지 않고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가기 전에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언제나 단정하게. 잭터나 다른 동료들이 싸잡혀 비난받지 않도록. 운은 머리를 빗고 모자를 고쳐 쓴 후 밖으로 나왔다.
사령부를 나서니 이른 시간부터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운동하는 사람도 있고 상점 앞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쓰러져 자는 사람도 있었다. 차림새를 보니 아랫세계에서 온 모험가 같았다. 천계와 아랫세계의 길이 뚫린 후 하늘나라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점점 늘고 있다. 관광 수입도 따라서 늘고 있지만 한편으론 치안 문제가 급증하여 늘 사람이 모자란다. 운은 곤란해하는 상점 주인을 대신해 취객을 깨워 돌아가게 했다.
"이봐! 거기! 꼬맹이 라이오닐이 아닌가!"
불안정한 발소리와 함께 술기운에 오른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귀족가의 영애들이 술병을 든 채 웃고 있었다. 기억에 없는 얼굴이다. 아마 노스피스로 피했다가 겐트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일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맞지? 하하하! 사진보다 귀엽게 생겼네!"
아라드보다 천계가 예절에 더욱 엄격한 나라임은 사실이지만, 당연히, 예외는 있다. 부모 간섭에서 벗어난 한창나이의 귀족 아가씨들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운의 외모를 품평하기 시작했다. 운은 이들을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도 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귀족과 대립하고 있는 잭터가 마음에 걸렸다. 어떤 빌미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있고말고. 우리 이제 몇 차냐... 아무튼 술 마시러 저~기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 가서 술이나 따라."
운을 둘러싼 여자들은 그의 몸을 툭툭 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혀만 쯧쯧 찰 뿐으로, 가던 길을 멈추진 않았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 것에 기세가 오른 여자들은 운의 손을 억지로 잡거나 가슴팍을 만지며 깔깔거렸다. 하지만 운은 이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거기. 뭣들 하는 짓입니까?"
절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도 익히 아는 사람.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한 점 주름 없는 제복을 갖추어 입은 그녀는 몹시 엄한 얼굴로 술주정꾼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저는 황녀의 정원 소속 마를렌 키츠카입니다. 귀족인 것 같은데 길 한가운데서 무슨 짓입니까? 게다가 군인한테. 술 마셨으면 가던 길이나 가세요."
황녀의 정원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젊은 귀족들은 꼬인 혀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냅다 도망쳤다. 마를렌은 말세라고 중얼거리다가, 가련한 피해자를 뒤늦게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이오닐 대령? 아니, 당신이었나요?"
"키츠카 수석궁녀님. 안녕하십니까."
"왜 가만히 있었죠? 비키라고 하지."
"저한테 뭔가 할말이 있는 듯해서 듣고 있었습니다만."
"저런 건 무시하고 가도 돼요. 화내도 되고요."
"아. 화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까?"
진심으로 하는 질문에 마를렌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녀는 "음... 어, 그건... 으음..." 등의 말을 흘리더니,
"...테미 대위한테 물어봐요."
책임을 떠넘겼다. 황녀를 호위하는 마를렌은 잭터의 부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마를렌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운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그래요. 아무튼 다음에 저런 사람들과 만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싫다고 말하고 가버리세요. 어차피 무력으로 당신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 상대가 귀족이라 해서 감내하고 있을 필요도 없어요. 알았죠?"
"조언 감사합니다."
"그쪽도 귀족 때문에 고생이 많겠군요. 이쪽도 자꾸 간섭해 와서 골치가 아픕니다. 자기들 휘하로 회유하기도 하고... 대장군님도 필시 머리를 싸매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만 저도 가던 길을 가야겠습니다. 황녀님이 요즘 불면증이 있으신 것 같아 보양식 재료를 사러 가는 중이에요. 앞으로 더 바빠질 테니 대령도 몸 잘 챙기고..."
마를렌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들고 있던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더니 예쁜 포장지에 싸인 무언가를 건넸다. 달콤한 냄새와 함께 봉투 안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운의 손을 살며시 데웠다.
"애플파이예요. 전에 반 님이 좋아하시길래 아랫세계의 조리법을 몇 개 더 알아봤어요. 아직 아침 먹기 전이죠? 식기 전에 우유랑 함께 드세요."
"감사합니다."
공손히 인사하는 운을 보며 마를렌이 뿌듯이 웃었다.
6. 아침 소동
"세상에! 대령님! 죽지 마세요!!"
사무실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달려온 테미는 울상인 루카스를 보고 놀라고, 죽기 직전인 운을 보고 크게 놀랐다. 운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지만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푸르게 변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왠지, 늘 반듯하게 쓰고 있는 모자가 삐뚜름하다. 테미는 가방을 내던지며 달려가 눈의 초점도 못 맞추고 힘겹게 인사하는 운의 뺨을 두들겼다.
"정신 차려요! 왜 이래요? 독, 독이에요? 습격이라도 당했어요?"
"...시간이 지, 지나면... 나아질... 콜록."
"헛소리하지 말고 업혀요!! 소위는 그만 울고 의무실에 가서 준비하라고 해!"
"이게 무슨 일인가?"
활짝 열린 문 주변으로 몰려든 구경꾼 사이에 선 잭터가 어이없어 하며 비극에 끼어들었다. 운은 이 와중에도 일어서서 경례하려 했으나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의자 위로 쓰러졌다. 루카스가 슬픈 곡소리를 내었다.
"대령니임!!"
"대체 무슨 일이냐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잭터가 달려왔다. 언제나 총기로 빛나던 부관이 하루아침에 시체 꼴이 된다면 누구나 놀랄 것이다. 죽은 오징어 다리보다도 쓸모가 없는 운의 팔을 잡아 어떻게든 업으려던 테미는 그의 책상 위에서 끔찍한 것을 발견했다. 하얀 배경에 색동 줄무늬가 있는 포장지가 활짝 펼쳐진, 차마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대령님. 이거... 황녀의 정원의 그... 설마?"
"뭐?!"
테미의 말에 잭터도 루카스도 얼른 포장지를 살폈다. 살짝 묻은 잼과 기름 자국이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운은 힘겹게 고개만 끄덕였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잭터는 운과 빈 포장지를 번갈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내 사무실 문고리에도 걸려있던데."
"어서 폐기하시지요, 사령관님."
"독극물 처리반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사령관님."
빙글빙글. 점점 멀어지는 말소리를 들으며 운은 끝내 눈을 감았다.
"바보입니까."
조용한 의무실에서 군의관이 정말 진지하게 물어왔다. 운은 아무 소리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계급은 운이 더 높건만, 비쩍 마른 청년 따위 한 손으로 가뿐하게 들 이 세레나 조이너스 앞에 서면 그는 무력하고 무력한 꼬마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곤 했다.
"오라고 할 때 안 와서, 두고 보던 참인데, 자기보다 키 작은 부하한테 업혀 와서는, 정말 이러고 살 겁니까?"
"죄송합니... 아니, 미안하네."
무시무시한 안톤과 잔인한 타르탄을 눈앞에 두고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는데, 이 경험 많은 군의관 앞에만 있으면 처음 총을 들고 사냥을 나갔던 때가 떠오른다. 바들바들 떨며 아버지 눈치만 살피던 그때. 이쯤 되면 숨 쉬듯이 하던 자책을 할 여유도 생기지 않는다.
세레나는 자신의 손목보다 가느다란 운의 팔에 붕대를 마저 감았다. 출근 시간의 소동 덕에, 화살에 맞은 사실이 잭터에게 알려졌다. 덩달아 겐트 사령부에 소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은 황녀가 사람을 보낸 탓에 황녀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습격 시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보고했지만 실제 피해가 일어났다는 사실까지는 전하지 않았으므로 나중에 사유서를 제출해야 할 판이다.
치료를 마친 세레나는 운의 붕대 위로 짜증을 담아 철퍽 때렸다. 운은 의자 채로 넘어질 뻔했다.
"붕대는 알아서 간 듯하니 더 혼내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사람 같이 생겼다고 다 사람이 아니듯, 음식 같이 생겼다고 다 먹는 게 아닙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하지만."
"입 다무세요."
"네."
"사흘 동안은 죽만 드시고... 대장군님도 교육 좀 잘 하세요. 상처는 참는다고 낫는 게 아닙니다."
의무실 창틀에 걸터앉아 키들거리던 잭터는 비난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해도 소용이 없는걸. 그나저나 마를렌 궁녀의 음식을 해독할 약은 정녕 개발이 불가한가?"
"전에 제국 기사님이 실려 온 걸 보면 아랫세계에도 없는 듯하네요. 아마 이 세상엔 없는 걸지도요."
'정말로 두렵기 짝이 없군.' 잭터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재료엔 문제가 없고 영양학적으로도 최고라는데 뭐가 어떻게 꼬이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멜빈 박사도 포기했는데... 역시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는 법인가."
"황녀의 정원에 가서 물어보시든지요. 그쪽은 아직 별문제가 없던데요."
"엘리트는 위장도 엘리트인가. 굉장하군. 아 참. 이거 사령부 전체에서 회수한 구원의 빵인데."
몇 년 전, 전선에서 격전을 치르던 한 부대가 있었다. 그 부대에는 소년병이 있었으며, 그를 가엾이 여긴 한 장군이 직접 과자를 만들어 주었다. 과자는 소년병의 부대가 전부 나누어 먹었고 전원 급탈로 당일 작전에 불참하였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전멸하였기에 천계군에서는 위장을 가져가고 목숨을 구한 그 과자를 구원의 과자라 부른다.
참고로 이야기 속의 소년병은 어린 운이며, 동정심이 넘쳐나는 장군은 마를렌의 어머니다. 잭터와 세레나는 떨리는 팔로 힘겹게 셔츠를 입는 운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저 어린 것이 어쩌다. 쯧쯧쯧.
세레나는 잭터에게서 빵이 한가득 든 봉투를 받아 냄새를 맡았다. 구운 지 시간이 상당히 흘렀지만 냄새는 완벽했다. 냄새는. 하지만 속으면 안 된다. 이건 먹이를 부르는 식충식물의 향긋한 꿀보다 무서운 것이다.
"양이 많군요. 이 정도면 상당히 공을 들인 걸 텐데 사령부 전체를 독살... 할 의도는 아닐 테고. 황녀의 정원 나름의 성의 표시인 걸까요."
"성의? 그쪽에서 우리한테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나?"
"황녀의 정원에서 탈퇴자가 늘고 있다더군요. 원래 그쪽에서 일임하던 궁궐의 경비도 겐트 수비대가 일부 담당하게 됐다면서요. 그만큼 우리 쪽 부담도 커졌으니."
겐트 사령부의 주 업무는 황도군을 관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겐트 내부와 근방의 치안 유지 업무가 추가되었고, 지역 사령부의 지원 요청도 매일 들어온다. 하지만 아무리 해결책을 내놓아도 심각한 인재 부족과 인원 감축 압박으로 인해 사령부 쪽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상태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를 썩이고 있는 화두가 떠오르자 잭터는 못마땅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그 얘기 말인가. 음. 황녀님을 모신다는 자부심으로 버텼지만 아무래도 마음고생이 너무 심했던 모양이야. 사상자가 많아 급하게 인원을 보충하다 보니 자기네끼리 갈등도 있던 듯하고."
"하긴 크림슨 로제 같은 사람들이 쉽게 나오는 건 아니죠. 아무튼, 이건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보기엔 이러니 음식으로 착각해서 피해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요. 내친김에 성분 검사도 다시 의뢰해 보고요."
"부탁하네. 마를렌의 성의를 거절하려니 마음이 아프지만 더 이상의 피해는 줄이고 싶군. 대령은 옷 다 입었나? 그럼 가세. 내가 아주 자네 때문에 아침부터 놀라서 낚시나 하러 가고 싶어졌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령관님은 언제나 일하기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마, 귀족만 조용하면 안 그래. 귀족만 조용하면."
동네 아저씨처럼 허허 웃는 잭터와 쇠약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운이 나가자 의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세레나는 몸을 일으켜 약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약이 빼곡히 들어있어야 할 찬장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예산이 모자란 탓이다. '언제쯤 마음 놓고 약을 쓸 수 있을까. 사람도 부족하고...' 세레나가 투덜거렸다. 운의 부하가 반으로 준 것처럼 의무실에도 사람이 줄었다. 한숨을 쉬며 책상에 앉은 늙은 군의관은 파일을 꺼내 운의 치료 기록을 적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꼬맹이가 또 사고 침.'이라고 적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나이만큼이나 이성적 판단을 할 줄 아는 세레나는 제대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기지개를 쭉 켰다. 돈 많은 귀족 병원이든 돈 없는 의무실이든 햇살은 공평하게 들어온다. 차별 없는 태양의 은혜에 감사하며 세레나는 의자를 창가로 옮겼다. 창밖 멀리 구보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예전엔 저렇게 날렵했는데 말이야. 지금은 젊은 대령이 벌벌 떠는 못된 할멈일 뿐이지.' 세레나는 껄껄 웃었다.
꼬맹이가 제 상처를 돌보지 않게 된 건... 글쎄. 보고 배운 게 그래서 그렇지 않을까.
영광의 자리에 선 독수리가 처음부터 창공을 누빈 것은 아니다. 모래 먼지를 들이키며 때론 폭풍에 휩쓸리며 날고 날았다. 아름다운 깃털을 다 잃어도 멈추지 않은 그 기적 같은 비행이 우연히 산 정상에 닿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태양에 가까운 것만 보고 손가락질한다. 부조리하지만 이 또한 인생이겠지. 세레나는 길게 하품을 했다. 정년을 가득 채운 나이가 되면 골치 아픈 일로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조금 투덜거리고 싶은 일이 남아있다.
"아들은 애비를 닮는다더니... 아주 부자가 똑같아."
짜증 섞인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주름 진 입가는 미소로 깊게 패어 있었다.
7. 겐트 시내
원래대로라면 회의 결과를 공유 받음과 동시에 다음 준비를 해야겠지만, 잭터의 엄명으로 꼼짝없이 휴가를 받은 운은 믿었던 부하에게도 쫓겨나 일거리 하나 없이 터덜터덜 사령부를 나왔다.
'뭘 하지.' 운은 사령부 건물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집에 가서 잠만 자라는 잔소리가 귀에 아직도 남아있지만 어설프게 잠들어 악몽을 꾸고 싶지 않았다. 사격장에 가본들 금세 들킬 것은 뻔했다. 하는 수 없이 순찰이나 하기로 결정한 그는 천천히 시장으로 향했다.
겐트 사령부에서 시장으로 가는 길은 시끌시끌했다. 제국 병사들은 대단하지도 않은 물건을 구경하며 놀라워하고 있었고, 장사꾼 정신으로 투철한 상인은 현란한 말솜씨로 그들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시골에서도 팔리지 않을 낡은 물건을 제값 이상으로 받을 속셈이 뚜렷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가을 햇볕에 그을린 일꾼들이 돌 위에 걸터앉아 땀을 식히고 있었다. 포격으로 파괴된 집을 다시 짓는 모양이었다. 집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사람들 사이를 돌며 시원한 음료를 한 잔씩 나눠주었다.
한창 복구가 진행 중인 골목을 지나자 너른 공터가 보였다. 얼마 전까지 망가진 포와 부상병으로 가득 찼던 그곳은 말끔히 치워져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낡았지만 깨끗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뭇가지로 만든 무기를 들고 전쟁놀이에 한창이었다.
"죽어라! 카르텔! 죽어라!"
"아앗, 저놈은 무법지대에서 숨어들어온 거렁뱅이다! 죽여! 우리를 몰래 죽일 거야!"
제법 실감 나게 연기하며 놀던 아이들은 키 큰 군인이 지나가는 걸 보곤 쪼르르 달려와 그의 군복을 당겼다.
"형. 총 있죠? 보여줘요."
운은 안전장치를 확인한 후 총을 건네주었다. 겐트에선 선발된 아이만이 사격을 배우지만 그의 고향에선 대부분의 아이들이 실탄을 장난감 삼아 논다. 이런 문화 차이 덕분에 처음으로 실제 총을 만진 아이들은 의외의 무게에 당황하면서도 신이 나 질문을 마구 던졌다.
"총 잘 쏴요? 사람 많이 죽였어요? 카르텔은 몇 명이나 죽였어요? 죽이면 기분 좋아요?
"오빠도 카르텔 밉죠?"
운은 말문이 막혔다. 카르텔은 늘 적이었다. 하지만 증오의 감정까지 느낀 적이 있던가?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희미한 옛 기억까지 들추어 보았다.
하지만 찾을 수 없다.
카르텔은 적일 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늘. 친구가 다치는 건 죽어도 싫었지만, 그 외엔 없었다. 왜일까. 제이와 레베카는 늘 카르텔을 미워했는데.
"…적에게 감정을 실은 적은 없다."
"왜요?"
"감정을 갖고 적 앞에 서면… 휩쓸려 버린다. 그러니까 아마 나는…"
운은 입을 다물었다. 옛날 일을 생각하면 늘 머리가 아프다.
‘그날’이 있기 전의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상처에서 올라오는 열 때문에 어지럽기까지 하다. 운이 말을 잇지 않자 제법 머리가 굵은 아이가 뒷말을 재촉했다.
"뭔데요? 카르텔한테 도움이라도 받았어요? 황녀님처럼 모두가 나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잘 모르겠다."
솔직한 심경이었다. 친구들이 죽고 레베카가 사라지고 자신도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감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고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적이니까 이쪽이 당하기 전에 총을 쐈을 뿐이다. 본능적인 공포는 느꼈으나 미워한 적은 없었다. 타인을 미워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운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머리가 몹시 아팠다. 그렇게 잠시 아픔을 다스리자니 싸늘한 침묵이 운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지막까지 총에서 손을 떼지 못하던 아이가 땅바닥에 운의 총을 내던졌다. 신호였다. 아이들은 악에 받쳐 외치기 시작했다.
"카르텔이 밉지 않다니, 그런 군인은 필요 없어!"
"도망쳐서 살아남은 주제에! 겁쟁이! 죽은 사람을 방패로 삼았지?"
"죽이자! 저 녀석은 적이야!"
아이들이 던지는 돌을 맞으며 운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운은 심한 두통에 시달리며 순찰을 마쳤다. 그래야 했다. 가능하면 순찰을 하다가 쓰러져 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꼼꼼하게 돌고 난 후에도 해는 아직 하늘에 걸려있었고, 기절하지 않았으며, 죽고 싶어졌다.
살아서 숨 쉬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로 느껴졌다. 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죽어야 민폐가 되지 않을까. 난 너무 오래 살았어. 레베카도 제이도… 그래, 다 죽은 걸 거야. 그럼 나도 가야지.'
도구는 갖고 있다. 수족이나 다름없는 금속의 무기가 있다. 오직 할일은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 너무도 간단한 일이다.
바람 한점 없는 맑은 날이다. 햇볕은 쨍쨍 내리쬐건만 운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짝 덥다고 느낄 날씨이기에 운은 이마저도 자신이 비정상인 증거라 생각했다.
'이미 죽어서 땀을 흘리지 않는 걸지도 몰라.' 운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걷던 운은 겐트 서문 근처에 도착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운은 저 밖의 풍경에 주목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문밖으론 산과 들이 펼쳐져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이다.
아. 저기서 죽으면 혼자 조용히 썩어가려나.
사막을 헤매다 한 줌의 물을 발견한 조난자처럼 운은 홀린 듯 바깥으로 향했다.
"호외요, 호외! 뉴스 체인이 보내드리는 깜짝 놀랄 소식!"
"떡 드세요! 맛있는 떡이 왔어요!" 활기로 가득 찬 시장은 아주 별세계였다. 너무도 동떨어진 눈부신 세상. 거기에 감히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형식적으로 출입을 관리하던 병사들은 운의 계급장을 보고 경례를 했고, 운은 기계적으로 답했다. 누가 봐도 그는 정상적이었다.
아무도 막지 않아.
늘 어깨를 짓누르던 짐이 몽땅 사라진 것 같다. 저기에 가서 죽으면 더 이상 원망에 찬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폭풍에 연기가 흩어지듯 두통이 싹 날아가는 기분이다. 발걸음이 가볍다. 팔의 상처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잭터는 휴가를 주었다. 부하들도 가서 잠을 자라고 했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나 따위 없어도 어차피 이 세상은 잘 돌아가니까.' 운은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도와줘요! 사람이 죽었어요!"
발이 멈췄다.
땅에 뿌리가 박힌 나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앞으로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데 고개가 자동적으로 돌아간다. 왜 죽을 자리가 아닌 곳을 보고 있는 거지?
"어쩔까요?"
비명이 들린 쪽으로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허둥지둥 도움을 요청했다. 운은 손을 뻗어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대로 자신의 머리를 조준하기만 하면 된다. 이 거리라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거기 두 명은 자리를 지키고 자네들은 날 따라오게."
목소리가 무척 낯설다. 멋대로 움직여 안전장치를 다시 거는 손가락도 낯설다. 병사들을 지휘하여 달리는 자신이 정말로, 죽을 만큼 낯설다. 모든 게 낯설어 소름이 돋았다.
인파가 몰린 곳으로 찾아가는 것은 쉬웠다. 사람들을 헤치며 다가가자 죽은 남녀를 살피던 노인이 운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운은 구경꾼의 기대에 부응하여 시체의 상태를 살피고 얼굴을 가린 천을 벗겼다. 자신이 이 손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
아는 얼굴이다.
잊을 리 없다. 어제 본 얼굴이니까.
전사한 누나의 뜻을 잇겠다며 자진 입대한 남동생. 아들을 말리지 못한 부부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매일 자식의 귀신을 보며 죽지 못해 살았다. 그러다가 돌아온 아들의 유품. 손때 묻은 수첩을 보며 그들은 삶을 마무리할 결심을 했을 것이다.
사이 좋게 죽은 부부의 얼굴은 평온했다. 운은 그들의 얼굴을 천으로 덮었다.
"자식이 다 죽어서… 아들은 시체도 못 찾았다지. 어떻게 살아가나 했더니 결국은 이리됐구먼. 쯧쯔. 요즘엔 흔한 일이지."
"그렇습니다."
끌끌거리는 노인의 말에 차분히 대답했다. 무섭도록 낯선 목소리였다.
테미에게 연락하니 금방 조치를 취해주었다. 부부의 시체는 정중하게 수습되었다. 전사자의 부모이니 그에 맞는 예우가 갖춰질 테지만, 운은 담당자를 귀찮게 하여 자식과 함께 묻힐 수 있도록 각별히 부탁했다.
"제가 죽어도 저희 가족 챙겨주실 거죠?"
모든 과정이 끝난 후 기력이 빠져 휴게실 의자에 앉은 운을 향해 테미가 갑자기 물었다. 운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크게 뜬 채 그녀를 올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테미가 키득거렸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사람은 다 죽잖아요."
운은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보다 먼저 죽지 말게."
"이상한 말씀이네요. 대령님보다 제가 더 죽을 확률이 높은걸요. 대령님은 뒤에서 지휘를 해야 하니까… 하긴, 병사가 부족하지 않아도 대령님은 직접 나설 사람이군요. 말이 꼬이네."
테미가 운의 앞에 있는 의자에 마주 앉았다. 눈높이가 비슷해지자 운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축 내려간 어깨와 굳게 닫힌 입. 사람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땅만 보는 시선. 참으로 대령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테미가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안타깝지만 그러려니 하세요. 다 구해줄 수도 없는 거고, 군인으로서의 각오는 대령님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군."
"제가 먼저 죽으면 이번처럼 저희 가족이나 잘 챙겨주시면 돼요. 제 유품도 꼭 찾아주시고."
"알겠네."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튼에서 무력시위가 일어났대서 알아보는 중이었거든요. 그쪽은 니베르 중장님이 계시니 어떻게든 수습되겠지만, 알아는 둬야죠."
테미가 가볍게 의자에서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운은 마주 경례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죽지 말아주게."
"대령님도요."
함께 안톤에 맞서 살아 돌아온 부하가 싱긋 웃었다.
8. 다시 궁궐로
어느덧 해가 서해로 넘어가고 겐트에도 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일반 가정집을 밝히는 전깃불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치였지만 안톤 토벌 후 파워스테이션이 조금씩 돌아가면서 복구가 이루어진 덕분이다. 하지만 아직 정상 복구된 것은 아니기에 꼭 필요한 곳에만 불을 켰다. 그래서 밤의 겐트는 휘황찬란한 불야성이 아니라 어둠에 잠긴 고요한 시골 마을 같았다.
돌아온 김에 영양제나 맞고 가라는 세레나의 성화에 의무실 침대에 누워있던 운은 바깥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침대의 커튼이 젖혀지며 베레모를 쓴 다부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숱한 전장을 겪었는지 단정한 용모에 어울리지 않는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황녀의 정원 소속, 라이니입니다. 겐트 사령부의 운 라이오닐 대령 본인 맞으십니까? 지금 즉시 입궐하라는 황녀님의 명입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말없이 일어나 라이니와 함께 궁궐로 향했다. 뻥 뚫린 큰길을 걷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약간 뒤처진 채 오른팔을 주무르며 따라가던 운은 멀리 보이는 황실 무기고의 경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저곳은 황녀의 정원이 경비하는 곳 아닙니까?"
잠시 멈춰 운이 가리키는 곳을 본 라이니는 다시 발걸음을 재게 옮겼다.
"저희 인원이 모자라서 겐트 수비대의 협조를 받고 있습니다."
'궁궐도 모자라 무기고의 경비까지 수비대에게 맡긴다고?'
운은 갸웃거렸다. 젤딘 슈나이더가 이끄는 겐트 수비대는 평소에 치안 유지만으로도 바쁠 터이다. 아무리 겐트 사령부가 범위를 넓혀 수비대를 지원한다고 해도 이쪽은 인원이 상당히 모자란다. 수비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년병을 동원하는 등의 대대적인 보충은 웨스피스 사령부에서만 진행하고 있다.
"수비대원도 부족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대장군님이 귀족의 사병을 끌고 안톤과 싸우셨잖습니까. 그때 생각이 바뀐 사병들 일부가 수비대에 합류했습니다. 사령부에는 그런 경우가 없나요?"
잭터가 천계군의 최정점에 있기는 하지만 특수 부대에 속하는 겐트 수비대나 황녀의 정원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모두 알지는 못한다. 전쟁 중에야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급한 상황과 잭터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금은 원래의 독립적인 행정 체제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운은 몇 가지 더 물어보았으나 라이니는 짤막하게 대답할 뿐 만족스레 정보를 주지 않았다. 수비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황녀의 정원이지만 아무래도 타 부대의 일을 그에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 왔습니다. 무장은 해제해 주십시오."
라이니가 운을 안내한 곳은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곳이 아니라 좀 더 깊은, 황녀가 거처하는 황녀궁이었다.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그야말로 어울리는 곳으로, 무법지대 출신자들은 감히 들어갈 꿈도 꾸지 못하는 곳이다. 감동보다는 여긴 내가 올 곳이 아니라는 불편함이 온몸을 짓눌렀다. 운은 부를 사람을 착각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황녀의 개인 서재로 들어갔다.
"잘 와주었네."
두 무릎을 꿇고 고두하자 황녀가 어서 일어나라 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문을 닫고 나가는 라이니와 함께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선객이 있었다. 황녀 앞에서 대담하게도 곰방대를 물고 있는 메릴과 안쓰러울 정도로 긴장하여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는 나엔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운을 본 황녀가 웃으며, 그러나 살짝 엄한 말투로 말했다.
"라이오닐 대령. 자네가 나엔 박사에게 실례를 저질렀다며? 자네의 말에 상처를 받은 나엔 박사가 연구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군. 그녀가 파워스테이션 복구를 도우러 가게 되었으니, 의욕이 없어지는 건 큰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네가 박사에게 사과를 좀 해줘야겠어."
"어제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운은 바로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딱딱하게 앉아 있던 나엔은 몹시 부담스러워하며 두 팔로 'X' 표시를 만들어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려 애썼다. 메릴은 곰방대를 씹으며 낄낄거렸다.
"잘됐네. 이제 싸우지 마라."
"내, 내가 언제 우, 운하고 싸웠다고 그러, 는 거야. 난 벼, 별로 사과 같은 거... 메릴이...!"
"이런. 그렇게 말하면 짐이 무안하지 않은가, 박사. 박사는 이 나라의 중요한 인재이니 먼 길 떠나기 전에 이렇게나마 챙겨주고 싶어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운은 입을 다문 채 세 여자의 대화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엔은 필사적으로 자기가 이른 거 아니라며 전하려 하였으나, 메릴과 황녀는 '사과는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아주는 것도 중요'라는 논리 하에 그만 내빼고 용서해 주라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기절할 듯한 나엔이 차를 허겁지겁 마시는 걸 흐뭇이 보던 황녀가 운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운은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하고 시키는 대로 앉았다.
"제게 용건이 더 있으십니까?"
"있고말고. 갑자기 사과를 강요해 불쾌하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미안하네.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남의 눈이 두려워 이런 핑계를 대어 부르고 말았군."
사과와 그간의 치하, 그리고 상처에 대한 염려를 한 후에 천계의 황녀 에르제가 본론을 꺼내었다.
"메릴 박사의 말씀으로는 죽은 자의 성에는 각종 신비로운 이기가 가득하다더군. 더구나 마계엔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이들이 강한 힘을 뽐내며 그들의 사회를 이루고 있다 들었네. 그곳을 알기 위하여 제국의 황녀는 본인이 직접 탐사에 참여했고 말이야. 그만큼 제국에서도 마계를 중요히 보고 있다는 뜻일세. 마계에서 구한 테라나이트라는 광물을 제국으로 가져가기도 했고."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운은 황녀가 이렇게 긴 뜸을 들이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저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국에게 마계는 반드시 천계를 통하여 가야 하는 곳일세. 우리는 그들과 동맹을 맺고 길을 제공하고 있으나, 점점 방자해지는 그들은 입장을 잊은 듯하네. 허나 제국으로 인한 각종 유익에 빠진 귀족들은 제국을 그저 질 좋은 금맥으로만 생각한다네. 가난한 백성이 소비하지 못하는 귀족의 생산품이 제국에 비싸게 팔려가고 있지. 또한, 제국의 사치품을 사들여 재력을 과시하는 것이 귀족가의 유행이야. 귀족에게 있어 제국은 결코 놓칠 수 없는 파트너일세."
에르제가 운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공손히 받아들며 황녀의 안색을 살피니 몹시 어두웠다. 아까의 밝은 웃음이 거짓말 같았다.
"귀족만이 아니야. 백성들도 제국을 좋게 보고 있어. 복구를 돕고 물건을 사가는데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 짐은 제국을 대체할 상대로 흑요정과 교역을 시도하였으나 그들은 낯선 우리가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모양일세. 제국과 동맹을 맺은 것도 그들의 심기에 어긋나는 듯하고. "
"그렇습니까."
"제국, 아랫세계... 우리가 대처하기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네. 그들이 황녀까지 보내어 우리를 필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연구해야 하네. 그러니 라이오닐 대령. 그대가 사절단의 책임자가 되어 아랫세계를 공부하고 와주지 않겠는가?"
운은 숨이 턱 막혔다.
"왜 저입니까?"
"자네는 명성이 있어 사절로 적당하고 새로운 학문을 익히는 속도도 빠르지. 안톤과 싸울 때도 나엔 박사의 조수 역할까지 했다고 들었네."
"담당자가 죽어 도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연구 내용을 알아야 사령관님께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어이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여 돕지 않았는가. 자네가 뛰어난 인재임은 이미 알고 있으니 겸손의 말을 거두게."
운은 낯가림이 심한 나엔이 중구난방으로 던지는 말을 필사적으로 받아 적던 때를 떠올렸다. 하나라도 더 알아듣기 위해 전투에 나가서도 책을 뒤적이긴 했지만, 글쎄. 억지로 집어넣은 지식이 완전히 소화되었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물론 평소에도 책을 짬짬이 읽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한 몸부림일 뿐이다. 자신에게 중임을 맡을 능력이 없다는 것은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알지 못하는 지식에 대한 탐구심도 없다. 아버지에게 맞아가며 사냥 기술을 익혔던 것처럼 그저 해야 하니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황녀는 실망한 듯했지만 더 강요하지 않았다. 서재는 조용해졌고 나엔이 차를 홀짝이는 소리가 빈자리를 채웠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에 시선을 고정시킨 운은 황녀가 이만 물러가라고 말해 주길 기다렸다.
'여긴 나 따위가 있어도 될 곳이 아니야.' 하지만 황녀의 용건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알겠네. 그럼 군사전문가로서 자네가 본 해안수비대의 상황과 전력을 평가해주게."
안도했다. 차라리 쉬운 일이었다.
9. 한밤 마을 외곽
궁궐을 나온 후 두 사제를 숙소까지 안내했다. 나엔은 가는 내내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일상적인 주제를 넘어 전문 분야의 최신 화제를 늘어놓았기에 운으로서는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최대한 이해하려 애쓰며 대답했고, 신이 난 나엔의 말은 점점 빨라졌다. 나이 든 메릴은 아는 내용임에도 제자의 말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피로가 쌓인 운은 말의 홍수 속에 멍한 기분을 느끼며 그저 이름이 짧아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몇 글자 더 붙기라도 했으면 나엔의 말이 배는 길어졌을 것이다. 아침의 소동 때문에 평소보다 더 피곤하다. 키츠카 모녀의 뛰어난 실력을 알고 있느니만큼 사령부에서 죽을 각오로 집에서 샤워만 하고 곧바로 출근했기 때문이다. 요 며칠간 제대로 먹은 것이라고는 엊저녁에 대접받은 식사뿐이다. 세레나가 억지로 영양제를 맞히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다.
두 명에겐 길고 한 명에겐 짧은 길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운은 메릴과 나엔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홀로 어두운 길을 걸었다.
그리고 달렸다.
가로등도 켜지 않아 앞뒤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운은 쉽게 방해물을 피했다. 안톤과 타르탄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전력은 늘 부족했으며 암흑 속에서 싸우는 상황도 비일비재했다. 군화 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달린 그는 어느 골목 담벼락 뒤에 몸을 숨겼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쇼..."
퇴로가 막힌 골목 구석에서 우는 남자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법지대 특유의 억양이었다. 슬쩍 고개를 내미니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명이 네 명의 남녀에게 둘러싸여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군가의 팔이 움직이더니 둔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총기 특유의 무거운 쇳소리가 비참한 울음을 뚫고 고막을 자극했다.
"미친놈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죽으려고 환장했냐!"
"살려주십쇼. 제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우린 너희 때문에 이꼴이 됐어! 우리도 먹을 거 없다고! 모래 속에서 얌전히 굶어 죽을 것이지!"
험한 욕설과 함께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운은 안주머니에서 작은 랜턴을 꺼내어 비추는 동시에 금속성 소리가 난 방향을 겨누었다. "멈춰." 갑자기 나타난 밝은 빛과 군인의 등장에 모두가 그 순간 굳어버렸다.
"무기를 버리고 손들어. 그 사람을 놔줘."
각목을 든 두 남자는 씨근덕거리며 운의 지시에 따랐다. 아이를 몸으로 가린 채 맞고 있던 남자가 얼른 구석으로 움직였다. 총을 든 사람은 두 명. 오른쪽 허벅지 아래에 의족을 한 여자와 온몸에 붕대를 감은 남자였다. 운은 그들의 몸에 밴 움직임을 보고 군인 출신임을 짐작했다.
"뭐야? 군인이면 다야? 그까짓 무섭지도 않다고!"
랜턴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두 남녀가 바락바락 대들었다. 붕대를 감은 남자는 피해자를 겨눈 총을 내리지 않은 채였다. 운은 짧게 명령했다.
"버려."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기가 죽은 남자의 팔이 조금 처졌다. 그러자 뒤에 있던 여자가 쩔뚝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운은 여자를 조준했다.
"어린 거 같은데. 계급이 뭐냐? 내가 누군지 알아?"
눈부심과 자세 때문에 운의 계급장은 그들에게 잘 보이지 않았다. 운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지만 여자는 의족으로 바닥을 쾅쾅 내리쳤다.
"내가 이런 병신이어서 말이야. 눈에 뵈는 게 없거든. 배급이나 타 먹고 사는데 이런 쓰레기가 기어들어 와서 한 그릇 가져가면 열이 받아, 안 받아?"
"사령부에 가서 신청하면 일거리를 알아봐 줄 거다."
"이 다리로 성벽에 올라가서 벽돌이나 나르라고? 그러느니 먹는 입을 줄이는 게 낫지!"
"마지막 경고다. 무기를 버려라. 따르지 않으면 발포한다."
"내가 그 시퍼런 괴물하고도 싸웠는데 애송이 말을 들을 것 같아?"
여자가 총을 들어 올렸다. 타앙! 정확한 한 발이 여자의 이마에 박혔다.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지는 모습을 본 붕대 남자가 이를 갈더니 아이를 안은 남자를 다시 겨누었다.
날카로운 화약성이 공기를 찢었다.
총소리에 달려온 수비대에게 폭력배를 인계하던 운은 멍투성이인 남자에게 팔을 붙잡혔다. 다친 팔이었기에 무의식중에 얼굴을 찡그렸으나 눈물 콧물 다 흘리던 남자는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연신하는 그를 겨우 떼어놓은 운은 수첩과 펜을 꺼내었다.
"두 분의 이름을 말씀하십시오."
남자는 운이 계속 도와주려는 줄 알고 이름은 물론 어떻게 살았는지, 어디에 숨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좔좔 읊었다. 운은 자진해서 풀어내는 정보 중 꼭 필요한 사항을 적고는 종이를 찢어 옆에 있던 수비대원에게 주었다.
"보호소로 이동하게 될 겁니다. 그곳에서 지시를 따르십시오."
"보호소라면..."
겐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남자가 불안하게 물었다. 운이 대답하기 전에 키 큰 수비대원이 짜증스럽게 그의 팔에 금속으로 된 팔찌를 채우며 말했다.
"아저씨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고요."
"아니, 저, 우리는 여기서 살고 싶어서 왔는데... 힘들게 왔는데..."
"아저씨 여기 있으면 맞아 죽어요. 말 들으니까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네. 몸도 비실비실하면서 머리도 나쁘신가? 황녀님이 아저씨 같은 무법지대 사람들은 여기 오지 말라고 했다니까요?"
운은 정정해주려고 했다. 황녀는 무법지대 융화정책을 주장했지만 반대에 부딪혔다고. 무법지대 출신으로 유명한 잭터를 대장군으로 삼고 있는 황녀가 그들을 차별하는 법안을 낼 리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체를 살펴보던 다른 대원이 "이 사람, 전에 나간 원사님이네... 보급로 차단 작전 때 다쳤던."하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먼저 끌려가는 아버지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아이가 미움에 찬 눈으로 운을 노려보았다. 기껏해야 열한 살쯤 되어 보였으나 작은 얼굴을 가득 물들인 노기는 어른도 흠칫할 정도였다. 운은 양주먹을 꼭 쥐고 버티는 아이의 어깨를 잡은 수비대원을 제지했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아이와 똑바로 마주 보았다.
"왜 여기까지 왔나. 차라리 이튼 쪽이 돈을 벌기 쉬울 텐데."
"아빠는 날 학교에 보내려고... 좋은 곳이랬어."
"하긴." 운이 중얼거렸다. "여기선 애들이 그네도 타더라."
"나도 타봤어!"
"아니. 그거 말고 큰 거. 색색의 동아줄로 묶은 나무 위에 일어서서 탄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모래가 날리지 않으며 높은 담장 위로 온 마을을 볼 수 있다더군."
"그게 뭐야. 필요 없어."
"나도 그래."
운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전부 건네주었다.
"나눠서 숨겨. 아버지에게도 보여주지 마. 열차를 타면 도둑이 많을 거다. 볼일을 보러 갈 때도 혼자 다니지 마. 총은 다룰 수 있나?"
아이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쳐다보았다.
"자는 사람의 몸을 뒤져. 술냄새가 심할수록 좋다. 욕심부리지 말고 가벼운 총을 훔쳐. 어쨌든 쓸 수만 있으면 된다. 잘 때는 교대로 눈을 붙이고 절대로 둘 다 잠들지 마."
나이는 어려도 느끼는 건 있는 듯, 아이는 노려보던 표정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듣던 수비대원들이 혀를 찼지만 운은 그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랜턴을 아이의 빈손에 들려주었다.
"필요할 거다."
아이는 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홱 돌려 제 발로 아버지를 따라갔다. 운은 몸을 일으켰다. 두 부자가 수비대원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시체를 수습하던 수비대원이 더는 참지 못하고 운에게 말을 걸었다.
"뭡니까? 동향인의 정입니까?"
"아니. 죽을 지경이 되어도 아버지가 아들을 필사적으로 지켰지 않나."
"그게 뭐가요. 새끼를 지키는 건 당연한 거죠."
운은 모자를 고쳐 쓰며 대답했다.
"신기해서."
10. 또 다른 아침
자정을 넘겨 집에 도착하니 정체된 공기가 기분 나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군에서 제공하는 숙소를 사양하고 사령부에서 먼 곳에 집을 산 지 꽤 지났는데도 집안은 아직 텅텅 비어 있다. 부엌과 거실이 하나로 이어져 있고 욕실과 작은 방이 하나 딸린 평범한 집. 그러나 있는 것이라곤 물 몇 병과 침대, 그리고 작은 옷장을 반도 못 채운 옷가지 정도다.
방으로 들어간 운은 침대 위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지만 서 있을 힘이 없었다. 싼값에 산 침대는 바닥에 눕는 것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였다. 바닥에서 자는 것도 익숙하지만 자꾸 살이 빠져 멍이 드는 통에 산 것이다.
다시 아파지는 머리와 팔의 상처를 생각했다. 불편하긴 하지만 업무에 지장이 올 정도는 아니다. 텅 빈 위와 위험 수준으로 줄어드는 몸무게를 생각했다. '체력 관리에 지장이 생기겠군.' 감상은 그 정도였다.
[...운.]
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깜빡 잊고 있던 물건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운은 홀더에 넣어둔 총을 꺼내었다. 익숙한 무게지만 요즘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운은 아이가 공을 갖고 놀듯이 총을 살짝 던졌다가 받았다. 처음 보는 것처럼 구석구석을 만지기도 하고 손가락을 끼워 빙글빙글 돌리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겨누었다.
아까 사살한 남녀를 떠올렸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을 때 주마등이 보인다던데 평생의 기억을 모두 떠올렸을까? 자신들을 죽인 자가 무법지대 출신인 걸 알면 구천에서도 화내지 않을까.
황녀와의 문답을 떠올렸다. 젤바. 해안수비대. 사람들 앞에서 시원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던 하이람은 운이 어릴 때 봤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운이 열 살도 되기 전이다. 제이와 함께 웨스피스 사령부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을 때였다. 지원군으로 와 있던 하이람은 운을 보더니 종군 기자를 불러 사진을 찍게 했다.
[학대에, 가출에, 어린이. 완벽한걸. 너라면 천 마디 연설보다 많은 지원을 부를 수 있어.]
하이람의 손에 끌려가던 운은 처음 보는 어른이 불안했다. 뒤돌아 보니 입을 꾹 다문 제이가 이쪽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당시 10대 후반이던 제이는 청소년기의 반항심을 더해 유명한 메카닉의 제자라는 하이람을 마뜩잖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이람은 일부러 가져온 낡은 소총을 운의 어깨에 메어주더니 기자에게 어떻게 방향을 잡는 게 좋겠다며 지시를 내렸다. 기자가 카메라를 고정하고 사인을 보내자 그는 운의 머리를 좀 더 헝클어 놓았다. 그리고 눈만 깜빡이며 올려다보는 운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는 허리를 굽혀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 네가 죽으면 더 많은 지원이 들어올 거야.]
어른의 말을 그대로 듣는 나이였던 운은 충격을 받았지만 죽는 게 무서웠다. 하이람이 비밀이라고 말했기에 연상인 레베카나 제이에게 털어놓지도 못했다. 친구들이 하나씩 다칠 때마다 혼자 울었다. 결국 죽지 못한 채 그날이 왔다.
그날. 모든 게 끝난 날. 운은 심한 열을 앓고 있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에서 친구들이 죽어가는 지옥 같은 광경에 그저 넋이 나가 있는데, 피투성이가 된 레베카가 달려와 그를 업었다. 굉음이 가득하여 레베카가 하는 말을 잘 듣지 못했지만 눈을 감으라고 했던 것 같다. 운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엄청난 폭발 소리를 들었다.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운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하이람의 말대로 운의 사진이 실린 신문은 불티나게 팔렸고, 웨스피스 사령부는 계속 아이들을 이용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웨스피스 사령부와 관련된 기사 어디에도 하이람의 이름은 실려 있지 않았다. 비공식 지원이었을까. 군 기록을 보려 해도 겐트 사령부 소속의 그로서는 해안수비대의 기록을 열람할 권한이 없다.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고.
철컥.
마른 쇳소리를 내며 탄창이 아래로 떨어졌다. 약실에 들어있는 탄환도 빼서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밀었다. 이제 잠결에 자신의 머리를 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행여 주변에 날카로운 물건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한 후에야 운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자 운은 평소대로 두 시간 일찍 출근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기대하며 문을 열었지만, 퇴직한 부하의 책상 위에 높다랗게 쌓인 책더미가 운을 반겼다. 바닥에서 한 줄로 길게 쌓으면 그의 머리를 넘어 천장까지 닿을 것이다.
"앗, 오셨습니까!"
루카스 소위가 허둥지둥 경례하자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답했다. 소위는 많은 책을 옮기느라 지친 듯했으나 생기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자신의 자리까지 간 운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의자에 앉아 책상을 닦았다. 하지만 모자의 챙 위로도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뭔가?"
"책입니다!"
테미 대위라면 책이라는 건 보면 아니까 그 많은 걸 사무실에 둘 생각을 해낸 끔찍하고 괴상한 사고 과정에 대해 설명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운은 점잖은 성격이었고, 부하의 행동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좋은 상관이라는 구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 그 책들이 필요한가?"
"해저성을 찾을 겁니다!"
씩씩한 대답을 듣고서야 운은 책의 제목을 살펴볼 생각을 했다. '사악한 용, 바칼', '바칼에 맞선 사람들', '기록으로 살펴보는 바칼의 행동' 등의 제목과, '보물섬', '해저 탐사 기초', '파충류의 생태' 등의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운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말을 잃고 소매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렸다.
"찾기만 하면 역사에 남을 발굴이 될 겁니다! 국가 재정에도 도움이 될 거고 관광 사업도 크게 발전하겠지요. 그럼 우리 사령부 문제도 해결할 수 있어요!"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지.
어린 상관에게 칭찬을 바라는 루카스의 표정은 그야말로 노골적이었다.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운으로서도 한눈에 알아챌 만큼 단순하며 강렬한 눈빛이었다.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운은 고개를 숙였다. 루카스는 사회 지도층의 심리나 분위기를 분석할 때 많은 도움을 주지만, 때로는 엉뚱한 발상에 매달려 각종 기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형의 탐구심을 그대로 닮은 건지 아니면 좋은 출신 덕분에 아픈 꼴을 덜 봐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며 테미가 투덜거린 적이 있다.
하지만 의도만은 좋았기에 운은 생각에 잠겼다. 저렇게 의욕을 불태우는데 하게 놔둬야 하나? 루카스가 업무에 집중하지 못해 생기는 잔업은 자신이 처리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테미가 가만히 두고 볼까? 사무실의 평화를 위해서도, 다소 늦은 나이에 꿈을 찾아 독립한 부하의 안전을 위해서도 말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순간,
"루카아아스 소위이!!"
지옥문을 뜯어먹고 올라온 듯한 테미 대위가 문을 부술 듯 열어젖히며 달려 들어왔다. 어깨치기로 타르탄쯤은 저 멀리 날려버릴 기세에 운은 반사적으로 총을 쥘 뻔했다.
"내 이름으로 국립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고? 어제 계산 틀린 거 마무리해서 오라고 했더니만, 뭐? '바칼의 해저성 탐사 작전'? 내가 언제 명령했다고! 그리고 내 도장은 언제 가져간 거야!"
"그치만 제 이름만으로는 다 못 빌리는걸요. 그리고 대위님의 이름으로 빌리려니 좀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한 것 같아서..."
루카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름대로의 이유를 주워섬겼다. 물론 테미의 분노를 잠재우기는커녕 부채질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화가 나서 방방 뛰면서도 이성은 남아있는지, 테미는 차마 상관 앞에서 폭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고 저 무거운 책상을 잡고 마구 흔드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운은 생각했다. 그녀가 극단에 가서 바칼 역할을 맡으면 박수갈채를 받을 거라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대위님 오시기 전에 치워둘 생각이었는데..."
"그 도서관 사서가 내 동생이다!!"
잭터가 봤다면 박장대소했을 것이다. 나엔이라면 깔깔거리며 숨도 제대로 못 쉬었겠지. 그러나 운은 웃지 않았다. 웃지 않는 건지 웃지 못하는 건지 그 자신도 몰랐지만, 기어코 테미에게 멱살을 붙잡혀 버둥대는 루카스를 보면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얼굴을 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던 허기를 깨달았다.
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질식사하기 전인 루카스와 살인죄가 생길락 말락 하는 테미를 불렀다.
"식사나 하러 가세."
테미와 루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출근 시간 전이라지만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저런 말을 하는 운은 처음이다. 두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운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고민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언어 예절에 관한 책 내용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그가 마침내 사과를 입에 담으려 했을 때,
"국밥이 먹고 싶어요!" "샌드위치가 먹고 싶습니다!"
동시에 외치는 부하들을 보며 다시 고민에 빠졌다.
텅 빈 황궁
앗, 모험가님! 이런 때에 오시다니… 어서 이쪽으로 오시지요. 라이니. 당신도 같이 가죠.
모험가님. 이쪽으로 오세요. 눈에 띄면 안됩니다.
……
마를렌 님. 이곳이라면 괜찮겠네요. 제가 망을 보고 있겠습니다.
고마워. 라이니.
죄송하지만 모험가님. 황녀님과 알현하시는 것은 당분간 힘들 것 같습니다. 아니, 알현이 문제가 아니라…
…염치 없는 소리지만 저희를 다시 도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만약 도와주실 수 있다면… 젤딘 님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저는… 이곳에서 시신을 수습해야 해서…
……
젤딘에게 가서 상황을 물어보기
<퀘스트 완료>
모험가님! 아아, 다행이로군요. 이곳에 와주실 줄이야!긴급 상황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패악한 놈들이 황궁의 문을 부수고 황녀님을 납치하려고 했습니다. 황녀의 정원이 필사적으로 막은 덕분에 무사히 피하셨지만 희생자가 많습니다.
더구나 바깥에도 적들이 몰려와 황녀님을 내놓으라며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제국군과 손을 잡은 귀족의 짓입니다.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라를 저버린 것이지요.
전쟁이 끝나고 민심이 자기들에게서 떠나자 주도권을 잡으려고 별짓을 다하더니 급기야 이런 짓까지 벌이는 모양입니다. 전쟁 때 함께 싸우면 되었을 것을…! 도망간 주제에 실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반란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수가 적은 저희만으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황녀님을 위해 한 번 더 함께 싸워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갑작스럽지만 동행을 부탁드립니다. 적의 대장이 보자고 하니, 함께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겐트 성 밖에서 적의 대장과 만나기
젤딘 장군이 아닌가. 오랜만이로군.
베르타 공. 명문가인 당신이 명예를 잊고 백성들을 선동하여 이 나라의 해악이 되다니요. 대를 거듭해 온 충성이 겨우 그 정도였습니까?
충성? 우리가 충성한 것은 이 나라네. 황녀와 모래 냄새 나는 늙은이가 나라를 흔들고 있는데 귀족으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반역의 핑계가 그런 것이라니 실망스럽습니다.
우리는 그저 죄 없는 천계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다 못해, 횡포를 부리는 위정자를 막고자 하는 것뿐일세. 나라를 구하는 것이 귀족의 역할이지 않는가.
우리의 뜻을 알았으면 비키게.
그럴 수는 없다! 반란자!
자네가 끝까지 황녀의 개가 되겠다면 하는 수 없지.
<퀘스트 완료>
젤딘 슈나이더. 난 자네를 존경하고 있던 사람일세. 그러니 이 말만은 해야겠네.
황녀가 자리에 오르고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전쟁뿐이었네. 그 여자가 제 권위를 높이느라 황녀라 자칭한 후에 천계에 새겨진 역사는, 오직 전쟁뿐이었단 말일세.
다치고 배고픈 백성들의 비명이 그대에게도 들렸을 터. 그 여자에게는 나라를 짊어질 자격도, 능력도 없네. 오직 화를 불러오는 능력만 있을 뿐이지.
잘도 말하는군. 군 병원의 예산과 퇴역 군인의 위로금을 줄인 것은 귀족원의 결정이지 않았나! 그래놓고 모든 게 황녀님의 결정이라 선동한 주제에!
돌아가서 잘 생각하게. 마음을 돌린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자네를 환영하겠어.
모험가.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우리는, 천계는 그대들을 잃고 싶지 않네. 부디 잘 생각해보게.
귀족과 제국의 연합
적은 황녀님의 권위를 훼손하고 이글아이 사령관님의 업적을 왜곡하여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은 휩쓸리고 있지요.
전쟁에서 이겼지만 천계가 얻은 것은 전무합니다. 부상자는 넘쳐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아랫세계에서 온 모험가들은 이곳저곳에서 사고를 치지요. 불안했을 겁니다.
노스피스-제국 연합군은 그 불만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천계 최고의 사령관이 '그깟' 안톤을 몇 년 동안이나 해치우지 못했을 리 없다며… 실은 카르텔과 손을 잡았던 것이며, 그래서 황도의 위기를 눈 감았던 거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법지대 출신에 대한 반감이 있을 겁니다. 아직도 그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같은 천계인으로서 정말 부끄럽습니다.
실례합니다! 적이 성문을 넘으려 하고 있습니다! 지원 부탁드립니다!
이런. 틈을 주지 않는군요. 모험가님. 테미 대위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성 밖의 적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겐트 성 밖을 클리어하기
<퀘스트 완료>
역시 대단한 실력이시군요. 모험가님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도 올라갔습니다.
대위의 보고로는 제국군의 병력이 우리의 몇 배 이상이라고 하던데… 역시 길게 끌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제국군의 물자에 노스피스의 풍부한 보급이 더해진 터라…
하지만 적의 약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여기 있는 제국군은 반 발슈테트의 병사보다 못하고, 귀족군은 실전 경험이 부족합니다. 이 점을 잘 이용해야…
그렇네. 포기하기엔 이르지.
작전 수행
오셨군요. 황녀님은 괜찮으십니까?
조금 놀라긴 하셨지만 무사하시네. 상황은 어떤가?
좋지 않습니다. 적들이 끊임없이 몰려오는군요. 성안의 민심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원군은 부르지 못하는 겁니까?
통신이 차단당했네. 멜빈이 힘을 써주고 있지만 기자재들이 모두 파괴됐어. 무기고도 엉망이고. 황궁 습격은 이를 숨기기 위한 눈속임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야.
맙소사. 어째서 제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던 거죠? 설마… 겐트 수비대 내부에도 반역자가…?!
그런 것 같군.
죄송합니다! 제 불찰로 황도와 황녀님을 위태롭게 하고 말았습니다!
아닐세. 이건 총사령관인 나의 과실일세. 게다가 저들이 심어놓은 첩자들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건데 자네가 뭘 어떻게 했겠나. 설마 이렇게나 무식하게 나올 줄은 나도 몰랐네.
유르겐… 섭정의 인을 돌려놓지 않더니… 기어코 이런 짓을!
…아마 그건 아닐 거야… 덫은 유르겐이 깔아놓은 것이지만 이번 일 자체를 유르겐이 주도한 짓이라고 보기에는…
네?
…아닐세. 잊어주게.
모험가. 인사가 늦어서 미안하네. 나도 정신이 좀 없어서 말이지. 자네가 와줘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군. 정말 고맙네.
그럼 바로 움직이지. 카르텔 이후로 성벽을 보수하였지만 북문은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네. 그래서 적은 지금 그곳에 몰려있지.
하지만 눈속임일 가능성이 커. 북문에는 구식 병기를 들고 있는 제국군이 더 많이 보이거든. 귀족들이 성의 함락을 타국 병사에게 맡기지는 않을 터. 주요 시설이 집중된 남문으로 오겠지.
젤딘은 남문으로 가게. 그리고 모험가는 서문으로 가주게. 지금은 쓰지 않는 낡은 송신탑이 서문 밖에 있어. 라이오닐 대령과 함께 가서 원군을 불러주게.
낡은 송신탑으로 가기 위해 겐트 서문으로 나가기
<퀘스트 완료>
모험가님. 무사하십니까? 자네들도 다친 곳은 없나?
죽겠습니다… 어떻게 다들 그렇게 멀쩡하신 거죠?
역시 귀족가 자제에게는 좀 무리였으려나. 전쟁 뒤에 입대했다곤 해도 소위씩이나 달았는데 좀 더 분발해 보면 어때?
그럴 겁니다. 귀족들이 이런 짓을 저지른 것에 저도 화가 나 있으니까요.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진작 입대했을 텐데… 부끄럽네요.
그런 점에서 저는 모험가님을 정말 존경합니다. 홀연히 나타나서 천계의 영웅이 되셨잖아요? 저는 가족 핑계를 대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는데 말이죠.
제가 입대하게 된 이유의 절반은 모험가님의 활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절반은 대령님이죠. 저보다 어린 게 잘도 싸우길래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죠.
…뭐?
엑? 앗, 죄송합니다!
어리신 게 잘도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군.
…아고. 아고 머리야…
그런데 대령님. 처음엔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는데 어째 점점 주변이 시끄러워지지 않나요? 우리가 가는 송신탑이 아직 기능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
모험가님. 제가 선두를 맡아 길을 열겠습니다. 모험가님은 이 둘과 함께 천천히 와주십시오. 목적지가 멀지 않으니 잠시만 버티면 됩니다.
대령님 혼자서요? 말도 안 돼요!
적의 지휘체계가 엉망이니 단독으로 움직여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을 걸세. 모험가님이라면 그 정도만 되어도 만에 하나의 일이 벌어졌을 때 몸을 빼내실 수 있을 테지.
가능한 게 문제가 아니라 대령님이 위험하신데요!
왜 내 얘기가 나오지? 나보다 모험가님이 우선일 텐데.
다른 할 말 없으면 나는 먼저 출발하겠네. 모험가님의 호위를 부탁하네.
송신탑으로
저 똥고집! 나이도 어린 게 죽고 싶어서 아주 발악을 하네! 알고는 있었지만!!
어… 그러고 보니 대위님 올해 몇 살이셨죠?
자네가 먼저 죽고 싶나? 분위기 파악 좀 해!
…모, 모험가님! 어서 가시죠!
낡은 송신탑으로 향하기
…모험가님 오셨군요. 별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여기까지 와버리셨네요.
…당신, 어째서 여기 있죠? 황녀님을 피신시키기 위해 그분 곁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텐데…
예리하네요.
대령님은 어떻게 된 거죠?
그야… 황녀의 정원이니까… 비겁한…
미안하다고는 생각해요. 초면도 아니고…
…황궁 습격을 도운 건 당신인가요?
그래요. 수비대에 숨어 들어간 귀족의 사병과 함께 일을 진행했죠.
정말 드릴 말씀이 없군요. 모험가님 덕분에 제 이름을 찾고 귀환했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못 했어요.
은혜를 갚고 싶었는데 이렇게 적으로 만나다니…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겠네요. 죄송해요.
<퀘스트 완료>
죄송해요, 모험가님. 저를 구해주며 기대했던 결말이 아니죠? 저도…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게 좋아질 줄 알았는데…
황궁 습격 때 동료들이 많이 죽었지요. 앞으로도 죽을 테지요…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 어요… 황녀님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세상이 바뀌길 바랐…
대령님! 대령님!
……대위…
응급 처치를 하겠습니다!
…그것보다 바로 황녀님께… 황녀의 정원의 배신자가 이들이 다라고… 단정 지을 수…
……
대령님? 대령님!!
…정신을 잃으셨군요. 숨은 붙어 있어요.
어쩌다가 사태가 이 지경까지…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일은 하고 가야지. 루카스 소위. 자네가 연락을 보낼 수 있지? 빨리 지원 요청을 보내. 대령님은 내가 맡을 테니.
알겠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가 오기 전에 다 망가뜨려 놨어요. 아주 세심하게 망가뜨려놔서 뭐 하나 써먹을 수도 없겠군요.
쳇… 이 송신탑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우리랑 황녀의 정원뿐이었는데 하필… 빨리 귀환해야겠어.
모험가님. 저랑 함께 가시죠. 소위는 대령님을 업고 뒤따라오고… 앗? 저건 뭐지?
성에서 연기가?! 빨리 돌아가야겠습니다!
몰려든 적들을 뚫고 겐트로 돌아가기
이게 누구신가. 천계의 영웅 아니신가. 하지만 조금 늦게 온 거 같군. 겐트의 성문이 열리는 순간을 봐주길 원했는데. 극적인 때를 놓치다니 내가 다 아쉬워.
마리안 유르겐? 유르겐 공의 딸인… 당신이 왜? 아무리 유르겐 공이 사령관님과 적대하고 있어도 이런 짓은…
아버님은 상관 없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결정이다.
내가 언제까지 아버님의 그림자 속에 있을 거라 생각했나?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지만 너무 물러. 그리고 이런 중대사는 유르겐 가를 이을 딸인 내가 해야지.
…바보로군…
전쟁의 혼란한 틈을 타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른 남자들이 문제지. 난폭하고 생각이 짧은 남자들이 나라의 일을 어떻게 맡을 수 있겠나!
위급할 땐 도망간 주제에 이제 와서 핑계가 그것밖에 없어요? 창의성은 다 삶아드셨나? 듣고 있는 이쪽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네요!
천한 것. 땀내 나는 군복이나 입고 먼지 속을 뒹굴던 것이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뭐어? 주제? 어쩌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저렇게 구식이지? 귀족이라고 오냐오냐 해주니까 시대가 바뀐 것도 모르는구나?
꿈 깨! 니가 꿈꾸던 시대는 진작에 안톤이 콧방귀로 날려버렸어! 도망자면 주제에 맞게 입 딱 닫고 지내든가, 병원 가서 붕대나 빨고 있으라구! 다 너네 지키느라 다친 사람들이니까!
…우와. 유르겐한테 저렇게 말하는 사람 처음 봐…
<퀘스트 완료>
모험가님! 돌아오셨군요! 다행입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가 맞서 싸우는 동안 성문이 갑자기 열려 적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내부에서 협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분하지만 지금은 성을 버리고 황녀님과 함께 탈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라이오닐 대령은…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요?
괜찮…습니다. 사령관님은 어디에…
황녀님과 함께 계실걸세. 자네는 눕는 게 좋겠군. 적이 오면 항복하고 치료를 받게. 두 분께는 내가 가서…
안 됩니다… 사령관님께는 제가 갈 테니… 항복해 주십시오.
무슨 소리지?
적이 내통자를 심어…두었던 것처럼… 우리도… 필요합니다. 수비대장으로서 명망… 함부로 대하지… 후우, 못 할 겁니다… 겐트…의…
어… 대령님 말씀은 수비대의 반발 때문에라도 젤딘 님을 해치지는 못할 거고, 그리고 여차하면 안에서 동조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여기 계시는 게 좋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물론 감시야 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민심 때문에라도 먼저 손을 대지 못할 겁니다. 황녀님과 사령관님을 공격하는 걸로도 위험은 이미 클 텐데, 겐트 방위의 일등공신까지 해치면 걷잡을 수 없으니까요.
……젠장. 황녀님을 두고 적에게 항복하라는 건가! 겐트의 수비대장인 내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적과 아군
……알겠다. 대령의 말도 일리가 있어. 황녀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잠시의 굴욕을 견디겠다. 마를렌 님도 아직 이곳에 남아 황녀님의 탈출 시간을 벌고 계실 터. 그분도 내가 설득하도록 하지.
그런데 자네는 그런 몸으로 어딜 가려는 건가? 자네야말로 투항하고 치료를 받아야겠는데.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직… 콜록콜록.
하아… 어쩔 수 없군요. 우리 대령님이 혼자 무리하는 거 하루이틀도 아니니까 이젠 익숙해요.
걱정마세요. 황녀님과 사령관님은 저희가 안전하게 피신시키겠습니다.
이런… 모험가님은 그럼 저와 함께 이곳에 계시는 게… 네? 같이 가시겠다고요?
……예전의 저라면 무작정 모험가님과 함께 황녀님께 가겠다고 우겼겠죠.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저는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모험가님. 조심하십시오. 두 분을 부탁합니다.
황녀 에르제와 잭터 이글아이를 구하러 가기(운 라이오닐이 죽으면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습니다.)
흠. 이제야 오는 건가. 꽤 늦었구만, 모험가.
뭘 놀라나. 무법지대 출신이 귀족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건 당연하지 않나. 아랫세계에서 온 시건방진 제국군도 혼쭐 내주고 싶었고 말이야.
뭐 이 코찔찔이가 끼어들어서 머리가 아픈 참이었다만…
늙은이가 아직도 입만 살았군. 은퇴할 때도 한참 지나지 않았어? 영감!
아직도 제 분수를 모르는군. 쯧쯧. 여물 위에 엎어져 자다가 오줌이나 싸던 놈이…
언제적 얘기야!
뒤에 쫓아오는 놈들은 내가 대충 처리할 테니 어서 황녀를 구하러 가게. 천계가 귀족놈들 손에 다시 넘어가면 또 다른 카르텔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어.
모험가 아냐? 생각보다 늦게 왔네. 얼씨구. 라이오닐 넌 왜 그렇게 다쳤냐? 아주 죽어가는구만.
……
대답도 못 할 정도로 아픈 거냐? 그러면 그냥 쉬지 그랬어. 얌전히만 있었으면 우리 대장이 써줄지도 몰랐다구.
허크 대령님. 왜 여기에 계신 거죠…
너희랑 싸우려고 왔지. 뭘 뻔히 알면서 물어.
모험가. 결국 그쪽에 설 거야? 난 네가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다. 다시 생각해 봐. 거기 서는 건 썩 좋은 선택이 아냐. 모험하느라 바쁠 텐데 왜 이런 일까지 신경을 쓰려고 하냐?
…그래? 그럼 뭐 한 판 해야지. 어쩌겠어. 나도 너희랑 싸우고 싶지 않지만… 쳇.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냐.
<퀘스트 완료>
아오… 아프네. 젠장. 다 죽어가는 놈 끼워서 잘도 싸우는군. 그래도 내가 할 만큼은 했나.
해안수비대도 귀족 편을 든 건가요? 함께 귀족을 욕하면서 이 나라는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으면서!
그랬지. 솔직히 너네한테는 악감정 없어. 하지만 명령인데 어쩌냐. 상명하복이 원칙인걸. 안 그래?
그래도… 그래도, 겨우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워지나 했는데… 평화를 찾겠다고 싸우던 사람이 귀족의 손에 놀아나서 동료에게 총구를 들이밀다니요!
게다가 우리가 충성할 대상은 황녀님이잖아요! 이글아이 사령관님은 이 나라의 대장군이고! 어떻게 배신할 수 있는 거죠?
…뭐. 더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한 거지. 그리고 솔직히 우리끼리도 살기 힘든데 황녀가 무법지대 놈들을 둘둘 끼고 있는 것도 별로잖아.
저도 무법지대 출…, 콜록… 출신입니다만.
……
어제의 동료
너무 지체했군요. 속도를 더 내야겠어요.
하지만 대령님이…
……
…대령님. 대령님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고 있습니다.
…면목이 없… 콜록콜록…
대령님은 여기서 쉬세요. 저희가 모험가님과 함께 두 분을 구할 테니까요.
…알겠네. 모험가님. 죄송합니다. 부탁드리… 콜록콜록, 후윽… 모험가님. 부탁드립니다.
황녀 에르제와 잭터 이글아이를 구하러 가기
우리로는 모험가님을 막아내지 못할 거라고 알고는 있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죽은 자의 성에서 모험가님과 함께 움직이며 참 든든했는데, 적이 되니 무섭군요.
이쯤 되면 안톤 앞에 서서 함께 싸우던 때가 그리워지는군요.
그러게요.
……
아아아악!!
저 소리는…? 모험가님! 어서 가시죠!
<퀘스트 완료>
잭터 이글아이를 구하라
대장군은 날 피신시키고 스스로 미끼가 되었네. 그분을 이곳에서 잃을 수 없네. 도와주지 않겠나?
황녀님을 안전한 곳까지 모시는 게 먼저입니다.
나에겐 이들이 있네. 하지만 대장군에게는 아무도 없어. 어서 가주게.
그럼 루카스 소위. 자네가 황녀님의 호위를 도와. 모험가님. 저와 함께 가주지 않으시겠어요? 황녀님 말씀대로 사령관님을 잃을 수는 없어요.
테미와 함께 잭터 이글아이를 구출하러 가기
<퀘스트 완료>
늙은이 하나 잡는데 분위기까지 고민할 필요 있나?
하긴 그렇군요. 그래도 방해를 받으니 기분이 좋지 않아서요.
왜…?
그건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인데. 왜 끼어드냐? 약자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영웅님이라면 그럴 수 있겠는데… 글쎄. 넌 그냥 싸우는 게 좋은 거잖아?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으니까.
헛소리 하지 마라! 반란자!
이봐. 저 녀석은 모험가라고. 호전적이라는 단어를 모욕으로 받아들일 녀석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던 건데.
……
아서라. 거기서 네가 날 맞추는 것보다 내가 이글아이를 날려버리는 게 더 빠를걸. 꼴을 보니 금방 죽을 것 같은데, 존경하는 상관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고 싶진 않겠지?
모험가도, 거기 있는 기세 좋은 아가씨도 마찬가지야. 허튼 짓하면 기껏 구하러 온 이글아이가 독수리 밥이 될걸.
이익…
좋아. 나도 슬슬 팔이 아파서 하는 말인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까? 어차피 이곳에 너희가 계속 있어봤자 황녀가 잡힐 확률만 올라가. 이 주변엔 너희 입장에서 적뿐이거든.
자아. 어쩔래? 너희가 이글아이를 버리고 싸운다면야 나도 맞서싸울 거고, 황녀는 그동안 잡힐지도 몰라. 취할 행동은 하나뿐이지 않나?
그래. 뭐하고 있는 건가? 빨리 가서 황녀님을 구하라니까.
미련이 남은 거 같은데. 이렇게 된 거 다른 녀석들이 오기 전에 이야기나 하나 할까요? 당신에게 특히 재밌는 이야기일 거 같은데, 시간은 되십니까?
무슨 이야기? 네놈이 내 딸을 죽였다는 이야기 말인가?
…!!
노블스카이
10년도 전에 카르텔과 싸우던 어린애들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밝혀지면 자네 평판에 그다지 좋지 않을 텐데? 여기 목격자들도 있는데 왜 제 입으로 그 이야기를 하자고 하는 건가?
그렇긴 한데요. 딱히 숨긴 것도 아닌데 정말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라… 재미없잖습니까. 유일하게 알 것 같은 사람이 당신인데, 이번이 마지막 대화가 될지도 모르니 물어보는 거죠.
나원… 미친놈의 생각은 정말 모르겠군. 범행이 들키기를 바라는 연쇄살인마의 마음이 이런 것인가.
…그건 대체… 언제부터…
미안하네. 자네가 열심히 찾던 것도 알고 있었네. 순탄치 않았지? 내가 방해를 했거든. 진상을 알게 된 건 안톤이 나타나기 얼마 전이었지. 그때는 이미 해안수비대가 필요할 때였어. 그래서 숨겼다네. 공연히 자네 고생만 시켰군.
그렇군요. 대의를 위해 자기 자식의 원수마저 모르는 척 이용을 했다는 거군요. 대단합니다.
짜증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지. 그런데 하이람. 그때 이야기를 꺼내는 게 꼭 여흥을 위해서는 아니겠지? 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건가, 아니면…
흥. 유르겐을 기다리고 있나. 어차피 여기서 날 죽일 생각은 없었군.
제가 당신을 죽이면 좀 위험해지거든요. 죽일 사람은 다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놓고서 책임은 피하겠다는 건가. 안톤의 악덕 중의 하나가 자네를 죽이지 못했다는 거야.
위험한 데로만 보내더니 이이제이라도 노렸던 겁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슬픈데요, 대장군님.
하이람! 하이람 대장! 그만 두게! 지금 그를 죽이면 안 되네!
유르겐 공이 몸소 와주셨군요. 잔소리가 걱정되지만 아무튼 이쪽이 우세해지겠는데요?
…사령관님.
뭐하나? 빨리 안 가고. 황녀님을 모셔라. 목적지는 그분이 알고 계신다. 반드시 무사히 구출해.
…알겠습니다! 모험가님. 대령님. 가시죠.
잠깐…! 으…
이제 다시 만나긴 힘들겠지. 운. 난 딸 하나 아들 하나 두는 게 꿈이었는데 네 덕분에 이루었다. 뭐, 확실히 딸이 더 좋긴 하더라. 하하하.
잘 가거라, 아들아. 황녀님을 부탁한다.
노블스카이로 가서 황녀 에르제와 이야기하기
<퀘스트 완료>
무사히 도착했군. 수고가 많았네. 그대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네.
별 말씀을.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편하면 사람이겠는가. 짐이 모자라 또 난리가 일어나고, 대장군 하나 보호하지 못했으니…
…그나저나 라이오닐 대령은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괜찮을 리가… 어휴. 그래도 나엔 박사님이 계셔서 다행이네요. 마중까지 와주시고.
어? 어, 응… 메릴이 귀띔해준 것도 있, 있었으니까… 근데 아저씨는… 정말 못 오는 거야?
…나엔 박사. 고맙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자네가 아니었다면 중간에 잡혔을걸세.
모험가. 그대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또 이런 꼴 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되어 정말… 말이 나오지 않는군.
저들이 내게 불만을 갖고 있다고 해도… 결국 이해해 줄 거라고… 혹은 아직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들은 나보다 훨씬 노련하고, 똑똑하군. 내가 우스워 보였겠지.
…내가 황녀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이 모든 건…
……아니지. 아니야. 내 탓을 하며 주저앉을 수는 없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일 테니. 대장군의 믿음에 어긋날 수는 없으니.
모험가. 실은 나는 어떤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네. 출신과 신분을 묻지 않고 오로지 능력에 따라 관료를 임명하는 제도일세. 귀족만이 대우받지 않고 무법지대 출신이라 하여 무시받지 않는 것. 그것을 원했네.
반발 때문에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지만… 계속 해나갈 생각이었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제도이거늘, 귀족들에겐 몹시 위협적인… 그런 시도를 하려고 했었네.
…사실 내 대에서 이루어질지 모르겠어. 힘들겠지. 허나 사람이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잣대에 의해 분류되어 차별받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네.
나는 말할 수 있네. 이 천계의 모든 이는 그 자체로 귀중하다고. 그들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내가 할일이라고.
반대는 이미 각오한 바. 오늘 잃은 것은 너무 크고, 뼈아프지만 그럼에도 나아가겠네. 그대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 생각했으니, 나도 그대를 닮겠네.
그럼 언젠가는 반드시 꽃피울 수 있겠지. 만인이 고귀한 천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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