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의 무게
글: REY
"읏! 차... 꽤 무겁군. 그럴 수 있지. 하하하!"
오스카가 양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웬만한 사람은 들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크기의 물건은 천으로 곱게 감싸인 채, 묵직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베닐은 생각에 잠긴 채, 이터널 플레임 본부에 지원 물품을 보급하고 있는 컴퍼니 도흐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봐, 그 무기들은 저쪽으로 옮겨야지. 말하지 않았나, 여기 연구실에는 부품들만 가지고 오라고. 뭐 못 들었을 수도 있지. 하하하! 어서어서 움직여."
자신의 실수에 당황한 오스카의 제자가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떨어트렸다.
요란한 쇳소리가 실험실 전체에 울려 퍼졌고, 넉살을 피우며 가볍게 미소 짓던 오스카의 표정에 무게가 실렸다.
"정신 안 차리나? 소란스럽게 굴었다가 용족들이 쳐들어올걸세."
제자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너스레를 떨며 유쾌하던 오스카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상인이라면 자기 값어치는 제대로 해내야지. 자칫 잘못했다가 모든 것이 끝나버릴 수도 있으니 명심하게."
오스카의 진지한 눈빛은 제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컴퍼니 도흐 상인들은 자신들의 무기에 값을 매기고, 그 값어치를 증명해낸다.
값어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무기상은 신뢰를 잃는다.
컴퍼니 도흐에게 이 혁명은 전 재산을 걸어도 될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여기는 내가 정리할 테니, 이만 가봐. 다시 안 그러면 되니 주눅 들 거 없네."
오스카는 멀어져 가는 제자를 바라보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다시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주베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 아무리 이곳을 지나다니는 용족 수가 줄었다고 해도 방심할 수 없지. 안 그런가 주베닐?"
"철의 무덤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건 아니니까."
철의 무덤, 용족과의 전투가 가장 많이 일어난 이곳에서 이터널 플레임은 대바칼병기를 연구하며 남겨진 불씨를 다시 키우고 있었다.
"줄어든 용족 수만큼, 죽은 병사들의 수는... 차마 셀 수도 없겠지."
주베닐은 온몸에 가시가 박혀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나? 자네답지 않군. 하하하! 자네라면..."
"영감."
그는 당장이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듯,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스카는 주베닐의 어깨 위에 놓여있는 책임에 대해, 그를 짓누르고 있는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이 혁명이 수많은 생명을 밟고 이루어져야 할 만큼 가치가 있다 생각합니까?"
"어찌 그리 나약한 소리를 하는 건가. 자네를 믿고 따르는 대원들 생각은 못 하나?"
"밤낮으로 생각해. 단 한 순간도 생각 안 한 적이 없다고. 그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어갔는지를 생각하면..."
주베닐이 해방을 위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단 말인가...
오스카는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철의 무덤뿐만 아니라 천계 전체가 무덤이야. 매일같이 무덤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라고!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한 혁명 따위..."
"하하하! 그래. 자네 말대로 천계의 땅은 죽은 천계인들로 퇴적되어 있겠지. 특히 이곳은 이터널 플레임이 만든 기계들의 무덤이기도 하니까."
"희망을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고철 덩어리가 되어버렸지. 앞으로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고."
"자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들의 실패뿐인가 보군."
"애써 포장하지 마시죠. 영감, 그게 현실이니까."
"그들이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로 덤볐는지는 보이지 않나?"
"허울 좋은 말에 개죽음당한 거지, 뭐."
오스카는 주베닐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듯 허리를 숙여 아까 그가 가져왔던 물건을 어루만졌다.
오스카가 감싸고 있던 천을 조심스럽게 걷어내자, 거대한 나무판자가 위용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 건화문?"
"하하하! 바칼과 용족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걸려있던 궁궐 대문의 현판이지."
"그걸 어떻게 영감이 가지고 있지?"
"아주 오래전에 우리 컴퍼니 도흐에 맡겨진 물건일세. 하하하! 어떤가?"
천계 연합군에 소속되기 전, 컴퍼니 도흐는 대를 이어 경영하는 무기상이었다.
바칼의 압제가 계속되어 경제가 무너지자 컴퍼니 도흐는 물건을 받고 무기를 내어주기도 했다.
"스승님 말씀에 따르면 용들에게 궁을 점령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귀족 가문에서 간신히 현판을 챙겨두었다더군."
건화문의 현판은 컴퍼니 도흐에서 긴 세월 동안 보관해오던 물건이었다.
역사적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 물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특별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 귀족 자제 중 하나가 바칼에게 대항하기 위해 가문 대대로 오랫동안 보관해오던 현판을 우리 무기상에 맡기고 무기를 받아 갔다는 거야."
"돈 대신 현판으로 계산한 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거 아니었겠나? 현판을 맡기면서 말했다더군. 지금은 비록 가치를 잃어버린 황궁의 현판이지만 언젠가 황금보다도 더 값진 가치가 생기는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자신이 그렇게 만들 거라고."
"하지만 결국, 그자도 실패했군."
"우리 컴퍼니 도흐는 그자의 꿈을 믿었어. 그리고 상인이기만 했던 우리가 전투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지. 적극적으로 바칼에게 대항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컴퍼니 도흐는 천계의 모든 실패를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이 혁명에 참여하기로 했네. 그자는 이름도 없이 잊혀졌지만, 천계인의 꿈으로 남았지. 자네는 무엇을 위해 이 혁명에 참여했지?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살아남았다고 원망만 할 건가?"
오스카는 주베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살짝 움켜쥐었다.
"자네 또한 그들의 꿈이었을지 모르지."
"꿈이라..."
살아남아야 한다. 대바칼병기의 완성을 위해 당신만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생사의 위기에서 주베닐을 도망 보내며 외치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의 눈 속에 담겨있던 것은 절망이었나 희망이었나.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결정하면 말해주게. 나는 밖을 정리하지."
"영감. 왜 여기까지 현판을 가져온 겁니까."
오스카는 주베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주베닐은 오스카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
"주베닐, 자네 또한 나의 꿈이야. 기억해 주게. 미안하네. 안 그래도 무거운 자네의 어깨에 또 큰 짐을 얹는 기분이군.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넉살 좋게 웃으며 오스카는 자리를 떠났다.
주베닐은 오스카가 남기고 떠난 건화문 현판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늘이 되다'라... 현판이 다시 걸리면, 그날이 이름을 되찾는 날이겠군."
천천히 일어나,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주베닐은 짐을 들어 천천히 나르기 시작했다.
"이거 꽤 무겁군. 밖에 누구 없나? 같이 좀 들지."
멀리서 주베닐을 향해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함께 짐을 짊어지고 갈 사람들이 있었다.
#2. 경계에 선 사람들
글: 99
"북쪽의 공기는 숨쉬기 힘들 정도로 차군요."
로자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북쪽의 찬 공기를 만나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폐부를 찌르는 한기에 숨 쉬는 것조차 힘겨운 느낌이었다.
"용의 도시에 머물다 온 이들에겐 그럴 수도 있겠죠. 조금 있으면 금방 적응될 겁니다. 어쨌든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말이에요."
"사라 님은 왜 이곳에 머물고 계십니까? 다른 대가문들은 진작에 바칼의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들었는데요."
유르겐 가문.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 중앙의 소식에 어둡다고는 하나,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사라 웨인은 이런 한미한 가문 출신이 굳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바칼 님의 명이라고 하나,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누군가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또 이곳에 남아 불충한 자들의 동향을 보고할 이가 필요하다해서 제가 그 역할을 맡았죠."
"...그렇군요."
막힘없는 답변에도 무언가 우습다는 표정을 짓는 로자의 모습에 사라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대청을 향했다. 대청의 기둥 뒤에는 무기를 든 부하들이 사라의 명령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로자는 들고 있던 쥘 부채로 입을 가리며 미소 지었다. 좀처럼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였다.
"불의 숨이 멎을 때가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뜻밖의 말에 사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로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녀의 두 눈이 불타듯 번쩍이고 있었다.
사라는 무의식적으로 부하들에게 보내려던 수신호를 간신히 멈춰 세웠다.
용족들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이 자를 보냈다면, 아무리 조용히 처리해도 들킬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목숨이 달아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요. 당신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건가요?"
"아니오. 당신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못 박힌 듯 자리에 멈춰선 사라를 뒤로하고 로자는 유유자적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라는 바람 소리에 묻힐 정도로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더니, 다시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당을 쓸던 부하 중 하나가 주변을 살피기 위해 조용히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당신이 혁명군들 사이에서 '가장 비정한 배신자'라고 불린다는 것도. 당신의 밀고 때문에 발각당해 전멸한 조직의 수가 여섯을 넘어간다는 것도."
쥘부채가 로자의 손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작년에 대가문의 가주들이 궁으로 불려갔을 때, 용족들의 유흥으로 전시된 혁명군들의 시체를 누구보다 앞장 서서 밟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도..."
순간 사라의 눈가에 미세한 떨림이 생겨났고, 그녀는 다른 곳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시야를 가린 어둠 속에서 끔찍했던 그날의 풍경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어디선가 매캐한 탄내가 날아와 폐를 가득 채우는 듯했고,
내딛는 발은 부패한 시체를 밟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치미는 욕지기 속에서 사라는 순간적으로 어지러움을 느꼈으나,
잠시 후 눈을 뜬 그녀의 표정에는 한 꺼풀 가면이 씌워진 듯 아무런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혁명군의 구호를 제창한 이유가 뭔가요?"
"그날 미소를 띠며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에서 커다란 슬픔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슬픔?"
사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감춰진 소매 아래에 꽉 쥔 주먹 사이로 옅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더군요."
"......"
자신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내쉬며, 사라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깊게 파고든 흉터들이 아직도 그날의 기억처럼 선명히 그곳에 남아있었다.
"그 후로 당신에 대한 의문이 생겨 따로 조사를 해봤습니다. 세간에 알려진 소문과는 많은 것이 다르더군요."
앞서 걷고 있던 로자가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였다.
"당신이 용족에 밀고한 조직들 또한 이미 그 위치가 드러났거나, 머지않아 꼬리가 잡힐 게 뻔한 무모한 행동을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혁명군에 몰래 전해준 정보 덕분에 전멸을 피한 조직들이 더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요."
둘의 대화가 들리는 거리였는지, 대청의 기둥 뒤에서 성급한 이들의 인기척이 나기 시작했다. 사라는 은밀한 눈짓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후우... 항상 몸가짐을 조심했지만, 역시 미흡한 부분이 있었군요. 하지만 당신처럼 머리 좋은 이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쉽게 눈치채지 못했을 거예요."
찬 바람 사이로 담장 밖에서 희미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주변에 용족의 감시가 없다는 신호였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용족들에게 내 행적을 일러바치고 대가문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는 건가요?"
"후후, 대가문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사라의 손은 어느새 소매 속에서 리볼버의 방아쇠에 걸려있었다. 로자의 대답 여부에 따라, 리볼버의 총구가 그녀를 향해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수 있도록.
"허나, 그건 먼 훗날의 일이 될 것입니다. 용족의 지배가 이어진다면, 제 살아생전에는 보지 못할 광경일 수도 있지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사라의 손을 마주 잡았다. 깊이 패인 손바닥의 흉터에 따스한 온기가 와닿았다.
"저도 당신처럼, 천계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3. 어둠을 먹고 피는 꽃
글: 99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때아닌 소나기가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어깨를 두들기던 빗줄기가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리네는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의 주인에게 대답했다.
"플로, 당신이군요."
플로는 이리네가 몇 시간째 자리를 지키던 무덤을 바라보았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덤에는 급하게 만든 흔적이 이곳저곳 남아있었다.
"이번 작전에서 희생된 단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리네의 목소리엔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묘한 힘이 담겨있었다.
플로는 눈을 감고, 죽은 이의 가족들이 노심초사 그들의 생환을 기도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존재 자체가 어둠 속에 숨어있어야 하는 이들이니... 그들의 죽음도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습니다."
뱉고 싶지 않은 말들이 성대를 긁으며 나오는지, 짧은 말을 하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플로는 잠시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맴도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 꽃을 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무릎을 꿇은 플로가 무덤 앞에 놓인 검은 장미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블랙 로즈단이 움직인 곳에 배반자들의 시체와 함께 항상 남겨지는 꽃이었다.
용족의 편에 붙은 천계인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 검은 장미가 자신을 찾아올지 몰라 꿈에서도 진저리를 쳤다.
"항상 피 냄새가 나고, 또 다른 피를 부른다고 손가락질하던가요?"
"비록 검고, 피 웅덩이 속에서 어둠을 먹고 피는 꽃이지만 한 줄기 희망을 보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
잠깐 사이 평소대로 돌아온 플로의 목소리에 이리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또한 슬픔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다만, 더 많은 슬픔을 만들지 않기 위해 눈앞의 광경을 견뎌내고 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당신과 단원들의 이름이 밝은 곳으로 드러나는 날이 올 거예요."
"네, 그리 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이리네의 목소리에 소용돌이치던 슬픔과 회한의 감정들은 어느덧 잠잠해져 있었다.
플로는 그런 이리네를 마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둠을 먹고 피는 꽃'이라..."
이리네는 건네받은 검은 장미를 무덤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무덤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우산을 접은 플로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맑게 갠 하늘이 동틀 녘의 어둠을 서서히 밀어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뿌리
해가 저무는 오후, 임시 주둔지는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에는 출진을 앞둔 이들이 조금 예민해진 탓이라 생각했지만,
병사들과 떨어져 주둔지의 분위기 살피던 모험가 일행은
조금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뭔가 공기가 심상치 않은데예? 저녁밥이 쪼매 맛없긴 했어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컴퍼니 도흐의 병사들을 제외하곤 다들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군요.
큰 전투를 앞두고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필요하지만... 이건 정도가 좀 심한데요? 아무래도 마지막이 될 전투를 앞두고 다들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요.
사람들은 때로 육신의 부상보다 정신적인 피로에 더 휘둘리기 마련입니다. 이대로라면 사기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 같군요.
에? 그럼 큰일 아닙니꺼? 이럴 때일수록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다독여야 할 텐데, 다들 보이지 않으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예.
...맞는 말일세.
일행의 뒤쪽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주베닐이 며칠 사이 꽤 수척해진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합군은 오랫동안 각지에서 활약한, 개성이 강한 집단의 모임일세. 이는 분명한 강점이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 통솔할 수 있는 수뇌부의 숫자가 너무 적다는 게 단점이기도 하지.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이리네도 그렇고... 너무 바쁘다 보니 알면서도 병사들의 사기를 돋울 여유까진 없는 거야.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곧 작전 회의 시간 아닌가요?
다들 모여있네. 다만, 참모인 로자가 잠시 머리를 식힌다더니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군. 저녁도 거르고 말야.
그 오스카인가 하는 무기상도 안보이는데예?
오스카 영감이야 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회의를 빼먹으니 그렇다 치지만 그보단 로자의 상태가 걱정일세. 고민이 많은지 아침 회의 내내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더군.
아무래도 로자를 찾으러 나가봐야겠네. 마침 다들 손이 비는 것 같으니, 좀 도와주지 않겠나?
임시 주둔지 근처에서 로자 유르겐의 행방을 찾기
다들 로자 님을 찾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이 근방은 대충 다 돌아봤다. 와, 이거 돌아 삐겠네.
곧 해가 완전히 질 텐데 큰일이네요.
이 주변은 매일 정찰하고 있으니, 용족을 만나는 일은 없을 테지만... 슬슬 걱정되는데.
일단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주변을 찾아봐 주게.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곳이 있을 수 있으니.
...우리도 움직이지.
모험가? 어디 짚이는 곳이라도 있나?
(고민 중인 로자가 있을 만한 곳이라면...)
그래, 우리 참모님께선 생각이 좀 정리되셨나?
...시간 내어 이곳까지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 오스카 님.
하하핫! 별말을 다 하는군. 안 그래도 밤공기가 마시고 싶어 산책을 나서는 길이었네.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자네가 먼발치에서나마 적을 보고 싶다고 하여, 운동이나 할 겸 동행했을 뿐이고.
후후...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로자는 오스카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칼의 궁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넘실거리는 투기와 용족들의 울부짖음이 전해지는 듯했다.
머지않아 저곳은 많은 이들의 피로 물들겠지요.
그렇겠지.
지도 위에서 병력을 장기 말처럼 배치하고 움직이는 게 참모의 일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찢어지는 듯 아파져 오지요.
자네의 작전이 아니었더라도, 천계를 위한 일이라면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불태울 이들일세.
...그렇다고 해도 사지인 걸 알면서 그들을 전진시킬 자격이 제게 있을까요?
자격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네. 그 희생이 슬프다고 하여 눈 돌리지 않고,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니까.
......
저 땅에 묻힐 것은 단순히 전사한 병사들의 시체가 아니네. 후대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다 눈감은 이들의 정신이지.
그리고 그것이 천계라는 거대한 나무를 지탱할 뿌리가 될 걸세.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깨우쳐주셔서 감사해요.
응? 내가? 무엇을?
으랏챠!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 슬슬 주둔지로 돌아가야겠네.
이런, 우리가 걱정돼서 여기까지 마중 나온 모양이군. 이거 얼른 돌아가지 않으면, 플로에게 또 한소리 듣겠는 걸? 껄껄껄!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요, 영감. 오늘은 은근슬쩍 회의 중에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허허! 내가 언제 도망쳤다고 그러나!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병사들의 고민을 들어주느라 좀 늦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후후... 돌아가시죠. 다들 기다리고 있겠군요.
<퀘스트 완료>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럼... 조금 지체되었지만, 예정대로 작전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숨죽인 슬픔
그나저나 저짝에 뭔 일이라도 났는가, 대빵들이 죄다 모여가 시끌벅쩍한데예.
저건... 무전기네요. 어딘가와 교신하려는 모양이에요.
일행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긴장된 표정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 중 초조하게 무전기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리네의 맑은 눈동자가 모험가와 마주쳤다.
모험가님! 그리고 다른 분들도... 잠시 이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작전이 시작되고 함께 움직일 분들이라면 사라 씨의 이야기를 같이 듣는 편이 낫겠지요.
사라 님이라면... 바칼의 궁 내부에서 정보를 전해준다는 분이군요.
적진 한가운데서 정체를 숨기고 있다고예? 와... 완전 범, 아니 용의 아가리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셈 아입니까.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정보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를 위해 사라 님이 견뎌내야 하는 일들이 많았지요.
치직! 치치직...
쉿...! 다들 조용히 해보게! 무전이 온 모양이네.
...아아.
잘 들리시나요?
연합군과 함께 사라 웨인의 교신을 듣기
잘 들리네. 모두 모여 듣고 있지.
하하하! 오랜만에 목소리라도 들으니 반갑군!
...제가 어딨는지 기억한다면 목소리를 좀 낮춰줬으면 좋겠군요, 오스카.
언제 무전을 끊게 될지 모르니, 본론만 얘기하죠. 네 명의 용인은 어떻게 됐나요?
모두 해치웠지. 이게 다 사라 씨가 전해준 정보들과... 여기 있는 모험가 덕분이야.
반가운 소식이군요. 어쩐지 궁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했습니다.
그곳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저에겐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마주치는 용족마다 은연중에 고조된 분위기예요.
하급 용족들은 출전을 준비하느라 다들 어수선하더군요. 덕분에 조용히 연락할 장소를 찾기 더 힘들어졌죠.
이봐, 사라. 어려운 부탁이겠지만 몇몇 적당한 장소의 리스트가 필요하다.
장소라면?
시간이 없으니 필요한 장소들의 조건부터 말해주지. 우선...
주베닐은 한동안 꽤나 상세한, 그러면서도 까다로운 조건들을
공들여 사라 웨인에게 설명했다.
아! '그것들'을 설치할 장소를 확보하려는 거군요. 알겠어요. 최대한 빠르게 알아내서 전달해 드리죠.
다만, 전 대략적인 위치만 알려줄 수 있을 뿐... 전송에 필요한 좌표는 결국 누군가 그곳에 접근해 알아내야 할 거예요.
...그래야겠지. 고맙다.
사라! 바칼과 세 마리 용들의 상태는 어떤가?
이런, 가장 중요한 얘길 빼먹을 뻔했군요. 아직까지 특이사항은 없어요.
...의외군요. 가장 큰 변수들이 조용하다니.
하지만 조만간 본격적인 움직임이 있을 것 같으니, 계속해서 예의 주시할게요.
그리고 이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도... 계속해야겠죠.
고마워요, 사라. 그리고...
궁 안에 있는 당신의 가족들은 무사한가요?
...네, 가족들은 아직까진 아무 문제 없어요.
다행이군. 지난번 배신자의 저택 사건 이후로 당신이 추궁받을까 봐...
이봐! 그 고철 더미들 사이에서 뭐하고 있는 거지?
...아! 에클레어 님.
...전리품들 중에서 혹시 쓸만한 부품이 남아 있다면, 포로들을 시켜 선별할까하여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전리품?
흥! 내가 전에도 말했지? 나약한 너희라면 모를까 우리 용족들에겐 그깟 기계들은...
흐응...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네 충성심을 정말로 증명할 기회를 주지.
......?
뭘 멍하니 보고만 있어? 얼른 따라와!
......
치직! 치치직...
괘, 괜찮은 기라예?
마지막엔 뭔가 다급하게 얘기가 끝나는 느낌이었어요.
용족에게 발견된 모양이군.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그녀라면 임기응변으로 잘 넘겼을 거라고 생각하네.
주베닐의 말을 마지막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각자 눈을 감고 새로 들은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거나
사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쉽지 않겠군요. 적의 심장부에서 온종일 날 선 기분으로 있어야 한다는 건...
아마 하루하루가 전투 같겠죠. 직접 피를 흘리지 않더라도,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고 있어요.
<퀘스트 완료>
자! 이제 우리도 움직이죠. 그녀가 애써 전해준 정보들이 무의미하게 버려지지 않게 하려면 준비할 일이 많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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