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에 잠식된 성전

[그들, 그날.] 일곱의 생(生)
지부장들을 둘러보던 에스라는 어느새 자신의 목을 감싼 채 내려다보고 있는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차가운 그 감촉은 안도감마저 주었다. 실바늘 같은 두 눈동자가 지금까지의 그의 행적을 치하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림시커가 견고해지기까지, 그것의 목소리를 따라 이곳에 오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것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바로 엊그제처럼 생생히 느껴졌으니까...
과거를 되짚는 에스라의 가면 속 눈이 아득해져 갔다.


“고통은 순간이고 진리는 영원을 찾을지니, 너희의 희생으로 하여금 모든 이치가 바로 설지어다.”

남자는 움직일 수 없었다.
뱀에게 온몸이 휘감겨서가 아니다, 차가운 뱀의 눈 너머로 전해오는 아스라한 절대자의 목소리에 전율이 일어서였다.
그는 공국의 땅 귀퉁이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밭을 일구며 지내는 소작농이었다. 가뭄과 기근으로 홀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그는 공국에게 애걸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멸시와 무시였다.
그에게는 전부이며 일생인 것들을 그렇게 손쉽게 무너져 버렸다.
유일한 혈육이던 어머니의 부재와 함께 모든 의미가 사라졌다. 분노와 원망도 해봤고 신에게 매달려도 보았다. 하지만 그 끝에 찾아온 것은 지독한 현실과 자괴감. 수년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죽지 못해 살았던 그를 가득 채운 것은 텅 빈 허무함이었다.
아무 의미도 감정도 없이 살아가던 그때, 목소리가 찾아왔다. 깊은 어둠 속 까닥거리는 위험한 손짓처럼, 조심스럽게 잠식한 그 목소리는 이제 바로 코앞에 뱀의 눈빛을 번뜩이며 속삭이고 있었다.
뱀은 말했다. 이 모든 고통이 숙명을 지기 위해서라고. 그 숙명으로 하여금 많은 것들이 완벽해지고 진리를 찾을 거라고.
이 모든 고통은 진리를 찾기 위해… 이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워지기 위한 것…
그러자 모든 것들이 편안해졌다. 차갑게 느껴지던 그 목소리는 구원의 목소리가 되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시작은 우연일지라도 끝은 필연적일 것이니, 내 일곱의 열매를 거둘 때 떨어질 씨앗은 반드시 이유가 있으리라.”

커다란 아가리를 벌려 금방이라도 그를 삼킬 것 같은 그것이 빤히 그를 내려다보며 웅혼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일곱의 열매로 하여금 씨앗이 돋아나매 부정한 것은 사라질 것이며, 모든 것은 본래의 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렇다. 지금은 자신의 머릿속에 흘러가듯 보여지는 이 불온한 것들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진 것이다. 그녀가 말한 진리가 영원을 찾으면 모든 것이 완벽해지리라…
어딘지 모를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에스라의 그늘진 두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며칠 뒤, 가난한 농부가 살던 집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인 채 농부만이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았다.


“똑바로 붙잡아! 녀석이라도 데려가야 상부에 면목이 서니까!”
“크윽…”

무장한 공국의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짓눌린 사내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바닥에 얼굴이 짓이겨지고 있는 사내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건물 사이에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별안간 필사적으로 얼굴을 움직이며 외쳤다.

“안돼!”

포승줄에 묶이지 않으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가 했지만 남자는 곧 얌전해졌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인 탓에 처참하게 바닥에 갈린 남자의 뺨에 핏물이 맺혀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안심이라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군인들의 손에 붙들려 끌려갔다.
그 모습을 건물에 가려진 그늘 속에서 바라보던 한 인영이 참지 못하고 한 걸음 움직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냉랭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베릭의 말 못 들었어? 지금 우리가 나가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돼.”

감정이 비치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표정마저 숨겨지지는 않았다. 이를 악문 채 벽을 노려보고 있는 패리스의 표정은 살벌하면서도 툭 치면 무너질 것처럼 안쓰러웠다.
그런 패리스의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숙연해진 루이제는 발걸음을 돌린 채 주먹을 쥐었다.

“이해할 수 없어…”

주먹 쥔 그녀의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억울함과 분노에 주먹 쥔 손이 파들파들 떨리는 듯했다.

“더 큰 죄를 짓는 인간들은 멀쩡하게 호의호식하며 지내고 있는데, 우리가 왜…”

패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었다.

“그들을 이해하려고 들지 마.”
“여왕도 귀족도 하지 못 하는 일을 우리가 대신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째서 이렇게 우릴 못잡아 안달인 거지? 이해가 안 가!”
“그자들을 이해하게 되면 뭐가 달라질 거 같아? 어쩌면 그들을 증오할 수 있는 지금이 나은 것일지도 몰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의문스러운 루이제의 말에 패리스는 등을 돌린 채 손을 휘휘 저었다.

“동료들이나 부르자. 베릭의 작별식을 해 줘야지.”
“주인공도 없는 작별식 따위…”

웅얼거리는 루이제의 말에 패리스가 싱긋 웃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동료를 떠나보내는 일은 뒷골목 생활을 하며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여전히 고통스럽고 가슴 쓰린 일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남은 이들끼리 의연하게 대처해야 이 공동체가 유지된다는 것을 패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패리스는 축 처진 루이제 앞에서 일부러 초연한 척하며 다음 의뢰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나불거렸다.
며칠째 계속되는 두통에 루이제는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두통이라기 보다는 머릿속에서 어떤 영상이 수없이 반복되고 재생되어서 두뇌가 과열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뱀의 눈빛과 자신을 둘러싼 여섯 명의 인영들… 그리고 무수히 지나치는 사건과 장면들… 모든 게 뒤엉켜서 머릿속 장면들과 현실마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수많은 장면과 수없이 메아리치는 비명소리와 목소리. 그 중에서 신기하게 뇌리에 각인되는 말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그녀의 의지를 전달받은 일곱의 영혼이 모이게 되면, 어그러진 현실이 바로잡히고 꿈꾸던 미래가 자리 잡을 것이란 거였다.
어그러진 현실과 꿈꾸던 미래라는 부분이 뇌리에서 맴돌았지만, 정체 모를 의식에 대한 거부감 또한 남아 있었다.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이 일련의 말들과 그 말들에 흔들리면서도 믿지 못하는 자신의 자아 때문에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최근 익명으로 된 의뢰자의 지시로 무기 운송 의뢰를 수행하던 동료들이 대거 공국에 체포되는 일로 인해 두통이 더해진 탓도 있었다. 그 일로 인해 패리스가 큰 부상을 입었고, 그녀의 순발력 덕에 체포는 면했지만 뒷골목은 많이 침체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뒷골목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패리스가 만신창이가 된 것이 루이제에게도 뒷골목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못 돌아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 생각까지 미치자 루이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 어쩌면, 자신이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섯 명의 그들과 하나의 의지를 잇게 된다면, 이런 불공평한 세상이 아닌 목소리가 말한 본래의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진리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깨질 것 같던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맑아지자 정신은 더욱더 또렷해지고 목표는 분명해졌다.
루이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곰팡이가 슨 낡은 문을 반쯤 밀어 열었다.
일렁거리는 희미한 촛불에 의지한 채 어둠 속 낡은 침대에 기절하듯 잠들어 있는 패리스의 얼굴이 비쳤다. 그런 그녀의 옆에 간호를 하다 잠든 듯한 동료의 등도 보였다.
한참을 빤히 그들을 바라보던 루이제는 서서히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나중에 패리스를 만나면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을 생각에 피식 조소를 흘린 루이제가 씁쓸한 얼굴을 한 채 낡은 판잣집을 빠져나왔다.


“곧 검은 대지로 간다 들었다.”

에스라를 대신해서 기록을 정리하던 만다린이 장승마냥 우두커니 앉아있는 로젠버그에게 건넨 말이었다.

“…”

대답도 없이 묵묵히 시선을 마주하는 그의 모습에 껄껄 웃음을 터뜨린 만다린이 말을 이었다.

“성지가 있는 그곳에 미리 기반을 닦아 두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 그곳이 그분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발판이 될 테니까…”

여전히 묵묵부답인 로젠버그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은 듯 다음 말을 이었다.

“용병 출신이라 들었는데…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느냐?”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묵묵히 마주하는 시선에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뒷말을 붙였다.

“물론 그분의 의지를 보았다면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개인적인 소명이나 목표가 있는가 물은 거다.”

그녀가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절대자의 의지를 보아서가 아닌, 자신이 꿈꾸던 소명과 절대자의 의지가 같았기 때문에…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신조차 보살피지 못하는 가엾은 생명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지낼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것. 절대자의 의지에서 그녀는 그 미래를 보았고 순응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버려진 자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로젠버그에게 흥미를 품고 있었다. 별다른 의사 표현도 의견도 없지만, 침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정신적인 무게감과 단단한 의지가 그에게서는 느껴졌다.
들리지 않을 것 같던 그의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낮게 울렸다.

“흉측한 몰골을 한 나를 누구도 원한 적도, 필요로 한 적도 없었습니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임에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묵직한 음성이었다.

“그런 이 몸을 필요로 하는 곳이 생겼으니. 그것이 곧 제 소명이고 앞으로의 목표가 되겠죠.”

망설임 없는 목소리에 만다린이 잠시 멍해져 있던 찰나, 문이 열리며 파란 가면을 쓴 남자가 들어섰다. 에스라의 임무를 받고 나섰던 청면수라 로즈베리론이었다.
그리고 그 뒤, 미라즈와 그녀가 돌보는 소륜이라는 소녀도 함께 들어섰다. 모두가 그분의 의지를 이은 자들이었다. 하나둘 모이는 계시자를 보며 만다린은 때가 가까워졌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일으켜 자리를 비켜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에스라가 문 속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는 처음 보는 여인이 함께였다. 독이 발린 자신의 손톱을 손질하고 있던 그녀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자연스레 에스라의 옆에 마주 섰다.

“이제야 일곱의 의지가 다 모인 것 같군.”

에스라의 웅혼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닿았다.


에스라는 과거의 그때와 같이 한자리에 모인 지부장들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달라진 것은 어렸던 소녀가 여인이 되었으며, 받아들인 의지 속에서 서로 다른 미래를 그리게 되었다는 것...
그로 인해 세 자리가 공석이 되었지만, 그 분의 계획을 진행함에 있어 필요한 말은 다 갖춰진 채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에스라를 바라보는 지부장들의 시선에는 결연한 의지와 각오가 담겨 있었다.
이제는 때가 가까워졌다.
목을 감은 그것의 형체가 희미해질수록 에스라는 순교의 순간이 다가옴을 느꼈다.


[그들, 그날.] 지켜야 하는 비밀
"뿌리를 오래 달여 아침 저녁으로 먹이세요. 통증을 가라앉힐 겁니다."
"감사합니다, 미라즈 님. 정말 감사합니다."

머리를 숙이고 돌아선 이가 숲의 녹음 사이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미라즈는 문가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엘븐 가드에 마련된 키 작은 통나무집은 미라즈의 거처이자 주민들의 약방이었다.

"계속 거기 있을 거니?"

빈 공간에서 낮게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소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기척을 지운다 해도 피냄새까지는 숨길 수 없다. 이번엔 또 어떤 것을 삼킨 건지, 내뿜는 기운이 제법이다. 미라즈는 소륜에게 눈을 두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 차를 끓였다.
포식. 대상을 잡아먹고 그 힘을 취하는 능력이었다. 선명하게 새겨진 턱의 흉터와 함께 아이가 떠안게 된 생은 고단하고 혹독했다. 아이를 위해 준비해둔 약초를 꺼내며, 미라즈는 ‘숙명’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어떤 약으로도 명(命)을 바꿀 순 없었다.

"당신이야말로 언제까지 여기 처박혀 있을 건데? 차원을 여는 힘이 아깝지도 않나?"
"엘븐 가드를 지키는 것이 나의 일이야."
"내게 그 힘이 있었다면 절대 당신처럼 썩혀두진 않을 거야."

소륜이 걸터 앉은 나무 탁자 위에 미라즈가 조심히 찻잔을 올렸다. 훅 끼쳐오는 익숙한 풀내음에 소륜이 사납게 눈망울을 굴렸다. 입가에는 채 닦이지 않은 피가 묻어있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숨소리가 불규칙했다.
언제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뭔데?"
"약이야. 먹으면 잠시나마 기운을 안정시켜 줄…"
"집어치워!"

소륜이 어릴 적, 홑잎처럼 작은 손으로 진흙을 주물러 만든 찻잔이 허망하게 깨어졌다. 함께했던 추억까지 삼켜버린 걸까. 미라즈는 슬픈 눈으로 깨진 조각을 바라보았다.

"눈… 그 눈.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은 그런 눈으로 날 봤지. 그게 사람을 아주 돌아버리게 한다고."
"륜아. 포식을 써선 안 돼. 더 이상은 몸이 견디지 못할 거야."
"하! 하하하하…"

소륜은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벌어진 입안이 피투성이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눈가를 반짝이는 아이를 따스히 품 안에 안아보고 싶었지만, 아이는 벌떡 일어나 등을 보였다.

"됐어. 이제 여길 찾아오는 일도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딜 간다는 거니?"

미라즈는 서둘러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희미한 기척이었지만 소륜은 분명 멈칫했다. 홀로 남은 자신을 붙들어 준 손. 차가운 세상에 얼지 않도록 보듬어준 손. 이제 그보다 커진 소륜의 손은 미적지근함을 더 견디지 못했다.

"다음에 내가 당신을 찾으면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당신에게 남은 용건은 당신 능력, 그거 하나뿐이거든."

소륜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잠깐이었지만 그것은 진짜 소륜의 목소리였다. 슬프도록 매정한, 가슴 아픈 소리. 미라즈는 얼른 그 뒤를 따라 나갔지만, 소륜은 사라지고 없었다.
미라즈는 엘븐 가드를 떠날 수 없었다.


슬픔을 견디기 힘든 날이면 미라즈는 숲을 걸었다. 가면에 가린 얼굴 위에 후드를 덮고, 나무와 공기를 나눠마시며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란플로리스의 기운마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전이 현상은 흐르는 숲에도 어둠을 옮기고, 놀란 정령들은 괴물들을 상대로 매일을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어짐은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것이나, 미라즈에게도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자연히 발걸음은 그곳을 향했다.
표식이 새겨진 나무들이 기다렸다는 듯 길을 터주었다. 주인을 알아본 마법진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엘븐 가드에 위치한 그림시커의 성지. 황혼의 미라즈가 이곳에 머무는 이유.
돌무더기 앞에 선 미라즈는 가면을 벗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13사도를 모두 지켜낼 수 없으니 단 한 명의 사도를 지켜냄으로써 그가 우리를 멸망으로부터 구해줄 것이니…"

기도가 이어지며 감정이 잦아든다. 감은 눈의 어둠 속에는 그들, 그날이 있다. 몸안으로 스며들었던 어느 사도의 사념. 그것이 전해준 기억과 계획. 일곱이 모여 나누었던 말들과 아젤리아와의 만남, 그리고…
나무 기둥을 뒤덮은 녹빛의 이끼처럼, 지나온 길에는 미련이 나 있다. ‘사도.’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존재들이 평화로운 삶을 뒤바꾸고 앗아갔다. 모두를 구할 수 있다면, 비극을 멈출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다던 결심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라즈는 과연 무엇을 지켜낸 걸까. 가여운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면 달구어진 돌처럼 알알한 심장을 또 견뎌야 했다.

“륜아…”

눈물 대신 한숨을 떨구던 그때, 숲에서 범상치 않은 마력이 터져 올랐다.
이제껏 느껴본 그 어떤 기운보다도 맑고 순수한, 그럼에도 강력한 힘. 대마법진 근처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짐작 가는 데가 있다. 미라즈는 급히 가면을 쓰고 힘의 흔적을 따랐다.

“…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마법진을 정화할 수 있었어요.”

힘의 근원에 가까워지자, 해맑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풀숲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미라즈는 상황을 살펴 보았다. 햇살을 홀로 머금은 듯 반짝이는 은빛의 소녀. 그리고 그곁을 지키고 선 낯선 모험가의 얼굴. 미라즈는 숨을 죽이고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비노슈 님께 말씀드리러 갈게요. 먼저 마을로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미라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돌아선 모험가의 뒷모습을 살폈다. 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특별한 의도도 없어 보였다. 그저 선한 마음으로 길 잃은 소녀를 도운 것이라면 좋겠지만… 뭘까. 이 가슴 벅차면서도 두려운 예감은.
다른 곳에 집중한 사이, 소녀가 풀숲에 가까워졌다. 피할 때를 놓친 미라즈는 급한대로 마법을 써 나무 위에 올랐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걸어오던 소녀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우뚝 멈춰섰다. 미라즈는 숨을 멈추고 발아래 소녀를 내려다봤다.

싱긋. 소녀가 웃었다.

숲의 어딘가로, 소녀는 이내 멀어져 갔다.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린 미라즈는 소녀가 사라진 숲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려나 보군요.”

청명한 바람이 머리칼을 흔든다. 미라즈는 하늘을 살피고 다시 후드를 썼다.

지켜야 할 것이 엘븐 가드에 있었다.


[그들, 그날.] 몰락의 빛



[심연에 잠식된 성전] 눈 속에 담긴 것


더 오큘러스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요. 깊고 어두운 기운에 둘러싸인 증오의 감정...
아직 원념이 더 오큘러스의 안에서 떠돌고 있는 모양이에요.
웨스트 코스트 연합 진영의 중앙 막사에 있는 테이다를 찾아주세요.
그가 모험가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웨스트 코스트 연합 진영 중앙 막사에서 테이다 베오나르와 대화하기



<퀘스트 완료>
왔군. 기다리고 있었네.
갑자기 일어난 심상치 않은 현상 때문에 시로코를 쫓기 위해서 하늘성으로 향하던 연합군을 일시적으로 물렸네.
안에서 용솟음치는 기운이 심상치 않더군. 연합군의 병사를 보내기에는 위험해 내가 직접 프리스트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네.
그리고 끔찍한 것을 보게 되었지.



[심연에 잠식된 성전] 심연 속의 원념


그들... 아니, 그것들이라고 칭하는 게 맞겠군.
그것들은 하늘성으로 오르던 시로코가 아래로 쏟아낸 검보랏빛 기운 속에서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처럼 모습을 드러냈네.
그것도 살아생전의 모습으로 말일세.
...!
그림시커의 망자들이 간악한 사도의 힘을 빌려서, 죽음에서 일어나 망령이 된 것이지.
하지만 단순히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서 배회하는 단순한 망령이 아니었다네.
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더군. 그 때문인지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깊고 어두운 통로에서 마주친 우리를 보고 말까지 걸어 오더군.
우리도 처음에는 혼란했다네. 그래서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았지.
기도를 하며 죽어간 자는 기도를, 싸우다 죽은 자는 싸우기를 반복하면서, 살아서 맞이한 죽음을 또다시 맞이하며 사악한 기운으로 돌아가더군.
그리고 사악한 기운 속에서 다시 태어나 모든 기억을 잃은 듯 같은 행동을 번복하고 있었네.
덕분에 아주 골치가 아픈 상황이 되었네. 끊임없이 되살아나 덤벼오는 망령들에게 가로막혀서 진군할 수 없는 상황이라네.
사명을 이루지 못한 원념이 영혼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겠지. 도대체 어떤 믿음과 열망이 있길래 그들을 이토록 지독하게 옭아메는 것인지...
우선은 더 오큘러스의 깊은 곳으로 향해, 망령들을 되살려내는 근원을 박살 낼 생각이라네.
자, 그럼 출발해보세나.



테이다 베오나르와 함께 심연에 잠식된 성전으로 향하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기운이 이전보다 더 사악해졌군.



<퀘스트 완료>
이정도면 전진기지를 세울 수 있겠군.
덕분에 좋은 장소를 확보했네.
모두 서두르시오!
망령들이 몰려오기 전에 끝내야하니.

이제야 한숨 놓을 수 있겠군. 프리스트들과 병사들이 진입하는 것을 보니 오베리스도 무사히 도착한 모양이네.
모험가님! 테이다!
양반은 못 되는 군.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 덕분에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어요. 연합군의 병사와 교단에서 파견 나온 프리스트들도 지원을 오고 있어요.
그리고 벨 마이어 공국에서 지원한 식량과 데 로스 제국에서 지원한 물자들도 곧 도착할 거고요.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군. 이제 뒤는 걱정 없겠어.



[심연에 잠식된 성전] 투영된 것


이제부터는 저도 합류할게요. 두 사람에게 계속 짐을 지울 수는 없어요.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여기에 남아서 뒤를 지켜주게나.
자네까지 움직이면, 뒤가 비어버릴 거야.
하지만...
사악한 기운이 만들어낸 망령들은 해치워도 그때 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 자리에서 부활하고 있다네.
망령들을 해치우며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점점 망령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뒤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면 다를 거라네.
전진 기지를 지키면서, 연합군 병사들과 프리스트들을 지휘하여 망령들에 맞서 싸워준다면 뒤를 걱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
자네라면 충분히 그 일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알겠어요. 후방 지원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당신과 모험가님이 고립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고맙군.
그럼 우리는 출발하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인다.)



테이다 베오나르와 함께 심연에 잠식된 성전으로 향하기



이걸로 뒤는 걱정 없겠지. 더 깊이 가보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걸려들었군!
역시 제법이야, 다시 한판 붙자고.
죽어서도 싸움을 잊지 못하는군.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신의 곁으로 보내주마!



쉽지 않군.
앞으로 가게.
나는 이 망령을 신의 곁으로 완전히 보내주고 따라가겠네.
(고개를 끄덕인다.)
자! 다시 덤벼라!
이번에야 말로 박살을 내주마!
하하하! 재미있는 아저씨인데?



(죽어서도 증오를 버리지 못했는가...)



<퀘스트 완료>
…!
!!!
!...
자네.
로즈베리론…

기다렸네.
로즈베리론...!
그런 짓을 했는데도 반겨주다니... 자네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내가 목숨이 다한 것은 알고 있다네.
그리고 자네를 만나고 죽기까지 있었던 일도 모두 기억하네.
죽음에서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네.
이 안에서 살아나고 다시 죽어가는 다른 그림시커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말일세.
하지만 죽어서도 마음에 남은 한가지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네.
바로 자네에 대한 것일세.
나는 자네를 속였지만, 자네는 나를 이해해주고 안타까워 해주었지.
그런 자네에게 염치도 없이 이 목숨을 끊어주기를 바랐었네.
그리고 자네는 그렇게 해주었지.
......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죽음에서 일어난 괴로움으로 소멸을 택하려 했지만, 자네를 만날 기회가 주어진 거라 생각하여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네.
이 말은 진심이니 믿어주면 좋겠군.
허허. 이제야 미련없이 먼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군.
잘 지내게.



[심연에 잠식된 성전] 진실의 눈


마음의 짐은 모두 덜었나?
로즈베리론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보고 있는 모험가에게 테이다가 다가왔다.
루이제의 망령과 치른 전투가 격렬했는지 군데군데 상처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테이다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평소와 같은 굳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언제까지 감상에 빠져있을 수는 없지.
심연에 잠식된 성전으로 향하도록 하지. 그곳에서 그림시커와 엮인 질기고 긴 인연의 사슬을 끊어버리세나.



테이다 베오나르와 함께 심연에 잠식된 성전으로 향하기



모험가의 시선이 어두운 통로의 끝을 향해 있었다.
자신을 부르고 있는 목소리라도 들리는 듯이 천천히 발을 떼었다.



...다시 이곳에 오게 되는군.
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군. 하지만 그것이 멈출 이유가 되진 않겠지.
자, 가세나.



기다리고 있었다오. 다시 만나게 되었구려.
이전 생에서는 그대와 좋은 인연을 얻지 못하여 괴로웠소.
하지만 죽어서라도 이리 만나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어 기쁘오.
이상하군. 어째서 지부장들은 신도들의 망령과 다르게 의지를 가지고 있는거지?
이는 사도의 기운을 오랫동안 담고 있었기 때문이라오.
덕분에 망령이 되어 떠돌아도 생전의 기억을 유지하게 되었다오.
소륜 같이 그렇지 못한 자도 있지만 말이오.
그 아이는 모든 죗값을 치렀다오.
대가로 모든 기억을 잃었지만, 증오는 남았더군.
하지만 그 또한 운명이지 않겠소?
이 내가 물러서고자 했음에도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말이오.
듣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오. 하지만 내가 들려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소.
다만…
그대가 꼭 들어야하는 이야기가 있소.
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그대의 힘을 알아보리다.



<퀘스트 완료>
역시... 그대는 자격이 있구려.
이제야 아젤리아 님을 뵐 수 있겠군.
단 한 명의 사도를 지켜냄으로써
그가 우리를 멸망으로부터 구해줄 것이니
또 기도할 때에 사도의 죽음을 두려워 말라
우리가 우리의 숙명을 다 하여질 때
우리 앞에 반드시 하나의 사도께서 나시리라
연단된 칼날이여.
하늘보다 높은 곳에 있는 그녀에게서... 이슬을 지킬지어다…
미라즈가 목숨을... 다해 지키고자... 했던... 우리의... 궁극적인... 사명....
흐르는 숲에... 찬연하게.... 빛나... 이슬을…
깊은 숲... 그녀...는....
(찬연한...이슬...?)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도통 모르겠군.
흐르는 숲이니 빛나는 이슬이니 전부 추상적이야.
...
하긴. 이런 뜬금없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리 없지.



[심연에 잠식된 성전] 굴레 속의 망령


사악한 기운이 사라졌군. 아무래도 선지자의 망령이 그들의 중심이었나보군.
더 오큘러스 안으로 쏟아진 사악한 기운들을 살아서 영혼을 모으던 것처럼 끌어당기고 있던 모양이야.
하지만, 이것도 시간 문제겠지. 선지자의 망령이 다시 나타난다면 더 오큘러스의 안은 또다시 망령으로 가득 메워지겠지.
모험가님! 테이다! 모두 무사했군요!
전진 기지를 지키다가 망령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이곳으로 달려왔어요.
망령들이 사라진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단숨에 올 수 있었어요.
분명히 두 사람이 사악한 기운의 근원을 쓰러트린 덕분이겠죠.
하지만 아직 방심하기는 이르다네.
사악한 기운을 끌어모으던 것은 선지자였네. 그가 끌어모은 기운에서 망령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지.
하지만 선지자 또한 망령.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기운을 끌어모으려 할 것이라네.
그렇다는건...
전진 기지를 유지하고, 그곳을 기점으로 망령과 맞서야 한다는 것이지.
여기서 길게 설명하기는 힘들겠군.
우선 웨스트 코스트 연합 진영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저도 곧 뒤를 따를게요. 웨스트 코스트에서 뵈어요.



더 오큘러스 전용 채널의 웨스트 코스트 항구에서 오베리스 로젠바흐와 대화하기



<퀘스트 완료>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침 병력을 나누고 심연에 잠식된 성전으로 진입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참이었어요.
표정이 어둡군. 아직도 선지자가 남긴 말을 신경 쓰고 있나? 너무 괘념치 말게나.
정말로 중요한 말이었다면, 또다시 들을 날이 올 것이라네.
(고개를 끄덕인다)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우리 레미디아 바실리카는 전진 기지를 중심으로 망령들을 막아서기로 했어요.
이걸로 연합군이 무사히 하늘성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겠죠.
하지만 방심할 수 없어요. 언제 상황이 급변할지 모르니까요.
저와 테이다는 계속해서 상황을 주시할 생각이에요.
나는 바로 프리스트와 병사를 이끌고 전진 기지로 향할 생각이네.
그곳에서 그것들이 기어 나올 작은 틈도 모두 막아낼 생각이네.
모험가님이 큰 전투를 앞두고 힘을 아껴두고 있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힘을 빌려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분명히 큰 도움이 되겠지. 기회가 되면 부탁하겠네.
그럼 나는 먼저 떠나겠네. 또 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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