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에 잠긴 하늘성

너는 살고자 한다.
길어진 갈증에 혀는 버썩 말라가고 두 눈이 씀벅인다. 분통이 터져 발을 굴러도 마른 가지처럼 버석한 것은 힘이 없다.
너는 차라리 '마계'를 그린다. 썩 성에 차지 않는 양의 에너지를 삼킬 때, 들썩이는 너의 등에서 나던 쇳소리를 생각한다.
누군가 실수로 쏟아놓은 적막이 갈라진 땅 위, 해무가 되어 깔리면 조용히 뒤척이는 기척에도 떨던 놈들을 생각한다.
감흥없이 지나간 얼굴들을 생각한다. 젖은 낙엽처럼 들러붙던 '사도'란 이름을 생각한다. 이윽고, 그 얼굴을 떠올린다.
너는 화를 참아내지 못한다. 괴성을 지른다.
혀뿌리에 비릿한 쇠맛이 돈다.
 
향기에 반응한 벌레들이 움직인다. 차올랐던 너의 숨이 천천히 잦아든다.
너는 살고자 한다.
몇 번을 찢어 죽여도 악착같이 돋아나는 멍청한 미물들에 당할 수 없다. 오늘에야말로 놈들의 씨를 말려주리라고, 너는 생각한다.
귀를 기울인다. 굴 속을 헤매는 발소리가 여럿이다. 너는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는다. 아니, 흩어진다. 연기가 되어 동굴 천정을 쓸어내린다.
빛줄기 하나도 허락치 않는 매정한 허공. 너는 손톱으로 돌벽을 버걱버걱 긁는다. 견디지 못한 손톱이 젖혀지면, 살갗을 찌른다. 파고든다.
너는 오늘 네가 죽을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너는 살고자 한다. 정신이 담길 그릇을 찾아 오래 떠돈다. 오래, 더 오래 떠돌며
너는 생각한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되찾으리라. 홀로 받은 것을 되갚으리라.
무(無)가 되었으니 형(形)이 되리라. 모든 시간에 존재하리라.
문득 처지가 서러워질때면 너는 다시 그 얼굴을 떠올린다.
'사도는 사도를 죽일 수 없다.' 그말이 네게는 꿈과도 같다. 차라리 죽여달라 울며 비는 얼굴을 상상하고, 상상하고, 상상하며 버틴
너는 마침내 일곱을 본다.
 
부활!
너는 비로소 이룰 것이다. 그 어떤 난관도 너에겐 여흥일 뿐.
거대한 폭풍으로 일어나리라. 넘치는 힘을 풀어 헤치며, 폭발하며, 터뜨리고 솟구치고 휘두르며
깨어날 것이다! 겁을 집어먹은 놈들의 눈동자에 너의 위용을 심어주고
몰아칠 것이다! 이 세계의 척추를 타고 올라 그리던 오아시스에 다다르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시리라!
바다 밑 하늘에까지 너의 뿌리를 내리라!
 
한때 너는 살고자 했다. 그러나 보다 원하는 것이 생겼다.
꽃향기를 맡은 벌레들이 줄기를 기어오르며 너를 오래 간질인다. 그 바람에 너는, 너조차 모르는 순간에 너는
슬픈 미소를 짓는다.
 

무아의 시로코 - 레베체
기억의 팔을 베고 가만히 눕는다.
금세 더운 에너지가 발가락 새를 채우고 든다.
쭈욱, 꿈결 안으로 다리를 뻗어내면 그는 곧 뿌리가 되어
별이 품은 힘을 여한없이 삼키어 낸다. 벌떡이는 혈관. 깨어나는 감각.
목젖을 태우던 갈증이 가시고 나면, 보다 느긋해지리라.
두 팔을 땅 깊숙이 박아넣고 가지를 내리라. 더 멀리, 안으로, 안으로…
마침내 닿으리라. 안개처럼 자욱한, 입안처럼 뜨뜻한 별의 숨통. 별의 부아.
그안에 몸을 풀어 놓으면, 그래, 나조차 나를 잊고 누리던 곳에서
나는 비로소 '만개'하리라!
 
찬바람이 등허리를 베어 물고 난다.
그 바람에 선잠을 깬다.
살갗에 닿는 땅이 얼어붙은 듯 차다. 꿈은 사라졌고, 기억은 흩어졌다.
긴 한숨이 과거의 조각을 뒤섞고 만다.
무릎을 곧추세우고 얼굴을 묻는다.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의 저편, 내가 있던 곳.
돌아갈 수 없다 해도 꿈을 꾸리라.
변이의 세계, 주알라바돈을.
 
 
무념의 시로코 - 레스테
흩어졌던 사념 속에서 너희를 보았다.
죽고, 죽이고, 탐하고, 빼앗고, 욕망하고, 또 욕망하고…
삶에 대한 집착이, 힘에 대한 갈망이 한낱 부스러기 같던 나의 사념을 부풀려
나의 아이들이라 불리기엔 너무도 추접하게 일그러뜨린 것을 보았다.
 
순진한 너희들은 그저 계획의 희생양일 뿐이라고, 잠깐이나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을 베고 찌르고 살육하며 얻은 힘으로 아량을 베풀듯 세계를 구한다는 너희를,
영웅 행세에 취해 악행을 벌이면서도 나를 가리켜 불의라 하는 너희를 보고 나니
참 많은 것이 쉬워졌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꿰메어 깁느라 누더기가 되어가는 판은 몰랐겠지.
살려둔 자만이 건넬 수 있는 감사에 적잖이 우쭐대며 기뻐했겠지.
두렵지 않았겠지. 이미 몇 명의 사도를 상대한 몸이니.
내심 기대도 했을 것이다. 다음, 그리고 다음을.
그러니 말은 바로 해야지.
너희들은 정의가 아니다. 살의(殺意)다.
이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와 다를 것 없는 괴물.
 
너희에게 별 감정은 없다. 조금 우습긴 했지만, 그것도 거기까지.
그러니 오해는 말기를. 내가 너희를 죽이는 것은 그냥…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의 시로코 - 길리
일곱의 그릇으로부터 사도가 나니 모든 일의 시작이 그러함이라
사도가 몸을 이룬 일곱을 보니 그간의 일들이 생생히 떠오르매 사도가 그들의 혼에 대고 이르길
너희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내리고자 하니 각자 생에 저지른 죄악을 고하라 내가 그것을 집어 삼켜 힘에 쓰리라
죽음 곁에서 생을 일군 이가 이를 듣고 나서서 가로되 저의 죄악은 이러하나이다
뒤늦게 깨달았나이다 반드시 예언을 가르고자 하였으나 저의 아둔함으로 계획의 일부가 되었나이다 하니
사도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며 이르되 내가 원하노니 지혜를 가지라 하니 즉시 그의 머리만 남더라
죽음의 고랑을 채운 이가 이를 보고 나서매 저는 무엇도 지키지 못했나이다
먼 과거 뜻을 함께한 동료들이 죽어 나갈 때 홀로 살아남았나이다 딸처럼 아끼던 아이마저 제손으로 거두었나이다 하니
사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르되 내가 원하노니 지킬 힘을 가지라 하니 즉시 그의 이마에서 뿔이 돋더라
땅을 헤집어 죽음을 쥔 이가 서둘러 나서 고하니 저는 친우의 손에 죽었나이다 그의 눈에 거짓을 담아 피를 흘리게 하고 두손마저 설움으로 적셨나이다 하니
사도가 고심하여 이르되 내가 원하노니 자유를 잃을지어다 하니 즉시 그의 배에서 집이 나더라
죄악을 고하는 소리는 이후에도 이어졌으니 사도가 흡족해하며 그들의 업을 삼키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이 새긴 이만은 나서지 않더라
사도가 괘씸하여 이르길 너는 어찌하여 입을 열지 않고 있느냐 너는 진실로 저지른 죄악이 없는 것이냐 하니
죽음이 새긴 이가 답하길 죄악이 있다면 너희 사도에게 있느니라
사도가 듣고 너는 두렵지 않으냐 하니 죽음이 새긴 이가 답하여 말하길 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내가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느니라
마침내 사도가 일어나 모두의 앞에 명하니 오냐 고할 것이 없는 자는 영영 고하지 못하리라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에 숨어 살리라 숨어서 무언의 곡을 하다 제풀에 지쳐 죽으리라
사도가 무리를 흩어 보내고 성에 오르니 거기서 남은 일을 행하게 되리라
 
 
게이트
"저곳에 원래 저런 문이 있었나요?"
줄곧 하늘성 입구를 통제해 온 제국의 군인들은 새삼스레 닫힌 '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타오르는 자색의 불꽃, 그 빛에 어슴푸레 드러난 '문'의 윤곽은
먼 옛날 하늘성의 주인이었다는 어느 사도의 위엄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기록 속의 사도는 죽었고, 문 너머에 웅숭그린 또 하나의 사도 역시 제국의 칼날에 숨을 거둘 테니까.
하지만…
"일단 황녀님께 보고하지."
제국에 대한 충성심보단 살고자 하는 본능을 따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문을 향해 등을 보인 그 순간, 성급한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
땅을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문'이 눈을 뜨고 말았다.
 
"누가 감히 하늘성을 침범하는가!"
 
 
백수왕 운조
하늘성을 타고 오르는 강자들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절망의 탑에서 느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전율이 척추를 따라 뻗어내린다.
사도 시로코의 힘을 받아들이고 난 뒤, 나는 달라졌다.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 팽팽하게 당겨진 두 다리의 힘줄.
벌떡이는 심장. 가쁘게 따르는 숨. 전신을 휘도는 피.
그리고 본능.
 
이제 내가 원하는 것은 수련의 장이 아니다. 사냥할 먹이다.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원하는 현무가 낮은 소리로 굶주림을 토할 때마다,
그 시선이 나의 목덜미에 송곳니처럼 박혀 올 때마다
나는 되새긴다.
힘! 오직 백수(百獸)를 찢어 발길 힘을 가진 자만이 그들의 `왕'으로써 군림할 수 있음을!
오거라. 너희의 시체를 현무의 먹이로 던져주고 되살아난 사도를 지켜내리라!
맹수의 포효와 뒤섞이는 비명 속에 예언은 반드시 빗나갈 것이다!
 
"하하하! 그러니 조금만 버티라고. 멋진 걸 보여 줄 테니."
 
 
떠도는 구루미
저는 지금 하늘성에 와 있습니다.
흩어진 사도의 에너지를 끌어모으기 위한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서지요.
일은 녹록지 않습니다. 사도를 잡겠다고 혈안이 돼있는 연합군도 연합군이지만,
진짜 제 속을 썩이는 골칫덩이는 따로 있거든요.
 
그 녀석을 처음 본 건 하늘성 4층 제일 끝방에서였습니다.
그 방 마법진이 자꾸 망가지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기둥 뒤에 숨어 동태를 살피던 중이었죠.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범인이 나타났습니다. 아니,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뭉게뭉게 떠도는 보랏빛 에너지 덩어리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름인 줄 알 겁니다.
사도로부터 떨어져 나온 녀석인 것 같은데, 도통 말은 안 들어먹고 마법진에 머리를 박아대니
그 녀석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도 제 일이 돼 버렸습니다.
특별한 생각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왜 자꾸 하늘성 밖으로 나가려는 걸까요?
뭐, 어차피 사도가 힘을 되찾으면 녀석도 사라질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겠죠.
아, 그나저나 거기는 어떻습니까? 솔도로스 님은 마계에 잘 도착하셨습니까?
 
ㅡ 절망에서 내려온 그림시커의 편지 중에서

 
터뜨리는 트라, 흡수하는 타나
타나, 저기 봐. 누가 왔어.
누구지? 처음 보는데. 만약 인간이라면…
뭐 어때! 재밌을 것 같은데. 가서 같이 놀자!
그치만… 분명 싫어할 거야.
누가?
알잖아.
잠깐은 괜찮아.
그때처럼 또 산산조각 나면 어떡해?
그럴 일 없게 우리가 저들을 붙잡아 놓는 거야.
꽃에 가까이 갈 수 없게?
꽃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트라, 저들을 믿는 건 아니지?
허튼짓을 하면 터뜨려버릴 테니 걱정 마.
그거라면 언제든 내가 도와줄게.
좋아, 그럼 정한 거다? 트라몬타나 전~진!
잠깐만. 조심 해. 같이 가!
 
 
마탄 6 레이나
그분이 향하는 길이 진리이고 진실이리라.
그분은 절망 속에 유일하게 빛을 뿜던 질서였으며, 모두가 바라는 염원과 같다.
그 염원이 답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이 한 몸 기꺼이 그의 탄환이 되어 산화할 것이니.
다짐은 신념이 되고, 망설임 없이 심연 속에 몸을 내던지리라.
이따금 심연 속 달콤한 뱀의 속삭임이 내면을 어지럽히지만,
상관없다. 그로써 한 걸음의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기꺼이 뱀의 혀에 놀아날 것이오, 맹수의 발톱이 되어 그분의 발자취를 지킬 것이다.
 
심연을 담은 탄환이 어둠을 가르고 헤매이는 자들의 심장을 꿰뚫는다.
죄책감은 발목을 잡는 덫일 뿐이니, 오직 그가 찾는 진리만을 쫓을 것이며
방아쇠를 당김에 한 치의 망설임도 있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찾아 분쇄하는 나의 탄환은 그분의 칼날이며 세상을 가르는 함성이 되리니.
 
부디 이 방아쇠가 솔도로스님의 길을 밝히는 신호탄이 되기를…
 
 
잔훼의 로도스
금빛의 육체를 앗아간 힘은 걸을 수 있는 다리를 내게 주었다.
자유의 의지를 구속한 힘은 휘두를 수 있는 무기를 내게 주었다.
하늘의 성을 점거한 힘은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을 내게 주었다.
 
그러나 진정 나를 눈뜨게 한 `힘`, 그 힘은 붉었던 나의 심장에 있다.
분노. 설움. 원망. 증오.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들이 단단한 응어리로 빈 곳을 채운다.
성의 힘이 사라지고 허기를 채우지 못한 나는 껍데기가 되어 무력해졌으나
이제 뜨겁게 달아오른 감정이 때를 맞아 장대한 갑주가 되었으니
 
파괴한다.
성의 침입자여.
나를 얕본 나날들을 후회하게 해 주마.
 
 
매혹의 하니에르
어서 와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나를 봐요. 보고 싶었잖아.
환영의 경계를 넘어설 때부터 코끝을 간질이던 달콤한 향,
그 주인이 누군지 내내 궁금했잖아.
솔직해져요. 알고 싶은 게 정말 그것뿐이에요?
하고 싶은 게 정말 그것뿐인가요?
 
내 정체가 궁금하다면 이리 와 함께 춤을 춰요.
허공을 휘젓고 폭발하는 환희를 느껴봐요.
더 많이 원해도 괜찮아요. 줄 수 있으니까.
당신이 찾는 그녀는 이곳에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꿈이 아니에요.
하지만 바란다면 모두 꿈으로 만들어줄게요.
자, 모든 것을 잊고 나와 머물러요.
영원히 해가 뜨지 않는 몽환의 새벽에서.
 
 
먹어 치우는 거스티
아! 참으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구루미 녀석을 잡으러 갔다가 더 어마어마한 놈을 만났지 뭡니까!
아, 구루미는 지난번 편지에서 말씀드린 그 녀석한테 제가 붙여준 이름입니다.
둥글게 뭉친 에너지 덩어리가 꼭 구름을…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이번에 만난 놈은 아주 악랄합니다.
평소에는 구루미와 비슷한 모양새로 위장을 하고 있지만 먹잇감이 다가오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지요.
쩍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뻗어 나온 놈의 본체를 마주했을 땐, 그 압도적인 공포에 어찌나 오금이 저리던지!
겨우 도망쳤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통째로 잡아먹혀 놈의 에너지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
떨어져 나온 기운에서도 저런 괴물들이 태어난다니. 새삼스럽지만 사도는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마계는 그런 사도들이 우글우글 모여 살던 곳이 아닙니까.
아참. 그러고 보니 벌써 사도 하나를 만났다면서요?
그게 누굽니까?
 
ㅡ 절망에서 내려온 그림시커의 편지 중에서
 
 
시로코의 악몽
아니, 그럴 리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다 부서진 행성의 조각에서 비루하게 망가졌을 리 없다.
입속에 칼을 숨긴 계집에게 당해 차가운 땅굴 어딘가에 내던져졌을 리 없다.
하찮은 인간들에게 당했을 리 없다. 흩어졌을 리 없다.
아아. 원통함이란 바늘을 삼키는 듯하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지나버린 이야깃거리로 부풀려지고 일그러지다니.
사정없이 찢겨 형체조차 없이 부연 먼지처럼 떠돌았다니.
그럴 리 없다. 내가 그럴 리 없어.
그건 내가 아니다.
꿈이다!
그래, 분명 꿈이다.
한밤의 불청객. 어둠보다 짙은 어둠. 눈꺼풀 안에서나 보이는 세계. 얼기설기 엮인 순간의 왜곡. 모순. 거짓!
 
섣불리 내 안에 발을 들인 자여. 와서 두눈으로 직접 확인하라.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진짜 나의 모습을.
 
 
꿈 속의 올드 해그
쉬. 아가.
악몽을 무르고 여기 와 잠들거라.
두려워 말거라.
내가 보고 있으니.
 
여기는 만들어진 무형의 세계.
발버둥 칠수록 옭아매는 정교한 그물.
아가. 여기 그녀가 있단다.
네가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토하고 무의미한 저항을 반복하며 서서히, 아주 서서히
힘을 다할 때까지
그저 즐거이 지켜보고 있단다.
 
쉬. 눈을 감으렴. 너를 대신해 내가 울어주마.
눈물로써 너를 따르는 비극의 행렬을 끊으마.
그러니 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저 소리를 듣거라.
너를 위해 준비한 영원의 안식.
그래, `죽음`이 오고 있단다.
 
 
록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냄새. 이 기운. 검의 녹과 뒤섞인 찐득한 핏방울. 그 비린내.
기특하구나. 아직 죽지 않았다니.
그 짧은 사이, 하찮은 목숨을 내버렸다면 어딘가에 처박힌 네 시체라도 찾으려 했다.
썩다 남은 살점을 모조리 짓이기고, 뼈까지 조각 내어 네 후손에 먹이려 했다.
그런데 네 발로 직접 찾아와주니 기쁘기 그지없구나.
덕분에 수고를 덜었으니 선물을 주마.
그날, 그때. 네가 두고간 것이 있지.
네깟 놈 하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계집을 너는 버리고도 잊어버렸지.
보아라! 네놈이 역한 생을 꾸역 꾸역 살아내는 동안 죽음조차 온전히 맞지 못해 고통받고, 고통받고, 고통받아온 계집의 모습을!
아아. 가엾기도 하지.
어딘지도 모를 곳에 혼이 붙들려 끝 모르는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 제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 하는 머저리 때문이라니.
 
네 손으로 끝낼 기회를 주마. 나를 향해 휘둘렀던 건방진 칼날로 계집의 심장을 찔러보거라.
못하겠다면, 대신 네 것을 내놓아도 좋다. 계집의 손에 네 심장을 들려보내면 계집의 혼을 기꺼이 놓아주마.
자, 어서 선택하거라.
나의 자비가 허락하는 시간은 길지 않으니.
 
 
이름을 잊은 수문장
가려진 심연의 안갯속, 목소리를 들었다.
켜켜이 묻힌 기억의 덮개 아래 잠들어 있던 그를 깨우는 목소리.
 
그분이 나를 다시 부르시는구나.
전장의 화신이며 겁화의 상징이자 용족의 왕이신 나의 주군.
그분이 나를 다시 찾으셨구나.
터질 것 같이 휘몰아치는 이 광활한 에너지, 그분임이 틀림없구나.
헌데, 어째서 안개에 가리어진 듯 그분의 형상이 뚜렷이 떠오르지 않는가.
어째서 그분의 목소리가 물 위에 번지듯 흐릿하게 들리는가.
 
'지켜라...'
그래, 나는 하늘성을 지키던 자...
'지켜라...'
나는 소임을 마치려는 자.
모든 소임을 끝마치고 그분의 의지가 지상과 하늘에 닿을 때,
그때, 비로소 온전한 자리로 회귀하리라.
 
그대, 하늘성을 찾은 자여.
내 육신과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소멸하기 전까지, 감히 하늘성 위를 올려다보지 말지어다.
 
 
안개 속의 암살자
분명 내 사지는 시로코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다.
비명굴에 헛되이 목숨을 내던진 자신을 한탄하며 허망한 운명을 원망했다.
하지만 눈을 뜬 내 앞은 세간의 사람들이 떠들던 천국의 형상도, 지옥의 형상도 아니었다.
아니다, 끝없이 펼쳐진 무의 어둠… 이곳이 지옥이려나?
 
어쩌면 나는 아직도 비명굴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보다 더욱 짙어진 어둠과 침묵을 가르며 끊임없이 칼을 휘둘렀다
쉼 없이 걷고, 베다 보면 끝에 도달하리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헤매고, 헤매이며 끝없는 어둠 속을 벗어나고자 허덕였다.
심해와 같은 어둠 속에서 아군은 없다. 철저히 혼자일 뿐.
서서히 잠식해오는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정신마저 탁하게 흐트러뜨린다.
 
이제는 어디까지의 기억이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상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공격해오는 것은 베었고, 다가오는 것조차 베었다.
서늘한 심연 속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공의의 넥스 & 자비의 비타
나는 심연 속 피어난 요동치는 '생(生)'이라.
나는 심연 속 사그라지는 절망하는 '사(死)'이라.
 
나는 무형의 공간에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주관자이자,
이 공간을 지배하는 지배자이니.
하나와 같으나, 함께 할 수 없으며.
하나에서 탄생했으나, 빛과 어둠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이라.
무형의 하늘을 향하려는 자는 삶과 죽음의 저울 앞에 선택할지니.
 
무형을 헤매는 자들이여, 삶 속에 고뇌하라.
삶이야말로 영원한 심연 속을 헤매는 고통의 형벌일지니.
감히 하늘에 닿으려는 자들이여, 죽음으로 단죄하라.
죽음의 형벌이야말로 너희를 절망케 하는 마지막 결말일 테니.
너희는 삶과 죽음의 형벌 앞에 자만을 벗고 고뇌할지어다.


풍월주 비화랑
아젤리아 님. 문이 열렸습니다.
하늘을 반으로 가른 거대한 폭풍 속, 벌어진 차원의 틈 어딘가에는 그리운 나의 고향이 있겠지요.
허나, 이리 폭풍을 마주 보고 서니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내 오랜 숙원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겠습니다.

나의 사명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나의 고향, 나의 세계를 예언으로부터 지켜내는 것, 그리고
눈 감는 순간까지 전하고자 했던 당신의 뜻을 이어가는 것.

모두의 기대와 염려 속에 솔도로스 님께선 마계로 향하셨습니다.
은거한 사도에 대해 전해 들은 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늘성을 지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나 역시 이곳에 남아 생각합니다.
사도의 힘으로라도, 목숨을 몫으로라도 끝까지 싸우겠노라고.
'화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라의 인재로, 훌륭한 장군으로 주어진 생을 살겠노라고.

그럼, 곧 다시 만납시다.
예언이 빗나간 곳에서.



진 웨펀마스터, 솔도로스


아직 사도 시로코가 쏟아낸 검은 기운으로 입은 피해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많은 병사가 죽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부활한 시로코는 하늘성을 점거했고, 아라드와 천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솔도로스라는 자와 그를 따르는 또 다른 그림시커들이 앞을 막고 있습니다.
하늘성에 자리 잡은 시로코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저들과 맞서야 합니다.
이제부터 저희는 앞을 가로막는 저들을 물러나게 하고, 하늘성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한발 먼저 '더 오큘러스'로 향할 생각입니다. 
곧 심연에 잠긴 하늘성으로 향하는 배를 띄우고, 연합군과 함께 진격할 예정입니다.
저들이 모험가님을 찾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모험가님이 나서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말이겠죠.
함께 해주십시오. 저들을 몰아내고 하늘성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모험가. 왔어?
보다시피 입구에 잔뜩 모여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네. 하하.
저기 모인 모두를 합친 것보다, 한 사람의 기세가 엄청나군요.
바로 무리의 가운데서 정좌를 한 저 사람이에요.
쉽지 않아 보이는군요. 저 사람이 서신을 보낸 '솔도로스'라는 사람일까요?
그래 보이는군요. 수쥬의 왕이시여. 마음속을 칼로 베고 나가는 듯한 기세로군요.
저 사람뿐만이 아니에요. 하나하나가 강한 자들 투성이에요. 수가 적다고 우습게 봤다가는 크게 당하고 말겠죠.
연합은 이미 사도 시로코라는 존재에게 크게 한번 패배했어요. 지금은 한 번의 작은 싸움이라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됐어요.
지금은 숫자만 믿고 달려들 수 없는 상황. 한 발을 내딛는 것조차도 신중하게 고민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도 시로코는 천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늘성을 오르고 있습니다.
앞에 산이 있다고 넘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태껏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힘을 합쳐서 큰 적을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큰 상처를 입은 다음이지만 그래도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물러서면 뒤에서 바라보는 더 많은 이들을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하하, 역시 대단한 분이시라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브왕가 형님.
웨펀마스터 솔도로스라... 오랜만에 손이 근질거리는군.
당연히 앞서 싸워야지! 이 밉살스러운 놈아. 도망칠 생각 말아라. 하하하
음...
도망치다니요. 그럴리가요. 하하하.
이봐 모험가. 너도 함께할 거지? 그럼 준비해볼까?



심연에 잠긴 하늘성 앞에서 솔도로스와 결투하기



진 웨펀마스터, 솔도로스
자네인줄 알고 있었네.
나오게. 마지막 대화를 나누세.
...
...준비 되었으면 가겠네. 받아 보시게나.
윽...
모험가는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다. 하지만 온몸에 전해지는 강렬한 떨림에 일어서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아 버린다.
훌륭한 기량이로다. 하지만 아직 '그'는 물론이고, 나에게도 미치지 못하는군.
마음속의 그릇을 부수게. 그래야 스스로 정한 한계를 넘을 수 있다네.
...!
이 순간을 잊지 말게나.
아젤리아. 당신이 보낸 유언은 잘 받았소.
나를 이어 '그'에게 대적할 훌륭한 칼날을 보냈군.
이 칼날을 연단하여, '그녀'와 '그'를 꿰뚫게 할 것이니…
우리의 방법은 서로 달랐어도 이루고자 하는 것은 결국 같았구려.



<퀘스트 완료>
모험가님...! 괜찮으신가요?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모험가님은 기력이 모두 소진되어 있어요. 솔도로스라는 자의 공격을 한번 받아냈을 뿐인데...
이거 질려버리겠네. 도대체 저런 괴물은 또 어디서 나타난 거야?
......
방금의 싸움으로 연합군의 기세가 꺾였어. 그나마 다행이란 건 아무런 피해가 없다는 정도?
다시 웨스트 코스트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아니, 그렇진 않을 것 같군.
심각한 얼굴로 후퇴를 고민하는 반의 말을 끊은 아간조는 솔도로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붉은 옷을 입은 흑발의 무사가 홀로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할 말이 있는가 보군.
기를 꺾은 다음에 협상이라... 머리 좋은걸?
가봐, 모험가.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니.
모험가는 떨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 멀찍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양얼에게 향했다.
양얼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험가를 보고는 옅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훌륭했습니다. 이 대화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을 깨우쳤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지난 만남 이후로 무엇을 깨달았는지 들려주시겠습니까?
가만히 양얼의 눈을 응시하던 모험가는 입을 열려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모습에 양얼은 옅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깨달았지만, 깨닫지 못했다... 경지를 보았지만,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군요. 이는 아직 진정한 깨우침을 얻지 못해서 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이 패배한 이유죠.
당신과 절망의 탑에서 마주했을 때 솔도로스 님은 이미 성취를 이룬 뒤였습니다. 하지만 쉽게 성취를 보이지 않은 건 당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젤리아 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솔도로스 님은 긴 침묵에 들어가셨죠. 찾아오는 모두를 물러나게 하셨습니다. 아젤리아 님을 모시고 온 로이 님과 에리카 님 조차도 말입니다.
오직 단, 한명. 아젤리아 님이 유언을 맡긴 당신만을 만나기 위해서였지요.
궁금하셨겠죠. 분명히 그러셨을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신과 '대화'를 했고, 뜻을 찾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화의 마지막에서 답을 찾았을 때, 그동안 이룬 성취를 작게나마 보임으로써 당신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오늘이 왔습니다. 선지자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목숨을 버리면서 예언의 시간을 묶었습니다.
솔도로스 님은 이들의 목숨을 검 위에 담았습니다.
양얼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흑발을 흐트러뜨렸다.
이천 년 전에 시작된 아젤리아 님과 솔도로스 님의 대화는 이제서야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 덕분에 말입니다.
당신은 아젤리아 님이 솔도로스 님께 보낸 마지막 질문이며, 대답입니다.
아젤리아 님이 선택한 솔도로스 님을 이을 칼날, 솔도로스 님께 연단 되어 '그'와 '그녀'를 찌르기 위해 선택한 칼날. 그것이 당신입니다. 지금의 당신이라면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솔도로스 님과 둘이서 마계로 향할 생각입니다.
그분의 마지막 싸움을 이 두 눈으로 보고 기억해 전하기 위함이지요.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말입니다.
하지만 절망의 탑에서 내려온 또 다른 이들은 이곳에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대적하겠죠.
선지자를 비롯한 그림시커 신도들이 목숨으로 만들어낸 시간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생각은 달랐지만, 멸망의 예언을 막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였으니, 그들이 목숨 바쳐 만들어 놓은 소중한 시간을 단, 1초라도 더 지켜낸다면, 솔도로스 님은 '그'에게 한 번의 검격을 더 뻗을 수 있겠죠.
그렇다면 어째서...
양얼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며 마지막 말을 전해왔다.
당신은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십시오. 우리가 만들어낸 시간을 늦춰도, 줄여도...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말고 뜻대로 하십시오.
이제 가야 할 때이군요.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입니다. 운이 좋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럼 안녕히.



충돌


큰일입니다! 하늘성을 점거하고 잠시 멈춰있던 시로코가 다시 움직인다는 보고입니다.



중앙막사로 가서 하늘성을 오르는 시로코의 상태를 살피기



<퀘스트 완료>
으음... 벌써 힘을 전부 되찾은 건가? 서두르지 않으면...
시로코의 움직임은 어떻죠? 예상대로 천계로 향하고 있나요? 
경악한 표정의 시선들이 한곳을 향했다.
하늘성을 집어삼킨 검보랏빛 기운이
역류하는 폭포처럼 하늘성을 오르고 있었다.
저런 걸 무슨 수로 막는다는 말인가.
카라카스가 뱉은 한숨이 파문처럼 사람들 사이로 번졌다.
그러나 잠시 후, 경악한 목소리가 한숨이 사라진 공간을 채웠다.
저, 저것 좀 보세요!

충돌




시로코의 발걸음이...멈췄어요.
게다가 방금 그 충돌로 시로코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군요.
대마법진이 시로코를...
이거... 어쩌면 비명굴 이후로 사도 시로코를 무찌를 기회가 한번 더 찾아온 것 같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게다가, 여기엔 그 때의 웨펀마스터들도...
그러고 보니 시란은 어딜 간 거지?
저도 수소문해봤지만 얼마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시더군요. 시란 아저씨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시겠죠.
흐음... 하필이면 이 시점에...
저걸 보십시오. 대마법진에 부딪혔던 시로코의 기운이 다시 한곳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성을 향했다.
하늘성으로 쏟아진 검보랏빛 기운은
점점 어떤 형태를 이루며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저건... '관' 같네요.
흥,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게다가 점점 강해지고 있소.
윽...
아간조, 안색이 안좋은데 괜찮나?
아간조 아저씨 말대롭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겠군요.
시로코가 힘을 회복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하늘성을 올라야 합니다.
이곳에 모인 분들은 모두 연합군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분들. 하늘성을 빠르게 오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스카디 여왕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많은 말들이 오고가지는 않았지만
침묵 속에서도 눈빛을 통해 서로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로코가 향하고 있는 천계의 지벤 황국에도 큰 위기겠지요.
하지만 천계는 과거에 안톤이라는 사도와 맞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일을 막기 위해서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것도 말입니다.
시로코는 대륙 전체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녀가 발을 내디딘 것만으로도 하늘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신 여기 계신 모두가 동의하실 겁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어도 완벽하게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그렇다면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벤 황국의 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여기 계시는 모두에게 천계의 지벤 황국과 협력할 것을 제안해 드립니다.
동의 하신다면 바로 산토리니에게...
역시 훌륭한 통찰력이시군요. 후후.
제국도 같은 생각이에요. 특히, 폭풍 주변에서 상주하고 있는 함선... '에를록스'라고 했던가요?
그 정도의 물건을 동원할 수 있다면 이번 전쟁을 쉽게 풀어 갈 수 있겠죠.
마침 우리 데 로스 제국은 지벤 황국과 동맹 관계에 있고, 여기 있는 발슈테트경은 직접 천계에 올라 그들과 친교를 맺었던 사이.
우리 데 로스 제국이 정식으로 지벤 황국에 서신을 보내도록 하죠.
네, 황녀 전하. 서신을 준비하겠습니다.
큰 도움을 주신 데 로스 제국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연합의 하나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후후.
(...공국이 천계와 직접 통하는 걸 견제하는 건가...)
드디어... 길었던 이 혼란에도 한줄기 빛이 보이는군요. 모두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모험가님? 이번에도 모험가님의 활약이 크다고 전해들었어요. 공국의 여왕이 아닌, 아라드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노고에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아직 처리할 문제들이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사도라는 가장 큰 산을 넘었으니 남은 일들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그대의 헌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모험가님의 앞날에 축복만이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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