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네 님. 플로입니다."
"...들어오세요."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잠깐 풀어지며, 이리네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얼굴에 가로로 긴 상처가 난 남자가 이미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리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압박을 본 플로는 곧바로 말하려던 것을 멈추고 잠시 기다렸다.
"플로? 말씀하세요."
"아, 천계 연합군 전원, 출정 준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주베닐이 밖에서 기다립니다."
"주베닐이... 네. 드디어 준비된 모양이군요."
곧바로 나온 바깥에는 주베닐과 오스카와 함께 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것들이 함께 보였다.
오직 바칼을 죽이기 위해 설계되어 대 바칼병기라 불리는 세 종의 병기는 한눈에 봐도 당당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마감을 확인하던 오스카가 조금 늦게 이리네를 발견하고는 반겼다.
"오, 왔는가? 하하하!"
"병기들의 상태는 어떤가요?"
"완벽하네. 정확한 위치로 전송할 수만 있다면... 어떤 용이든 박살을 내버릴 수 있을 걸세."
"그렇군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스카의 말에 안도한 이리네가 옆에 서 있는 주베닐을 바라보았다.
주베닐은 대 바칼병기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주베닐."
"......"
이리네의 부름에, 주베닐은 고개를 돌려 묵묵히 이리네를 바라보았다.
"이제 모든 준비가 되었나요?"
"...그래.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준비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제 바칼을 삼킬 거대한 불꽃이 될 일만 남았군요."
"그래."
이리네는 주베닐을 시작으로 오스카, 플로, 로자, 그리고 천계의 희망을 바라보는 모든 천계 연합군 병사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로자. 작전은?"
"준비되었습니다."
로자의 말에 이리네는 눈을 감았다. 방금 바라본,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두려는 듯.
지금까지 희생한 사람들과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순간에도 바칼의 곁에서 목숨을 걸고 있는 사라까지 떠올렸을 때, 다시 눈을 떴다.
이제 필요한 모든 조각이 준비되었고, 그렇기에 이 전쟁은 승리해야만 한다.
"이제 개전을 위한 마지막 작전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폭룡왕 바칼
감히 누가 그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천부적인 싸움꾼이며,
불길 속에서 죽어갈 운명을 타고난
특별한 용.
폭룡왕을 찬양하라!
모든 용들의 왕.
그대들의 머리 위에서 일렁이는
거꾸로 된 도시의 신기루를 본 적이 있는가.
이토록 거대한 계획은
아주 작은 변수로도 무너지기 마련.
폭룡왕을 찬양하라!
모든 용들의 왕.
수천, 수만의 목숨을 짓밟고
이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구할
'구원자'가 올지니.
폭룡왕을 찬양하라!
용의 왕을, 폭군을!
폭룡왕 만세.
폭룡왕 만세.
조용히 해.
폭룡왕 만세.
광룡 히스마
크아아아아
바칼이 창조한 세 마리의 용 중 가장 강인한 육체를 지닌 존재. 광룡 히스마가 울부짖었다.
히스마가 내려앉은 지붕의 기와들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들썩거렸고,
바닥과 벽면에는 선명한 발톱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 지층은 선명한 균열을 내비치며 괴로운 듯 조금씩 뒤틀리고 있었다.
"그놈, 목청 한번 좋구먼. 데려다가 병사들 기상나팔로 쓰면 제격이겠어. 하하!"
오스카는 팔짱을 낀 채 히스마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바칼의 궁과 꽤 거리가 있으면서도, 그곳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이의 봉우리였다.
육안으로는 점처럼 보일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땅을 울리는 진동과 소음이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생생히 들려왔다.
주베닐이 눈에 가져다 대고 있던 쌍안경을 내리며 대꾸했다.
"저 녀석의 무기는 저 엄청난 신체를 통해 만드는 순수한 물리력이겠군요."
"하하! 그렇다네. 사라의 말에 따르면 웬만큼 담이 큰 용족들도 저 광룡의 멸진당(滅盡堂)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지.
성격도 더러워서 한 번 날뛰기 시작하면 주변의 모든 것이 부서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더군."
"저렇게 날뛰고 싶어 하는 녀석이 어떻게 바칼의 궁 안에 얌전히 머무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보다 더 커진 듯한 광룡의 외침이 다시 들려왔기에,
주베닐의 물음에 대답하려던 오스카는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말을 멈췄다.
장비로 귀를 보호하고 있음에도 고막이 찢어질 듯이 아파져 왔다.
심지가 약한 이들은 멀리서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을 느끼며 몸이 굳는다는 광룡의 울부짖음이었다.
"그만큼 바칼에 대한 충성심이 절대적이라는 거겠지."
오스카는 물끄러미 주베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봉우리에 지고 있던 석양이 내려앉았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비장해 보였다.
"더 있다 갈 텐가?"
"먼저 내려가십시오, 영감. 난 저 녀석을 좀 더 지켜보다 가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오스카는 생각에 잠긴 주베닐을 뒤로하고 천천히 봉우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룡 스피라찌
사아아아- 사아아-
죽음의 장막이 드리운다.
사룡의 숨결은 저승의 길목에 안개를 흩뿌리고 망자를 헤매게 하는구나.
찢긴 날개는 죽음에 맞서 발악하던 망자들의 침통함이오.
발톱에 눌어붙은 깃발은 사명을 부르짖던 망자들의 집념이니,
애석하고 원통하구나.
죽음을 각오하고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을 자처했거늘,
부르짖던 사명과 원한은 고작 한숨에 맥없이 으스러지고 말았구나.
각오했던 다짐은 부질없고, 목 놓아 부르던 외침이 허망하다..
자유를 위해 죽음으로 뛰어들었으나,
죽음이라는 자유조차 얻지 못한 가련한 전우들이여.
기다리게나, 곧 그 자리에 함께 할 터이니.
우리의 비통함이나마 부디 바람을 타고 한 줌 씨앗이 되어 잔가지에 닿기를...
부대끼는 잔가지가 부디 죽음을 집어삼킬 겁화의 불씨를 피워주기를...
그리 염원하고, 희망하며 안갯속에 몸을 누인다.
숨이 차구나.
하늘이 검구나...
허기지는 갈증과 원한 속에 이렇게 또 하나의 망자가 헤매는구나.....
냉룡 스카사
"...지독한 한기구나."
바칼이 창조한 세 마리의 용 중 가장 강한 냉기를 지녔으며,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것들을 얼려버리는 힘을 가진 자. 스카사.
임무를 위해 그런 스카사의 권역에 들어선 사라는 아직 권역 초입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싸늘한 냉기에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나 예상했던 상황이기에 미리 준비해놨던 방한복과 체온을 보존할 도구들로 몸을 데운 그녀는, 거침없이 권역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 아, 네 녀석이군..."
권역 안에는 일부 용족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권역에 들어온 이가 사라임을 알아보고 말없이 길을 비켜주었으나,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는 눈길은 거두지 않았다.
이때까지 용족의 편에 서서 천계 연합군을 잡는 데 수많은 공을 들였지만, 여전히 그녀를 탐탁지 않아하는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라는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마실이라도 나온 듯 편안한 기색으로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그 행동으로 인해 큰 의심 없이 먹구름과 얼음 조각으로 뒤덮인 누각을 지나,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연못까지 전부 둘러볼 수 있었다.
'...둘 다 위치가 적절하지 않아...'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에 사라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뚫고 더 안쪽으로 이동했고,
마침내 끝없는 넓이의 얼음 호수가 펼쳐져 있는 투한당에 도착했다.
"...이곳이, 스카사가 잠들어 있는 곳..."
주변은 지금까지 지나왔던 곳과 같은 장소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매우 고요했다.
가볍게 떠오른 옅은 안개 층이 호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거대한 크기의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얼어붙어 하얗고 푸른 빛만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린 냉기가 온몸을 휘감았고, 서늘한 칼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사라는 몸의 감각이 점점 마비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위험함을 느낀 그녀는 호수 곳곳에 박혀 있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을 피해 빠르게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의 시선이 한 위치에 고정되었다.
'...하필 이곳인가... 많이 힘겹겠군...'
호수 정중앙에서 아주 옅은 붉은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아래, 불투명한 얼음 사이로 거대한 동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천둥의 에클레어
함성과 비명, 그리고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한 전장의 한가운데.
갑자기 어두운 먹구름이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하늘이 어두워지고, 동시에 커다란 낙뢰가 내리쳤다.
그리고 그 여파로 세찬 바람과 함께 커다란 충격파가 일어나 근처에 있던 수많은 이들이 큰 상처를 입은 채 쓰러졌다.
"무,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멀리 있던 이들이 주춤거리며 낙뢰가 내리친 곳을 바라보자,
이제는 자욱한 먼지가 깔린 그곳에서 거대한 그림자 옆으로 자그마한 그림자가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칼 님의 자비로 살아있는 것들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반란을 일으키는구나."
이후 그림자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천둥 소리와 함께 그 근처에 있던 연합군이 우르르 쓰러졌고,
"이번 기회에 전부 싹을 잘라버려야겠어."
동시에 눈앞의 먼지들이 전부 걷히며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연합군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무슨...! 드래곤나이트가 이곳에 나타난다는 말은 없었는데...!"
"모두 정신 차려! 일단 공격해!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힐 수 있게 어떻게든...!"
하지만 상황 파악이 빠른 연합군 병사 한 명이 급하게 소리치는 것을 기점으로, 그곳에 있던 모든 연합군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에 드래곤나이트가 짜증 어린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고,
동시에 그녀의 뒤에 있던 거대한 용이 검붉은 번개를 내리쳐 달려드는 천계 연합군을 공격했다.
"으아아아악!"
살벌하게 내리치는 번개 사이에서 천계 연합군의 수가 하나둘 계속해서 줄어갔다.
연합군은 쓰러져가면서도 어떻게든 그녀에게 피해를 주고자 노력했으나,
애석하게도 번개처럼 움직이는 드래곤나이트에게는 그 무엇 하나 닿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번개가 잠잠해졌을 즈음에 전장에 서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단 한 대도 맞지 않을 수가..."
순식간에 홀로 남은 연합군 병사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눈동자에는 경악이라는 감정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검붉은 번개가 맺힌 검을 들고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던 드래곤나이트가 비웃음을 지었다.
"멍청하긴. 그러게 왜 주제도 모르고 바칼 님께 대항해?"
동시에 시끄러운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연합군 병사도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병사의 시체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드래곤나이트는 검을 어깨에 걸쳤다.
그 뒤 완전히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다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려 이동했다.
"가자, 토네르."
전장의 열기로 가득 차 있던 장소는 더 이상 없었다.
스산한 바람이 한때 전장이었던 곳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요룡 님파
초록이 무성한 숲 가운데, 님파가 가지 사이로 살랑살랑 날아다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풀잎을 사뿐사뿐 밟고 다니는 그녀는 마치 요정 같았다.
하지만, 생기 넘치는 푸름을 자랑하던 식물들은 그녀의 손길과 발길이 지나자 마치 양분을 빼앗긴 듯 시들시들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본 님파가 시든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울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측은하게 꽃잎을 바라보던 님파의 날개가 별안간 파르르 떨렸다.
뭔가를 감지한 듯 퍼뜩 고개를 든 님파의 입가에는 어느새 짓궂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손님이 온 모양이야."
꽃잎 낱장 같은 날개를 파득파득 떨어대던 님파는 이내 신이 난 몸짓으로 허공을 뱅글뱅글 돌았다.
어린 아이의 흥얼거림 같은 콧노래를 흘리며 춤을 추던 그녀가 별안간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시든 꽃잎 앞에 웅크리고 앉은 님파가 말갛게 미소 지었다.
"조금만 기다려. 네 양분이 되어줄 손님을 이리로 초대할 테니까."
천진난만한 미소를 흘린 님파가 날개를 퍼덕이자, 일순 자리에는 연분홍 꽃잎과 꽃가루만이 허공에 휘날렸다.
덩그러니 남은 시든 꽃 위로 요정의 날개 같은 꽃잎 한 장이 사뿐 내려앉았다.
아홉 꼬리 블로나
"시시하긴... 너희들 영혼은 이 꼬리에 잘 담아줄게."
블로나는 맥없이 스러진 천계인들의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어간 이들의 표정을 보자니, 우습고 한심했다.
"어차피 죽을 건데 꼭 덤벼든단 말이지... 곱게 죽으면 덧나나."
블로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망자들의 시체에서 혼령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영혼들은 서로 뒤엉켜 블로나의 꼬리로 흡수되었고 순식간에 꼬리의 개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누군가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 그 짓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다.”
정체를 가린 남자는 결연한 눈빛으로 탄환을 장전했다.
그는 블로나의 꼬리를 향해 총구를 겨눴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꺄아아아악! 내 꼬리… 꼬리가…!!!”
블로나는 온몸에 밀려오는 뜨거운 열기에 거친 숨을 토해내다 이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선... 몸부터... 몸부터 숨겨야겠...어..."
겨우 늘려 놓은 꼬리가 다시 하나가 된 꼴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블로나는 구석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자욱한 연기가 서서히 걷힐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곧이어 저 멀리 천계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감히 인간 따위가... 조만간 네 영혼도… 이 꼬리에 넣어줄 테니까 기대해…”
블로나는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두 눈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저 천계인과 다시 마주할지도 모르겠단 예감이, 아니 확신이 들었다.
악동 스완
함께 세상에 났던 용인들은 어느새 멋진 발톱과 비늘을 가진 멋진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작은 용인의 발톱은 누구보다 물렀고, 여린 비늘은 옅은 한기조차 막아주지 못했다.
천계 어느 곳에서도 작은 용인이 머무를 땅은 없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먼저 손 내밀지 않았다.
작은 용인에게 허락된 것은 폭력과 멸시, 그리고 이어지는 차가운 말들뿐이었다.
너 같은 실패작은 바칼님의 계획 안에 없었을 거라고.
언제 그칠 줄 모를 구타와 핍박,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이제는 자신을 받아줄 무리를 찾는 것조차 의미 없게 느껴졌다.
"이딴 녀석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지?"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작고 여린 몸뚱어리가 더욱 서럽게 느껴졌다.
정말 자신에게는 조금의 힘조차 허락되지 않은 것인지 몇 번이고 되물어보아도 소용없었다.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서라도 네 목은 꼭 내가 부러트려줄게..."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이것뿐이라는게 서글퍼졌다.
차가운 바닥에 처박힌 작은 용인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 삶이 끊어져도 미련은 없었다.
뒤이어 지옥 같은 기억이 작은 용인의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발톱에 베이고 짓밟힌 순간들이 뒤섞여 흘러들어왔다.
삶의 마지막에서 작은 용인을 가장 비참하게 만든 건 저항하지 못한, 아니 시도해 보지도 않은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억울함과 분함에 바닥을 움켜쥐었다. 작고 여린 발톱이 부러져 나가도록 원통함을 쏟아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마지막 순간, 갑자기 따스한 기운이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고통도 사라졌다.
뒤이어 자신을 괴롭히던 용인들의 비명 소리가 작은 용인의 귓가를 울렸다.
"크억... 뭐야 이 자식... 갑자기 어디서 이런 힘이..."
작은 용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조금 전까지 그를 짓밟던 용인 무리는 작은 용인의 거대해진 왼팔에 짓이겨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볼품없는 발톱 위로 새로 돋아난 날카로운 발톱과 세 마리의 용만큼이나 거대해진 팔. 넘치는 힘을 가진 용인, 스완이 서있었다.
찰나의 참극이 끝난 후 살아남은 용인 한 마리가 일 순간에 뒤집힌 상황에 놀라 하얗게 질려 스완을 바라보았다.
"너... 너 뭐야...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압도적인 강함에 도망칠 의지조차 상실한 용인의 곁으로 스완이 단숨에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상대방의 목에 가져다 댄 스완은 용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목은 꼭 내가 부러트려주겠다고 했지? 아닌가? 이미 죽어버린 저 자식이었나...?"
"뭐... 상관없어. 어차피 다 죽일 거니까."
스완의 왼팔이 용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점점 막혀오는 숨 탓에 흐릿해져가는 시야 속에 웃고 있는 스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덜미를 붙잡힌 채 마주한 눈앞의 스완은 목을 쥔 왼손에 힘을 주며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스완은 좀 더 강하게 왼손을 쥐었다. 이내 주변을 울리는 비명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하아... 이 재밌는 걸 여태 너희들만 한 거야?"
한기의 게르다
그분의 연못을 어지럽히다니...
서늘한 냉기를 두른 아름다운 여인이 고고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창백하고 고혹적인 여인의 모습에 모두가 넋을 잃고 말았다.
어쩌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머릿속마저 얼어붙어 사고가 둔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감히... 그 더러운 발로 그분의 권역을 밟다니요."
분노와 혐오감이 묻어난 말이었지만, 여인은 지독하리만치 무감각하고 냉랭한 표정이었다.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흘러나온 말이 아니라고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감상도 잠시, 숨이 얼어붙어 호흡조차 힘들 정도의 한기가 밀려들었다.
일부는 그 추위에 선 채로 혼절했고, 일부는 신체에 뚫린 구멍으로 파고드는 한기에 고통을 토하며 울부짖었다.
지옥은 살과 영혼을 녹이는 겁화로 이루어진 구렁이라지만,
이곳이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극한의 추위와 고통마저 무디게 하는 한기 속에서 서서히 감각을 잃고 굳어져 가는 동료를 바라보는 인세의 지옥....
사지의 감각이 무뎌져 가는 와중에도 눈앞에 여인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황홀했다.
마치 얼음으로 빚은 여신처럼....
"차가운 안식이 당신에게 닿기를...."
한기에 스러져가는 생명을 바라보고 있다기에는 지극히 평온하고 냉랭한 말투였다.
얼음에 감정을 새긴다면 저런 창조물이 탄생하는 걸까...?
빌어먹을, 머리가 굳어져서 도저히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쉽지 않다.
발끝부터 서서히 무뎌져 가는 감각을 느끼며 나는 그저 멍하니 여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무치게 차갑고도 지독히 아름다운 결정....
어쩌면 저 빌어먹게 생긴 용인들이 아닌 그녀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그렇게 나는 조소를 흘리며 무뎌져 가는 몸을 한기 속에 내맡겼다.
전격의 스테이츠
네 용맹함을 시험해 보겠다.
눈앞에 놓인 창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스테이츠는 마른침을 삼키며, 굳은 표정으로 크라체의 창대를 움켜쥐었다.
"으으음!"
악다문 입술 사이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창대를 잡은 손에서 시작된 떨림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실핏줄이 터져 붉어진 눈을 부릅뜬 채, 그는 느릿한 동작으로 크라체를 허공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섬(一閃)
크라체의 전류에 노출된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묵묵히 자세를 잡았다.
허공의 한 점을 찌를 때마다, 방출된 전류가 주변으로 튀었다.
보는 이마저 지루할 정도로 느리던 찌르기는 어느새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변해갔다.
이연(二連)
한 점만을 향하던 크라체의 창날이 기이하게 비틀렸다.
내밀어지던 것보다 더 빠르고 강한 힘에 꺾인 궤적이 파공음을 내며 사방을 찢었다.
황금빛 기운이 환상처럼 그 뒤를 따랐다.
스테이츠의 전신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났다.
보기 좋던 피부와 비늘들이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제 거의 춤사위에 가까워진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몰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다른 용족들이 아직 잠든 새벽, 먹구름 누각에는 연신 천둥이 내리치고 있었다.
마룡 바실리스크
왕께서 마안(魔眼)을 하사하시며 이르시길, 그 어떤 인간도 감히 용족을 마주 볼 수 없게 하라 하셨다.
마안의 주인이 된 용인 바실리스크는 그 말을 되새겼다. 절대로, 인간은 용족과 공존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용족에게 짓밟혀야 하는 존재이다. 힘으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용족에게 인간이란 한없이 약하고 보잘것없었다.
태생의 강함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니까, 인간은 그저 뭉쳐 다니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니까.
그런데, 너는 왜 그런 나약한 인간 따위를...
바실리스크는 거처를 벗어나 전장으로 향하는 길에 자신에 의해 돌이 된 천계인들의 석상을 마주했다.
석상 사이를 지나는 그의 몸 주변에 감도는 푸른 기운이 마치 죽어간 이들의 혼처럼 부유했다.
석상들의 역동적인 모습과는 대비되는 느린 발걸음의 진동만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돌이 되어버린 아이를 붙들고 흐느끼는 어머니의 석상을 지나쳤다.
사람들을 지키려 품속에서 무기를 꺼내던 이의 석상도 지나쳤다.
느린 발걸음은 길의 끝에서 한 석상 앞에 멈춰 섰다.
서로를 지키려다 함께 돌이 되어버린 연인의 모습을 한 석상 앞, 바실리스크는 그곳에 서 있었다.
바실리스크는 잠시 멈춰 석상을 바라보곤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네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구나."
바실리스크는 석상들을 뒤로 한 채 전장으로의 걸음을 이어갔다.
"메지리아...너는 틀렸다. 아니, 너의 생각은 틀렸어야만 한다."
떠나는 발걸음의 진동이 한층 무거워졌다.
졸린 눈의 로턴드
부우우웅-
로턴드는 육중한 몸으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는 느릿하게 바람을 가르며 공중을 유영하듯 지나다녔다.
여느 때와 다르게 가벼이 뜨는 몸이, 넘쳐나는 힘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던 잠이 조금도 오지 않았다.
"에잇! 오늘 같은 날에 스완을 찍어 눌러야 하는데..."
로턴드는 스완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구석구석을 살폈다.
이내 한쪽 구석에 멍하니 서 있는 스완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기필코 스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리라.
"스완! 오늘은 내가 단번에 이겨주마!"
"......"
"말도 못 할 정도로 겁먹은 거냐? 흐흐흐!"
로턴드는 스완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했고, 온몸에 힘을 실어 찍어 내렸다.
그는 제 몸도 못 가눈 채 힘없이 쓰러지는 스완을 보며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흐하하! 그렇게 센 척하더니 별거 없잖아?"
그때 사방이 쏟아져 내리듯 무너지기 시작했고 온 세상이 춤을 추듯 일렁였다.
주변이 온통 흐릿하게 번져가자 로턴드는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쓰러져있는 스완의 형체는 마구 조각나 흩어졌고 로턴드는 몽롱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고 있음을 느꼈다.
'설마...'
로턴드는 꿈은 아니겠지, 간절히 바라며 질끈 감은 눈을 번쩍 떴다. 허무하게도 예감은 맞아들었다.
“또 자고 있냐? 쯔쯧... 일어나. 인간들이 오고 있다고 하니까.”
뒤통수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로턴드는 찬찬히 뒤쪽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차는 스완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로턴드는 이 모든 게 꿈이었단 사실에 화가 치밀었지만,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들어 올릴 여력조차 없었다.
그는 이번만 자고 다음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완을 이겨버리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현룡 자미르
어린 용족은 전신의 감각을 일깨우고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자그만 언덕 위에 그가 목표로 하는 늙은 용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양탄자를 깔고 앉아 가부좌를 튼 채였다.
처음엔 명상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졸음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문득 자신을 만류하던 다른 용족들의 경고가 떠올랐지만, 어린 용족은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대상은 소문처럼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이건 기회야.
며칠 동안 노쇠한 용을 관찰한 끝에 그는 자미르에 대한 소문이 와전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럼에도 이것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용족들에게 자신의 용맹함에 대해 깊은 인상을 남길 기회.
생각을 정리한 어린 용족은 발톱을 세우고 두 다리에 신경을 집중하며 몸을 웅크렸다.
며칠 간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기습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자신의 발톱이 저 볼품없는 비늘을 찢어발길 것을 의심치 않는다는 듯한 동작이었다.
눈앞의 늙은 용이 잠시 흐릿해졌다고 느낀 순간, 시야가 뒤집히며 그의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어떻게..."
어린 용족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어느새 두 팔과 다리가 마력으로 생성된 칼날에 꿰뚫린 채 결박되어 있었기에,
그는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힘겹게 고개를 돌려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타난 현룡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리석은 것..."
어린 용족은 그제야 자신이 찢어발겼다고 생각한 자미르의 모습이 환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용족의 감각으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할 정도로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상황을 파악한 어린 용족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나를 만만히 보고 기습한 녀석이 그동안 너밖에 없었을 줄 알았더냐?"
늙은 용은 양탄자에 올라탄 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손짓했다.
허공에 새로 생성된 몇 개의 칼날들이 그 손짓에 따라 춤추듯 움직이며 가까워졌다.
자미르의 등과 허리는 여전히 굽어 있었지만, 어린 용족의 눈에는 어떠한 용족보다도 거대해 보였다.
그것은 곧 어린 용족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떠올린 생각이 되었다.
두 개의 변수
전면전을 앞둔 천계 연합군 임시 주둔지에서는 바칼의 궁으로 진입하기 위한 작전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조율되고 있었다.
이야... 용들도 군세가 장난이 아이데이. 저 많은 용들을 뚫고 드가야 겨우 바칼을 볼 수 있다는거 아이가.
드가는 것만해도 골이 땡기는 거 같은데.
그렇겠죠. 그 과정만으로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어려울 거에요. 이들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뭐, 계획도 중요한데, 쪼매 살펴보니 연합군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던데예. 케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겠지예.
카고 저런 뜨내기들이 문제가 아이다 아입니까.
맞습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모험가님. 그리고 다른 분들도 잠깐 이쪽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임시 주둔지의 한쪽 구석으로 이동하기
<퀘스트 완료>
다들 아시겠지만, 세 마리의 용... 그러니까 냉룡 스카사, 사룡 스피라찌, 광룡 히스마는 지금 이 시점에 천계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글치예. 광룡이야 오래전에 토벌되었을끼고, 스피라찌도 흑요정들이 봉인했었다카고, 스카사는 브왕가 노마랑 모험가가 최근에서야 처치했으니까예.
그런데도 지금 천계의 사람들은 세 마리의 용의 등장에 동요하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어요.
그렇다는 건... 이 시간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심각한 왜곡이 발생한 상태였다는 뜻이 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정도의 왜곡은 정말 심각한 것 아닌가요?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고작해야 한두 개의 결과가 달라지는 정도의 왜곡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과 완전히 결이 달라 걱정이네요.
설마 우리가 7인의 마이스터들을 도와 게이볼그 개발을 막은 게 어떤 영향을 준 건 아닌지 걱정되네예.
그 때 왜곡이 사라진 게 아니라, 더 큰 왜곡을 만들어가 지금 여짝으로 오게 된거라면예?
설마...
네. 우리가 경험했던 그 사건 이후에 여전히 작은 왜곡이 남아 있었고, 그 왜곡이 현재 상황을 만들었다는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지금은 아라드에 내려갔어야 할 세 마리의 용이 이 장소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십... 아니 수백 년의 시간에 걸쳐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의 상황과 단순히 비교하더라도... 현재 상황은 그보다 더 나빴으면 나빴지 좋을 수는 없겠네요.
네. 그때에 비하면 이미 너무 큰 왜곡이 발생했어요. 이미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는군요.
케도 우옛든동 결과가 맞아 떨어져야 왜곡이 사라진다 카는건 맞지 않습니까?
여짝은 테네브의 배신이나 게이볼그, 엘디르니 하는 복잡한 건 없잖아예. 그냥 바칼을 원래 역사대로 오늘 죽이뿌면 되는 거지예. 지금 상황이 사소한 변화라고 치부될 상황인지는 알 수 없지만예.
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바칼의 죽음이에요. 저들의 천계... 아니 우리의 미래에 그보다 더 큰 영향을 줄 만한 변화는 없을 거예요.
글치예. 원래 여짝에 없어야 할 용 세 마리를 먼저 치아뿌고... 바칼을 치우는 게 최우선이겠지예.
아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겠지만... 현재로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를 맞추는데 집중하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겠군요.
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을 것 같네요.
우리가 세 마리의 용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면... 저들도 우리가 개입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어찌 보면 오히려 양쪽의 균형이 맞다고 봐야 할 수도 있겠군요.
......
마치 예정 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리스 님. 와 그랍니까? 걱정되는 거라도 있는거라예?
만약... 이 모든 일이 운명이라는 큰 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면... 이 모든 변수가 어떤 미래를 만들지...
미래는 어차피 알지 못해요. 예상할 수 있을 뿐이죠.
그리고 처음부터 우리가 했던 예상은... '왜곡된 이 과거를 없앨 수 있다.' 이구요. 맞지 모험가?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저들이 모르는 변수가 하나 더 남아 있어요. 마침... 적임자도 확인했구요.
다른 변수? 그건 또 뭔 소리라예?
그건...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변수라...
음? 이리네 님?
여러분 모두 이곳에 계셨군요.
개전
여러분. 잠시 이쪽으로 모여주시겠습니까? 작전이 최종 정리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역할이 중요하니 같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임시 주둔지의 이리네와 대화하기
<퀘스트 완료>
오셨군요. 그럼 정리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바칼의 궁이 코 앞입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저 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지금까지 걸어온 걸음을 모두 합한 것이 쉬울 정도로 고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먼저 마주해야 할 세 마리의 용은... 분명 그동안의 적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이며, 오랜 기간 수많은 천계인들을 희생시킨 거대한 벽입니다.
어쩌면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많은 싸움이... 저 거대한 용들을 뚫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었죠.
그렇기에 지금의 연합군은 이미 세 종의 대바칼병기로 바칼을 무찌를 계획을 세워두었고, 예상외의 전력 보충으로 네 명의 용인을 더 수월하게 해치웠습니다.
앞으로도 희생은 불가피하지만, 없을수록 좋은 것... 그래서 부끄럽지만, 여러분에게 또한번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아시겠지만, 누구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부탁이라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뭐, 목숨이야 이미 저짝에 걸어놨고, 애초에 그랄라고 여기 온거니 걱정 마이소.
정말... 고맙습니다.
저 안에는 바칼과 세 마리의 용 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를 짓밟았던 많은 용족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칼의 궁... 폭룡왕의 정전으로 들어가기 전, 저 앞에 출전해있는 바칼의 군대부터 상대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아니 이 전쟁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할 만큼 많은 희생을 낳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희생을 밟고 올라선 우리에게... 이제 물러날 길은 없으니까요.
네. 우리 모두가 하나의 몸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제 연합군은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나아가야 합니다.
하하하! 하나의 목표가 있으니, 당연히 하나의 몸처럼 움직일 수 있겠지!
불꽃은 서로 가까이 가면 더 큰 하나가 되지 않나! 안 그런가 주베닐?
오직 그것을 위해 그 많은 사람이 언제든지 타오를 수 있는 불씨가 되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까.
그럼 이제부터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바칼이 있는 궁 앞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용인과 용족...
그들은 그 수가 많지만, 우리가 우려해야 할 부분은 아닙니다. 이 전쟁은 나라와 나라 간의 싸움이 아니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바칼, 그리고 바칼에게 다가가기 위해 직접 방해가 되는 요소입니다. 바로 세 마리의 용이죠.
이제 선전포고를 했으니 전면전이 시작될 것입니다. 연합군의 전 병력은 가장 먼저 저 앞의 개활지에서 대규모 전투를 치르게 될 겁니다.
다행히 바칼은 성벽을 이용해 싸울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저 많은 병력이 미리 밖으로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인지, 제대로 위협당해본 적 없는 자의 무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히려 공격하는 우리에게는 매우 유리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뭐지?
우선 주력부대가 출격해 개활지에서의 싸움을 시작으로 개전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투의 목적은 저 많은 병력을 뚫고 성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대한 많은 병력을 몰아내고, 성벽 주변에 자리를 확보한 후 바칼을 공격할 대바칼병기의 전송을 준비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입니다.
바칼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대바칼병기가 근처로 전송되어야 하지 않나요? 그 안에서 그 위치도 함께 확보해야 할 텐데요?
그 일을 위해 여기 계신 분들을 모셨습니다.
소수 정예를 선별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용족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실력과 장비를 갖춘 사람들로 구성된 정예 병력이 되겠죠. 개전이 된 후, 가장 먼저 그 별동대의 길을 뚫어 안쪽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들도 안쪽에 나름대로 수비체계를 갖추었을 것이나, 작은 병력이 들어가는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고 바깥에서의 대규모 전투에 집중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강하다는 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입한 후 우리는 가장 먼저 건화문을 되찾고, 대바칼병기를 전송할 위치를 선점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작전이 되겠군요. 그런데 건화문? 그곳은 분명 천계 궁궐의 대문 아닌가요?
알고 있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 관심이 없는 자들은 기억을 못하고 있을 텐데.
맞아. 지금도 그 대문은 형태는 유지되고 있지만... 껍데기일 뿐 이미 오래전 이름을 잃고 말았지.
이름을 잃었다는 것은...
그 이름을 되찾을 때가 온 것이란 말일세!
주베닐의 뒤로 이터널 플레임의 병사들이 거대한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건화문' 이라고 적힌 그것은 여기저기 난 흠집과, 세월의 흔적으로 색이 바래있었지만,
분명히 그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건화문의 현판... 저걸 언제부터?
바칼의 침공 당시, 이름을 잃을 것을 우려한 자가 현판을 먼저 챙겨서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지. 결국 그 현판은 돌고 돌아 오스카 영감께 간 모양이다.
천계의 것이었던 황궁의 상징인 이 현판을 다시 건화문에 거는 것으로 바칼에게 알려주고 싶군.
바칼에게...
자신을 태워죽일 천계의 불꽃이, 바로 코앞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원래 자리
네. 그럼 모든 준비는 마쳤습니다.
이제...
전쟁을 시작하겠습니다.
건화문을 되찾기
지금부터 전면전이 시작될 것입니다. 사령관 님, 그리고 다른 분들은 저희가 길을 뚫었을 때 바로 건화문으로 이동하세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한 걸음이 늦어지면 그 만큼 더 많은 희생이 생길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건화문을 되찾고... 천계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할 테니까.
그럼...
작전대로, 최고의 위치에 대바칼병기를 전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한다.
네. 알겠습니다.
불의 숨이 멎을 때가 왔다.
불의 숨이 멎을 때가 왔다.
우리의 불꽃으로!!!
불의 숨이 멎을 것이다!!!
불의 숨이 멎을 때가 왔다!!
이쪽입니다! 이쪽이 뚫렸으니 어서 가십시오!
지금입니다! 어서, 어서 가세요!
크윽... 꼭... 천계의 상징을 되찾아 주십시오! 뒤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상황은?
그게... 이상합니다. 건화문에는 용족의 꼬리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건화문이 아무리 용족들에게 의미가 없는 곳이라지만, 바칼의 성으로 들어서는 길목인데 아무도 없다니, 이해가 안 되는군요.
일단 원래 계획대로 들어가는 게 좋겠군. 어차피 건화문을 되찾은 후, 바칼에게 가야 하니까.
잠깐,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단 한 명도 이곳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게 이상하군요.
함정이 되려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해야 한다. 방심하지 않고 들어가면 이 앞에 우리의 적이 숨어 있는 것일 뿐이니 문제는 없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함정이라고 가정하고 그 작전을 역이용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선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 사이 오스카 님께서는 발이 빠른 자들과 함께 주변을 돌아 이동하여 건화문과 적이 매복하고 있을 만한 위치 사이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되겠나? 알겠네.
주베닐, 그리고 플로. 두 분은 이곳을 지키고 제 신호에 따라 언제든 돌입할 수 있도록 대기하십시오.
그 후 적이 나타나서, 진입조를 공격하면, 그 사이에 오스카 님은 적들의 추가 지원을 매복으로 막아주십시오.
나는 나서지 않고 지원군의 발만 묶으면 된다는 것이군. 재미는 없겠지만, 어렵지 않은 일이지. 하하하!
네 맞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주베닐과 플로, 두 분이 이끄는 부대가 돌입해서 저를 공격하는 적들을 제압하면 됩니다.
교전이 마무리되면 건화문을 되찾고 오스카 님이 합류합니다. 그 후 진지를 구축하면서 적의 공격을 대비하겠습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주베닐?
내가 먼저 건화문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나? 지금 저곳으로 먼저 들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해.
총사령관인 당신의 목숨은 당신의 것이 아니야. 알고 있을 텐데?
아뇨. 적들이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게 하려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진입했다고 적이 느껴야 할 거예요.
주베닐 당신은 많은 활약을 했지만, 주로 외곽에서 보이지 않는 활동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적들에게 많이 노출되지 않았죠.
말씀하신 대로 저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입니다. 당신보다 바칼군에게 얼굴이 많이 노출되어있죠.
총사령관이나 되는 사람이 불쑥 들어온다면... 적들은 의심을 하면서도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대담하군. 주베닐. 적들도 총사령관을 대뜸 죽이려고 들지는 않을걸세. 아마 먼저 포로로 잡으려고 하겠지.
그런 면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물어뜯길 우리보다는 총사령관이 더 나아 보이는군. 하하하!
......
정말 괜찮겠나?
네. 전 항상 최전선에서 싸워왔습니다. 지금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가? 내가 불필요한 걱정을 했군. 사과하지. 하지만 플로는 함께 들어가는 것을 권하지. 여긴 나 혼자서도 충분해.
당연하지. 사령관 혼자 보내기엔 불안하군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이리네 님.
...알겠습니다. 그럼 플로, 부탁합니다.
그럼 내가 이곳에서 대기하지. 아까 말한 대로 신호에 맞춰서 움직이겠다.
주베닐. 그런...
천천히... 진입하겠습니다.
주베닐. 자리를 잡았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용하군요. 저 멀리서 싸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뭐야, 총사령관이 그냥 이렇게 얼굴을 보인다고? 웃기지도 않은 작전이네. 본인들을 너무 과신하는 거 아니야?
<퀘스트 완료>
주베닐, 오스카 님. 적과 교전 중입니다. 규모는 단독. 다른 지원은 없어 보입니다. 지금 바로 이쪽으로...
칫... 여기서 저 사령관 놈을 잡고 싶었는데... 그냥 죽여야겠군.
윽...
이리네 님! 괜찮...
칫... 귀찮은 놈...
윽... 하늘로 도망가다니.
이리네 님!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라니... 일단 지혈하겠습니다. 가만히 계세요.
적은! 어디에 있나!
이리네! 다친 건가?
조금... 하지만 괜찮습니다.
적은 하늘로 날아가더군. 적은 저 용인 하나밖에 없었나?
네. 정말 이곳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 것인지... 저 용인의 단독 행동인지 알 수가 없군요.
일단, 이곳을 점령했으니 임시 거점을 구축하고, 주변을 경계하는 게 우선이야. 그 후의 작전은 따로 이야기하지.
네.
그리고...
이제 진짜 시작이야.
건화문
수백 년간 용족들에게 하늘을 빼앗기고... 잊을 수밖에 없었지. 긴 압제의 세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텨온 이 문을.
이 문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우리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을 거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다시 돌아온 것이고.
되찾은 건화문으로 이동해 오스카와 대화하기
하하하! 내 눈으로 현판이 다시 걸리는 날을 보게 될 줄이야!
뭣하고 있나, 주베닐! 어서 걸어보게!
그럼...
거대한 현판이 건화문에 다시 걸렸다.
세월의 풍파를 맞아 여기저기 파손되긴 했지만,
그 글자는 명확히 아래에 있는 사람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여보게들 뭘 하나! 이쪽으로 와서 한번 보게. 본래 이름을 되찾은 저 문을!
<퀘스트 완료>
하하핫! 역시 저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어울리는 현판이구만!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군요.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자리를 찾는 것이지.
직감적인 판단
건화문 확보에 성공했으니 이제 움직여야겠습니다. 오스카 님, 로자와는 연락이 되었습니까?
아니.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모양이군. 그 병세를 물리치고 대바칼병기를 설치하기란 쉽지 않겠지.
하지만 해낼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그들을 믿고 해야 할 일을 해야겠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게 정확히 뭔가요?
대바칼병기는 강력한 위력을 가졌지만, 적을 맞추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바칼을 죽이기 위해서는 적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후, 한번에 포격을 시작해야 합니다.
엉뚱한 곳에 사용할 에너지가 없을뿐더러... 발사 위치가 발각되면 곤란해지니까.
한 번 쏘는 순간, 되도록 빨리 적을 무찔러야 한다는 거지예?
네. 그 병기들은 시간에 맞춰서 정확히 정해진 곳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장을 지휘하는 로자에게 병기를 설치할 정확한 위치를 전달할 수만 있다면,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싸울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송 할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었나요?
그건... 이제 연락이 올 거다. 건화문을 되찾는 것을 신호로 하기로 했으니.
신호?
그래. 이 안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이가 있다.
그게... 가능한가요? 어떻게 그 용족들 사이에서?
그래서... 배신자의 낙인을 지닌 채 우리를 돕고있지.
배신자라니...
분명... 느마우그와 싸울 때 만났던... 사라 웨인이라는 자가...
뭐야? 모험가는 알고 있는 거야?
그나저나 사라 웨인이라... 배신자라니. 운명이 참 얄궂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그렇게 말하는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아,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 사라 웨인이란 사람이 내부에서 정보를 계속해서 주고 있던 것이군요.
목숨을 건 일이었을 텐데... 대단하네요.
주베닐.
주베닐. 들리시나요?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건화문을 되찾았군요. 먼저 전달 주신 로자의 계획이 그대로 실행되고 있는 건가요?
그래. 그러니 그녀가 짠 계획에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돼. 필요한 정보는?
다 준비되었어요. 전송을 해야 할 위치는 모두 파악했으나... 최악의 조건입니다.
최악?
네. 세 개의 대바칼병기를 전송할 위치는... 정확히 세 마리의 용이 자리잡고 있는 곳입니다.
허허! 정말인가? 쉽지 않은 상황이군. 바칼 놈 다 알고서 세 마리의 용을 거기에 둔 것인가?
...최악의 경우도 상정했을테니,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면 되지?
그 전에... 혹시 다른 용족들과 전투가 있었나요?
조금 전 건화문을 점령하면서 드래곤 나이트와 맞붙긴 했지만, 큰 저항은 없었다. 이건 왜 그런 거지?
전면전에만 집중하는 것인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요. 강력한 용족들은 원래도 협력이 잘되지 않지만... 바칼의 가장 강력한 피조물인 세 마리의 용이 나타나면서 더더욱 심해졌습니다.
세 마리의 용은 각자 자신의 강력한 힘 때문에 서로 가까이 붙어있지 못하고 있고, 그들을 따르는 용족들 또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자 그 용의 권역 안에서만 활동하고 있죠.
너무 강력한 용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생긴 문제로군요.
네, 그렇게 보입니다. 이건 우리에겐 좋은 기회에요. 세 마리의 용이 한 자리에 뭉치게 되면 정말 힘든 싸움이 될 수 있었겠지만, 다행히 그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는 해도, 방심할 수는 없지 않나? 세 마리의 용의 위용은 자네가 여러 차례 알려줬으니 그게 사실이라면 한 마리의 용과 싸우면서도 결코 방심할 수는 없겠지!
맞습니다. 방심할 정도로 상황이 좋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승리의 가능성이... 다소 올라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 그래서 작전이 뭔가?
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대바칼병기의 전송 위치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 위치는 세 마리의 용이 지키고 있으며, 세 마리의 용과 그를 추종하는 용족들은 각자의 권역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파악한 위치는, 바칼의 궁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사룡 스피라찌, 동쪽에는 냉룡 스카사가 있고, 남쪽에는 광룡 히스마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럼 각개 격파를 해야 한다는 건가? 한쪽을 먼저 치는 게 안전할 텐데.
그게 가장 안전하겠습니다만, 한쪽만 집중해서 공격했을 때, 다른 두 마리의 용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위험한 작전이 되겠지만, 세 마리의 용을 동시에 공격해야 합니다.
크하핫! 안 그래도 적은 인원을 나누라는 말인가? 언제나 그랬지만, 이건 정말 무모하구만!
네. 각 세 개의 권역을 동시에 공격하고, 가장 먼저 좌표가 확보되는 쪽에 대바칼병기를 먼저 전송한 후, 그곳의 용을 빠르게 무찔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그 사이 포격 지원을 받지 못하는 다른 쪽은...
......
그 포격이 성공할 때까지... 살아남는 싸움을 해야겠지요.
......
......
(역시... 세 마리의 용이라는 거대한 변수는 감당하기 힘든 모양이군.)
살아남는 싸움은... 우리가 늘 해오던 것이지. 다를 것 없겠군.
주베닐. 하지만... 생각보다 더 위험합니다.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길 바란 적은 없어.
그것이 사라 웨인. 당신이 그곳에서 직접 보고 내린 결정이라면 따르겠다. 결론 나지 않을 논의로 허비할 시간이 없어.
맞네. 이 전쟁을 시작할 때,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로 했네. 로자의 계획 아래에서, 그리고 사라가 결정한 대로 움직여서 그들이 그린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니 말일세.
......
네. 그 계획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우선 세 조로 나누겠습니다. 먼저 북쪽의 스피라찌는 플로가, 동쪽의 스카사는 주베닐, 오스카 님은 남쪽의 히스마에게 향해주세요.
가장 먼저 좌표를 확보하는 쪽에 우선하여 대바칼병기를 전송해서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요 병력으로 바칼의 궁 주변을 무작위로 공격하여 정확한 목표를 숨기겠습니다. 그사이 여러분은...
우리도 나눠 움직이는 게 좋겠네예. 모험가야, 어데로 갈끼고?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아니. 그 몸으로 함께 이동하는 건 오히려 방해될 것 같군. 당신은 이곳에 남아서 사라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로자와 함께 우리를 지원해주면 좋겠군.
하지만 저도...!
시간이 많지 않아. 당장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속일 셈인가?
......
다른 이들의 도움은 거절하지 않겠다. 그럼 바로 부대를 재편성해서 움직이지.
작전에 맞춰서 각 권역에 있는 용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동하기
...다들 오셨군요.
이건...
크핫... 쿨럭 쿨럭! 크으... 하늘이 노랗구만. 히스마의 비늘이라도 날리는 건가?
스승님. 더 말씀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아서라. 네 눈에는... 이게 말을... 쿨럭쿨럭! 말을, 하지 않는다고 나을 상처로 보이느냐?
하지만...
죽음은... 이미... 오래전에 각오했다.
그... 크흠...
...스승님.
기침을 참고 입을 가렸던 오스카의 손에서 피가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그것을 바라본 오스카의 눈빛은 조금 더 공허하게 하늘을 향했다.
...그 수많은 죽음 속에 겨우 하나의 죽음이 더해지는 것일 뿐이야. 유난 떨 것 없다.
먼저 갔던 놈들에게 안부는... 전해주마. 쿨럭쿨럭!
혹시 방법이 없습니까? 당신은 이런 상처도 혹시 치료할 수 있습니까?
...심각한 상처로군요. 안타깝지만 저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정도의 부상입니다.
그런! 혹시 다른 방법이...
그만...
하지만 스승님. 스승님께서 없으면 저희 컴퍼니 도흐는...
......
그래. 컴퍼니 도흐는... 이제 네가 맡거라.
예? 하지만 저는... 도흐가 아닙니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성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마라. ...네가 도흐냐 아니냐는 것은 이제... 상관없다.
너는 나의 제자이니... 그것만으로도, 크흠... 컴퍼니 도흐를 이끌 자격이 충분하다.
......
그럼 컴퍼니 도흐에서 도흐라는 이름을 빼야 하는 건가? 푸흐흐... 크윽... 쿨럭! 크흠...!
스승님...
술을 진탕 마신 것처럼 정신이 흐릿하군. 주베닐... 주베닐 거기 있는가?
말하십시오. 영감.
후우... 그놈의 영감 뒤에 님자는 끝까지 안 붙여주는구만.
......
스카사는... 잘 처리했나?
예. 잘 처리했습니다.
그렇구만. 다행이야. 이제 진짜 바칼만 남았구만.
......
...자네가 그 현판을 건화문에 다시 걸었을 때, 이미 죽어도 여한이 없다 생각했지.
죽을... 죽을 때가 되니...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지는구만...
......
동정 정도는 해주지 그러나? 냉정하기는.
저는... 그래야만 합니다.
......
주베닐... 과거에... 과거에 너무 연연하지 말게. ...그것... 그것보단... 현재 자네가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나. 쿨럭! 쿨럭!
...네. 알겠습니다.
그래... 후우... 이제... 좀 쉬어야겠네. 다들...
오늘 꼭... 이 전쟁을 끝내게나... 이미 간 이들의 불꽃 속에서 함께하겠네...
스승님! 스승님! 크흑...
......
건화문으로... 이동하지. 먼저 대바칼병기를 전송... 아니 내가 이리네에게 연락하겠다. 다들 정리하고 이동 준비를 하도록.
<퀘스트 완료>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군.)
...오스카 씨의 시신을 수습해라. 이 전쟁이 끝난 후... 다른 사람과 함께 모셔야 하니까.
최후의 출사표
수습은... 다 되었어. 주베닐은 이미 출발한 건가?
...우리도 어서 건화문으로 이동하지.
건화문의 이리네를 찾아가 현재 상황을 공유하기
<퀘스트 완료>
오셨습니까. 오스카 님은...
......
우리가 갚아야 할 것이 늘었다.
그렇군요.
......
오스카 님...
오늘 영감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병사가 희생했다.
아직 그들을 애도하고 슬퍼할 때가 아니야.
네... 그들의 희생 또한 평생 안고 가야 할 죄가 되겠군요.
어쩔 수 없다지만 그 어쩔 수 없는 희생조차 더 줄일 수는 없었을까. 그렇게 고민했건만...
전장의 뒤에서만 있는 제가 감히 어찌 그들을 애도할 수 있을지...
로자.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모두 죽음을 각오했고,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차례가 된 것입니다.
그들을 애도하는 것은 이 전쟁이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로자. 지금 상황과 다음 작전은?
...네, 우리는 세 마리의 용을 모두 무찔렀고, 대바칼병기를 모두 설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잔당들과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지만, 주요 강력한 용족들을 모두 처리해주셔서 금방 소강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상정 외의 상황이 있었으나, 모두 예상범위 안이었으며...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렇군.
반드시.
바로 오늘.
불의 숨은 우리의 손으로 멎게 될 것입니다.
희생을 짊어지고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바칼이 어떤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릴지 직접 확인하러 갈 차례입니다.
바칼이 있는 폭룡왕의 정전으로 향하기
뭐하느라 이제 옵니까! 바칼 낯짝 보러 퍼뜩 가시지예.
네. 봐야죠. 천계를 그렇게 못살게 굴었던 폭군의 얼굴을. 하지만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요.
무슨 할일예?
이리네 님. 주베닐 님을 잠깐 빌려도 될까요?
미쉘 님. 무슨 일입니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마지막 변수를 위해서 주베닐 님이 반드시 필요해요.
......
주베닐. 지금까지 이터널 플레임이 계속 타오를 수 있게 만든... 작은 불씨가 다시 타오를 때가 되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그냥 그걸 본다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게 알게 될 거예요.
......
알겠다.
주베닐?
나 하나 빠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저자가 말하는 변수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한번 믿어볼 가치는 있어 보이는군.
......
로자? 계획은?
네. 주베닐 님이 전사했을 경우의 수도 미리 상정해두었습니다. 좋은 조건의 변수라면, 충분히 걸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미쉘 님.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제안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믿어줘서 고마워요. 꼭 도움이 될 거니까 부디 조심하시길... 주베닐, 그럼 이쪽으로.
그러지.
그럼... 폭룡왕의 정전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저자는... 분명 건화문을 공격했던 용족?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네. 오스카 님과의 싸움에서 이미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아마 제대로 서 있는 것도 무리일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죠?
...저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배신자로 낙인찍힌 모양이었습니다. 저자를 제외한 나머지 드래곤 나이트들은 이미 전멸했더군요.
배신? 용족이?
싸울 의지가 없으면 순순히 목을 내놓거라.
네년... 잘도 이따위 이간질을 하다니...
이간질? 나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결국에는... 님파의 손에 당한 모양이군.
역시 네년은... 인간의 편이었나? 과연 배신자의 명성에 어울리게 행동하는구나. 이따위 이간질로 감히 나를...!
나는 애당초 천계를 배신한 적이 없으니, 배신자가 아니다. 그러니 그런 말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네 말대로... 그 따위 이간질에 휘둘리는 충성심이라니. 역시 힘과 같은 것에 놀아나는 종족답구나.
...네년의 가족이... 볼모로 잡혔을 때도... 하나 둘... 끝끝내 그 조그마한 놈들이 내 칼에 쓰러졌을 때도 너는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지.
그런 네가 어찌 배신자가 아니란 말이지? 너희들이 말하는 천계라는 허상을 위해 가족과 동료의 죽음을 방조한 주제에...
그런 주제에 어째서 계속 바칼 님께 대항하고... 목숨을 내던지며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거야!
너희가 우리에게 누군가를 지킬 기회를 주었는가?
그저 위력으로 찍어 누르고, 말을 듣지 않으면 물어뜯는 야만적인 족속인 주제에 기회를 준 것처럼 말하지 마라.
그래. 너희의 손에 내 가족들이... ...결국 그 어린 것까지 쓰러질 때에도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것은 천계를 위한 맹세나 다름없다. 비록 다른 자의 피로 강제로 쓰여진 맹세였지만, 그렇기에 더!
격렬하고, 처절한 맹세를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은 자가!
목숨이 아까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너희와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적은... 네놈들 스스로 만들었던 것이니, 결국 너희들이 모두 배신자나 다름없다.
크으... 시끄러워!
<퀘스트 완료>
......
난... 배신자... 배신자가 아니야... 배신자는 너희... 너희가 처음부터 저항하지 않았다면...
멋대로 말하거라. 이제와서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사라 웨인... 배신자로 있으면서 정말 많은 희생을 감수했군... 아니, 천계의 모두가... 감수한 희생인가.)
폭룡왕의 정전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마치 하늘의 색이 변한 것만 같은 거대한 기운을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이 앞에...
네. 후우... 이제 바칼을 마주할 일만 남았습니다.
로자. 대바칼병기의 준비는 잘 마쳤습니까?
네.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말씀드린 시점에 신호하면 움직일 예정입니다.
사라와 함께 전 병력으로 폭룡왕의 정전을 포위한 채 신호를 기다리십시오. 절대로 작은 변수조차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원래라면 주베닐과 오스카 님이 이끄는 최정예들과 함께 바칼에게 돌입할 예정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두분 모두 이 자리에 없군요.
모험가님. 그리고 그의 동료분들. 그들을 대신해 저와 폭룡왕을 마주하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와 직접 대면해본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나자마자 그의 숨길에 잿더미가 되어 바스러질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절실합니다.
당신의 정체... 그리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알고 싶은지 단 하나도 아는 것은 없지만... 제 직감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분들도...
당연히 가야지예. 여까지 그 고생을 하면서 왔는데 그노마 낯짝은 봐야 하지 않겠어예.
저도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당신들이 없었다면 이 전쟁이 어떻게 되었을지... 당신들이 이곳에 나타난 건 정말 운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럼... 마지막 작전을 시작하겠습니다.
폭룡왕 바칼의 최후를 원래의 역사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지키고 있는 이들이 하나도 없군. 우리가 들어오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의 오만한 태도에 화가 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방심 때문에 당한다면 역사에 가장 멍청한 놈으로 기록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으러 가겠습니다.
폭룡왕! 마침내 오늘 네 숨을 거두러 왔다.
수백 년 정도의 시간은 나에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생각보다는 늦었군. 기대가 있어서 더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아, 그리고... 내가 준비할 것을 잘 찾았더군.
그래. 과거를 돌아본 기분은 어떤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바칼!
건방지구나. 감히 나의 대화를 끊으려 들다니.
그래. 너희도 분명 내가 의도한 칼날이지. 비록 여러 가지 변수가 있었지만, 여기까지 잘 와주었다.
너희로 말미암아 미래에 저 예리한 칼날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니... 칭찬해주지.
마법의 사용을 금한 후... 그동안 내게 도전했던 누구보다도 강력한 군대와 병기를 만들었더군.
하지만, 경거망동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크윽... 이건... 확실히... 다르데이.
그때 그... 엘디르... 어쩌면 그것보다 더...
음? 너는 그 년의 인형이 아닌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저는... 이제... 그분의 인형이 아닙니다.
시로코가 왔다는 미래에는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 모양이군. 모두 듣지 못해 아쉽구나! 크하하핫!
뭐 상관없다. 그런 것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니. 지금은 그저 이 유희를 즐기는 게 중요하겠지.
유희...라고!
경거망동하지 말라 했을텐데.
크하하하핫!
건방지군. 아직 네게 관심이 있는 것에 감사해라.
......
그래. 이 정도로 쓰러지면 기다린 보람이 없지. 자, 방해꾼은 사라졌다.
네가 알아야 할 진짜 역사... 즉, 진실을 알려주기 전에...
네가 정말 시련을 이겨내 이곳에 도달한 칼날인지...
그리고 진실을 들을 가치가 있는지...
어디 증명해 보아라.
아니, 이정도론 안된다.
따분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구나.
네놈의 가능성을 나에게 보여라.
그러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으니.
윽...
TNB 좌표 확보. 전장으로 투하합니다.
잠시 시간을 벌 뿐입니다. 어서 몸을 가다듬으세요.
히스마를 꿰뚫은 병기인가. 칭찬해주마.
좀 더 보여봐라. 모든 수단을 동원한 너희들이 얼마나 강한지!
크하핫! 과연 힐더를 꿰뚫을 가능성이 보이는구나.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모험가님! 들리세요? 바칼이 바깥으로 나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다른 사람들은?
네. 모두 무사합니다. 바칼이 밖으로 나오면서 더 유리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대바칼병기의 사용이 훨씬 원활하겠군요.
준비되는 대로 바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후.
진실을 들을 만한 자격은 되어 보이는구나.
네가 온 곳에서의 과거는 지금과 다르다는 것. 가령 예를 들면... 본래 아라드로 내려갔어야 하지만 이곳에서 죽은 나의 피조물같이.
그래. 모든 것을 전해 들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이야. 결국, 그것들은 힐더의 계략에 넘어가 창신세기의 예언에 맞추어 죽은 모양이더군.
좋은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힐더가 아니라 바로 그 창신세기란 것이지.
사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칼날이여?
힐더는 무슨 생각으로 사도들을 마계로 모았으며, 하나씩 그들을 아라드로 전이시키고 있는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계산적이지 않던가? 하나의 사도가 전이되고, 그 사도가 죽음에 이르면 머지않아 또 다른 사도가 전이되었겠지.
......
미래에서 온 네가 아는 것을 맞춰 볼까? 최초로 전이된 사도는 바로 시로코. 그리고 이어서 로터스, 디레지에의 순서로 전이되지 않았나?
아니. 이것은 루크의 예언. 그는 자신의 그 특별한 능력으로 미래를 보았다. 그 덕에 그 영감은 진실을 너무 일찍 깨닫고 말았지.
루크...
그 영감은, 창신세기의 내용을 예언했다. 아니, 정확히는 힐더가 할 행동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야겠군.
힐더는 창신세기에 적힌 예언에 따라 사도들의 죽음이 미리 예정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창신세기에 적힌 순서대로 사도들을 죽게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무언가일 수도 있을 것이며... 또는 가장 염원하는 곳일 수도 있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에 모순이 느껴지지 않나? 아주 치명적이지만 ...어설픈 허점이.
...허점...
그녀의 목적은... 창신세기의 예언대로 사도들을 죽게 하는 것...
...창신세기가 정말 예언서라면... 전이를 시킬 필요가...
크하하핫! 그래! 맞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것을, 맹신에 눈이 가린 힐더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다.
창신세기가 정말 사도들의 죽음에 대한 예언서라면, 힐더가 나설 필요도 없었겠지.
하지만 전이가 없었으면, 사도들은 너희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전이는... 유일하게 창신세기의 원본을 손에 넣은 힐더만이 할 수 있는 일.
물론... 힐더가 단순히 창신세기를 맹신하는지... 아니면 그 속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그 창신세기의 예언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뿐이지.
글쎄. 나조차도 창신세기가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해. 하지만 힐더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내용은 분명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것... 그것이 어떤 사람인지, 물건인지... 어떤 개념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숨기고자 하는 대상은 힐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사도가 아닌... 다른 존재일 수도 있겠군.
헤블론의 예언소에서 아이리스가 생각한... 외부 세계의 개입...
푸흐흐... 헤블론의 예언소라고? 그 영감은 또 그런 것을 남긴 건가. 정말 알 수 없는 노인네군.
이슬을 감춘 자... 그 늙은 인간도 그렇고 똑똑한 늙은 것들이 많단 말이야.
이슬을 감춘 자? 그건 또 누구...
그건...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또 다른 진실을 알게 되겠지.
어떤가? 연단된 칼날이여. 네가 그 칼날을 겨눌 곳이 어디인지... 적어도 의심을 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이제 감이 잡히는가?
글쎄. 지금의 나는 그것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했다면 언제든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힐더의 계획은... 나의 죽음을 통해 시작되는 것이니까. 어느 시간대에서든... 어느 역사에서든 그것은 변치 않겠지.
창신세기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에?
이해가 빠르군. 맞다. 하지만 내가 그냥 죽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아주 작지만 큰, 그 변수를 만들기 위해 나는 지금껏 천계를 지배했다.
그 변수는...
그게 너인 것 같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힐더의 뜻대로 너는 분명 사도를... 이 나를 가장 먼저 겨눠야 한다 칼날이여.
그래야 그 힐더가 자신의 소망을 운명으로 착각하고, 진실을 맹신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파고들 수 있는 아주 작은 빈틈을 만들겠지.
시련에 연단된 칼만이 모두를 꿰뚫으리라... 그 모두에 힐더 본인도 포함될 수 있음을... 무시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힐더가 이런 짓을 벌이느냐고?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힐더가 원하는 아주 작은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시키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하다.
......
이토록 수많은 톱니바퀴가 짜맞춰 진 듯 잘 짜인 싸움에서는... 아주 작은 차이가 큰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지.
네가 자격이 된다면, 내가 직접 그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내주마.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네가 정말로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이제 진짜 증명해 보아라.
네가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 힐더를 찌를 칼날이 꼭 너일 필요는 없거니와... 나는 그저 기다리면 되는 것이니까. 크하하핫!
이터널 플레임 준비 완료. 전장으로 투하합니다.
스피라찌를 구속한 병기인가. 꽤 귀찮은 병기더구나. 하지만...
외부 충격 발생! 이터널 플레임의 제어가 불가합니다! 모험가님, 피하세요!
이제야 출발선에 거의 다다랐구나!
마지막 힘을 짜내 나의 시험을 통과해라, 칼날이여!
칼날이여, 역사 공부는 끝났다.
이후의 남은 것은 오롯이 너에게 달렸으니,
이제 마지막 시험을 시작하마.
최종 병기
휴. 드디어 완성했어. 이제 진짜 천계가 만든 게이볼그라고 부를 수 있겠어.
정말 고생하셨어요. 쿠리오.
오드뤼즈. 만약 이 게이볼그가 움직일 일이 생긴다면 분명 바칼에게 주먹 한 방 먹일 만한 상황이라는 거겠지?
그렇겠죠. 미래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게이볼그를 찾아서 가동하진 않았을 테니까!
게이볼그의 가동은... 테네브의 후손만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코드를 해석하는데는 얼마나 걸릴까?
모르죠. 하지만 테네브의 이름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쿠리오의 코드는 금방 풀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미래에는 분명 더 엄청난 천재들이 나타날 거니까.
맞아요. 아직 다 크려면 멀었지만… 결국 저 아이를 통해 미래는 계속 이어지겠죠.
그래... 그럼 이 녹음을 들은 사람은 바칼한테 한 방을 꽂아 넣었을 수도 있겠네? 아아! 거기 들려?
녹음? 언제부터...! 아, 미리 말을 했어야죠! 준비도 안 되었는데!
자연스러운 게 좋잖아. 너무 진지하게 남기면 재미없으니까.
거기 듣고 있어? 우리의 선택 때문에 고생이 많지? 꼭 말해주고 싶은게 있어.
이건 테네브 혼자의 선택이 아니야. 바로 우리 모두의 선택이야.
그러니까... 테네브는... 배신자가 아니라는 말이지. 이걸 말해주고 싶었어.
그거 이리 내놔요!
어, 어! 키 좀 컸다고 대드는 거냐? 으악!
(우리의 선택... 그는 배신자가 아니다...)
......
주베닐! 주베닐! 들리십니까?
그래. 들린다.
주베닐, 설마... 당신이 그 안에 있는 겁니까?
맞다.
저 크기 하며, 생긴거 하며... 진짜 게이볼그가 존재했었다는 말인가? 7인의 마이스터의... 이터널 플레임의 유산이?
그래. 게이볼그의 안이다.
말도 안돼...! 어떻게... 어째서 주베닐이?
후우... 정확한 타이밍이었어. 그때 받은 코드가 정말로 작동할 줄이야! 정말 멋진 선조들이잖아?
하지만 원래 계획대로, 대바칼병기 역시 준비해야 해요!
드래곤 슬레이어 설치 완료. 모든 준비는 마쳤습니다. 정말... 상상치도 못한 변수를 들고 오신 덕에, 승리의 확률은 대폭 상승했습니다.
이쪽도 완료했습니다. 드디어... 바칼을...!
아직 속단은 이릅니다!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회를 찾으십시오!
자 다들 위치로 이동! 게이볼그가 빈틈을 만드는 순간, 일제 사격한다!
우리도 흩어지자. 드래곤 슬레이어를 하나라도 더 설치하는게 변수를 줄일 수 있을테니까.
<퀘스트 완료>
시련으로 연단된 칼날이여. 이제 시작할 준비가 되었음을 인정하지만, 끝낼 준비는 아직 멀었다.
앞으로 지금보다 더 큰 시련이 있음이 분명하나... 너를 한 번 믿어보도록 하겠다.
네가 진정으로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은 힐더의 바로 옆에 도사리고 있으니... 진실을 직시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마지막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네가 이미 찾은 것... 나의 의지를 담은 힘을 남겨 너를 인도할 것이니... 안개를 넘어 그것들을 취하라.
나는 이 마지막 남은 이 힘을 쏟아내어 그년에게 시작을 알릴 것이니...
아주 작은 차이
폭룡왕 바칼의 마지막 단말마와 함께 천계 전체를 휩쓸었던 연기가 가라앉았다.
바칼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위용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흔적 하나 없이 사라졌고,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주베닐! 주베닐! 무사한건가요!?
크으... 그래, 다행히 조종부는 피해갔군.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다.
종전
후... 다행입니다. 무사하신 분들은 폭룡왕의 정전으로... 모여주세요.
원래 역사대로 죽음을 맞이한 바칼을 확인한 후, 바하이트로 되돌아가기
오랜... 싸움이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고 갈망한...
우리의 불꽃으로! 마침내 불의 숨이 멎었습니다!
와아아아!!
불의 숨이 멎었다!!
혁명이 성공했다!!
이런, 바칼이 마지막에 한 발악 때문에 이곳이 무너지려는 것 같습니다. 일단 내려가시죠.
네. 이 기쁨은... 이제 언제든지 나눌 수 있으니...
모두! 환호는 잠깐 멈춰! 아래로 내려가서 계속 환호하자고!
와아아아!!
우리의 천계는 이제 시작이야. 다 끝난 전장에서 죽기 싫으면 빨리 움직여!
(주베닐은?)
(게이볼그... 그토록 원망했던 선조가 틀리지 않았던 것이었나? 나는... 지금껏... 무엇을...)
...다들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모양이던데.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어서 내려가라. 생존자... 아니 전공자들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있을 테니 부디 잘 받았으면 좋겠군. 너희들의 공이 가장 크니까.
당신은?
...나는 보상 같은 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 잊혀져야 할 사람이니.
......
나는... 지난 백여 년간의 일어난 희생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
배신자의 후손이... 무슨 낯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나.
배신자라면...
저기 쓰러진 게이볼그를 만든 사람 중 하나이자... 모두를 배신해 최악의 폭정이 더 연장되게 만들었던...
마이스터 오드뤼즈와 쿠리오에게 넘겨져 자라난 먼 선조는... 배신자의 후손이라는 것 외에는 자세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배신자의 후손으로서 속죄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원망스럽고, 경멸했던 그 선조는... 7인의 마이스터 중 하나...
나는 쿠리오이자... 테네브다.
놀라지 않는군.
......
방금 원망했고 경멸했다고 말했지. 하하.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선조의 멍청한 선택 때문에 태어나서부터 죄인처럼 숨어지냈으니까.
그 원망은 점점 더 커졌다. 그래. 우선 살아남자. 그리고 이 죄를 씻어내리라. 이 더러운 배신자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 다른 죄는 얼마든지 지어도 좋다.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이 죄를 씻어낼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상관없으니!
...하지만 오늘 증명되었지. 그들은 결국 틀리지 않았고... 나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는 애송일 뿐이었던 것이지.
고맙군... 그렇게 말해줘서.
모험가! 여기에 있었네.
주베닐 님?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당신은 이미 아는 이야기. 그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곳은 위험한데 어째서 돌아온 거지?
어...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런가. 이대로 떠나려는 것인가 보군.
눈치가 빠르시네요. ...당신은?
......
주베닐 님. 잠깐... 부탁할 게...
...알아서는 안될 것을 알았으니, 정리되는 대로 나도 이곳을 떠날 거다. 어차피... 이름 같은 것을 남길 생각은 없었으니 걱정하지 마라.
...네. 고마워요.
나도...
고맙군...
정리가... 된 기가.
속단할 수는 없겠군요. 바칼의 죽음은 원래 역사대로 이루어졌지만, 그 전에 일어난 사건들이 과연 감당할 만한 변화일지...
이대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갔는데... 모든 것이 바뀌어 있고 그런 건 아니겠지예?
처음 이 과거로 향할 때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무엇이 바뀌었는지 인지조차 할 수 없을지도 모르죠.
하이고마, 골치 아프데이...
우리가 해낸 일이... 부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기를...
뭐 할 수 있는게 더 없네예. 케도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돌아가면 되는 거겠지예.
네. 이곳에서 우리가 할 일은 끝났어요.
이제 남은 일은 저들이 처리해야겠죠.
그럼...
베키 노마를 불러가 나가뿌면 되겠네예. 퍼뜩 움직이자.
주베닐! 다른 분들은? 모험가님은 어디에...
그들은 떠났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막 전쟁이 끝난 참인데 말도 없이 떠나다니!
...사정이 있겠지. 그리고 그들이 부탁하더군.
부탁?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길 바라더군.
그런... 그들이 없었다면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당연히 영웅으로서 후대에 알려져야 합니다.
......
주베닐 님?
누굴 위해 남겨야 하는 건가?
그야 당연히 그분들의 기록을 보고 자랄 미래의...
결국 지금 우리와 함께 한 그들을 위한 것은 아니란 말이군.
......
그건...
그 오랜 기간... 미래를 위해 그렇게 많은 희생을 했으니... 오늘만큼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
......
......
......
알겠습니다. 현재의 그들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고맙군.
참 아쉽지만 그들의 뜻이니 어쩔 수 없군. 자자, 전쟁은 끝났지만 할 일은 더 늘었습니다. 바칼의 잔당도 처리해야 하고, 이 난장판도 정리해야 합니다.
거기 친구들!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조금만 더 고생하면 진짜 끝이야!
저는, 마지막 잔당들이 있을만한 곳을 선별해서 토벌대를 꾸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을 테니 지금이 적기입니다.
네.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이제는... 다른 희생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네. 급하지 않게,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
사라.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배신자라는 오명을 가지고... 이제 그 오명을 씻을 수 있을 겁니다.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사라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다잡았다.
사라? 괜찮으십니까?
아... 네. 괜찮습니다.
저는... 잠시 본가를 찾아가봐도 될는지요. 가족을 잃은 후... 단 한 번도 찾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가족을...
네. 편히 다녀오세요.
...고맙습니다.
이리네.
네. 말씀하세요.
......
주베닐?
이건... 조금 이른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지만... 미리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부탁?
나는 이곳을 바로 떠날 생각이다.
네? 떠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떠나거나... 전쟁 중에 죽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남았군.
어째서...
알고 있지 않나?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그동안 모르는 척해준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 줬으면 좋겠군.
......
그래서 부탁이란 게 뭐죠?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바칼을 몰아내고 천계를 되찾았을 때...
만약 무언가 상징적인 것이 필요하다면 오래전 희생하여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해준 그들을 기릴 수 있는 이름을 고려해줄 수 있겠나?
그 이름이라고 하면...
...그 일곱 명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올 수 있었으니... 되찾은 나라의 이름을 새로 짓게 된다면 '지벤'이라 하는 것이 어떤가?
지벤... 그들의 숫자를 의미하는 거군요. 당신은... 그를 용서한 건가요?
용서...라. 글쎄. 꼭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개인적인 부탁일 뿐이야. 새로운 국가라고는 해도, 한 국가의 이름이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지어지진 않겠지.
...알겠습니다. 결국, 그들이 남긴 기술과... 유산으로 승리를 쟁취했으니... 당신의 이야기는 고려해보겠습니다.
...고맙군.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
방금 떠난다고 하신 것... 한 번 더 생각해줄 수 있습니까?
그건...
주베닐?
...나는...
<퀘스트 완료>
으아! 파래졌어!! 드디어 끝났어!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는데! 살았다!
정말 고생했어 베키.
이제 다 해결된 거냐? 주변에 빨간 번개들이 다 사라진 걸 보니 해결된거 같은데!
그래. 왜곡은 사라졌으니까. 또 다른 왜곡이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야. 일단 계속 봐야겠지만 지금은... 해결된 것 같아.
다들 고생많았습니데이. 하이고, 이제사 발 뻗고 좀 쉴 수 있겠데이.
아주 작은 톱니바퀴
그런데... 결국 시로코 그 노마가 할라던 게 뭐였을까예? 다른 사도들을 살릴라 했지만 결국엔 모든 사도가 믿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아입니까.
그걸 운명이라카면, 운명이란게... 애당초 바꿀 수 있는 것이었을까예?
정해진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시로코라는... 사도라는 존재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겨우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고... 겪은 후에는 바꿀 수 없는 것이 운명이죠.
하... 어렵네예. 운명이라는 게 그런 성질의 것이라면... 결국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뀌는 건 없다는 말 같아 힘 빠지네예.
모험가야. 아까 바칼이랑 단둘이 남았을 때 바칼이 무슨 이바구 안 하더나?
우리는 튕겨져나가서 암것도 못 들었데이.
아, 맞네. 베키 노마랑 미쉘 님캉도 같이 들어야 하니 저쪽으로 가서 말해야겠데이. 따라온나.
바하이트의 미쉘 쿠리오와 대화하기
해방
이번 시간대의 왜곡도... 이렇게 사라지고 말았군. 어째서 사라진 거지? 바칼의 죽음은 막지 못했지만, 분명 수백 년에 걸친 큰 변화가 있었는데.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과거의 역사도... 미래의 역사도, 그리고 현재의 역사도. 결국에는 정해진 운명 속에 있다는 것을.
...너는 뭐지?
(이 느낌... 분명 어디에선가 느껴본 적이 있군.)
누군가의 죽음... 혹은 수백 년의 왜곡...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네.
이런 모습의 마무리 또한, 그들이 가진 '운명'이라는 큰 틀 위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작은 어긋남에 불과함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년의 계획을 비틀어서... 그 운명을 함께 비틀고자 한 것인데. 헛수고였나?
아니. 그대의 행동으로 그 계획은 비틀렸다네.
비틀었다고? 과거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바뀐 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일세. 자네는 그녀의 절대적인 맹신 속에 아주 작은 의심을 틔워줄... 아주 작은 변수를 만들었네.
......
서로 엉켜돌아가는 무수히 많은 톱니바퀴는... 각자 독립적인 것 같지만, 아주 작은 톱니바퀴 하나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받는 법이지.
이제 오랫동안 기다린 이 늙은이의 계획이 시작될 수 있게 되었네.
어떤가? 더 갈 곳이 없다면, 나와 함께 지켜보는 것이.
마침 그대의 힘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대로 차원 속에서 소멸하는 것보다는 나와 함께 지켜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시로코여.
...너는 누구지?
나는 이슬을 숨기고... 칼날을 안내하기 위해 기다리는 늙은이일세. 자, 이쪽으로 오게나. 그곳에서 그를 같이 기다리게나.
......
시로코... 이제야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구나. 예상 밖의 움직임이었지만 과거에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한 모양이구나.
칼날은 아직 차원의 폭풍 속에...
그곳에서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을지는 모두 알 수 없겠으나
이 일련의 사건들로 작은 과정은 달라질 수 있을지언정, 그 끝에 있는 창신세기의 예언은 변하지 않을 것이니...
...이건?
결국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가?
언젠가 움직이리라 생각했으나 마침 지금이라는 것은... 역시 처음부터 그자가 개입한 것이란 말.
모든 생명을 쏟아부어 진실을 가리고 늙어버린 은자여...
당신이 칼날을 인도한다면 칼날이 향할 곳은 분명...
......
오랫동안 움츠리고 있던 당신이 어떤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나 또한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니...
<퀘스트 완료>
어, 모험가 왔어? 다행히... 다른 왜곡된 시간대는 발생하지 않고 있어. 바로 발생했었던 지난번의 상황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네.
그거 참 다행이네예. 하긴 시로코 그노마도 이 정도 난리를 피웠으면 힘이 부치겠지예.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어요. 일단 여기에 조금 더 머물면서... 상황을 살펴야겠죠.
네. 언제든지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일보다 더 험한 상황이 있을까 싶지만서도예.
네... 오늘 겪은 일은...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모험가. 아까 바칼과 단둘이 남았을 때... 바칼이 무슨 말을 했어?
아 맞다. 그 말할라꼬 왔는데 깜빡해뿟데이.
바보 아니냐! 얼라다 얼라!
하하. 아직도 얼라라 한번 캤다고 삐져있나. 지독한 얼라데이.
여튼, 모험가야, 바칼이 뭐라 캤나?
창신세기의 예언을 맹신하다니. 창신세기는 세상의 탄생과 멸망을 적은 성서... 그것을 믿는 것은 옳고 그름으로 따질 영역이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그건... 그럴 수가...
바칼이 지 목숨 버려가면서 거짓말을 칠 거 같지 않긴 한데... 아, 헤블론의 예언소인가, 거서 봤던 것들 다들 기억 나지예.
분명... 시로코... 디레지에... 그리고 오즈마와 미카엘라에 관한 내용이 바뀌었었다고 했었죠? 아이리스 님. 그 내용이 혹시 창신세기의 내용인가요?
그 부분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창신세기가 있는 곳은 힐더 님만 알고 있고, 저 또한 일부의 내용밖에 들은 바가 없습니다.
곤란하네예. 이미 죽어뿟는데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번에 루크를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물어봤어야 되는거 아니었나 모르겠네예.
그건...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니까 어차피 안 되겠죠. 애당초 저희가 정확히 원하는 시간으로 이동한 것도 아니니 다른 기회가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시간의 문을 통하는 것도 어차피 의미가 없을 긴데.
모험가야. 니 괜찮나?
모험가. 우리는 지금 어떤 말도 쉽게 믿을 수 없어. 아니, 섣불리 믿어서는 안 돼. 특히 그 대상이 폭룡왕 바칼이라면 더더욱.
케도 지금 들은 말들이 모두 힐더를 향하는 건 분명하다 아입니까. 우옛든동 힐더를 가장 먼저 만나야 하는건 확실합니데이.
일단... 이곳을 나간 후에 다시 정리를 하도록 해요. 창신세기에 대해서... 그리고 힐더 님, 전이가 되었던 사도들... 모든 사건을 다시 확인해봐야 합니다.
네. 이곳에서 다른 왜곡된 차원이 생기는지 확인한 후... 되돌아가도록 해요. 모험가. 이번에도 고생했어.
네가 가장 정신없겠지만... 쉬어두도록 해. 시란 님, 아이리스 님도 쉬세요.
다른 시간대의 왜곡이 생기는지 나와 베키가 계속 확인할 테니까요. 베키 괜찮지?
쉴 틈이 없네 정말! 알았어!
글: 성종
해방.
저는 이날을 기다려오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544년,
이십만 일의 시간.
제가 겪어낸 시간은 그 가늠조차 어려운 시간의 아주 일부였으나,
일상이었으며,
생업이었으며,
하나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오늘로 끝인 듯 보입니다.
저는 지금 기쁘기보단, 두렵습니다.
우리가 밟는 땅은 시산이자,
묘입니다.
저는 한 걸음에 한 번 겨우 울음을 참아냅니다.
시체들은 마치 하나의 길처럼 놓여있어,
우리는 앞서간 낯선 이의 쓰러진 몸을 밟으며,
피 묻은 발을 겨우 빼내며,
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길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오직 주어진 길이었습니다.
의미와 무의미조차 재어낼 수 없는,
그저 한 가지 길이 있기에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 끝은 언제나 해방이라는 막다른 곳이되,
이 길 외에 이어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걷고, 쓰러져,
드디어 이곳입니다.
더 이상 누구도 쓰러지지 않고,
누구도 기도하지 않으며,
기도에 답하기 위해 누군가 신을 자처하지 않아도 되는,
이곳입니다.
저는 이곳에 서서,
그간 해온 일이 하나뿐이어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남고자 합니다.
제가 아는 길은 여기서 마무리입니다.
저는 이제 앞서 가는 자들의 뒷모습이 아닌,
이미 스러진 신들을 마주하려 합니다.
다시 한번, 저는 두렵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랜 기간, 하나의 길을 따라서만 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싸울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기도가 필요하고,
여전히 누군가의 시체를 딛고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익숙한 저항을 해나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일방은 아닐 겁니다.
여전히 싸우더라도 우리는 각자가 정한 각자의 길을 걸을 것이고,
여전히 기도하더라도 언젠가 모퉁이에서 다시 만날 것이며,
누군가 쓰러져야 하는 길이 있더라도, 그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헤맬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이 축하할 일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고백하자면,
저는 드디어 길을 잃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는,
이제 비로소 길을 잃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채,
기대와 두려움과 함께,
흔쾌히,
그리고 온전히,
...마침내.
해방되었습니다.
- 530년, 초대 최고 사제, 알데라민 이리네 폰 릴리오,
연회에서 간단한 축사를 요청 받자.
글 : Noa
“여기 숨어서 놀고 있었군요, 플로.”
“어이쿠, 들켜버렸네요. 하하.”
천계가 훤히 보이는 산등성이 위에서, 단정한 사제복을 입은 이리네가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플로의 옆으로 다가왔다.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그냥 잠깐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염원하던 미래가 제 세대에서 펼쳐지니 조금 감격스러워서 말이죠.”
그에 플로는 가벼운 감상을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이리네가 미소 지으며 잔디에 앉았다.
“모두가 힘을 합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 상황을 유지해야겠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부탁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이요?”
의아해하는 플로를 향해 이리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플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플로, 블랙 로즈단의 모든 전권을 맡아주지 않겠습니까?”
“...예?”
갑작스러운 말에 플로는 잠시 당황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이리네를 바라보았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제가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왜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시는 겁니까?”
그에 가만히 플로의 눈을 응시하던 이리네가 몸을 일으켜 복구되고 있는 천계를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앞서 연설할 때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예, 두 번 다시 바칼과 같은 이에게 천계를 빼앗기지 않도록 항상 준비하겠다고 하셨지요.”
“저는 그 준비에 대한 초석으로 블랙 로즈단이 앞장서서 움직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바칼의 폭정에서 끝없이 분투해야 했던 천계인들에게 있어서 블랙 로즈단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존재했기에 천계인들은 끝까지 노력하며 저항할 수 있었고, 그렇게 힘을 합쳐 싸워온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플로, 당신이 그들을 이끌 중심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렇기에 플로 또한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였으나, 전권을 맡아달라는 부탁에는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네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오며 그녀를 보조해 왔기에, 그들을 이끄는 것 자체는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블랙 로즈단의 단장이 되어 이리네가 들고 있는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기뻤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리네처럼 부드럽고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이 블랙 로즈단을 지금처럼 규합하여 올바르게 이끌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하는데, 이리네가 다시 플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사제복이 바람에 의해 너울거렸다.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에 플로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제가 그들을 잘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어째서인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당신이 오랫동안 천계를 위해 해온 노력과, 그 노력의 결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녀의 올곧은 눈이 플로를 향했다.
“당신이 만든 탄환으로 수많은 천계인을 구하고, 적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위험한 일들을 직접 떠맡은 덕에 인명피해도 적었고, 적군에 대한 수많은 정보도 얻을 수 있었지요.
그것뿐일까요. 용기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격려를, 마음이 꺾인 이들에게는 위로와 조언을.
그 외에도 당신이 한 크고 작은 행동들이 쌓여 많은 이들이 존경과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리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 또한 혼자였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고요.”
“...거,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닌가요.”
낯부끄러운 기분에 플로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그러나 이리네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건 당신이 해온 일들입니다. 저는 그저 그것들을 읊었을 뿐이지요.”
“......”
“그러니 플로, 천계인들의 희망의 구심점이 되어주세요. 지금의 천계가 오랜 시간 유지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말에 한동안 말없이 이리네를 바라보던 플로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뭐, 단장님이 부탁하시는데 부단장인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아직 미숙하겠지만, 한 번 해보도록 하죠.”
“아까 거절하지 않았나요?”
“어이쿠, 기억이 잘 안 납니다만... 하하...”
시선을 회피하는 플로를 작게 눈웃음 지으며 바라보던 이리네가 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며칠 후, 블랙 로즈단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해왔던 공로도 함께요. 신비주의로 활동했다 한들, 그들을 계속해서 그림자처럼 두는 것도 좋지 않다고 보니까요.”
“부하들은 좋아하겠군요. 허나 그렇게 되면 앞으로는 비밀스럽게 활동하기 힘든 거 아닙니까?”
“적들이 더 경계하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천계인들에게는 안도감이 찾아오겠죠. 우리가 더 철저하게 행동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리네의 단호한 말에 플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벨트에 끼워진 탄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그만큼 더 많은 이들이 강해져야겠군요. 이번에 새로 발명한 탄도 있고, 지금이라면 가르칠 시간도 충분하니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기술들을 천계인들에게 전수해야겠습니다.”
“그래 주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리네가 미소를 지으며 플로를 바라봤다.
“그럼 마지막으로... 블랙 로즈단 단장의 새로운 명칭도 생각해보는 게 좋겠군요.”
“명칭... 말입니까?”
“네. 이제부터 한 나라의 조직을 이끄는 직책이니, 단장이라고 부르기에는 알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이리네는 흩날리는 머리를 옆으로 넘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하늘에서 수많은 새들이 대열을 맞춰 날아가고 있었다.
그 질서 있는 모습에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던 이리네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 ‘제너럴’.”
“예?”
“제너럴이라는 명칭은 어떤 것 같습니까?”
그 말에 플로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너럴...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이름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예, 앞으로 수많은 이들을 이끌게 될 테니까요.”
“이것 참, 좋으면서도 또다시 긴장되는걸요.”
“그렇게 말해도 잘해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지켜봐 온 당신은 그러했으니까요.”
이리네는 다시 플로를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플로에 대한 신뢰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초의 제너럴 님.”
그렇게 둘은 한동안 재건되고 있는 천계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바램을 들어주듯이 옅은 무지갯빛이 천계를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글 : Noa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저택의 모습에 사라는 잠시 멈추어 섰다.
항상 반갑게 맞이해주었던 가족들도, 자신의 품을 파고들던 자그마한 존재도 더 이상 없었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넘치던 공간은 싸늘한 침묵으로 채워져 있었다.
“......”
분명 발랄하고 따뜻한, 언제나 마음이 편해졌던 장소였는데
그들이 없기 때문인지, 이곳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 사라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더더욱 가라앉는 기분에 저택을 둘러보지 않고 바로 뒷마당으로 이동했다.
“...제가 너무 늦게 왔죠.”
그곳에는 약식으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중앙에 있는 무덤 앞에 주저앉았다.
“...드디어, 끝이 났어요.”
그리고 무덤들의 푯말을 쓰다듬으며 작게 읊조렸다.
“하지만... 저 혼자 살아남았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사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모두를 외면한 대가로 살아남은 제가 어찌...”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씁쓸한 음성이 자택 내를 얇게 울리며 사라졌다.
한동안 말없이 무덤 위에 쌓인 옅은 먼지를 털어내던 사라는 조용히 그들과 함께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천계가 고통받는 것을 보다 못한 사라는 용족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자진해서 배신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라의 가족은 그녀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위험을 떠안고 함께 바칼의 궁에 입궁했다.
살얼음을 밟는 듯한 그 공간 속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었던 곳은 가족들의 품이었고,
그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곳에서 완벽한 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라의 정보 덕분에 천계 연합군은 수많은 고비를 겪으면서도 용족들을 꺾을 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희망을 보았고, 새로운 미래를 보았다.
더이상 용족에게 억압받는 삶이 아닌,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개전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용족 내에서 큰 학살이 일어났다.
그들은 잔혹하고 무자비했다. 배신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자들의 가족, 지인, 친구 등을 모조리 붙잡은 뒤 죽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라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었고, 바칼의 궁에 있던 그녀의 가족들 또한 그 볼모로 붙잡혀 그녀의 눈앞에서 하나둘 죽어갔다.
그러나 사라는 버텼다.
배신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고, 그들의 죽음을 보며 더더욱 맹세했기에.
천계의 자유와 앞으로의 미래를 위하여 피가 날 정도로 혀를 깨물고, 꽉 쥔 주먹 사이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으로 정신을 붙잡으며. 그렇게 버텨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천계는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미래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오롯이 기뻐할 수 없었다.
가족들을 그렇게 만든 에클레어에게 복수하고 그렇게 염원했던 천계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도
그들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고,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 그때의 상황이 사라를 괴롭혔다.
“......”
고통스러운 단말마가 귀 끝을 찔러왔고,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왔다.
무자비한 공격에 의해 사라의 가족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스러져갔다.
하지만 사라는 그들의 이해 하면서도 원망스럽다는 눈빛과 함께, 그 끝에서 미약하게 떨리다 떨어진 자그마한 손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핏줄 선 눈으로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당시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었다는 건 사라도, 사라의 가족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짙은 무력감과 죄책감이 사라를 짓눌렀다.
“...내가 좀 더 잘했다면...”
모두와 함께 이 자유를,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완벽했더라면...”
찢어질 듯한 공허함에 사라는 가족들의 무덤을 껴안고 소리 없는 울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사라는 힘겹게 감정을 추스른 뒤, 가족들의 시신을 제대로 된 장지에 안치했다.
그리고 주둔지로 이동하다 거리의 모습을 보고 멈추어 섰다.
거리는 부서진 잔해들로 인해 난장판이었지만 활기와 웃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
가족들과 함께 이 모습을 볼 수 없음에 또다시 가슴이 미어지려할 때, 사라의 앞으로 꼬질꼬질한 모습의 아이들이 다가왔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다.
그들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라를 보고 그녀의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이더니 걱정 어린 질문을 던졌다.
“누나, 무슨 일 있어요?”
“계속 용족한테 괴롭힘당해서 그래요? 이제 괜찮다고 어른들이 그랬어요!”
“우는 거 아니죠? 울지 마요!”
그에 사라는 말없이 그 아이들을 바라보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니, 드디어 천계가 자유로워져서... 그래서 기뻐서... 그런 거란다.”
그러나 아이들은 입을 삐쭉 내밀더니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에이, 거짓말. 기뻐서 우는 사람들도 그런 얼굴은 아니었어요.”
“아니면 배고파서 그래요? 우리도 배고플 때 그런 얼굴이었는데.”
“먹을 거 남은 사람 있어?”
“나, 나. 조금 남아있어!”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한 후, 자그마한 빵 쪼가리를 사라에게 건넸다.
아이 자신도 아껴 먹기 위해 남겨 놓았던 것일 텐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그 빵을 선뜻 건네는 모습에 사라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며 그 선의를 거절하자,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 중 한 명이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
“그럼 이건 어때요!”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라가 놀란 눈빛을 지으며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가 방긋 웃더니 활기차게 말했다.
“이제는 없지만... 슬플 때마다 엄마가 이렇게 안아줬거든요!”
“......”
“그러니 울지 말아요! 기쁜 날이잖아요!”
그러면서 그녀의 품에 파고드는데, 그 따스함으로 인해 이제는 볼 수 없는 아이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사라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한동안 아이를 껴안은 채 눈물을 흘리던 사라는 감정을 진정시킨 후, 다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사라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 천계의 미래가 되겠지.’
전쟁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남을 위해 행동하는 순수함에 작게 미소가 지어졌지만, 아이들의 꾀죄죄한 모습을 본 사라의 안색에 다시 그늘이 졌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잘 자랄 수 없을 거야.’
바칼의 압제에서는 벗어났으나, 전쟁의 후유증과 더불어 핍박받는 생활을 해왔던 많은 천계인들은 아직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리네와 로자, 플로 등 많은 이들이 힘쓰고 있지만 계속해서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이번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고아들이 더 생겨나 사정이 더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걸 할 자격이 있을까 싶지만...’
작게 갈등하던 사라는 아이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저택에 있던 음식을 가져와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그녀가 준 음식을 소중히 껴안았다.
“우와! 신난다!”
“감사해요!”
그리고 그 모습에 사라는 애써 씁쓸한 미소를 감추며 웃어 보였다.
‘이런 것으로나마 조금이라도, 속죄할 수 있다면...’
그들의 눈에 보이던 원망은 분명 자신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마치 자신을 원망하는 것만 같았다.
차갑게 식어가며 힘없이 떨어진 자그마한 손이 보였다.
동시에 가장 소중한 가족들을 희생시켜 놓고, 다른 이들을 구하는 자신의 모습에 또다시 죄책감이 밀려 들어왔다.
그래서 사라는 그들이 그녀를 위해 희생한 이유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꼭 천계를 해방시키자는 그들과의 약속을.
그리고 천계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던 가족들의 바람을.
“......”
죄책감을 덮기 위해 하는 자기만족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들과 함께 꿈꿔왔던 그 미래를 조금이라도 이루기 위해, 사라는 다짐했다.
앞으로 천계의 미래가 될 아이들을 보살펴, 지금보다 더 좋은 천계를 만들어내겠다고.
‘...그리고...’
잠시나마 느꼈던 따스한 온기를 떠올리며, 서서히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라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주둔지로 이동했다.
글 : 月
황궁의 잔해 위로 선언되었던 해방서와 함께 새로운 태양이 드리웠다.
황궁을 포함한 수도 중심지는 전쟁의 참상으로 성한 것을 찾기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그 잿빛 잔해 위로 새로운 기둥을 박는 이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여느 사람 사는 곳이 그러하듯 모든 이의 생각과 목소리가 같을 수는 없는 법.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만큼 불안과 불신을 품은 이도 존재했다.
“최고 사제라니... 말이 좋아 사제지 황좌에서 치세를 누리던 폭룡왕과 다를 게 뭐요?”
“쉬... 조용하시오. 이러다 누가 듣겠소.”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사내와 달리 다른 사내는 불평 가득한 얼굴로 푸념하기 여념이 없었다.
“솔직히 최고 사제가 필요하다면, 우리 귀족 중에서 한 명을 뽑아야 하는 것 아니오?”
“어허, 이 사람이! 이미 정리된 일을 이제 와서 왈가불가한들 뭔 소용이오?”
한창 황성이 복원되는 한복판이었기에 사내가 일침을 가했으나, 불안과 불만으로 가슴이 답답한 다른 사내는 퉁명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차라리 그 유르겐가의 가주가 사제직을 맡았다면 인정했을 거요.”
“로자 유르겐 말하는 거요?”
“그렇소. 솔직히 이번 연합군에서 책사로 참여한 로자 유르겐의 공이 가장 크지 않소?”
쉬쉬하면서도 최고 사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두 귀족 사내가 황성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황성 입구의 처마 아래 서 있던 여인과 한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아직은 자리 잡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군.”
씁쓸한 미소를 띈 플로의 말에 쥘부채로 입가를 가린 로자가 여상스럽게 말을 이었다.
“모두의 마음이 하나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더구나 이런 격동의 시대를 앞둔 상황에서는 누구든 마음 한구석 불안과 불만을 품고 있기 마련입니다.”
차분한 로자의 음성에 플로가 한쪽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저들 말로는 최고 사제로 적합한 자는 당신이라는 거 같은데.”
“......”
“아쉽지는 않습니까?”
로자의 표정을 살피는 듯한 플로의 시선에도 그녀는 북방의 서늘한 바람처럼 차갑고 침착한 표정으로 복구 중인 황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이 지붕이라 한들 그 하나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은 수많은 기둥이자 들보이지요.”
플로가 그녀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로자는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뒤에 말을 읊조렸다.
“아무리 높고 화려한 지붕이라 해도 기둥과 들보가 부실하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좀 쉽게 말해주겠습니까?”
난감해 하는 플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로자가 싱긋 미소 지었다.
“유르겐 가는 기둥을 자처할 것입니다. 이 나라를 떠받칠 기둥을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한참 재건 중인 황성을 바라보는 로자의 눈에는 미래를 향한 희망과 설렘으로 반짝였다.
플로 또한 마찬가지로 그녀가 바라보던 황성을 올려다보며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둥이라...”
플로의 말에 로자가 저도 모르게 플로를 바라보았다.
플로는 그런 로자를 향해 호쾌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황성 주변의 부지런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은 기둥도... 영원하진 않을 겁니다. 미래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니까.”
플로의 무거운 목소리에 로자는 평온하게 답했다.
“지금의 이리네님이 그러했듯... 후대에도 많은 이들의 신념과 의지를 규합시킬 누군가가 나타날 겁니다. 난세에는 성웅이 나기 마련이고, 그런 자의 곁에는 또다시 기둥을 자처하는 영웅들이 모여들 테니까요.”
“난세라.... 바칼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이 시기에 걱정할 부분은 아닌 것 같지만, 벌써부터 설레는군요! 하하!”
플로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로자는 눈부신 태양이 걸쳐 있는 황성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아무리 밝은 태양도 언젠가는 지기 마련이고 난세의 어둠 속에서 새로운 여명은 다시 비추기 마련이지요.”
차분하게 울려 퍼지는 로자의 목소리는 예견 같기도 했고, 지난날 스러져 간 수많은 불꽃에 대한 조의이자 경의를 표하는 것 같기도 했다.
플로가 씁쓸하게 황성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로자는 눈 여겨 보지 않는다면 알아채지 못할 미소를 짓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후에 찾아올 여명은 그들의 몫입니다.”
로자의 나지막한 말 뒤로 한 차례 온화한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격동의 시대를 이겨낸 자들을 향한 위로이자 축하였고, 또 다른 변화를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대를 치열하게 그려냈던 두 인물은 재건되는 황성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글 : 月
수도 외곽 객잔에 들어서는 사내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천계 해방 이후 객잔을 찾는 이들은 희망에 찬 이가 반, 전쟁의 참상으로 슬퍼하는 이가 반이었다.
그리고 그중 그늘진 구석에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이제 막 객잔에 들어선 로브를 둘러쓴 사내는 구석에 늘어져 있는 사내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스카 영감의 제자인가?”
로브를 둘러쓴 사내에게서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술잔을 비운 채 기운 없이 처져 있던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로브 안쪽으로 보이는 낯익은 얼굴에 사내의 눈동자에 놀라움과 의아함이 뒤섞인 채 비쳤다.
“주베닐 님?”
사내의 물음에 주베닐은 깊숙이 둘러쓰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벗어 내리며 덤덤하게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해방을 기뻐하며 축배를 들어도 모자를 판에 이곳에서 청승맞게 뭐하는 거지?”
“......”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던 사내는 자신의 볼품없는 모습이 창피한 듯 주베닐의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는 주베닐 님은 해방 이후 한동안 안 보이시던 것 같던데 이곳엔 웬일이십니까?”
“뭐...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목을 축이러 왔다고 해두지.”
덤덤하게 주베닐이 느긋하게 사내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느닷없는 주베닐의 합석에 기운 없이 바닥만 바라보던 사내의 시선이 의아하게 주베닐을 향했다.
“떠나십니까?”
“굳이 남아 있을 이유도 없으니까.”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니요. 연합군을 함께 이끌어 주신 영웅이지 않습니까?”
씁쓸한 미소를 흘린 주베닐은 테이블에 놓인 사내의 술잔을 빼앗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수많은 영혼과 시체 위를 밟고 지나 얻은 승리였다. 모두가 해방을 만끽할지언정 누구 하나쯤은 그 영혼에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야겠지.”
주베닐의 말에 무거운 시선으로 술잔을 바라보던 사내가 고통스러운 무언가가 떠오른 듯 술을 벌컥 들이켰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고 승리였는지...”
침울해 보이는 사내의 모습을 덤덤하게 바라보던 주베닐은 그의 술잔을 빼앗아 도로 술을 채워 들이켜고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오스카 영감에게 빚진 것이 있어 잠시 들른 참이었는데, 괜한 헛걸음을 한 것 같군.”
냉랭하기까지 한 주베닐의 목소리의 사내의 시선이 의아하게 그를 향했다.
사내를 바라보는 주베닐의 시선은 온기라고는 한 점 없이 지극히 냉철하고 차분했다.
“자네가 이리 나약한 자란 것을 안다면 저승을 향하던 영감이 억울해서라도 돌아올 것 같은 데 말이야.”
주베닐의 비아냥에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주베닐이 남은 술잔을 입에 털어놓고서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미련없이 몸을 돌리려는 주베닐의 뒤로 참담함이 섞인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승님이 없는 컴퍼니 도흐라니...”
기운 없는 사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사내를 내려다 본 주베닐이 무감각하게 한마디 던졌다.
“도흐라는 성이 그리 중요한가?”
“중요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승님 자체가 컴퍼니 도흐의 상징이자 그 자체였단 말입니다. 그런 곳을 제가 무슨 수로...”
마치 벌 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내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주베닐이 한심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컴퍼니 도흐라는 이름이 버겁다면 새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면 될 것 아닌가.”
“예...?”
어떻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냐는 듯이 사내가 불신 어리게 주베닐을 올려다보자 주베닐은 태연하게 말을 흘렸다.
“영감이 남기고 간 것은 이름 따위가 아니야 아직도 모르겠나?”
주베닐은 시원하게 술을 잔에 따르며 사내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술잔을 받아 든 사내가 망연히 술잔을 바라보자 주베닐은 쐐기를 박았다.
“도흐라는 성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죽기 전 영감도 말했을 텐데?”
“그렇지만...”
“컴퍼니 도흐는 더 이상 어느 한 가문에 속한 집단이 아니야. 이제는 상인 집단이라고 볼 수도 없지. 그래 말 그대로 컴퍼니...”
“더 컴퍼니...”
사내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애초에 이름이나 성 따위는 중요치 않으니 그보다 잘 어울리는 명칭은 없겠군.”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사내의 눈동자에 이체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애초에 스승님도 그 말을 남긴 것이었을 텐데...”
사내가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자 주베닐이 덤덤하게 물었다.
“이제 어찌할 건가?”
“컴퍼니 도흐는... 아니, 더 컴퍼니는 말씀하셨던 대로 더는 상인 조합이 아닙니다.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바칼의 잔재는 아직 곳곳에 남아있죠.”
그렇게 말한 사내의 눈동자에 결연함이 서렸다.
“저희는 총 사령관님... 아니, 최고 사제님과 귀족들이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지원할 것입니다. 물론 적절한 대가는 받아야겠지만요.”
“상인 기질은 어디 안 가는군.”
주베닐은 씨익 미소를 짓고는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느긋하게 몸을 돌리는 그의 모습에 사내가 불현듯 그를 불러 세웠다.
“주베닐 님! 다시 뵐 수는 있는 겁니까?”
고개를 반쯤 돌리고 멈춰 선 주베닐의 얼굴에 설핏 웃음기가 어렸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곳은 지옥일 테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라야 할 거네.”
글: 성종
“자! 그럼 역사 공부를 시작해 볼까?”
천계 어디에나 있는 퀴퀴한 연구소.
“...미쉘. 미쉘?”
“......”
미쉘이라 불린 아이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한껏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꼬마 천재 미쉘 님께서 왜 이렇게 입이 나오셨을까?”
안경을 쓴 사내의 말에, 볼멘 목소리가 돌아왔다.
“...안 나왔거든요. 꼬마 아니거든요.”
펑.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계 혁명.
천계가 용의 압제에서 벗어난 날을 기념하는 사제 축일.
저녁이 되자 연구소 밖은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이곳, 반지하의 콘크리트에도 소리와 빛은 스며들고 있었다.
사내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자, 오늘은 사제 축일에 맞춰, 기계 혁명 당시에 대해...”
미쉘이 사내의 말을 잘랐다.
“다 알거든요.”
“최초의 최고 사제는 이리네 님. 최초의 제너럴은 플로 님. 기계혁명 연도는... 연도는... 하여튼! 다 안다고, 헤르만. 외우기만 하고, 역사 하나도 재미없어.”
헤르만이라 불린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 역사도 좋아하던 미쉘이 오늘은 달랐다.
아마 연구소에 틀어박힌 이 상황에 불만이 있는 것이리라, 헤르만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겐 외출할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그의 설계도를 노리는 귀족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번잡한 축제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했다.
물론, 그러한 위험이 온전한 그만의 것이었다면 기꺼이 감수했겠으나, 미쉘까지 위험해질 수 있기에 그는 토라진 미쉘 앞에 서 있기를 선택했다.
헤르만은 그런 사람이었다.
대꾸가 없자, 미쉘이 조금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 없단 말야.”
미쉘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헤르만의 처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외출하고 싶은 마음을 티 내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도 했지만,
생각과 달리 삐죽 나온 입과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직은 어색한, 열두 살의 미쉘은 그런 아이였다.
헤르만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늘 역사 공부는 조금 다를 예정이었는데... 아쉽네.”
헤르만의 말에, 미쉘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황궁에서도 모르는건데... 진짜 나라서, 천계 최고의 기술자라서, 마이스터 헤르만이라서 알고 있는건데...”
“......”
계속해서 헤르만이 미쉘의 기색을 곁눈질하며 추임새를 띄웠다.
“아쉽다, 아쉬워.”
“오늘밖에 진짜 기회가 없는데.”
“내일이면 나도 까먹을지도...”
결국 미쉘은 몇 번쯤 더 눈썹을 꿈틀대더니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뭐, 뭔데.”
기억력이나 이해력 따위가 아닌, 모르는 것 앞에서의 순수한 호기심과 탐구심.
헤르만이 알아본 미쉘의 재능이었다.
이어서 헤르만이 꺼낸 얘기는 정말로 그가 아니면 모를만한 이야기였다.
“바칼이 남겼다는 유산들에 대한 소문인데...”
“유산...?”
헤르만은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내 자신이 아는 것을 어떻게 정확히 전달할지에만 집중했다.
미쉘이 이 말들을 기억할까? 이런 것들을 지금 얘기해도 될까? 헤르만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다 한들, 미쉘은 그의 동업자이자, 믿음직한 동료였으니.
단지 자신의 얘기로 미쉘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진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미쉘은 집중하는 듯, 가끔은 다른 생각에 빠진 듯 조용히 듣곤, 질문했다.
“근데 헤르만은 어떻게 그렇게 뭐든 잘 알아? 나는 모르는데.”
“글쎄, 왜일까?”
누구나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당연한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연하게 대답하지도 않았다.
두 공동 연구자의 대화 방식이었다.
“음...”
가벼운 반문에 미쉘은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더니, 자신의 답을 꺼내놓았다.
“나 몰래... 꿀떡을 많이 먹어서...?”
헤르만은 가끔 미쉘의 생각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꿀떡을 먹으면 본인 머리가 잘 돌아가서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모를 일이었다.
“음... 그건 아니란다.”
“그럼?”
헤르만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역사 속 거인들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지.”
“거인...?”
헤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쉘이 이해가 되지 않은 듯, 고민에 빠졌다.
“거인... 큰 사람 같은 거... 게이볼... 그...?”
그리고, 헤르만은 한 번 더 미쉘의 생각을 따라잡지 못했다.
“게이볼그! 거인! 헤르만! 게이볼그구나! 대박이다!
“어... 응?”
“소형화된 게이볼그가 알려주는구나! 와! 이제 알았다. 맞아. 옆에서 카모플라쥬 기술을 적용해서... 차원 장치로 통신해서...”
미쉘의 동공은 이미 현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이에게 게이볼그란 뭘까.
헤르만은 궁금증이 이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하하. 그것도 아니란다.”
“뭐야.”
김샌 표정을 하는 미쉘에게, 헤르만은 조용히 들고 있던 역사책을 내밀며 말했다.
“거인들은 여기 있단다.”
헤르만이 건네준 페이지엔, 과거의 마이스터들, 선인들이 제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7인의 마이스터들, 플로, 로자, 오스카, 사라 웨인을 비롯해 역사 속 연구원, 병사들 하나하나까지.
연구 서적을 뒤질 때마다 나오는 얼굴들, 표정들, 이름들이었다.
그들은 책 속에서 약속한 듯 하나같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탄의 성질을 고민하며 서적을 살필 때마다, 흰 머리의 흉터가 인상적인 남자는 얼굴을 비췄다.
인간의 몸에는 너무 과분한 탄들을 보고 있자면, 용의 피부가 얼마나 질긴지 피부에 닿는 듯했다.
합금을 다룰 때마다, 눈 밑에 피로가 짙은 여성이 있었다.
용의 손톱을 금속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연구를 보며, 헤르만은 선인들의 공포와 오만을 동시에 읽었다.
차원에 대해 연구할 때마다, 미쉘과 똑같은 성씨의 선조가 헤르만의 세계를 넓혀주고 있었다.
그때 헤르만은 다른 시공간이 필요할 만큼 참혹했던, 과거의 천계를 떠올렸다.
천계를 배신했던 남자의 연구도 있었다.
그 사진과 이름은 배신으로 얼룩져 지워졌지만, 기술은 남아 생생히 이어지고 있었다.
헤르만의 생각에, 그들은 거인이었다.
그들은 거인이어서, 죽은 뒤에 시체로 천계를 이루었다.
거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켜켜이 타고 올라 산맥이 되었다.
헤르만 자신은 그 산처럼 쌓인 몸들을 이리저리 올려보다 겨우 꼭대기라고 생각되는 어깨에 매달리려 할 뿐이었다.
이 거인들은 무엇을 그렇게 멀리 내다보려 산이 되었을까.
헤르만이 하나의 질문을 품고 있을 때, 책을 보던 미쉘이 그를 깨우듯 또 다른 질문을 가져왔다.
“별로 거인같이 생기진 않았는데... 최고 사제? 이 사람도 거인인가? 최고 사제는 누구한테 기도하는 거야?”
미쉘이 질문과 함께 책을 펼쳐 보였다.
거꾸로 든 책에, 헤르만의 고개가 잠시 옆으로 기울여졌다.
시선의 끝에, 분홍색 머리가 인상적인 여인이 있었다.
... 초대 최고 사제, 알데라민 이리네 폰 릴리오.
연구 서적에선 보지 못했던, 기도하는 듯한 표정.
헤르만은 미쉘에게서 책을 다시 받아들었다.
... 이후 초대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본인의 확고한 주장으로 최고 사제직에 등극 ...
... 작전에 나서기 전 언제나 기도를 했으며 ...
... 전쟁이 끝나고도, 늘 그곳이 전장인 것처럼 기도하곤 했다 ...
... 최초의 사제가 누구에게 기도했는지 현재로서 기록되어 있진 않다 ...
그간 숱한 최고 사제들이 있었음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몇 페이지에 걸쳐, 사제들의 이름과 얼굴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많던 역사 속의 사제들은 누구에게 무엇을 기도했을까.
그 많던 역사 속의 거인들은 다른 거인의 어깨 위로 힘겨이 오르며 무엇을 하고자 했을까.
헤르만은 문득 이 질문들이 버겁게 느껴졌다.
또, 자신이 만들어 낼 설계도를 떠올리며, 그것이 답을 모르는 자신에게 주어져서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역사 속의 거인들은 용을 물리치고 하늘을 되찾았으나, 이제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과 싸운다.
전란은 절대 멈추는 법이 없었고, 어쩌면 헤르만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이 그것을 더욱 부추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미쉘은 헤르만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헤르만. 생각해보니 나도 기도했다?”
헤르만이 되물었다.
“기도?”
“응. 기도. 누구한테 기도했는지는 나도 몰라. 헤르만이 같이 축일에 놀러갈 수 있게 해달라고... 그냥 기도해봤어.”
미쉘의 말에, 헤르만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근데, 기도처럼 안되더라도 이젠 괜찮아. 아까까지는 안 괜찮았는데.”
이 작은 아이는 자신에게 기도했다.
마치 헤르만 자신이 미쉘의 신인 듯.
헤르만은 무심코 그 자신 또한 기도해온 사람인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기도는 무엇을 염원했는지 떠올려보았다.
그가 기도하는 것은 안녕뿐이었다.
자신의 신이 그저 안녕하길.
미쉘이 그저 조금은 더 안녕히 살아가길.
서로가 서로의 사제이자, 신이었다.
헤르만의 눈이, 역사 속 최고 사제의 눈과 마주쳤다.
눈빛은 말을 전하고 있었다.
“천계에 필요한 건 추앙받는 황제가 아니라 서로의 기도를 모아줄 사제일 뿐입니다.
그 기도들은 단지 서로의 안녕을 빌었을 따름입니다.
기도를 받은 신들은, 용족이 없는 세상을 기도했던 나약한 인간들의 기대를 들어주기 위해 거인이 되었고,
거인들은 다시 앞선 거인들의 어깨를 기어올랐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왔고, 하고자 했던 것의 거의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헤르만은 소리내 책을 덮었다.
책 속의 인물이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인지, 어디선가 봤던 기록을 떠올린 것인지 모호했다.
그는 굳이 그것을 규명하려 하지 않았다.
시선을 옮기니,
자신의 신이자, 사제가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작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쉘. 나가자꾸나. 쉽게 오지 않는 축일이니.”
헤르만의 말에, 미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읍. 아니지... 괜찮아...?”
“그럼.”
“정말...?”
헤르만은 대답 대신 웃었다.
두 사람은 단출한 짐을 챙겨, 겐트 뒤편의 야트막한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을 오르는 길은 평탄했지만, 꽤 숨이 찼다.
각자 길가의 나뭇가지를 주워 지팡이 삼았다.
대화는 없었다.
단지 조금 가빠진 숨소리와, 발을 땅에 딛는 소리, 가방 고쳐 매는 소리만이 있었다.
이 시각에도 어딘가에선 헤르만을 찾기 위한 카르텔의 수색이 계속되고 있었다.
헤르만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용들의 압제 속에서 선인들이 겪었던 것, 헤르만은 언덕을 오르며 그것을 떠올렸다.
카르텔 귀족들의 감시 따위는 아주 작은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불꽃을 구경하기 좋게 넓이 트인, 한적한 장소였다.
두 사람은 앉아서 가져온 간식을 나누거나,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을 맞으며 불꽃을 기다렸다.
불꽃은 꽤 오랫동안 터지지 않아서, 둘은 침묵 속에 놓여있었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헤르만이 말했다.
“이제는 안 궁금해? 최고 사제가 누구에게 기도했는지.”
미쉘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음... 궁금하긴 한데, 물어보진 않을래. 헤르만도 혼자 알아낸 것 같으니까.”
“하하, 그럴래?”
“그래도 역사 공부는 나랑 별로 안 맞는 것 같은데... 음... 그래! 그냥 이렇게 하면 되겠다.”
“어떻게?”
“시공간 장치를 만들어서~ 과거로 가서~ 내가 다 눈으로 확인하면 되겠네! 직접 물어도 보고!”
과장된 말투에 헤르만은 작게 웃었다.
그는 언젠간 자신이 정말로 미쉘을 따라잡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되면 헤르만이 제발 나 좀 데려가 달라고 해야 할걸!”
“그거 기대되는데.”
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으로 모였다.
그 사이로, 폭약이 돌고래 소리를 수놓으며 솟구쳤다.
“와! 불꽃이다!”
“오.”
“헤르만, 그거 알아? 불꽃놀이에서 불꽃의 색을 결정짓는 건 화약에 어떤 금속을 쓰느냐에...”
“응, 예쁘네.”
펑.
하늘을 되찾던 그날도, 지금도, 똑같은 소리와 빛이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땅에 빛이 내려앉자, 거인들이 있었다.
거인들이 있었고,
거인들 사이, 분홍 머리의 최고 사제는 큰 몸집으로 여전히 무언가를 기도하는 중이었으며,
그 아래, 신의 도시 겐트는 잠시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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