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벗은 뱀
방금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게 좋을 거야. 테라코타의 늙은 여우. 그렇지 않으면 쥐도새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이 네게 찾아갈 테니.
크흐흐, 염려말게. 자네야말로 약속을 주문처럼 기만하는 일은 없으면 좋겠군.
이거, 잠귀가 예민한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었나보군.
어머~ 익숙한 얼굴이네.
이건 어비스의 기운... 당신은?
킥킥, 다시 보자고, 모험가. 당분간은 암시장에 계속 머물 생각이니까.
<퀘스트 완료>
심연의 끝
자스라? 자스라...
이전 카쉬파의 수장이었던 그 자스라 말인가요? 하지만 그녀는...
그래, 카쉬파 내부의 암투로 언니와 함께 제거되었다고 알려졌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정체를 밝혔네. 그동안 어디에 숨어있던 건진 모르겠지만, 카쉬파의 눈을 피해 지독할 정도로 납작 엎드려 있던 모양이야.
그런가요? 론 님답지 않게 남의 말을 너무 쉽게 믿으시는군요.
그래, 처음엔 나도 의심했지만 내 마법을 파훼한 실력은 분명 주문 기만자의 솜씨였네. 보이드가 파훼되는 걸 보니 예전에 마주쳤던 트리플 케이트 모아의 모습이 그녀 위로 겹쳐보이더군. 크흐흐, 마력은 숨길 수 있어도 피는 숨길 수 없는 모양이야.
...확실히 강대한 마력이 느껴지긴 하더군요. 회합에 참여했던 조직들의 대표들에 버금갈 정도로요.
그래서 그녀와 무슨 약속을 했죠?
이런, 거기까지 들었는가? 크흐흐, 별 거 아닐세. 다같이 쓰레기장에서 뒹구느라 피곤한 상황이라 뒷정리를 조금 도와달라고 했을 뿐이니.
암시장의 자스라에게 그동안의 이야기에 대해 듣기
<퀘스트 완료>
후후,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암시장의 공기가 이렇게 상쾌하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퀘스트 완료>
기다리고 있었네.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네라면 언젠간 찾아올 것 같았거든.
크흐흐, 농담일세. 주문 기만자와 얘기는 나눠보았나?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그녀의 제안은 충분히 합리적이었고, 나도 품 안에서 만지작거릴 수 있는 카드가 그리 많지 않았으니 말일세.
그녀가 이끄는 새로운 카쉬파는 이전과 전혀 다른 조직으로 태어날 걸세. 자스라야 앞에선 여전히 으르렁거리겠지만, 조직을 장악하고 검은 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뒤로는 우리에게 협조적일 수밖에 없을 테지.
그 점을 이용해 이번과 같은 일이 절대 벌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테라코타의 감시 하에 둘 생각이네. 이번에야말로 쉽게 부숴지지 않을 튼튼한 목줄이 되어야하니 말일세.
Time to Go Home
돌아갈 시간
글: ±0 / 그림: Lazaroos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너덜너덜했다. 희끗한 머리카락은 그을려 있었고, 코끝에 걸친 안경은 한쪽이 깨져 제 기능을 못 했다. 얼굴의 상처에서는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려 피와 섞여 바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남자는 이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바쁘게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켈켈켈... ”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르텔이 해체되고 나서 황실의 수배를 받았다. 가까스로 추적을 피했지만, 특별 부대까지 편성해서 쫓아오는 황실의 개들을 뿌리치기에는 점점 힘에 부쳤다. 사도 안톤이 나타나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았다면 진작에 잡혀서 끌려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사도 안톤은 쓰러졌고, 혼란스러운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어갔다. 수습이 끝나면 다시금 추격을 받게 될 것이라... 남자는 아직은 잡힐 수 없었다. 이루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미 천계 안에서는 갈 곳이 없었다. 황도 겐트가 있는 이스핀 섬은 물론이고, 이튼 공업지대와 노스피스에는 천계군이 가득했다. 히링 제도 안에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동안 방치되어있던 웨스피스에도 천계군이 밀고 들어왔다. 덕분에 미리 마련해둔 은신처도 모조리 박살이 나버렸고, 비축해놓은 물자도 바닥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천계군 휘하 전략정보국의 의지였다.
결국 남자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 이상 천계에 머물렀다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판이다. 그렇다면 천계가 아닌 곳으로 가야 한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곳은 아랫세계라고 불리는 아라드와 저 멀리 짙은 안개에 가려져 다가가기 어렵다는 선계, 그리고 사도 안톤이 죽으면서 모습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건물과 그곳을 통해서 갈 수 있다는 미지의 세계 ‘마계’였다. 수많은 예측이 남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라드로 향하면 분명 제국이라는 놈들의 추격을 받을 것이다. 선계도 마찬가지다. 그곳으로 가는 항로는 이미 모두 막혀있을 것이고, 뚫었더라도 안개에 가로막혀 선계에 진입조차 못 할 것이 뻔했다. 정말로 운이 좋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거의 0에 가까운 가능성에 목숨을 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정체불명의 건물에 올라가는 것도 무모했다. 모두의 이목이 쏠려있는 곳이기도 했고, 그걸 둘째 치더라도 올라가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남자가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떠안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그 여인이 나타났다. 낯설지 않은 분위기의 여인은 자신을 마계의 마법사라고 소개했다. 천계의 것이 아닌 복장, 온몸에서 새어 나오는 신비로운 느낌과 알 수 없는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여인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귀가 솔깃할 이야기를 전한다. 바로 정체불명의 건물로 올라가란 이야기였다.
‘분명히 최상의 선택이었지.’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남자는 속는 셈 치고 여인의 말을 따랐다. 정체불명의 건물은 죽은 자의 성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바칼이나 안톤과 같은 사도가 머문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지식을 얻는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여인의 말대로 기다리고 있었더니 손쉽게 사도의 지식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얻어낸 지식은 상상 이상이었다. 평생을 쌓아 올린 지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새로운 것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뛰어난 지식과 기술이 있어도 이걸 받쳐주는 재료가 없다면 없느니만 못하다. 하지만 이곳 ‘죽은 자의 성’에는 재료들이 넘쳐났다. 사도를 따르다 죽어간... 아니, 기능을‘정지’한 존재들. 그들의 육체야말로 뛰어난 재료였다. 남자는 지식의 광기에 물들어 죽은 자의 성 깊은 곳에 숨어서 이것들을 이용해 하나둘 지식을 흡수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인이 다시 나타났다. ‘이제 마계로 갈 때입니다.’ 남자는 웃어 보였다. 여인의 인도를 받은 남자는 죽은 자의 성을 벗어나 처음으로 마계에 발을 딛게 된다. 암흑이 가득한 절망의 세계. 하지만 남자의 눈에는 다채로운 것들이 차고 넘치는 보물고로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어비스’였다. 형체를 가늠할 수 없지만, 무한의 에너지를 담고 있었고, 생명마저 깨우는 신비의 재료. 이런 걸 목숨을 걸고 몸에 이식해서 사용한다니 미친놈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마계인들, 특히 카쉬파라는 놈들에게 흥미가 생겼다.
불완전하긴 했지만, 어비스를 이용해서 만든 조각에 흥미를 보인 카쉬파가 자신을 찾아왔다. 다소 거칠었지만 녀석들 나름대로 정중한 방식이었다. 어찌되었건 칙사라는 놈을 만나게 되었고, 뒤이어서 수장과 부수장이라는 것들을 만났다. 놈들이 나에게 원하는 건 하나였다. 어비스 조각을 이용해서 무기를 만들어 달라. 그리고 어비스를 품고 죽어가는 자들을 개조해서 쓸모있게 만들어 달라. 생각 이상으로 미친 놈들이었다. 그것도 남자의 취향과 딱 들어맞는 그런!
남자는 기꺼이 동참했고, 그에 걸맞은 설비를 얻었다. 카쉬파 놈들은 어디서 얻었는지 몰라도 어비스를 품고 죽어가는 재료들을 잘도 주워왔다. 물론, 이미 죽어서 어비스가 사라진 재료는 써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이것들을 기계로 개조해서 쓸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자의 특기였으니.
‘글러 먹었어.’
처음 카쉬파 놈들에게 들었을 때는 뒤처진 문명에서 마법 하나로 연명하는 놈들이라고 들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을 가치가 없는 상대였다. 카쉬파가 원하는 대로 적당히 놈들을 박살 내주고 여기서 원하는 것을 챙겨서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실패했다.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도 한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는 자만심이 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 원인이 아니다. 죽은 자의 성에서 얻은 사도의 지식을 모두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도 실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파리 잡는데 게이볼그를 쓸 수 없는 노릇 아니던가? 게다가 카쉬파가 가져오는 재료에도 한계가 있었다. 주어지는 것에서 최대의 효율을 냈고, 이 정도면 마계를 정복하지는 못해도 세력을 크게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 주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남자가 생각하는 실패의 원인은 단 하나였다. 바로 예상치 못한 커다란 변수. 바로 ‘모험가’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카르텔에 몸을 담고 있을 때도 모험가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다. 어찌 보면 지금 이곳에 있는 것도 모험가 때문이다. 무언가 이룩해내려고 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멜빈 만큼이나 짜증 나는 존재다. 여인은 이 또한 칼날을 연단 시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번에도 모험가에게 당해서 이 길고 복잡한 통로에서 역한 냄새를 맡으면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실험실이 보였다. 전투의 충격인지 문이 부서져 사라졌고, 입구 곳곳은 무너져 내려 있었다. 다행인지 모르지만, 남자의 몸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일부는 무너져 내린 돌덩어리에 깔려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남자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무사한 것 같았다. 틈을 비집고 들어오느라 옷이 찢어지고 상처가 나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지 여기저기 뒤져서 물건을 챙기기 시작한다.
“이것도 챙기고... 이것도 필요하겠군. 그리고... 시슬레 녀석의 생체 개조 데이터를 빼돌린 게... 여기 있군. 아차, 가장 중요한 데이터 칩! 잊을 뻔했군.”
한참을 짐을 챙기던 남자가 멈칫하고 고개를 든다. 그리고 여태까지와 다르게 섬뜩한 무표정으로 한쪽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여인이 서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여인을 응시했다. 시선을 받은 여인은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지팡이로 바닥을 살짝 내리쳤다. 바닥에 닿은 지팡이 끝에서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남자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거대한 돌덩어리가 시간이 멈춘 듯이 정지한다.
“돌아갈 때입니다.”
남자는 머리 위를 슬쩍 보고는 돌덩어리를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여인이 마법을 풀자 남자가 서 있던 장소에 거대한 돌덩이가 큰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켈켈켈... 얻을 건 다 얻었어. 이곳에 미련은 없다.”
“다행이군요.”
여인이 다시 지팡이를 휘두르자, 공간에 균열이 생기면서 차원의 문이 조금씩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남자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중한 짐을 꽉 부여잡았다.
“이번엔 어디지?”
완전히 열린 차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남자는 여인을 향해 돌아보며 물었다. 여태까지 여인이 시키는 대로만 향했다. 가는 곳마다 새로운 것이 있었고,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주 먼 옛날에 만났던 그 누군가와 비슷한 것 같았다. 분명히 그 여자도...
“죽은 자의 성입니다.”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는 ‘켈켈켈’하는 웃음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원의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곧 갈라졌던 차원의 균열이 사라지고 원래의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모든 것이 끝나자 여인은 미소를 짓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벽 너머로 신에게 도전이라도 하려는 듯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 탑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정체불명의 검은 구체가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심상치 않게 요동쳤고, 검은 구체의 압력 때문인지 탑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기도 했다. 이런 위태로운 장면에도 여인은 태연하게 이를 바라보며, 사라진 남자가 미처 듣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곳이라면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죠. 지젤 로건.”
어느새 여인이 보던 풍경은 변해있었다. 거대한 검은 구체는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앉았고, 창공의 주인이 나타나 이를 소멸시켰다. 순간, 세상이 멈춘 듯이 찰나의 정적이 일어났다. 여기까지 지켜보던 여인이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내리쳤다. 몸 주변으로 마법진이 생기면서 환한 빛이 솟아올랐다.
“이제 모두가 돌아갈 시간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여인이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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