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다시 천계로
마계에 솟아오른 차원의 폭풍은 곳곳에 기둥을 만들고,
마나를 흩뜨리고, 산 자를 집어삼키고 있다.
지금의 마계를 뒤로 하고 걷는 걸음은 결코 가벼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생긴 폭풍이 아랫세계인 천계,
그리고 아라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작은 실낱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며 조금씩 불안을 키우고 있다.
그러니 가야만 한다.
그곳에서 생겨날 혼란을 막기 위해, 가진 힘이 옳은 곳에 쓰일 수 있게.
다시, 천계로.
젤바의 죽은 자의 성 입구에서 마계의 폭풍이 천계에 미친 영향 확인하기
<퀘스트 완료>
부연 물안개에 덮인 젤바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파도마저 잠든 바다는 잔잔히 밀려 들었고,
죽은 자의 성 조사를 위해 천계-제국 동맹이 마련했던
임시 병영은 텅 비어 있었다.
그간의 걱정이 괜한 기우였나 싶어 다시 발길을 돌리려 할 때,
다른 곳도 아닌 머리 위, 하늘에서 모험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험가, 여길세! 여기, 위를 보란 말이네!
세인트 혼? 어떻게 천계에…
세인트 혼의 안내
여어. 모험가! 낯익은 인물이 죽은 자의 성에서 나오기에 와 봤더니, 역시 자네였군. 자네도 소식을 듣고 온 건가?
응? 어째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인데? 아아, 그러고 보니 천계에 올라 온 뒤로 자네를 만나는 건 처음인 것 같군.
황녀가 궁으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네. 섭정의 인을 가진 그 귀족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나 했는데, 일을 친 건 그가 아닌 그의 딸이더군.
아비 되는 쪽은 뒤늦게 돌아와 사달을 수습하기 위해 철없는 황녀가 유람을 떠나느라 궁을 비웠다는 거짓을 꾸몄지.
천계의 사정이야 뭐, 내겐 바다 건너 불구경이지만, 이번 역시 제국이 얽혀있어서 말이야.
작위까지 줘 가며 동맹을 맺었더니, 믿었던 자가 다른 귀족들은 물론 자기 딸조차 제대로 간수 못하는 인물이란 걸 알게 됐다면… 제국은 어떻게 나올 것 같은가?
세인트 혼은 황녀의 편에 서기로 했네. 천계에 올라와 있는 건 다 그 때문이지. 아, 그래. 자네, 이참에 겐트로 가 주지 않겠나? 자네가 힘을 실어준다면 이번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릴 것 같은데.
곧 뱃머리를 돌려야 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없군. 겐트로 가 모래바람의 베릭트를 만나게. 그와 이미 안면이 있을테니, 남은 이야기는 그에게 듣는 것이 좋겠네.
겐트에 있는 모래바람의 베릭트 만나기
모험가? 귀한 손님이 올 거라더니, 자네였나.
악당과 영웅
놀랐나 보군. 하긴, 고매하신 천계의 황녀께서 무법지대 출신 늙은이에게 직접 명을 내릴 줄 누가 알았겠나. ‘황궁을 제대로 뒤엎어보라’니. 이거야 원, 영 거절하기 힘든 제안 아닌가?
허, 자네. 정말 하나도 모르고 있군. 설마 그 소식조차 전해 듣지 못하고 온 건가?
이제, 날이 밝는 대로 잭터 이글아이는 처형될 걸세.
옥좌가 눈앞에 있는데 귀족들의 인내심이 남아 나겠나? 이글아이를 처형한단 소식을 천계 전역에 퍼뜨려, 이를 전해들은 황녀가 눈물을 흘리며 버선발로 환궁하길 기다렸겠지.
헌데 말이야. 모르는 사이 황녀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모르겠네만, 제법 강단이 생긴 것만은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적인지, 아군인지 확신할 수 없는 무법지대 늙은이에게 이글아이의 목숨을 맡길 리 없지 않은가?
그 맹랑한 손이 빚어낼 천계가 나로서는 꽤 궁금해지더군. 하여 제대로 사고를 쳐 볼까 하네.
황녀의 명에 따르고자 함이 아닌,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보내기엔 아까운 나의 천적을 위해 말이야.
자네는 어떤가? 대우받지 못하는 천계의 영웅 놀음은 관두고 나와 함께 황궁을 뒤엎어 볼 생각 없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뭐, 좋네. 다만 이것만은 알아주게. 이글아이의 목이 달아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네.
모래바람의 베릭트를 만나 잭터 구출을 돕겠다는 뜻 전하기
<퀘스트 완료>
함께 해 줄 것이라 생각했네. 모험가, 고맙네.
새장에 갇힌 매
이글아이가 갇혀있는 곳이 어딘지는 이미 알고 있네. 옥문을 여는 일도 걱정하지말게. 젤딘, 그 녀석이 다 준비를 해 두었더군.
무법지대 카르텔 출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더니, 그간의 일을 겪으며 녀석도 나름 철이 든 모양이야.
자, 그럼 슬슬 움직이세. 새장에 갇힌 매가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
겐트 황궁 내 전옥서에 갇힌 잭터 이글아이를 만나 구출하기
<퀘스트 완료>
만월이 제 빛을 펼쳐놓은 밤이었다.
짝 잃은 풀벌레가 우는 소리, 우물에 둔 함박에 물젖는 소리,
밤 순찰을 맡은 경비의 늘어지는 하품 소리 사이로
밤손님의 발소리가 언뜻 비쳤다.
부러 몸 숨길 어둠을 찾지 않아도,
해이한 궁궐의 경비를 뚫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감히 누가 천계의 귀족들이 들어 앉은 황궁을 헤집어 놓겠는가’란
오만이 등불이 되어 침입자의 밤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천하의 이글아이도 정든 생을 마치려니 잠이 오지 않는가 보군.
다른 죄인들이 수감된 곳과는 멀찍이 떨어진 전옥서 외곽.
부르는 소리를 알아들은 잭터가 미동 없이 조용히 답을 건넸다.
이곳까지 숨어들어오다니, 그 재주는 녹슬지 않았군. 베릭트.
어인 일인가? 어울리지 않게 작별인사라도 하러 온 건가?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 않은가?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무법지대에서 서로 총구를 겨눴던 원수가 죽는다니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어지더군.
하여 여기, 모험가에게 부탁해 잠행하였네. 역시 천계의 영웅님과 동행하니 오는 길이 수월하군.
…모험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어둠에 푹 잠겨있던
잭터가 모험가란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묻는 말은 하나였다.
황녀님은 무사하신가?
눈물 나는 충정이군 그래. 당장 모가지가 날아가게 되었어도 황녀가 먼저란 건가.
실컷 비웃었다면 돌아가게. 저승길만이라도 혼자 걷고 싶으니.
뻣뻣하기는. 자넬 위해 밤이슬을 맞아가며 황녀의 서신을 가져온 나에게 너무 야박한 것 아닌가?
황녀님께서 서신을?
베릭트는 품 안의 온기가 묻은 황녀의 서신을 옥문 사이로 건넸다.
둘둘 말린 서신을 감싸 묶고 있는 것은 잭터의 눈에 익은 붉은 댕기였다.
짙은 고동색 문 뒤에 홀로 머물던 아이를 위해 그가 준비했던 서툰 마음.
잭터는 그 댕기의 까슬한 끝을 매만져보다, 서신을 열어 내용을 읽어 내렸다.
……
황녀도 제법 성장한 것 같더군. 더 이상 전에 알던 꼬맹이가 아닌 듯 싶어.
…명을 받들겠네.
죄수의 차림을 한 잭터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으나, 이내 비틀거렸다.
벽을 짚으며 중심을 찾는 그를 본 베릭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문초를 받은 건가. 명색이 천계의 총사령관인데, 대우가 엉망이군.
다친 곳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고질병이 된 것 뿐일세. 꼴이 이러하니, 속도를 내기가 어렵겠군. 허니 더욱 서둘러야겠네. 어서 문을 열어주게.
준비한 열쇠는 옥문에 걸린 자물쇠에 경쾌하게 맞아들었다.
닫혔던 문이 열리자, 절뚝이며 바깥으로 나온 잭터가 모험가를 바라봤다.
어깨를 힘주어 잡는 손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은 지친, 허나 그 무게만은 잃지 않은 목소리가 잔잔히 귓가에 와 닿았다.
잊지 않아주어, 고맙네.
언제고 갚을 길이 있다면 좋겠군.
한밤 중의 소란
<퀘스트 완료>
이 속도로 가다간 나란히 저승길 동무가 되겠어. 다른 수를 써야겠네.
혈연
<퀘스트 완료>
으윽!
어머니!
코엔, 저자를 붙들거라. 유르겐 공께 데려가면 우리 가문을, 아니, 너를 어여삐 여겨 기회를 주실 게다. 어서!
어머니, 제발 그만 좀 하세요! 그자는 우릴 이용하는 것뿐이에요.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하이람 대장 몰래 절 궁으로 부른 건 어머니를 볼모 삼아 제게서 대장의 흠을 캐려던 거라고요!
말 조심 하거라! 네가 떠나고 위태롭던 우리 가문을 유일하게 살펴 주신 분이 유르겐 공이시다. 그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었을 성싶으냐?
어머니, 제발…!
쓰러진 어미를 끌어안은 아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축축이 젖어가는 눈을 감고 다시 숨을 고른 코엔은
모험가를 향해 눈을 돌렸다.
모험가, 지금 여기서 내가 전력을 다해 덤벼도 네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거 알아. 그래도 혼자였다면 죽을 각오하고 덤벼라도 봤을 거야.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어머니를 살리는 일이야. 그러니까…
모험가, 이렇게 빌게. 제발… 내 어머니를 살려줘.
코엔!
여기서 널 봤다는 말, 절대 하지 않을게. 누가 물어도 끝까지 잡아 뗄 거야. 어머니라면 걱정 마. 내가 그리 하면, 내 어머니 역시 그리 말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제발…
코엔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그의 어미의 마른 볼 위로 뚝뚝 떨어졌다.
몇 년 만에 만난 아들이 보인 진심에 그 어미의 눈에도 달무리가 졌다.
천천히 무기를 거두자, 그제야 맘이 놓였는지
흐느낌을 삼킨 코엔이 모험가를 향해 살짝 고갯짓을 해 보였다.
고마워, 모험가.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
그때, 쇠갑옷끼리 부딪히며 절걱대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대여섯 병사의 발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협력하는 척하고, 모험가나 도망친 죄수를 발견하면 다른 누구보다 우선 나한테 먼저…
이 목소리는…
오발탄
제국 근위대
황녀님, 이번 일을 슈만 공께서 아시면 저희는 정말 큰일납니다.
아니, 내가 제국의 황녀인데 지금 누구 눈치를 보는 거예요? 제국에 돌아갔을 때를 생각하면 내 말에 잘 따르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죠?
…네, 알겠습니다.
황녀님, 어찌 이곳에 나와 계십니까?
유르겐 공.
제국군의 힘을 빌릴 수 있도록 허하여 주신 것은 황송하오나, 소란을 일으킨 죄인의 죄질이 좋지 않아 황녀님의 안전이 저어된다 말씀드린 줄로 압니다.
그래도 그만한 죄인이 제국의 동맹국을 어지럽히는데, 제국의 황녀인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요? 조금이라도 거들어야 나중에 아바마마를 뵐 면목도 생길테고…
…언젠가 황녀님께서 물으셨지요.
?
‘천계의 옥좌는 에르제의 것인 줄 알았으나, 섭정의 인은 저 네빌로가 가지고 있고, 궁에 와 보니 죄 귀족들뿐이라, 당최 누가 천계인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저 역시 경황 중이라 적절한 답을 드리지 못하였으나, 때때로 계신 곳을 잊으시는 듯하니 감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천계는 이곳에 있습니다. 황녀님께서 보고 계시는 바로, 여기, 이곳에 말입니다.
이자벨라는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으나,
네빌로는 여느 때처럼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자벨라가 무어라 말을 던지려 입을 뗀 바로 그 때,
네빌로의 두루마기 속에 감춰져 있던 낡은 무전기에서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잭터가 여기 있다. 잭터 이글아이를 찾았단 말이다! 게 아무도 없느냐? 잭터가…
저의 여식, 마리안이 죄인을 찾았나 봅니다. 일은 탈없이 마무리될 듯하니, 다른 염려 놓으시고 처소로 돌아 가 쉬시지요.
저는 이 길로 마리안에게 가 봐야겠습니다. 죄인과 함께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아비된 마음으로는 딸에 대한 걱정을 놓을 수 없군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참나. 젤바에 있을 때랑은 완전 딴판이네. 저러면 내가 기라도 죽을 줄 알아? 제국의 황녀인 내가 에르제와 같을 거라 생각하면 섭하지.
(네빌로의 뒤를 쫓아야겠어.)
<퀘스트 완료>
이쪽이야!
터진 연막탄에서 피어난 연기가 눈을 찌르며 시야를 흐렸다.
잭터를 데리고 움직일 절호의 기회였다.
절뚝이는 잭터를 부축한 채, 부르는 외침이 들리는 쪽으로 무작정 발을 옮겼다.
문 바깥쪽에서, 두 사람의 것이 분명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네빌로 쪽은 내가 처리하지.
부탁하네.
또 한 명의 아군
<퀘스트 완료>
놈들을 따돌린 것 같군. 이제야 숨을 좀 돌리겠네.
희소식
모험가, 고맙네. 자네 덕분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어. 번번이 신세만 지는 것 같아, 미안하군.
그리고 베릭트, 자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군.
그런 말을 나누기엔 아직 한참 이른 것 같네. 황궁엔 여전히 귀족들이 들어앉아 있어. 이대로라면 자네는 죽음이 두려워 도망친 비겁한 탈옥수가 될 뿐이야.
잭터, 앞으로 어찌할 셈인가? 모험가도 있겠다, 이 길로 함께 황녀를 만나러 가는 것이 좋지 않겠나?
아니, 난 겐트를 지켜야 하네. 그것이 황녀님께서 내게 내린 명일세.
호기를 부리는 것은 좋네만, 지금의 자네가 무슨 수로 겐트를 지킨다는 말인가? 전처럼 군을 지휘할 수도 없을 테고, 무기를 공급받을 믿을만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래. 그런 것들은 어떻게 해결된다 해도 자네, 그 다리는…
나는 아직 살아있네.
살아 있으면,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네. 카르텔과 전투를 벌일 때에도, 안톤을 상대로 분투할 때에도 살아서 승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보게. 비록 옥에 갇혔어도 포기 않고 살아 있으니, 적이었던 자네가 날 구하겠다 와 준 것 아니겠나?
후, 자네의 고집을 내가 어찌 꺾겠나. 허면, 내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도 주저말고 일러 주게.
자네가 맘에 들어 그런 것이 아니라, 탐욕에 눈 먼 귀족들이 천계를 좌지우지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순 없으니 하는 소릴세. 알겠나?
천하의 베릭트가 아군으로 있어 준다니, 든든하군. 고맙네.
모험가, 면목없네만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젤딘을 만나주게. 그 녀석에게 내 뜻을 전해주었으면 하네. 흩어진 퇴역 군인들을 모으고, 음지에서 황녀님을 위해 투쟁하던 자경단과도 연이 닿아야 해.
부탁일세, 모험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자가 자네 뿐이야.
젤딘 슈나이더를 만나 잭터가 무사히 탈옥했다는 소식 전하기
<퀘스트 완료>
조짐
오기만을 기다린 듯 젤딘은 눈을 밝히며 잭터의 안부를 물었으나,
이내 주변의 눈을 의식하고 말을 삼켰다.
곧, 자리는 젤딘이 머무는 방으로 옮겨졌고,
잭터가 무사히 탈출했으며 마지막까지 겐트를 지키기 위해
남는 것을 택했다는 말을 전하게 되었다.
젤딘은 그저 담담히 듣고만 있었다.
황녀의 명을, 사령관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들여다 보이는 미래에 쓴맛이 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군요. 어찌 되었든 모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저 또한 모험가님과 함께 움직이고 싶었으나, 자리를 지키라는 황녀님의 명이 계셔서…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모험가님. 일이 이리 잘 해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 모험가님, 그리고… 베릭트, 그자가 도와준 덕이라는 것, 꼭 기억하겠습니다.
아, 황녀님 말씀이십니까? 그게… 이튼에 있는 멜빈의 누이를 통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곤 하였으나, 방금 전 출처를 알 수 없는 통신 방해 전파로 인해 그마저도 되지 않아 속을 끓인 참입니다.
총사령관님께서 무사히 탈출하셨다는 소식을 하루 빨리 황녀님께 전해드리고 싶은데…
겐트 수비군
대장! 큰일났습니다!
별안간 벌컥 문이 열리더니 겐트 수비대 소속 병사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쉬지 않고 달려온 건지, 넘어갈 듯 숨을 헐떡이던 병사는
젤딘과 함께인 모험가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경례를 올려붙였다.
모, 모, 모험가님! 처, 천계의 영웅, 모험가님을 뵙습니다!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을텐데. 이 밤에 대장의 처소에 당당히 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그, 그게… 루프트 하펜 보초를 맡은 병사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귀족군이… 모든 항구를 폐쇄한다고…
뭐? 항구를? 또 무슨 짓을…!
모험가님, 궁 안의 상황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모험가님께서는 이 길로 겐트를 떠나 이튼으로 가 주십시오. 제 아무리 귀족군이라도 천계의 영웅인 모험가님께서 떠나시는 길까지 막을 순 없을 겁니다.
이튼에 계신 황녀님께… 저희 소식을 꼭 전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모험가님.
베른 보네거트를 만나 루프트 하펜의 상황 확인하기
모험가 나리! 이게 다 무슨 일이요? 갑자기 군이 우루루 몰려와선 항구를 폐쇄한다고 아주 난리도 아니요!
천계의 운명
병사의 보고는 사실이었다.
겐트에서 외부로 향하는 모든 항구를 폐쇄하라는 명이 있었고,
루프트 하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움츠리고 있던 역장, 베른 보네거트는
역에 들어선 모험가를 발견하고는 냉큼 붙들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나리! 이 밤에 다짜고짜 항구를 폐쇄하겠단 경우가 어디 있소? 뭐, 이유라도 제대로 알아야 내 손님들에게 둘러댈 말이라도 있을 것 아뇨!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건 뭔 줄 아쇼? 모험가 나으리나 다른 귀족 나으리들께서 오시면 또 살뜰히 뫼시랍디다. 아니, 돈 없고 뒷배 없는 평민들은 어디 갈 곳도 없는 줄 아쇼? 참나.
아, 이 상황에 내가 거짓말하게 생겼소? 모험가 나으리에 대해선 특별히 당부합디다. 천계의 영웅님께서 불편하지 않게 뫼시고, 또 어디로 가시는지 꼬박 꼬박 살펴 보고하라고 말입니다!
모험가 나리, 대체 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황녀님께서는 이 상황에 정말 유람을 가 계신 거요? 거 무슨 말이라도 해 주쇼!
역장의 말을 들으니, 역 앞을 지키고 있던 귀족군이
왜 모험가만은 막아 서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황녀는 어디에 있는가.'
저들이 답을 구하고 있는 물음은 그 하나뿐인 것이다.
더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튼으로 가야만 한다.
심각하게 굳어진 모험가의 표정을 보며 역장도 어떤 낌새를 느낀듯,
군말 없이 열차를 몰아 어슴푸레한 새벽 바다 위를 달려주었다.
목적지는 이튼.
황녀는 그곳에 있다.
이튼에 있는 노블스카이에서 천계의 황녀 에르제를 만나기
<퀘스트 완료>
모험가여. 겐트와의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머지 않아 그대가 와 주지 않을까 생각하였네. 역시 그대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군. 고맙네.
이튼 사령부 내 마련된 작은 회의실.
황궁의 것과 비교하자면 단출하기 그지없는 작은 방은 천계의 황녀,
에르제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장군께서는 어찌 지내고 계시던가? 서신 한 통밖엔 전하지 못한 황녀를 원망하지는 않으시던가?
잭터의 안부를 묻는 황녀 에르제의 표정은 예상과는 달리 평온했다.
잭터를 데리고 황궁 밖으로 빠져나오기까지 있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 들으며, 에르제는 침착하고 신중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대장군께서 무사히 몸을 피하셨다 하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모험가, 다 그대가 있어준 덕분이야. 그대가 베풀어 준 은덕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에르제는 옅은 미소와 함께 짧은 숨을 내쉬었다.
앉은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소매 안에 감추어진 작은 주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카르텔에 끌려 다닐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험가, 그대에게는 천계의 황녀라기엔 낯부끄러운 모습만 보인 것 같아 면목이 없구나.
애통하고 애통하나, 무엇를 탓하겠는가? 짐의 미숙함 탓에 황궁을 빼앗기고, 충신을 빼앗기고, 백성을 빼앗긴 것이거늘…
허나, 저문 해는 반드시 다시 떠오르고, 오른 해는 수백, 수천의 손을 모아도 가릴 수 없는 법.
해 뜨기 전 어둠을 틈타 잘도 일을 쳤을 것이나, 곧 저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누가 천계인지, 다시는 의심치 못하도록 짐이 확실히 본을 세울 것이야.
모험가여, 황녀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짐은 짐을 위해 목숨을 걸어 준 이들을 위해 반드시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서, 욕망에 눈이 멀어 옥좌를 탐한 이들을 벌하고, 천계를 구한 영웅들의 이름을 역사에 남길 것이다.
그대여, 그러니 부디 때를 기다려주겠나? 이 길고 긴 전쟁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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