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어린 기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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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드를 공포로 몰아넣은 사악한 괴물 시로코를 쓰러뜨리고 제국으로 돌아온 반 발슈테트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제국인들은 연륜 많은 기사들도 해내지 못한 위업을 이룬 어린 웨펀마스터에게 찬사와 축복을 보내었다.
여자들은 소년 영웅을 향해 꽃을 뿌렸고 남자들은 힘차게 박수를 쳤다. 아이들은 반의 행렬을 따라가며 꺅꺅 소리를 지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팔 소리와 함성이 뒤섞인 축제의 주인공이 된 반은 얼떨떨해하면서 황궁에 입궐하여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반 발슈테트,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수고 많았다. 무사히 돌아왔군. 궁정마법사조차 당했다고 들었는데 나이 어린 그대가 사악한 시로코를 쓰러뜨리고 올 줄이야.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닙니다. 그곳에 함께 있던 다른 웨펀마스터들이 아니었다면 저 또한 쓰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반의 목소리는 크고 또렷했다. 자신을 위한 날이니 황제가 건네는 칭찬을 혼자의 것으로 해도 상관없었을 테지만 그는 다른 웨펀마스터들도 언급하며 혼자만의 공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황제는 부드럽게 웃었다.
겸손하군.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대의 공적을 깎아내리고 숨길 필요 없다. 그대는 우리 제국의 자랑스러운 기사다.
네?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만…
황제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을 주저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반의 모습에 황제가 더 큰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는 그랬지. 그러나 지금부터는 그대는 기사로서 나와 제국에 봉사하고 그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게 될 것이다.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어라.
기사라는 말에 반이 얼굴을 들었다. 반은 기사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얽혀있는 기사후보생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검술을 갈고 닦는데 바빴거니와, 딱히 기사라는 명예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웨펀마스터라는 이름을 받은 것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업적이었다.
아니, 검술을 인정받았다는 점만 보면 웨펀마스터의 칭호가 더 명예로웠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반 발슈테트. 그대는 기사도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기사로서 정의를 숭배하고 봉사를 즐기며 만인의 앞에 몸가짐을 바로 하겠노라고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반 발슈테트. 그대는 데 로스 제국의 영예로운 기사로서 나라에 헌신하고 그대의 피와 살을 바쳐 국가를 지키겠노라고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반 발슈테트. 그대는 데 로스 제국의 제1 기사이자 가장 정당한 지배자인 나 레온 하인리히 3세의 충실한 종복으로서 모든 위험에서 나를 구하고, 나의 명령을 성실히 따를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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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충성에는 사랑과 신뢰가, 그대의 배신에는 분노와 처벌이 돌아올 것이다. 이 서약은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며, 죽음만이 그대를 쉬게 할 것이다.
고개를 들고 일어서라. 그대는 데 로스 제국의 기사가 되었다. 또한 앞으로 반 발슈테트 남작으로서 대대로 이름을 역사에 남길 것이다.
클라우스
……!
좌중이 술렁였다. 제국의 귀족들은 황제의 선언에 너나할 것 없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이 잘못 들었길 바랐다.
하지만 황제는 잘못 말하지 않았다. 내세울 것이라곤 검술 실력밖에 없는 반 발슈테트는 오늘부로 귀족이, 그것도 남작이 되는 것이다.
(폐하는 제정신이신 건가? 저런 얼뜨기에게 남작위를 내리다니! 논의된 건 기껏해야 자작위가 아니었나? 저런 망할 귀수 꼬맹이에게…!)
반 본인도 당황하고 있는 지금, 황제를 제외한다면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무인 집안으로 유명한 크루거 가의 콘라드였다.
(남작위라… 폐하께서도 장난을 좋아하시는군. 반대가 만만치 않을 텐데… 하지만 발슈테트라면 충분히 그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겠지. 지금의 썩은 기사들보다 저 젊은이가 백 배는 나으니…)
황제의 깜짝 선언에 호의적인 시선은 그뿐이었다. 반은 자신의 등뒤에서 조용하고 빠르게 오가는 시선 교환을 알지 못한 채 힘차게 맹세했다.
황공하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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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충성에는 사랑과 신뢰가, 그대의 배신에는 분노와 처벌이 돌아올 것이다. 이 서약은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며, 죽음만이 그대를 쉬게 할 것이다.
고개를 들고 일어서라. 그대는 데 로스 제국의 기사가 되었다. 또한 앞으로 반 발슈테트 백작으로서 대대로 이름을 역사에 남길 것이다.
……네?
반이 부지불식간에 입 밖으로 흘린 의문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좌중이 술렁였다. 제국의 귀족들은 황제의 선언에 너나할 것 없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이 잘못 들었길 바랐다.
하지만 황제는 잘못 말하지 않았다. 내세울 것이라곤 검술 실력밖에 없는 반 발슈테트는 오늘부로 귀족이, 그것도 백작이 되는 것이다.
황제는 당황해하는 반 너머로,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는 귀족들의 면면을 주의깊게 둘러보았다. 반대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폐하는 제정신이신 건가? 아니 어떻게, 백작위를 이렇게 단번에?!)
반 본인이 대답을 찾지 못하고 황망해하는 지금, 무인 집안으로 유명한 크루거 가의 콘라드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작이라니. 시로코 토벌의 공이 아무리 커도 너무 심한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가. 장난이라 해도 정도가 지나치군…)
(어쩌면 폐하는…)
황제의 깜짝 선언에 호의적인 시선은 없었다. 그나마 황제의 의중을 넘겨짚느라 반을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버린 콘라드가 그나마 적대적이 아닌 측이었다.
이 분위기를 모를 반이 아니었다. 과분하다며 사양하였으나 황제는 결정을 물리지 않았다. 주군의 성격을 아는 반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황공하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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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어린 기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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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에밀리!
황제 알현이 끝나자마자 반이 달려간 곳은 한 소녀가 기다리고 있는 조용한 정원이었다.
사람들이 반의 그림자라도 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반은 긴 원정 중에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에밀리를 위해 모든 난관을 뚫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늘 둘이서 만나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숨어오느라 엉망이 된 반의 모습에 잠깐 놀랐다가 바로 얼굴 가득 장미빛 기쁨을 띠는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였다.
반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에밀리를 가볍게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았다. 에밀리는 반을 세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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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알현이 끝나자마자 반이 향한 곳은 한 소녀가 기다리고 있는 조용한 정원이었다.
사람들이 반의 그림자라도 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반은 긴 원정 중에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에밀리를 위해 기척을 숨기고 움직였다.
에밀리.
늘 둘이서 만나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갑자기 나타난 반의 모습에 놀랐다가 바로 얼굴 가득 장미빛 기쁨을 띠는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였다.
반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에밀리를 가볍게 들어올려 꼭 끌어안았다. 에밀리는 반의 품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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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돌아왔구나!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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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궁에 들렀다가 바로 만나러 왔어. 아, 에밀리! 굉장한 일이 있었어! 오늘부터 내가 뭔지 알아?
기사님이지? 꺅! 잘됐다! 축하해! 엄청 멋있어!
반은 에밀리를 내려놓았다. 에밀리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반의 표정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뭐야… 누가 말해줬어? 쳇, 내가 제일 먼저 말해주려고 했는데.
반이 오기 전부터 사람들이 그랬는걸! 아버지도 반이라면 기사가 되고도 남을 거라고 하셨어! 그리고 콘라드 당숙님도!
콘라드 폰 크루거 님이?
응응. 자작위는 따 놓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셨어! 잘됐다, 이제 어머니도 우리 결혼을 싫어하시지 않을 거야!
품안에 안긴 에밀리를 멍하니 내려보던 반이 씨익 웃었다.
자작이라니? 난 남작이야! 남작!
…정말?
정말?! 발슈테트 남작님! 너무 멋있어!
에밀리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반의 팔을 잡고 팔짝거렸고, 반은 기품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어울리며 웃었다. 눈부신 햇살은 이 두 연인을 위해 준비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참 법석을 떤 후에야 진정이 된 반과 에밀리는 누가 떨어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꼭 잡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걱정했어.
반의 손을 쓰다듬으며 에밀리가 조용히 말했다. 누구보다 확고한 목표를 가진 약혼자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기다리며 지새워야했던 밤은 너무 길고 가혹했다.
그 편린을 본 반은 충동적으로 에밀리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에밀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반의 가슴을 때리며 얼른 떨어졌다.
뭐, 뭐야… 누가 지나가면 어쩌려고… 바보!
뭐 어때? 이미 약혼한 사이인데. 아아, 빨리 결혼하고 싶다!
에밀리는 새빨간 얼굴로 반의 입을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종달새의 다리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는 신이 난 소년을 막을 수 없었다.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결혼하고 싶다아아!!
……
……죄송합니다. 다시는 떠들지 않겠습니다. 제가 너무 들떴나봅니다. 용서해 주세요.
반은 고개까지 숙여가며 사과했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는 화가 나면 정말로 무섭게 변했다.
다음에도 또 그러면 한 달 동안 안 만나줄 거야.
알았어…
금세 시무룩해지는 반을 샐쭉하게 쳐다보던 에밀리였지만 이내 까르르 웃으며 반의 팔을 껴안고 어깨에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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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궁에 들렀다가 바로 만나러 왔어. 많이 기다렸지?
사랑하는 소녀를 만난 반의 목소리가 밝지만은 않았다. 에밀리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반?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냐.
그럴 리 있어? 반!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우리 사이에 비밀 만들지 않기로 했잖아!
반가움보다 짙은 서운함에 에밀리의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촉촉해졌다. 유명한 검사, 마법사들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비명굴에 연인을 보낸 후 무서움에 떨지 않은 적이 있던가.
승전보보다도 더 반가웠던 것은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었다. 다시 보게 될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무사한 반의 모습만 보고도 이렇게 기쁜데, 반은 왜 이렇게 시무룩할까.
반은 그런 에밀리를 보며 아차, 혀를 찼다. 황제의 의중, 귀족들의 반감, 앞으로의 고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에밀리의 웃는 얼굴이 아니었던가.
정말 별일 아냐. 그냥 좀 놀라서 그래. 기사가 됐거든.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정말? 정말 그래서 그런 거야? 나 보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럴 리 있어?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데.
반은 열심히 사정을 설명했다. 황제가 갑자기 작위를 내렸는데 그게 백작이라 놀랐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에밀리가 눈물을 닦았다.
반이 너무 훌륭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래도 좀… 갑작스럽잖아.
얼마 전에 콘라드 당숙님이 그러셨어. 반에게 작위가 내려질 거라고. 반이 전쟁에 나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라드를 괴롭히던 무서운 괴물과 싸워 이긴 거잖아?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한 걸 반이 해낸 거야. 어린 나이인데, 단번에 성공한 거야. 그러니 폐하께서도 얼마나 기쁘고 기특하시겠어.
그럴까? 그런 걸까?
그러엄. 반이 이렇게 계속 유명해진다고 생각해 봐. 폐하는 역사에 남는 멋진 기사를 둔 황제가 되시는 거잖아!
에밀리의 말에 반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네 말대로 되면 정말 좋겠다.
반은 에밀리를 다시 강하게 끌어안았다. 앞으로 갖은 방해가 그를 괴롭히겠지만 에밀리가 곁에 있는 한 무섭지 않다.
반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에밀리 역시 반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겨우 닿을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리고 있지… 반이 백작님이 되면 어머니도 허락해 주실지 몰라. 우리 결혼… 꺅?!
반이 갑자기 하늘 높이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리자 소녀는 놀란 비명을 질렀다. 수줍음으로 얼굴이 빨개진 에밀리의 눈 앞에 기쁨으로 얼굴을 붉힌 반이 보였다.
당연하지! 이제 아무도 우릴 막을 수 없어! 에밀리는 이제 내 아내야! 내 아내라구!
꺄악!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바보! 바보야!!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소년은 마침내 터진 소녀의 분노 앞에 조용해졌다. 반이 내려주는 대로 나무 그늘 아래에 앉은 에밀리가 치마 주름을 펴며 새침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몸가짐을 조심히 해야지. 백작님이 이렇게 어린애처럼 떠드는 걸 들키면 폐하께서 후회하실지도 몰라.
상관없어. 너랑 결혼할 수 있으면 어찌 되든 상관없어!
흥이 오른 반의 목소리는 꽤나 컸고, 에밀리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만약 이런 모습을 남에게 들켰다간 에밀리는 부끄러워서 기절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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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화제를 돌리자, 반은 또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에밀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들었다. 정말이지 무섭고도 가슴 떨리는 이야기였다.
고생은 했지만 얻은 것도 많았어. 상상도 못하던 걸 봤거든. 사도의 힘이라는 거 굉장해. 제대로 연구하면 제국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끔찍한 괴물이라며?
하지만 엄청났어. 사람의 정신을 파고드는 그 힘은 궁정마법사조차 못 막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봐. 그런 힘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만 있다면 제국은 더욱 강대해질 거야. 아무도 제국을 위협하지 못할 거고, 용이나 괴물이 다시 난동을 피우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막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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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괴물의 힘은 사악한 힘이잖아.
그래. 하지만 힘 자체에는 죄가 없잖아.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지. 검을 생각해 봐도, 검 자체에는 죄가 없어. 도구일 뿐이지.
그래도 위험할 거 같은데… 안 그래도 반은 귀수 때문에 고생했으니까 그런 위험한 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반이 다치면… 난 또 울어버릴 거야.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울먹거리는 소녀의 젖은 눈망울을 보며 반은 두 손을 휘저으며 당황했다.
울지 마. 네가 울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구.
마음 졸이던 나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에밀리는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바삐 훔치며 반을 올려보았다.
그러니까 그런 위험한 생각은 하지 마. 알았지?
그래. 알았어.
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어린 기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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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봄날에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과 코를 간지럽히는 꽃내음이 향기롭다. 이런 날은 누구에게나 기쁘고 즐거운 하루가 되어야할 터였다.
피어나는 초록 이파리가 연보라빛 하늘에 물들어갈 무렵. 평화로운 작은 도시에서 짙고 매캐한 연기가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에밀리! 에밀리!!
병사
안 됩니다! 지금 들어가시면 같이 죽을 뿐입니다!
젠장, 이거 놔! 내 약혼자가 저 안에 있단 말이다!
병사
소방 마법사들이 올 겁니다. 잠시만… 어이쿠!
반은 자신을 말리는 경비대를 뿌리치고 무작정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콜록거리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헤치며 찾아보아도 익숙한 밤색머리의 약혼자는 없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반의 옷은 검댕이 묻고 타들어갔지만 뜨거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에밀리는 결혼식을 앞두고 친구의 별장에 놀러간 참이었다.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는 에밀리의 부탁에 훈련이 끝나자마자 말을 타고 달려왔다.
어떻게 하면 에밀리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을지 무척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견한 것은 지독스런 화마였다.
나이 많은 웨펀마스터들에게 침착하다는 평을 듣던 반이었지만 에밀리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앞뒤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헤매다 머리가 빙글거리며 어지러워질 쯤에야 퍼뜩 정신을 차린 반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짧은 기합과 함께 검기를 날렸다.
몰려오던 연기가 물러나고 창문이 부서졌다. 반은 창 밖으로 몸을 빼내 심호흡을 하면서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에밀리는 점심을 먹고 따로 쉬고 있었다고 했지… 어디서 쉬고 있었을까? 하녀가 방에는 없다고 했었어… 그럼…)
밖에서 본 저택의 구조, 에밀리의 성격, 구조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본 반은 다시 복도로 들어가 빠르게 달렸다.
숨을 멈추고 달리는 것쯤 별것 아니었다. 몸을 태우는 불 따위 비명굴을 가득 채운 진득한 저주에 비하면 간지럽지도 않았다.
반은 저택의 반대편으로 달려가 굳게 닫힌 서재의 무거운 문을 부수었다.
…이건…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반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였다. 발끝부터 솟구쳐올라오는 불안을 무시한 채 넓은 서재를 샅샅이 찾았다.
이곳은 서재라기보다는 도서관에 가까웠다. 반은 에밀리가 친구와 어울리게 된 계기가 책이었다는, 그런 아무래도 좋을 기억을 떠올리며 소녀의 모습을 찾았다.
……!
원목의 커다란 책장 너머에 에밀리가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큰 다툼이 있었는지 책은 쏟아져 있었고 그 뒤의 책장은 모두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감싼 남자 둘이 쓰러져 있었다. 에밀리는 복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경비병의 뒤에 기절해 있었다.
반은 에밀리를 얼른 안아들었다. 하얀 팔이 목각인형처럼 툭 떨어졌다. 힘을 잃은 몸은 흔드는 대로 흔들릴 뿐이었다. 손에서 떨어진 작은 은장도가 반짝거렸다.
반은 경비병의 상태를 살폈다. 가냘프게 숨을 쉬고 있는 에밀리와 달리 그는 정말로 죽어있었다. 아무래도 에밀리를 찾으러 왔다가 자객들과 싸우다 죽은 것 같았다.
반은 죽은 경비병의 눈을 감겨주고 짧게 묵념을 했다. 그리고 에밀리를 단단히 안은 후 탐욕스럽게 서재 안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화염을 피해 창문을 깨고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제국의 어린 기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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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명을 받들어 북방 출정에 다녀온 반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명하신 대로 우리 제국의 영토를 넘보는 북방의 이민족을 토벌하고 왔습니다. 놈들은 다시는 허튼 꿈을 꾸지 못 할 것입니다. 그들의 리더인…
이번에 죽은 병사는 몇이나 되나?
126명입니다. 하지만 적의 사상자는…
많이 죽었지. 안 그런가?
황제의 매몰찬 질문에 반은 당황스러웠다. 분명 사상자가 나오긴 했지만 물리친 적의 수와 비교하자면 큰 손실이라고 할 수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황제의 말대로 사상자가 나온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선 곤란하지 않나? 병사가 싸움이 날 때마다 그렇게 죽어서야, 어떻게 제국이 존속될 수 있겠나? 황후는 미개인의 도끼에 맞아 죽을까봐 두려워 덜덜 떨고 있어.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반 발슈테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 일단은 믿어보지. 달리 믿을 사람도 없으니 말이야.
……
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온 황제가 말을 잘라버렸다. 반은 당혹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아아, 그러고보니 자네 부인은 어떤가? 아차, 아직 결혼은 안했던가? 미안하군.
아닙니다. 폐하께서 신경을 써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제 얼굴도 잘 알아보고 스스로 식사도 할 수 있습니다.
불행한 화재 사고에서 다친 에밀리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출혈이 컸지만 경비원이 지켜준 덕분이었다. 방화범은 제국에 불만을 가진 모험가들로 밝혀졌다.
하지만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에밀리는 반을 알아보기는커녕 남자만 보이면 괴성을 지르며 물건을 집어던졌다. 에밀리의 부모는 조심스럽게 파혼을 권하였으나 반은 에밀리 외의 여자를 처로 맞이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을 할 수도 없었다. 귀족의 딸인 에밀리는 가문의 명예 때문에 저택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못 했다.
더구나 제국의 법은 신랑과 신부가 본인의 의지로 혼약의 맹세를 나눌 때만이 부부로 인정한다. 자기 이름을 겨우 말할 줄 아는 에밀리가 결혼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리 만무했다.
자네를 아픈 약혼자에게서 떼어놓고 여기저기로 나가서 싸우라고 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아닙니다. 외적과 싸우는 것은 기사의 의무. 나이가 어린 저를 신뢰해 주시니 힘껏 보답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하지만 자네도 슬슬 아이를 키우며 살고 싶을 때가 아닌가? 자네는 약혼도 일찍한 편이니 아이가 한둘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아직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가. 그거 잘됐군.
네?
반은 얼굴 가득 의문을 담은 채 고개를 들었다. 설마 베필감을 직접 마련해주겠다는 뜻인가?
반과 에밀리의 사정을 아는 몇 사람 중 한 명인 황제에게는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고, 그의 기사인 반은 황명으로 내려진 결혼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다.
반의 오해를 알아차렸는지 보고를 받는 내내 딱딱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오해하지 마라. 아이가 없으니 어린 죄수를 보며 괜한 동정심에 휩싸이지 않을 테니 잘 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자들은 질색이야.
아… 그 걱정이라면 문제없습니다. 어리다고 해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죄를 지은 자는 남녀노소 동정할 필요가 없지요.
자네는 매사가 분명해서 좋다니까. 다른 귀족들이 자네만큼 유능했다면 병사 한둘 죽은 것 갖고 골머리를 썩히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지.
칭찬하는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게. 그래, 자네의 소중한 에밀리 이야기나 해볼까? 정신적으로 아프다곤 해도 결혼은 해야할 것 아닌가? 결혼을 얼마 안 남기고 사고가 났다면서.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에밀리가 맹세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폐하께서는 본인의 의지로 나눈 맹세를 통해 맺어진 부부만을 인정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결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흠… 그녀의 상태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지?
사용인을 제외하면 몇 안됩니다.
실은 말이지. 자네가 약혼을 한 지도 꽤 됐지 않나? 사람들은 점점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그 잘난 반 발슈테트가 왜 결혼을 하지 않는가. 혹시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라면서.
…하지만 저는 에밀리 외에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에밀리도… 아무리 크루거 경께서 막아주신다고는 해도, 파혼되면 가문의 보호를 받지 못할 겁니다…
그나마 에밀리가 본가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발슈테트 남작의 약혼녀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종질녀를 아끼는 콘라드의 배려도 있어 에밀리의 부모는 아직 딸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반이라는 방파제가 없어진다면 쓸모가 없어진 귀족의 딸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그거 말인데. 그냥 내가 인정해주면 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렇잖은가? 그 소녀도 불행한 사고를 겪기 전에는 결혼을 간절히 바리고 있었을 테고, 자네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을걸세.
황제의 제안에 반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황제의 말대로 결혼을 하여 에밀리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올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지금껏 그러지 못 했던 것은 지엄한 황제의 법 때문인데 바로 그 황제가 편의를 봐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남의 눈은 피해야 할 테니 성대한 결혼식은 못하겠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 작게나마 열어주겠네. 그곳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조용히 돌아오게.
다만 에밀리는 그곳에서 쉬다가 온다고 하고, 자네만 먼저 돌아오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새신부를 보고 싶어서 시끄러울 테니까.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못되먹은 황제가 새신랑을 억지로 오라고 했다고 하면 다들 납득하고 불쌍하게 여겨주지 않을까? 하하하!
그런 배려를…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감동한 반을 황제는 뿌듯하게 내려보았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미안할 것 없네. 자네는 좀 먼 곳에 가주면 좋겠어. 자네밖에 할 수 없는 일일세.
무슨 일입니까? 어떤 임무든 해내보이겠습니다.
믿음직스럽군.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 제국이 안전해지려면 강한 병사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을 어떻게 튼튼하게 만들지 연구하는 연구소를 만들었다네. 허나 귀족들이 시끄러울지 몰라서 외딴 곳에 있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귀족이 시끄러워질지도 모른다.' 무슨 뜻인지는 명백했다.
경비 임무입니까.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따로 연락주겠네. 자네는 결혼 준비를 해야지. 하지만 너무 기대말게. 나도 결혼을 했지만, 하기 전엔 좋은데 하고 나면… 무슨 말인지 알지?
하하, 그럼 피곤할 텐데 돌아가 쉬게. 준비는 내가 맡아서 진행해 줄 테니 마음 놓고.
감사합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반이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황제는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텅 빈 알현실에서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믿겨지나? 제정신도 아닌 여자를 꽃처럼 아끼고 기다리고 있는 남자야. 저런 멍청한 외골수는 그냥 방패 역할이나 시키면 될 것을, 왜 집착하는 건가?
저분은 이 제국에서 사도의 힘을 가장 잘 알고, 또 경외하고 있는 자. 분명 폐하의 뜻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
황제의 뒤에 쳐진 휘장 너머에서 검은 로브를 쓴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얼굴을 포함하여 전신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 실루엣 속에 숨긴 심상치 않은 마력은 궁정 마법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황제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도 예언에 있는 내용인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제국의 안녕과, 아라드를 위한 것. 이 높은 뜻을 알게 된다면 반 님은 누구보다도 큰힘이 되어주실 겁니다.
바뀌리라고 보나? 세상이 발전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는 저 남자가?
이제는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위대한 예언대로…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레온 황제를 안심시키듯 검은 로브의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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