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0일 금요일

떠나간 성자의 기억

떠나간 성자의 기억 1


거대한 변화는 언제나 작은 균열로부터 시작된다.
늘 십자가가 매여 있던 등 뒤의 감촉이 허전했다. 검은 대지를 떠나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미카엘라는 갑자기 눈앞을 덮친 광휘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여긴?’
주변의 풍경은 순식간에 변해 있었다. 혼돈의 기운으로 가득하던 검은 대지는 축복을 받은 땅처럼 생기가 넘쳐흘렀고, 귓가에는 흐르는 물줄기 소리와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가 들려왔다.
이러한 광경들보다 더욱 놀라온 것은 검은 대지 사방에 가득 차 있는 신성력의 기운이었다.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때, 무언가를 감지한 미카엘라의 고개가 어딘가를 향했다.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면서도 너무나도 익숙한 신성력이었다.
‘이상하군. 어떻게 대천사의 기운이 여기에…’
우두커니 멈춰 서 있던 미카엘라의 발걸음이 다시 바빠졌다.
가파른 언덕을 넘어 막혀 있던 시야가 탁 트이자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미카엘의 모습이 보였고
빛의 날개로 자신을 감싼 미카엘의 내부에는 사악한 혼돈의 기운을 억누르며 웅크리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저건… 설마?’



떠나간 성자의 기억 2


오즈마를 마주한 순간 미카엘라는 그가 자신과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도(使徒)’
각기 다른 태생을 갖고 있으나 동일한 기운을 근원처럼 가지고 있는 이들.
검은 성전에서 오즈마에게 힘겹게 승리하였을 때, 미카엘라는 자신이 그를 해할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점을 이용하여 오히려 혼돈의 기운을 흡수하여 신성력으로 ‘정화’시키는 방법이 있었다니…
미카엘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 태초의 순수한 신성력이었다.
“이러한 광경을 내게 보여주는 ‘그쪽’은 누구입니까? 시로코, 당신입니까?”
모든 것이 환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미카엘라가 소리치자 주위의 풍경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당연하게도 그의 목소리만 허공에서 메아리칠 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혼돈의 문이 다시 닫히고, 한차례 변화의 폭풍이 휩쓸고 간 로스체스트 외곽.
후드를 깊게 눌러쓴 한 남자가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황량한 대지 위를 지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잠시 멈춰선 그의 이마에서 비 오듯 땀이 흘러나왔다.
턱밑까지 차오른 호흡과 이따금 피부에 돋는 검보랏빛 핏줄은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듯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듯, 남자는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 대기 중에 넓게 펼쳐진 대량의 신성력이 미세한 촉각처럼 그의 감각을 대신했다.
이곳에 멈춰 서서는 안 된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마을과 가까운 곳에서 혼돈의 기운을 풀어 두었다가는 예기치 못할 희생이 또 발생할 터.
""분명 좀 더 적합한 곳이...""
사람들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미카엘라는 검은 성전 당시 동료들과 나누었던 과거의 대화 속으로 빠져 들었다.



떠나간 성자의 기억 3


“’성역’이요?”
부상당한 프리스트의 팔을 치료하던 밀란 로젠바흐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우리가 빌려오는 빛과 생명의 근원지이자, 레미디오스의 신성력으로 가득 찬 곳이지요.”
미카엘라는 저 멀리 보이는 위장자들의 군단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그런 곳이 정말로 있다면 지상 낙원이겠군요.”
“우리에겐 그렇겠지만 위장자 놈들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겠지.”
한쪽에서 커다란 방패를 손질하던 샤피로 그라시아와 볼프간트 베오나르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혹시라도 지긋지긋한 이 전쟁의 막을 내릴 방법은 아닐지, 은근한 기대감이 담긴 눈빛이었다.
“…글쎄요.”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던 미카엘라는 이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레미디오스의 성역은 모든 불경한 것을 불허한다.’라고 하지만, 그 ‘불경한 것’이 꼭 위장자에만 해당되리라는 법은 없겠지요.”
“그렇다면 성역이 거부하는 대상이 위장자가 아닌 이들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밀란의 물음에 이번에는 조용히 명상하던 신야가 어느새 눈을 뜨며 대답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지. 지금이야 혼돈의 신이라는 강대한 적 앞에 뭉쳐 있을 뿐, 인간들이란 본디 위장자보다 더 시커먼 속내를 지닌 이들도 많지 않은가?”
신야의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 모여 있던 이들은 각자의 생각 속으로 잠겨 들었다.
위장자들에게 포위된 늙은 광부는 자신의 안일함을 탓하고 있었다.
얼마 전, 검은 대지에서 프리스트들과 위장자들의 큰 싸움이 있었던 이후 희귀한 광물이 더 많이 발견된다는 소문은 그의 탐욕을 자극했고 로스체스트의 가장 외진 곳까지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황폐화된 외곽 지역에서 피의 저주의 걸린 자들을 마주쳐 돌아오지 못한 광부들에 대한 이야기는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설마 자신이 이야기의 당사자가 될 줄은 몰랐으니까.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감당할 수 없는 공포와 마주친 다리는 통제를 벗어났고, 평생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했던 곡괭이마저 힘이 풀린 손아귀를 벗어나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지막 저항마저 포기한 광부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 감긴 눈꺼풀 사이로 강렬한 빛이 파고들었다.
한동안 뿌옇게 바뀐 시야를 겨우 회복하고 나서야 눈에 들어온 것은, 재처럼 변해버린 위장자들의 시체와 새하얀 백의를 입은 프리스트의 등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교단의 프리스트십니까?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할 지…”
이제 막 약관이나 되었을까? 작게 고개를 끄덕인 푸른 눈의 프리스트는 광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서… 이 근방을 벗어나십시오. 최대한 멀리.”
몸 상태가 좋지 않은지,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그는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곳은 곧… 아주 조금의 어둠도 용납하지 않는 장소가 될 테니까요.”
엄숙한 그의 표정에 늙은 광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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