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2일 수요일

엔피시 대사집 - 남겨진 기록 (베히모스 내부)

남겨진 기록
<기록1>
신을 저버린 죄인의 첫 번째 기록
이 구렁텅이에 빠진 후 답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어째서 미의 여신은 이토록 타락하게 되었는가?
가장 먼저 미의 여신에 대한 기록을 빠짐없이 확인했다.
마침내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러 잊혀버린 그때의 일들을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작게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생명이 시작이고 죽음이 끝이라면, 아름다움은 시작과 끝을 잇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의 신은 인간에게 더없이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삶의 때를 정할 수 없고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아름다움만큼은 인간의 선택권 아래에 있는 가치였다.
미의 여신 베누스는 그런 개념에서 잉태된 신이었고,
인간과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 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인간과 가까운 신.
이것이 미의 여신이 타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가장 미워하는 신이, 인간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신이었어.)



<기록2>
신을 저버린 죄인의 두 번째 기록
그때의 아름다움은 단 하나의 가치로 정의되지 않았다.
남을 위하는 마음이나, 남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나만을 우선 위하는 마음, 남을 미워하고 부러워하는 마음조차도
바로 아름다움이라 불리던 때였다.
그렇게 인간이 정의하는 아름다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미의 여신은 가장 강력한 신이 될 수도 있었고,
인간이 정의하는 아름다움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가장 약한 신이 될 수도 있었다.
오로지 인간이 내리는 가치가 미의 여신 베누스의 가치를 정의했고,
이는 생명이나 죽음의 가치와는 분명히 달랐다.
이것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다.
미의 여신의 가치를 인간이 정의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뜻으로 그 신을 타락시킬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으니.



<기록3>
신을 저버린 죄인의 세 번째 기록
자유로웠던 선계에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구름 없는 밤이 일어나 세상이 사라질 뻔한 것을 대마법사 마이어가 구했고,
안개신이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조화라는 개념이 선계의 주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고,
안개신의 안개는 모든 이들을 똑같이 품는 조화로움을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가치로 여기는 미의 여신에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들은 조화라는 이름 아래에 내려놓아야 할 아름다움이 많았다.
미의 여신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권세가 약화하였지만,
선계를 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노라 말했다.
그 후로 아름다움은 이전보다 더 좁은 범위 안에서 정의되었고,
정의되지 못한 아름다움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그렇게 선계는 이상적인 세상이 되었지만, 정작 미의 여신은 그 힘을 잃기 시작했다.



<기록4>
신을 저버린 죄인의 네 번째 기록
우리는 그렇게 선계가 정의하는 것에서 벗어난 아름다움을 모두 잊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정말 사라져버렸을까?
아니면 우리가 외면했을 뿐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는 걸까?
한때 아름다움으로 인정받았으나,
이제는 아름다움을 인정받지 못한 것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었다.
빛이 향하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 뒤편에는 언제나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처럼.
우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나, 바라보지 않았다.
그 고독이 결국 미의 여신을 덮치게 될 것을.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렇듯 망각한다.
이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누군가의 사연일 뿐이다.



<기록5>
신을 저버린 죄인의 다섯 번째 기록
우리는 고민했다.
우리가 외면한 것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선한 것만을 받들던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부정적인 것들은
사라지지도 못하고 어디로 모여드는가?
답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이고 있었다.
안개와 신수에 밀려난 것들은 환란의 땅에 고여, 지독한 요기가 되었으나
갈 곳 없는 미의 여신의 기준은
여신 자기자신에게 고여 들어, 스스로 물들게 된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모른 척 외면했을 뿐.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늦은 후였다.
미의 여신은 이제 더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자신을 타락시켜버린 것을 기준으로 삼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들을 모두 내치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기록6>
신을 저버린 죄인의 마지막 기록
미의 여신의 영혼은 이미 더럽혀졌다고 말한다.
오로지 황금빛의 광채만이 아름다움의 기준이며,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만 거두어들인다.
미의 여신의 은총은 사실은 저주와 같고,
죽음은 그것에서 벗어날 가장 달콤한 보상이지만,
그 보상을 내려주지 않는다.
지독한 복수.
어쩌면 이것은 미의 여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복수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한 행동을 그저 되돌려받을 뿐인 것이다.
미의 여신은 모든 신 중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미의 여신은 타락하지 않았다.
타락한 것은 인간이며 모든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일으킨 재난이니.
그것을 따르는 신이 인간의 재난이 되어 돌아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을 되돌릴 수 있을까?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평화를 누리고 있는 이 선계에서,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될 계기가 없는 이상,
선계는 선이란 이상에 갇혀 허우적대며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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