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0일 금요일

막간의 이야기 - 노블스카이

막간의 이야기 - 노블스카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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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짐은 어찌해야 했겠는가.
천계의 전함 노블스카이의 함교. 안톤을 물리치기 위해 군인들이 바삐 움직이던, 하지만 지금은 텅 빈 함교에 선 황녀 에르제가 두 눈 가득 푸른 바다를 담고 있었다.
짐은 어찌해야 했겠는가.
그들의 말대로 무법지대에 복수의 불을 질러야 했나. 대장군에게 어처구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나. 제국 황녀처럼 나라를 비우고 마계에 갔어야 했나.
할 수 없는 것을 시키는데 어찌했어야 했단 말인가.
……
대장군의 곁을 지키던 대령은 말이 없다. 그는 이곳에 도착한 후에도 몇 번이나 정신을 잃어 걱정을 샀다. 아직도 얼굴이 창백한 그를 보며 에르제는 염려도 되었으나 고맙기도 했다. 든든한 대장군이 곁에 선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잭터는 저 멀리 겐트에 갇혀 있을 것이다. 얼른 은퇴할 수 있게 도와 달라던 욕심 없는 노장군에게 그런 불명예를 안기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왜 그러는가?
죄송합니다. 혼잣말을 하시는 건지 하문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이 있으면 말하게.
허락이 떨어지자 운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바닥에 대었다. 순전히 고집만으로 병상을 박차고 일어난 몸으로 차가운 바닥이 부담스러울 법하건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의무를 저버리고 전쟁에서 도망친 귀족들은 큰소리를 칠 입장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기세 등등한 것은 황녀님께서 죄를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체포되지 않은 범죄자가 그러하듯 그들은 자신들에게 정말로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귀족을 '용서한' 황녀님께 화를 내니, 이번 일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위로를 받고 싶었던 에르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비판을 언제나 달게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한계에 몰려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나온 분노였다.
예전에 잭터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도망친 귀족들을 체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르텔에 붙잡힌 자신도 죄인이라며,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며 끝내 반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회한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는데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눈물이 고였다. 자연스레 말투가 딱딱하게 바뀌었다.
이 나라의 부는 그들이 가지고 있으며 병사들 역시 상당히 다쳐 그들을 제압하기 어려웠다. 포로가 되어 나라에 우환을 안긴 짐으로서는 덕을 보여 그들에게 반성할 기회를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네빌로 유르겐이 있었습니다. 그는 야심이 있지만 남자라서 받는 차별 때문에 황녀님이 보이신 틈을 더 집요하게 파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왜 안전을 버리고 겐트에 남았으며 스스로 젤바에 가 탐사를 주도했겠습니까. 정말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는 자리를 함부로 비우지 않습니다. 그는 황녀님과 다른 귀족들에 대비되어 보이려 했습니다.
그의 행보에 불안을 느낀 귀족들이 먼저 들고일어났습니다만, 작금의 위기만 넘기면 백성들의 민심은 네빌로 유르겐에게 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녀님의 입지는 더욱 좁아집니다.
이번 일은 귀족들이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벌인 짓이다. 그들이 네빌로 유르겐을 압박하지 못하리라 보는가?
백성들이 기억합니다. 황녀님이 부재하실 때 누가 겐트에 남아 함께 싸웠는지. 도망쳤던 귀족들은 이번 일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글아이 대장군이 천계를 위해 싸우신 것도 기억할 터. 백성들은 왜 그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 점은 저 역시 무법지대 출신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에르제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이었다. 황도 백성들과 귀족들이 잭터에게 갖는 경계심은 에르제가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다.
무법지대 출신인 잭터가 황녀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모습은 오래된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운이 대답을 피한 것이다.
그럼 대장군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은 어떻게 해야 했겠는가. 짐은 그들이 헛된 소문을 떠드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차라리 사령관님의 죄를 따지셨음이 나았겠습니다. 그들이 꼬투리를 잡은 것은 겐트를 비워 황녀님의 봉변을 초래했다는 것과 안톤을 불필요하게 추격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톤을 막는 것은 필요한 과정이었고 또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작전상의 흠이 될지언정 죽을죄까지는 되지 못합니다.
국문장에서 황녀님이 직접 용서하시고, 안톤을 토벌함으로써 루크 역시 막을 수 있었음을 강조하시어 공으로써 흠을 덮었다면 일사부재리에 따라 더 이상 수면 위로 뜨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령관님의 공만 강조하시고 흠을 덮지 못하셨습니다. 적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뜻대로 재판이 진행될 것입니다.
운은 자주 기침을 했지만 막힘 없이 대답했다. 문답이 시작될 때만 해도 서운함이 앞섰던 에르제는 완전히 다른 기분으로 젊은 대령을 보았다. 20대에 준장 임명 제안이 나온 게 오직 군공 덕분만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에르제는 거부감 역시 느꼈다. 운이 내놓은 해결책은 영웅의 이름에 한순간이나마 먹칠을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르텔이 아닐세. 명예는 명예로써 답해야 하네. 군인은 나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풀기 위해 대장군을 국문한다니… 자네의 생각에 새로운 점이 있는 것은 알겠으나 그분을 모욕하는 건 아니될 일이야.
아까보다는 말투가 부드러워졌으나 황녀의 목소리에는 채 숨기지 못한 거부감이 남아 있었다. 만일 유르겐이 여기 있다면 에르제를 가리켜 '도덕적 결벽증'이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장군이 왜 자네를 중히 쓰셨는지 알겠네. 남의 말만 듣고 사절로 보내려 했는데 진작에 자네와 깊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군.
대령. 유르겐은 천계를 좌지우지하고자 하네. 하지만 제국을 끌어들인 그가 천계를 이끌면, 제국에 빚을 진 꼴이 되고 마네. 그럼 제국과의 협상에 대등하게 나설 수 없게 되지.
유르겐을 막아야 해. 그러려면 겐트로 돌아가야 하네. 자네에게 계획이 있는가?
원군을 부르시고 작전은 다른 분들께 맡기십시오. 이번 일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웨스피스와 이튼 말인가. 그들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았어. 짐이 부른다고 해서 오겠는가.
에르제는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끝끝내 참지 못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배신감과 슬픔이 다시 떠올랐다.
만약 위로의 한마디라도 들었다면 울음이 터졌을 것이다. 하지만 운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덕분에 나약함을 꾹꾹 누를 수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네. 유르겐만이 문제가 아니야. 귀족들은 대장군을 죽일 것일세.
짐을 믿고 도와준 모험가와 겐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다른 이들을 실망시킬 수 없네. 어떻게든 빨리 움직여야 해.
저에겐 그럴 힘이 없습니다. 차라리 네빌로 유르겐의 암살을 명하십시오. 그것만이라면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성공시키겠습니다.
자네마저 잃을 수는 없네. 그리고 암살 역시 허락할 수 없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해. 힘겨운 길이 되더라도 전쟁에 지친 백성들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단 말일세.
그는 법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네. 반란죄로 잡아 가둘 수 있는데 무엇하러 피를 본단 말인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일세. 지금은 찾을 수 없더라도 필사적으로 찾으면 보일 것이야.
에르제는 단호했다. 운은 엎드린 채 황녀를 올려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무리한 요구를 하여 미안하네. 하지만 우리마저 피의 정치에 휩쓸린다면 백성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이 사라지고 마네.
짐에게는 그간 생각해 온 계획이 있네. 여태 귀족의 방해 때문에 이루지 못했으나 이번 일을 넘기기만 하면 성사될 가능성이 커지네.
그러면 짐과 대장군이 그리던 천계에 한 발짝 가까워지지. 지금처럼 멋대로 날뛰는 귀족들도 힘을 못 쓸 터. 자네를 아들처럼 여긴 대장군을 위해서라도 힘내 주게.
…알겠습니다.
운이 가까스로 대답하자 에르제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함교를 떠났다. 갑작스레 날아든 바닷바람에 잠시 움츠러들었으나 이내 어깨를 펴고 눈을 크게 떴다.
떨며 눈물짓던 황녀는 온데간데 없었다. 타고난 명민함과 카르텔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의지가 에르제를 새로이 채웠다.
(…비록 이곳까지 몰렸지만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는 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할 일이 많다. 나를 믿어준 대장군과 모험가를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에르제의 눈은 이제 더 이상 차가운 바다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운은 상황이 달랐다. 자책, 또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 자신이 아니라 잭터가 이곳에 있었다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를 심하게 괴롭혔다.
함교에 홀로 남은 운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몸이 굳어가는 것도 모른 채 부하들이 찾으러 올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막간의 이야기 - 노블스카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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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황녀가 없는 겐트의 궁궐. 곳곳이 부서지고 심지어 불에 탄 흔적도 남아 있는 오래된 궁궐에 들어선 네빌로 유르겐은 치솟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자신의 딸, 마리안 유르겐을 불렀다.
하지만 화를 참은 보람이 없었다. 주변 사람을 물리친 채 황녀의 서재에서 딸을 기다리던 그는 부른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딸이 해안수비대의 대장 하이람과 함께 얼굴을 들이미는 것을 보고 분통이 터지고야 말았다.
멍청하구나! 네가 어찌 아비에게 이런 불효를 저지를 수가 있단 말이냐?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아버님.
할 말이 그것뿐이냐?
저야말로 아버님이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대신에 잭터 이글아이를 사로잡고 황녀를 쫓아내었는데 웬 역정이십니까?
너무 화가 나서 말이 막혀버릴 때가 있다. 너스레를 떠는 딸을 앞에 둔 네빌로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유창한 언변을 자랑하는 그였지만 목에 뭐가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리안의 뒤에서 참으로 화목한 부녀의 대화를 지켜보던 하이람이 싱긋 웃었다.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따님은 지휘관 노릇을 제법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염려하시던 것처럼 품 안의 자식이 아님을 확인하셨으니 오히려 마음을 놓으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하이람 대장. 자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내 딸을 부추겨 사달을 내다니! 이렇게 되면 우리가 카르텔과 다를 게 무엇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다르죠. 하늘은 기다려주지 않으니 때가 가까워지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법이라고 한 건 공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해안수비대도 대기하고 있었던 거고요.
하이람은 가볍게 대꾸했으나 인상을 찌푸리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유르겐은 그의 표정 변화를 알아챌 여유가 없었다.
아직은 아니었네! 자네들은 황녀가 무력하게 쫓기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말았어! 카르텔도 아니고 제국과 귀족에 의해 쫓기는 꼴을!
동정심은 무서운 방패일세. 무능한 황녀가 왜 아직도 지지를 받는 줄 아나? 케케묵은 충성심 때문만이 아니야. 백성들은 정에 약하네. 그놈의 정 때문에 황녀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거란 말일세.
황녀는 아무 일도 안 한 대신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 백성들도 그걸 알아. 어린 나이에 고생하는 황녀를 잃은 자식처럼 여기고 있는 이들이, 우리를 또 다른 카르텔로 여길 거란 말일세!
유르겐의 언성이 커졌다. 하지만 마리안은 당황하기는커녕 차가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이번 일에 아버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는데 '우리'라니요?
무슨 말이냐?
황녀가 도망치고 이글아이가 사로잡혔을 때 아버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젤바에 계셨지요. 일을 주도한 것은 저와 베르타 공, 그리고 해안수비대인데 아버님이 왜 제게 역정을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네빌로는 낯선 것을 보는 눈으로 마리안을 쳐다보았다. 시키는 말에 순순히 따르던 딸이 너무도 달라진 까닭이다.
마리안은 그런 아버지에게 켕기는 구석이 있었으나 턱을 들어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까지 아버지 등 뒤에 숨을 거냐는 비웃음을 지겹게 들어온 터였다.
아버님께서 준비해 주신 덕분에 저의 일이 수월해진 점에 대해서는 따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언제까지고 아버님의 도포 자락이나 잡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네가 하게 될 일이었다. 그 잠깐을 참지 못하여 일을 그르친단 말이냐?
남자의 눈으로는 성급해 보이시겠지요. 하지만 여자의 시각으로는 충분히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이글아이는 나라를 어지럽힌 죗값을 치를 것이며, 황녀가 그 옆에 꿇어앉게 될 것입니다.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네빌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이래서 너의 귀족원 출입을 최대한 늦추었던 것이다. 황녀를 심판하겠다고? 내가 아까 무어라 말했느냐? 황녀는 죄가 없다.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도, 백성들은 무능할지언정 죄가 없다고 생각한단 말이다.
무능한 왕은 물론 그 자체로 죄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옥좌에 오른 황녀에게 시간이 부족했음은 너도 알고 그들도 안다. 내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글아이를 공격했겠느냐? 왜 군인무용론을 퍼뜨렸겠느냐?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황녀의 날개이자 보호막은 이글아이였다. 새를 잡을 때 먼저 날개를 꺾듯, 필요한 순서였기에 이글아이를 공박한 것이다. 그를 떨어뜨리고 홀로 남은 황녀를 압박하여 제 손으로 옥좌를 넘기게 해야 했다!
그 후에 시골에 있는 작은 신전에나 처박아 두고 평생을 비웃음 속에 살아가도록 해야 했거늘! 네 덕분에 황녀는 또다시 가여운 어린 황녀가 되었단 말이다!
그럼, 황녀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야 후환거리가 생기지 않습니까!
마리안이 반발하자 네빌로는 차라리 적을 보는 눈으로 제 딸을 쳐다보았다.
후환은 안톤에게서나 찾아라. 군대를 무너뜨리고 파워스테이션을 짓밟은 안톤과 가진 것이라고는 백성의 동정뿐인 황녀가 같은 줄 아느냐? 만약 이글아이가 그때 추격을 반대했다면…
홧김에 말을 계속하려던 네빌로 유르겐은 옆에 하이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하이람 클라프. 해안수비대의 대장이며 헤르만의 제자였던 남자. 서글서글해 보이지만 그의 본모습이 외견과 같지 않다는 것을 네빌로는 알고 있다.
이 남자를 곁에 두어야 한다. 현재 네빌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뢰해서는 안 된다. 폭탄의 위력을 믿는 것과 폭발 속에서 자신만은 안전할 것이라 믿는 것은 다르니까.
네빌로는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은 온갖 감정과 생각으로 끓어 넘치기 직전이었지만 자연스레 체득한 포커페이스가 훌륭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자신이 갈고 닦은 방패 뒤에서 재빨리 머리를 굴린 그는 가장 효과적으로 딸을 움직일 목소리, 즉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가라. 곳간을 열고 백성들을 진정시켜라. 젤딘 슈나이더와 마를렌 키츠카에게 가서 황녀를 해할 생각이 없다고 말해라. 절대로 둘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너를 도와줄 방법이 영영 없어지게 된다.
네빌로의 예상대로였다. 아버지의 꾸중보다 지친 목소리가 마리안을 초조하게 했다.
모험가의 참견 때문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해 내심 불안해하던 마리안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총총히 자리를 떠났다.
당당하더군요. 경험만 좀 더 쌓으면 훌륭한 군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네빌로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군대는 필요하지만 군인은 필요 없다. 폭력을 훈련받은 군인은 카르텔과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유사시에는 민간인이 무기를 들면 된다.'라며 군인을 감축시킨 네빌로에게 하이람의 말이 결코 칭찬일 수 없었다.
자네는 내 딸과 성급한 귀족들을 충동질하여 이 사태를 벌여 놓았네.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이글아이가 싫습니다. 안톤 때야 달리 방법이 없어 저를 믿는 시늉을 했지만 언젠가는 저를 내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것은 군인이나 정치가나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하는데요.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자네에게 기회를 주었을 것일세.
그만 두시죠. 당신의 계획대로면 저와 해안수비대는 단순히 당신의 무기로 쓰이고 버려졌겠죠. 그런 손해 보는 짓을 왜 해야 합니까?
……
아무튼 당분간은 황녀를 쫓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군요. 천계의 영웅인 모험가가 황녀를 도왔으니 이번 일에 동조한 귀족은 물론 백성들도 당황스러워할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이글아이를 죽여야 할 겁니다. 당신은 그를 죽이는 대신 유배를 보낼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하이람의 마지막 말은 비웃는 듯도 했고, 짜증을 내는 듯도 했다. 유르겐은 흘러내린 안경을 들어 올리는 척하며 놀란 눈을 감추었다.
…이글아이가 어쩌면 필요해질 수도 있네.
하나만 하시죠. 버리든가, 살리든가. 게다가 이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늙은 독수리를 살려 놓으면 다음에 죽는 건 당신이 되겠지요.
아무튼, 저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의 준비 덕분에 편한 점도 있었지만 귀찮게 된 것도 많아서요. 정산은 나중에 하시죠.
하이람까지 돌아가자 황녀의 서재에 남은 것은 네빌로뿐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한참을 서성였다. 
(하이람을 죽여야겠군. 쓸 만한가 싶어서 주웠지만 오발만 일으키는 총 따위 애초에 쓰는 게 아니었어…)
(없애야겠군. 없애야겠어. 지금은 황녀가 문제가 아니야. 낡은 생각에 빠져 날뛰는 다른 귀족들도 문제가 아니야. 제 목숨줄을 누가 쥐고 있는지도 모르는 미친개가 문제다.)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도 네빌로는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혹시 있을지 모를 염탐을 우려한 그는 결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네빌로의 머릿속은 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갖은 수단을 떠올리던 그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막간의 이야기 - 노블스카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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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어쩔까.
뭘요?
황녀님에게 달려갈까, 아니면 가만히 있을까.
이튼 사령부의 연병장 구석에서 콜라를 마시던 니베르가 한가롭게 물었다. 하지만 말 상대가 된 비연은 결코 한가로운 기분에 빠질 수 없었다.
그녀는 목을 무리하게 꺾어 상관이 혹시 취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다른 사람이 가발을 쓰고 앉아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켜켜이 쌓인 구름을 먼눈으로 보던 니베르는 비연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피식 웃었다.
콜라 냄새가 지독한 걸 보니 중장님이 맞군요. 오늘 몇 캔째죠?
콜라에 취하진 않아. 그나저나 콜라가 냄새가 나던가?
중장님처럼 마시면 안 날 것도 나요. 그렇게 마셔대면 마흔 넘기자마자 틀니를 하게 될 걸요.
…늙은이 취급하지 마. 아직 내 이빨은 튼튼하다고.
이상하니까 그러죠. 황녀님을 위해 싸우던 분이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니까.
비연은 읽던 책을 덮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한 오후다. 군인이라는 틀 속에서 상관과 부하라는 경계를 지켰던 두 사람은 용병이었을 때의 말투로 대화를 계속했다.
그때는 황녀님이 카르텔에 대항하는 하나의 상징이었지만… 이젠 나도 좀 지겹군.
싸우는 거야 상관없지만, 끝이 있어야 보람 있는 거잖아. 전쟁이 겨우 끝이 보인다 싶더니 이번엔 겐트에서 반란… 이 난리가 언제 그칠까.
카르텔은 황녀님의 잘못이 아니었죠.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선대 사제가 죽은 후에 카르텔이 다시 일어났으니까. 안톤이야 자연재해급이지만 그 외의 문제는 책임자의 잘못이지.
생각에 잠긴 니베르를 보던 비연은 그가 만지작거리던 콜라를 빼앗아 쭉 들이켰다.
달달하고 시원한 콜라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더 미지근한데다 김도 다 빠져 있어서 입맛만 버리는 꼴이 되었다. 잔뜩 인상을 구기는 고운 얼굴을 보며 니베르가 거들먹거렸다.
이래서 내가 보급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는 거라고.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병참이지. 하지만 아직도 해결이 안 됐어.
중장님의 콜라 타령은 좀 심하지만요. 그래서? 사령관님이 뭐라고 하셨길래 어울리지도 않게 고민이시죠?
비연이 말하는 사령관은 이튼 사령부의 총책임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짜증의 원인을 지적받은 니베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참에 독립하는 게 어떨까 하더군.
네?
천계의 전기는 이곳에서 생산하지. 기반 시설이 다 복구되지 않았지만 기술자들이 돌아왔으니 세븐 샤즈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이튼 하나쯤 돌릴 정도로 회복됐어.
해안수비대는 겐트로 갔고, 귀족들도 당분간 그쪽 문제에 정신이 없을 거고, 황도군은 말할 것도 없으니 전기 공급을 약점 삼아 권리를 주장한다는 게 그 아줌마 생각이야.
요컨대, 우리 사령관 아줌마는 이튼의 총독이 될 생각이란 거지.
가벼운 말투였기에 충격은 천천히 찾아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총독'이라는 두 글자를 중얼거리던 비연이 돌연 니베르의 어깨를 세게 때리기 시작했다.
미쳤어! 그걸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요? 그러니까 낙하산 소리나 듣지!
이번엔 니베르가 잠시 말을 잃었다. 갑작스레 날아든 진실이 너무나 아팠기 때문이다.
아직은 망상 수준이야. 괜히 자극하기 뭐해서 그냥 '재밌네요, 허허.' 했지 뭐… 아야! 그만 좀 때려!
이튼에 있어 중요한 시점이라고! '우리끼리라도 잘 살 거냐, 아니면 오래된 대의를 이어갈 것이냐'라는 선택의 기로라니까?
엉뚱한 생각하지 말아요! 이 좁은 나라에서 그딴 짓 했다가 잘못되면 꼼짝없이 죽을 텐데 무슨… 아.
그래. 옛날과는 달라. 아랫세계가 있지. 게다가 꼭 겐트를 통하지 않아도 갈 수 있고. 거긴 여기보다 훨씬 넓다고 하니 도망자를 찾기도 힘들걸.
나라의 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야심가들에겐 딱 좋은 기회로군요.
그러니까 처음에 물어본 거잖아. 황녀님에게 달려갈지, 아니면 가만히 있을지를.
황녀님에게 달려가면 감성은 충족시킬 수 있겠지만 다른 일이 벌어졌을 때 움직일 수 없어. 탈주자도 나올 거고, 여차하면 이튼을 벗어나기도 전에 아줌마에게 잡혀.
여기 남으면 총독 지망생께서 허튼짓하기 전에 적절히 조치할 수 있어. 하지만 이 경우 황녀님은 부평초 신세를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해.
여기 남아서 지지표명을 하면? 바로 영창에 처박히겠지. 대탈주극 끝에 바다에 빠지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있어야 해.
머리 좋은 아줌마야. 반란죄에 죄다 걸릴 짓을 꾸미고 있으면서 증거 하나 안 남겨. 총독 건도 자기가 직접 말한 게 아냐. 고자질하면 상관 모독죄로 내가 잡혀 들어갈걸?
니베르는 투덜거렸지만 비연은 안심이 되었다. 이러쿵저러쿵해도 용병 시절부터 모신 상관이 바뀌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베르 한 명이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황도에는 제국군이 많이 있어요. 숫자만 보면 그쪽이 더 많죠. 카르텔 때문에 낡은 무기도 다 망가진 상황에서 전기까지 끊기면 상황은 더 어려워지겠죠. 그땐 황녀님의 복권이 문제가 아닐지도요. 
무법지대, 아니, 웨스피스 사령부는요? 거기도 아직 안 움직이고 있잖아요. 어떻게 하겠대요?
거긴 논외로 치지. 집안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힘들걸. 카르텔 잔당에, 민병대에, 반정부 시위에… 어휴. 닐스한테도 매달리나 보던데? 내가 거기로 안 간 게 다행이야.
이럴 때야말로 이글아이 사령관님이 계셔야 하는 건데… 귀족들이 그분 이미지를 다 망쳐놨어요. 그분만큼 훌륭한 분도 찾기 어려운데.
글쎄. 휘둘린 사람도 잘못이 있지 않을까. 욕할 땐 같이 욕해 놓고 추궁받을 땐 남이 하는 말만 듣고 그랬다고 하는 게 더 싫은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부하가 툭 떨어뜨린 슬픔 앞에 니베르가 입을 다물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혹자는 안톤의 등장이 천계의 근간을 흔들었다고, 혹자는 아랫세계와의 교류가 천계의 비극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베르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고개를 숙인 비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꺼운 구름 뒤로 숨은 태양이 이제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험가님이 아랫세계와의 길을 열었지. 그분이 제국군과 함께 온 후에 카르텔과 안톤의 사태가 정리되었어. 루크도… 어쩌면 이 모든 게 모험가님이 불러온 변화의 일부일지도 몰라.
새로운 바람일지, 단순한 부작용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갈등의 원인은 그분이 가져온 게 아니야. 우리 내부에 있던 거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나마 다행인 건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군.
선택했어요?
응. 난 이곳에 남겠어. 너는?
뭘 물어보세요. 중장님 혼자 둘 수 없죠.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비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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