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머금은 곳 1화. 노래를 찾는 아이
약속을 머금은 곳 2화. 안개를 닮은 아이
약속을 머금은 곳 3화. 약속을 지킬 아이
장막 속의 진실
#1. 끊이지 않는 비
글 : 성종 / 그림 : Aoba
청연 내 고즈넉한 한 공간, 아직 블루호크가 떠나기 전.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비... 이례적인 기상 현상에 대해 전혀 기록된 바가 없다는 건가요?"
단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음을 던졌다.
달그락, 빗소리 사이로 청명한 소리가 펴졌다.
"그, 그렇소이다. 소인이 며칠간 찾아본 결과... 이리 오래 비가 내린 일은 땅지기들의 기록 속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소이다."
슈므, 에를리히, 단델.
원래, 루톤과 버디, 클라디스가 모여 여러 사태의 대응을 논의하는 자리이지만, 각자 다른 사정으로 자리를 비워 세 사람이 모였다.
김이 나는 찻주전자와는 달리, 분위기는 냉랭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며칠 간?"
"어... 어떤거 때문에 그러시오이까?"
"그냥 되물어봤을 뿐인데요. 확실한지."
"으... 확실... 할 것... 아니, 더 찾아보겠소이다."
"네."
단델은 짧은 대답과 함께 다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럼, 계곡 쪽은 상황이 어떻죠?"
허둥이던 슈므의 시선이 에를리히에게로 향했다.
"아, 네. 그..."
슈므와 에를리히는 단델이 조금은 어색했다.
명확히 해야 할 일을 가진 사람 특유의 차가움, 혹은 날카로움...
그리고 슈므와 에를리히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은 단델의 '해야 할 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약간의 불편함이, 아직 어린 두 사람에게는 크게만 느껴졌다.
"별일은 없어요. 무의 눈... 아니, '무의 장막' 쪽도 아직 큰 움직임을 보이진 않고 있고요. 하지만... 다들 날씨 탓에 불안해하고 있어요. 안개신님께 이변이 일어난 것이라며..."
"안개신의 이변이라... 흠..."
단델의 잔과 달리, 슈므와 에를리히의 찻잔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뭐가 되었든, 심상치 않은 상황이란 건 분명하군요."
단델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어졌다.
슈므와 에를리히는 서로 난감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사이에서, 에를리히가 결심한 듯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남은 안건은... 솔리다리스와의 전투, 그리고 어둑섬 사건 이후 처리의 현황 점검이네요."
"아, 그것에 관해서라면 크게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소이다."
슈므가 재빨리 대답했다.
"이전, 버디 공과 루톤 공, 클라디스가 이야기한 대로, 모든 부상자는 솔리다리스에서 치료받도록 하고 있소이다. 부상자 수 또한 단델 공과 펜러드 공의 덕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소이다."
"흰 구름 계곡에서도 큰 부상자는 없지만... 배를 이끌고 와서 진료를 봐주신 덕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어요. 렐 님께서도 감사 인사를 대신 전해달라고 하셨죠."
"아닙니다. 저희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을 할뿐... 그리고 저희의 책임이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찰나,
"다만."
단델이 말을 이어갔다.
"다만, 지켜지지 않는 게 있는 것 같군요.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뻔했던."
"지켜지지 않는 것... 말이오이까?"
슈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 분명 심각한 부상자는 제게 찾아오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 알고 있소이다. 이미 심각한 부상자들은 모두..."
"계곡에도 말씀인가요? 혹시 누군지..."
단델의 눈이 처음으로 둘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당신 둘."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 무심한 눈빛과 목소리였다.
"소인은 다친 곳은 없소만..."
"저도 아픈 곳은..."
대답이 끝맺어지기도 전, 단델의 손가락이 슈므와 에를리히의 가슴팍을 쿡, 차례로 짚었다.
"아파 보이는데."
"무, 무슨...?"
단델은 태연히 다시 차를 들이켰다.
"...마침 모였으니, 얘기나 나눠볼까요."
***
"으음... 그러니까."
블루호크의 일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동그랗게 모여 앉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펜러드 공은 왜 온 것이오?"
어느새 단델은 펜러드 배 위에 올라타,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고, 얘기하시죠. 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그냥 제 얘기를...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에를리히는 어리둥절한 듯, 단델의 말을 되물었다.
"네. 특별히 흰 구름 감시자들의 어르신이 저를 찾아와 요청하시더군요. 당신이 많이 아파 보인다고. 도와달라고."
"어르신께서..."
루톤이 언급되자, 에를리히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에 따라, 붕 떠 있던 분위기는 차분히 가라앉았다.
"글쎄요... 하하. 아프다... 아프다라."
에를리히가 다음 말을 꺼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다.
단델은 찻잔을 두번여 다시 채웠고, 펜러드는 잠에 곯아떨어졌다.
슈므는 조용히 에를리히의 말을 기다렸고, 비는 끊임없이 창에 부딪혀, 일정한 박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녀석, 아니 라르고가... 요괴였던 것은 상관없어요."
정적을 깬 것은, 에를리히의 결심이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저희 계곡에 숨어들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아요. 감시자 동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요."
온기를 찾듯, 에를리히의 손이 찻잔을 꼭 쥐었다.
"하지만, 아픈 것은..."
'시간', 이라고 에를리히는 작게 되뇌었다.
고작 두 음절의 단어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올 때, 아니면 임무를 수행할 때, 가끔 마주치는 그 시간이 여전히 걸려있어요. 찌르듯이..."
"시간... 말이오이까."
"그래, 슈므. 시간. 감시자들과, 모두와 같이 보냈던 그 시간...말야."
"...그 시간들이 모두 거짓이고 기만이었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뭐죠? 서로 진심으로 웃고, 행복했던 기억이 분명히 거기에 있는데 말이에요."
에를리히의 말은 흐름을 타기 시작했고, 이내 터지기 시작한 격류처럼 멈추지 않았다.
"다들 내색은 하지않지만... 이전처럼 웃지는 않게 되었어요. 비가 풍경을 바꾸듯, 저희가 공유하던 추억은... 모두 뒤덮이게 되었어요. 거짓과 기만으로."
담담히 사실을 뱉는 목소리는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있었다.
다만 어쩐지 빗물에 젖은 듯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비에 녹아 공기를 더욱 가라앉혔다.
"에를리히 공..."
"......"
셋 모두 무언가를 잃거나, 다른 이들에게 등 돌려져 본 일이 있었다.
그렇기에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에를리히가 공유한 아픔은, 각자의 상처를 열어 보였다.
단델은 블루호크의 동료들을 잃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 상처는 여전한 환상통으로 남아있었다.
슈므는 이면 경계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 상처는 어설프게 덮인 상처였다.
"...아니오."
정적을 깬 것은, 슈므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에를리히 공과, 흰 구름 감시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 기억, 시간은, 라르고 따위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슈므는 불현듯 떠오른 듯, 두서없이 말을 주워섬겼다.
"미안하오, 단델 공. 소인이 나서서..."
"아뇨, 괜찮습니다."
단델은 슈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클라디스는."
슈므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에, 에를리히의 것과 같은 시간이 담겨있었다.
"그는 소인을 믿지 못했소이다. 그리고 소인은... 그가 혼자서 행동했던, 아니, 지금도 혼자 행동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었소이다."
"......"
"분명, 클라디스에게 소인이 아닌, 모험가 공과 같은 사람이 그의 곁에 있었더라면, 아마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고민하지 않소이다."
슈므는 자신을 지탱해 준 여러 이들을 떠올렸다.
안개 너머의 손님들, 이미 자신의 곁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소인은 상관없소이다. 클라디스가 어떻게 소인을 생각했는지... 주변에서 소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험가 공덕에, 많은 걸 겪고 바뀔 수 있었으니 말이오."
이면 경계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처음 클라디스를 만났을 때의 기억, 끔찍한 진실의 기억.
"처음 청연에 왔을 때 그가 줬던 작은 믿음은... 여전히 소인의 안에 있는, 소인의 것이오. 누구도 더럽힐 수 없고, 누구도 소인에게 버리도록 할 수 없는."
어느 것 하나, 자신의 것이 아니지 않았다.
제논, 라르고... 그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여전히 클라디스에게도 남아있다고 믿고 있소이다."
슈므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고민하는 것은 그를 다시 마주할 때, 어떤 말을 건내야할지였다.
"그러니. 에를리히 공이 가진 추억... 그 추억도 온전한 에를리히 공과 감시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오이다. 그깟 기만에 덮이지 않는... 종류의 것, 말이오."
"온전한... 나의 것."
"그러니, 그러니까... 라르고가 감시자들 모두와의 추억을 버리고 배신했을까,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오. 만약 라르고, 그자가 그걸 버렸다면 그건 정말..."
"...멍청한 놈이니까."
***
그렇게 몇 번인가 더 찻잔이 비워졌다.
날씨는 개지 않았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나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중의 하나지만요."
단델은 말을 흐리며,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린 것처럼 표정을 찡그렸다.
"상처는 아물면 좀 더 단단해지곤 하죠. 어쩌면, 저보단 슈므, 에를리히 당신들이 더 단단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우리 모두... 아직 곁에, 바람에 잃은 만큼의 씨앗이 남아 있으니까요."
단델의 말에 에를리히와 슈므는 의사가 처방한 약을 받아 마시듯, 말없이 차를 삼켰다.
"...차, 맛있네요."
"맞소. 정말, 맛있소이다."
둘의 미소에, 단델은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오랜 통증에 시달린 환자처럼, 편히 웃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쓰고 어색한 미소였다.
고작 몇 마디의 말로 무언가 변하진 않는다.
라르고와 클라디스의 배신도, 떠나간 블루호크의 동료들도, 지금 청연의 날씨도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이었지만...
세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도 바꾸지 못할 각자의 청연이 담겨있었다.
비가 끝나고 새살이 돋아, 화창한 하늘의 청연이.
#2. 자라지 못한 아이
글: 성종 / 그림: 로이
어린아이는 자라 어른이 된다.
아이는 자라며 많은 책임을 짊어진다.
점차 책임질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포기하는 것이 많아지며, 결국 포기했다는 사실을 잊는 순간, 시간에 쫓기는 어른이 되고야 만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라기를 거부한다.
잊지 않고, 기억하고, 오직 혼자서 해내려는 자는 자라지 못하는 아이인 채 살게 된다.
***
"잠시 둘이 얘기하게 해주겠나."
"하지만 어르신..."
"괜찮네."
"...알겠습니다."
흰 구름 계곡의 어딘가.
초췌한 모습의 클라디스 앞에 루톤이 홀로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한때는 감시자의 수장, 무의 눈의 제사장으로 각각 백해를 수호하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솔리다리스의 침공, 그 과정에서 무의 눈이 개입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 후, 한 축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아직 아무 말도... 해줄 생각이 없는 건가?"
슬픔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루톤과 클라디스는 분명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루톤은 그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전대 제사장을 만날 때마다, 뒤에서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던, 어쩐지 눈길이 가던 아이.
안개 고원에서 구조되어, 말 그대로 청연, 백해 전체가 부모가 돼 키워낸 아이.
전대 제사장의 뒤를 이어 클라디스가 제사장이 되었다고 전해 들었을 땐, 루톤은 혼자서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이 지키고 감시한 덕분에, 누군가는 바르게 자라 주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루톤은 그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한마디의 말에 그만큼의 거리감만을 확인하게 되는, 지금의 시간이 지치게만 느껴졌다.
"저는 무의 눈의 제사장입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계곡에 억류해 놓은 채 무슨 얘기를 하라는 것입니까?"
이미 여러 번 반복된 이야기였다.
"자네를 이렇게 흰 구름 계곡으로 불러온 것은, 자네를 지키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네."
클라디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감시자들의 어른이라 하지만, 무의 눈 제사장을 억류하는 것은 루톤으로서도 무리한 것이었다.
클라디스의 부정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했고, 루톤은 그런 책임을 지고서도 클라디스를 데려왔다.
"나는 여전히 자네를 믿고 있다네. 자네가 청연과, 백해에 해가 될 만한 선택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 말이네."
루톤은 조용히 클라디스의 옆에 다가섰다.
"모험가 일행은 어둑섬으로 향한 모양이네. 슈므도 같이 말이야. 이제 곧, 어둑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소식이 들려오겠지."
"......"
"그들이라면 분명 밝혀낼걸세. 이곳... 백해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하지만 나는, 자네에게서 먼저 듣고 싶네."
"그들이 어둑섬으로 향했다면... 더더욱, 제가 해 드릴 얘기는 없습니다."
"자네는 같이 백해를 끌어가는 어른이라고 생각했건만..."
"어른..."
클라디스의 표정이, 일순 뒤틀렸다.
"...웃기는군요."
명백한 조소였다.
"당신처럼 허황된 꿈을 모두에게 믿게 만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큰 어른이라면... 저는 어른 따위가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투정일지언정,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클라디스."
클라디스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흰 구름 감시자들은 천 년간 당신들, 그 수많은 큰 어른들에게 속아 안개 너머를 바라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역겹게도, 마을과 백해를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을 따름이죠. 허나 사실은, 그들 모두가 자라지 못한 아이로 죽었을 뿐입니다."
"......"
"어른... 적어도 나는...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하려 했습니다. 제 선택으로 인한 죽음들까지도."
말을 쏟아낸 클라디스의 표정은, 오히려 후련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고해를 마친 것처럼.
클라디스의 말을 오래간 곱씹던 루톤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왔네."
클라디스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허황된 이야기로 많은 이들을 속여왔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루톤은, 클라디스와 달리 다른 동료들을 믿기에 떳떳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결국, 안개 너머에서 그들이 왔다.
"감시자들의 삶은 그들 스스로 받아들였던 것이네. 그들 역시 어린 아이가 아니니."
"정말 무책임한... 궤변이군요."
루톤을 바라보는 클라디스의 눈에는 날이 서있었다.
추하게 늙어버린 어른을 바라보는, 순수한 어린 아이처럼.
"무책임하다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클라디스. 책임은... 나눠가질 수 있는 것이네. 자네 또한,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하려던 일이 어떤 일이었건... 노사가 같이 책임을 지겠네."
한 때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으로서, 루톤은 말했다.
"그러니... 말해주게. 지금이라도. 대체 장막으로 안개신의 눈을 가려 무엇을 하려했는지."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날 선 미소만이 남겨졌을 뿐.
클라디스의 미소에서, 루톤은 이미 많은 것들이 서로의 손을 떠났음을 직감했다.
***
"어르신, 라르고가 요괴였다는 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제사장은 이미 놓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비는 대체..."
어둑섬에서 모험가 일행이 복귀한 후, 다시 돌아온 계곡.
클라디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막이란... 눈을 가리는 것 뿐만이 아닌,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막는 것.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잊은 채 편히 살 수 있도록."
클라디스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혼잣말이 여전히 루톤의 머릿 속을 맴돌고있었다.
"...이제는 들여다보아야 할 때겠지."
루톤에겐 시간이 없었다.
라르고의 일 또한 루톤은 잊어야했다.
노인에겐 누군가의 죽음이든, 배신이든, 잊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루톤은 힘을 짜내어 거대한 노구를 일으켰다.
들여다볼 장막 속의 진실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것이길 바라며....
특별청연비날씨조사단
아, 모험가 공, 섀넌 공. 오셨소이까?
슈므, 갑자기 무슨 비가 이렇게 오래 내리는 거야. 선계는 원래 이래?
역시 섀넌 공, 모험가 공도 이 비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이오이까?
심상치 않다기보단, 습해서 죽을 것 같아. 촉촉한... 아니, 축축해 늘어진 허그미가 되어버릴 것만 같달까.
벌써 일주일 간 지속된 비... 땅지기들의 기록에도 이런 이상 현상은 기록된 바가 없소이다.
물론, 단순히 오래 내리는 비일수도 있겠소만... 최근 일어난 일들과 겹쳐, 불안한 마음이 자꾸 드오이다.
흠... 어찌되었든, 이상한 일이란 말이지. 뭔가 짐작되는 건 없어?
안개신께선, 안개를 통해 저희를 지켜보고, 날씨를 관장하시는 분.
만약 이 비가, 안개신 님과 관계가 있다면, 무의 눈 신도들과도 논의가 필요한데...
신도들이라... 클라디스인가, 그 실눈 제사장도 사라졌다고 했지. 뭔가 관계가 있는 건가? 슈므, 혹시 따로 연락이라도...
......
...이런, 내가 뭔가를 건드린 것 같은데.
슈, 슈므. 괜찮아?
......
윽.
괜찮소이다. 클라디스의 일은 클라디스의 일. 이런 일 쯤은, 소인이 혼자서 해내야하는 일인 것이오.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고, 소인이 알아보면 되는 것이오이다!
오, 성장했는걸.
어떻소이까, 섀넌 공, 모험가 공. 소인을 도와주시겠소이까?
모험가 공은, 마이어 님을 찾기위해 안개신 님을 만나려하고 있으니... 그 과정에 혹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소이다.
좋아. 이대로 손 놓은 채 질퍽질퍽한 허그미가 되어 살아가는 건 싫으니까.
그럼, '특별섀넌슈므비날씨조사단'의 결성이군.
'특별섀넌슈므비날씨조사단'...!
소인이 그런 조사단에 합류하게 되다니... 처음이오...! 정말 영광이오이다!
우무 공과 함께 열심히 조사하겠소이다!
어, 음. 그래그래.
(슈므의 기분도 안 좋은 것 같으니, 맞춰주자고. 어차피 지금은 비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
자, 그럼. 모험가, 너도 합류하는거지? '특별섀넌슈므모험가비날씨조사단'에!
(...이미 조사단 이름에 들어가버린것 같은데.)
청연 광장의 슈므와 이야기하기
<퀘스트 완료>
끊이지 않는 비
우선, 이 비가 청연만의 일인지, 백해 전역에 걸친 일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소이다.
물론 지금 중천과의 연락은 막혀있기에, 선계 전역에 걸친 일인지는 알아보지 못 하겠지만...
백해에 한정해서 알아봐야하겠군. 꽤 발품이 들겠는 걸.
흰 구름 계곡의 에를리히 공이라면, 여러곳의 소식을 이미 갖고 계실 것이오이다. 먼저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렇군... 좋아. 그럼 흰 구름 계곡으로 앞장서도록.
소인만 따라오는 것이오이다!
슈므와 섀넌 마이어와 함께 청연의 비에 대해 조사하기
네. 계곡은 그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더 깊은 곳은... 루갈루의 도움을 받아서, 목책을 세워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미리 전해놓을게요.
알았어. 그곳의 사람들을 먼저 대피시켜야겠군.
난데없는 이 비는 대체...
슈므? 그리고...
에를리히 공!
이런, 이건 한 눈에 봐도 난리가 났는데.
역시... 흰 구름 계곡에서도...
이 비 때문에 온 거구나?
그렇소이다. 혹시 흰 구름 계곡에서도, 비가 비슷하게 시작되었다면...
'흰 구름 계곡에서도'란 말은... 청연에서도?
맞소이다. 7일쯤 전부터 계속 비가 내리고 있소이다.
우리는 클라디스와 클라디스를 빼내간 일행들이 추적을 뿌리치려 벌인 짓으로 의심하고 있었는데, 청연까지 비가 왔다면... 그건 사람이 조절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정확히 비슷한 시간대에 비가 시작되었다면, 역시 백해 전체에 영향이 있는게 맞는 것 같소만...
으음... 아무래도 이렇게 돌아다녀서는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아, 슈므. 비가 오지 않는 장소가 있잖아. 거긴 가봤어?
비가 오지 않는 곳이라면... 아, 안개고원을 말하는 것이구려!
안개고원에는 비가 오지 않아?
그렇소이다. 사시사철 안개신님의 가장 짙은 안개가 머무는 곳. 비가 내린 기록은 없소이다.
그곳에마저 비가 내리고 있다면... 그건 분명... '구름 없는 밤' 정도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지금은 반대로 '구름 너무 많은 낮' 같긴 한데 말야.
'구름 없는 밤' 당시, 모든 구름이 없어지고 비가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그때와는 정 반대의 상태라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소이다.
어째되었건, 안개고원이 영향을 받았는지 확인을 해보는 게 다음 순서일 것 같소.
그럼 우선 안개고원으로 가봐야겠네.
에를리히 공, 혹시 흰 구름 계곡에 도와줄 것은 없소이까?
'특별섀넌슈므모험가에를리히비날씨조사단'에 편입 시켜 줄 용의는 있어.
특별... 뭐라고요?
그러니까, '특별섀...'
아니, 괜찮습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슈므, 이곳의 대응은 우리끼리 가능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가끔 비가 많이 오면 계곡이 범람하는 경우가 있어 어느정도 대비는 되어있으니까 말야.
알겠소이다.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해야하오. 도우러 오겠소이다.
음... 아무래도 조사단에 들어오기 싫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이들은... 무의 눈 신도들 아냐? 기척이 약하다 했더니, 다들 쓰러져있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으... 발 내딛는... 어... 째서...?
발 내딛는 자들이라면...
그게 뭐하는 자들인데?
무의 눈에서 직접적인 대민, 조사 임무를 맡는 곳이오. 쉽게 말하면, 신도들보단, 전투원들에 가까운 곳... 이오이다.
으음... 그들이 이런 짓을 했다는 건가?
무의 장막, 어쩌면 그들이... 이 날씨의 이변도...
잠깐. 이쪽으로...
이런. 슈므!
안개고원에 비가 오다니... 이것 또한 로페즈 님의 뜻인가?
전달받은 건 없어. 다만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일 뿐.
어차피 이 앞은 이미 비로 길이 끊겨 지나가기 힘들텐데 말야.
...어때? 모험가.
누가봐도 무의 장막인가 하는 나쁜 녀석들 같은데. 지금 덮칠까?
섀넌 공, 모험가 공, 안 되오!
괜찮아. 이겨.
아,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소이다.
때가 아니다?
저자들이 무의 눈 내부에서 정체를 이런 방식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면, 무의 장막이 아닌 이들, 무의 장막인 이들로 갈라질 것이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이들이 분명 모일 것이오이다.
우리가 저들을 모르는 만큼, 저들도 아직 우리를 모를 터...
으음...
그리고 저들의 말에 따르면, 어차피 안쪽은 비가 그치기 전까진 길이 끊겨 조사하기 힘든 것 같소이다.
그래, 굳이 지금 위험부담을 지지 말자는 거지?
결국 이 비가 안개신님과 관계된 것이라면... 맞부딪혀야할 때가 올 것 같소이다.
무의 장막... 안개신의 신탁, 그리고 클라디스에 관해서도...
흠. 이렇게 '특별섀넌슈므모험가비날씨조사단'의 임무는 큰 소득없이 끝나게 되었네.
소득 없지 않았소이다!
모험가 공과, 섀넌 공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중요한 것이오!
하하, 말은 잘한다니까.
후후, 섀넌 공. 조사는 끝나도, 조사단은 계속하는 것이 어떻소이까?
뭘 조사하는데?
으음... 잘 모르겠소만, 모험가 공의 비밀이라던가...
아, 그거라면...
오, 알고 계시는 것이...
모험가, 넌 가봐도 돼.
......
...그럼, '특별모험가조사단'의 결성인 것이오이다...!
좋아. 관심있는 녀석들이 꽤 많겠는 걸.
우선 미쉘을 꼬셔서, 기계를 활용해서...
안개고원에 비가... 걷기가 힘드네. 얼른 청연에 도착해야할텐데 말야.
플래티, 아무래도 네 도움을 좀 받아야겠는걸.
거기 누구냐!
잠깐, 저 사람... 어떻게 고원 안쪽에서 온 거지?
음... 저자들은 에르곤님이 말씀하신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
저 복장은... 아름의...?
일단 구속해라. 외부의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는 인원은 로페즈 님께 데리고 간다.
아무래도... 말씀하신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네요. 에르곤님.
말씀하신 제사장을 데려왔습니다.
......
이제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행해볼 수 있겠군. 제사장, 준비는 됐나?
지금 내리는 비는... 당신의 짓입니까?
글쎄. 안개신의 마지막 발악이겠지.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계획이 마무리되면, 비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될테니.
......
조화가 없는...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말이죠.
걱정 되나? 이미 설명했지만... 안개신은 영원할 거다. 비록 그 본질은 달라지겠지만.
아니, 아니군. 그래.
본질을 '되찾는' 것이겠지. 선으로 포장한 마법사의 손에 덧씌워진 껍질을 벗기는 것일테니...
그럼 시작하지. 준비는 다 되었으니.
...영원...이라.
<퀘스트 완료>
모험가 공, 고생 많으셨소이다.
아무래도, 이 비가 그칠 때 쯤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것 같소만...
그래도 소인이 모험가 공을 믿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테니 믿어도 되오이다.
어쩌면 이제는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오이다.
무엇이 소인을 기다리건... 소인은, 준비가 되었소이다.
모험가 공 덕에 말이오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